[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네이멍구보도) 전 네이멍구(內蒙古) 츠펑시(赤峰市)의 총공회 여공부(女工部) 부장 저우차이샤(周彩霞)는 2003년 정월, 중공(중국 공산당) 당국에 의해 츠펑시 훙산구(紅山區)유치장에 납치당했다가 같은 해 7월 네이멍구 바오안자오(保安召)감옥(그 기업 명칭은 ‘바오안자오 농장’임)에 보내졌다. 며칠 후에 감옥장 저우젠화(周建華)가 직접 박해하여 사망했다.
저우차이샤는 생전에 여러 차례 중공 당국에게 납치와 고문학대를 받았다. 투무지(圖牧吉)노동교양소 여자2중대에서 감옥 경찰대장 뤄(羅)모, 마(馬)모, 나(那)모, 양(楊)모에게 여러 차례 혹독한 구타와 전기곤봉으로 충격 당해 얼굴까지 변형되었다. 그 후 또 후허하오터(呼和浩特市) 여자노동교양소에서 20여 일 동안 박해를 당했는데, 한때 박해로 정신이상까지 되었다고 한다. 츠펑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두목과 훙산구 정법위의 두목까지 저우차이샤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츠펑시 ‘610’요원이 말했는데, ‘후에 저우차이샤가 살려고 해도 그녀를 살지 못하게 했고’, 또 ‘상부에서 이미 그녀를 사형에 처하도록 정했다’고 암시했다.
1. 납치와 노동교양박해
2000년 10월, 츠펑시 중공 당국은 이른바 ‘10,15’ 대사건을 만들어 광적으로 50여 명의 수련생을 붙잡았다. 저우차이샤는 훙산구 구치소로 납치당한 후,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가 또 야만적인 음식물주입을 당했다. 그리고 불법으로 3년의 노동교양을 선고받은 동시에 단위에서 해고당했다.
12월, 저우차이샤와 정란펑(鄭蘭鳳)과 다른 15명의 수련생은 투무지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했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 그들은 막 투무지에 도착하여 차례로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몸을 수색 당했고 추위로 온몸을 떨었다. 그 후 매일 세뇌박해를 당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은 파룬따파에 대해 확고했다. 노동교양소의 흉악한 경찰은 그녀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2001년 2월 흉악한 경찰은 저우차이샤와 정란펑 및 다른 몇 명의 수련생들은 연공을 했다고 수갑을 채워 노동교양대대의 복도에 2시간 동안 세웠다. 당시 정란펑은 구타를 당해 코피를 줄줄 흘렸다. 중대로 내려온 뒤, 흉악한 경찰 뤄진팡(羅進芳)에 의해 저우차이샤는 경문을 전했다는 이유로 내위(內委)로 불려가 한바탕 뺨을 맞았으며, 밤중에 가부좌를 했다며 침대에 수갑으로 채워진 채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저우차이샤는 매일 저녁 흉악한 경찰에게 내위로 불려가 아직도 일어나서 연공을 하는지를 심문 당했다. 저우차이샤가 “연마합니다”고 말하면 흉악한 경찰은 강제로 수갑을 채워 하룻밤 혹은 몇 시간을 세워두곤 했다. 흉악한 경찰은 고의로 사람을 괴롭혔는데 어떤 때는 저우차이샤가 막 침대에 눕기를 기다려 곧 일어나게 했으며, 낮에는 여전히 일하러 나가게 했다. 수련생들은 전부 중노동을 배치 받았고,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에게 배당해 준 노동공구는 가장 무거웠다.
2. 혹독한 구타, 전기 충격, 노역 노동
2001년 봄, 투무지 노동교양소의 흉악한 경찰은 일을 끝내고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우차이샤와 정펑란 및 다른 두 명의 수련생들을 내위로 끌어들여 한바탕 뺨을 때려 박해했다. 그리고 또 전기곤봉으로 저우차이샤의 얼굴을 구타해 아주 크게 부어올랐으며 전기충격으로 물집이 생겨 누런 진물이 흘렀다.
시연 사진: 전기곤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해 강제로 ‘전향’시키다
2001년 4월, 저우차이샤의 남편 마웨민(馬躍民)은 츠펑시 훙산구법원의 두 사람을 투무지로 데리고 와서 저우차이샤와 이혼했다. 저우차이샤는 집과 집안의 물건은 가지지 않고 모두 아이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한 마음씨 좋은 법원 직원이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겁니까?”라고 물었다. 저우차이샤가 모두 아이에게 주겠다고 말하자 마웨민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았다. 서명한 후 저우차이샤는 마웨민에게 말했다. “지금 당신은 자유롭게 됐어요. 당신은 당신의 동창과 결혼할 수도 있고 또 그 아가씨와 결혼할 수도 있어요.” 마웨민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후 마웨민은 악보를 당해 사망했다.
2001년 여름날 점심 때, 흉악한 경찰은 저우차이샤와 정란펑 등이 일을 끝냈다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호를 외치지 않은 7~8명의 수련생들과 2시간 동안 볕이 따가운 운동장에 세워두었으며, 밥과 물을 허락하지 않았고, 여전히 오후에 일하러 나가게 했다.
같은 해 여름, 흉악한 경찰은 이른바 ‘적발 비판회의(揭批會)’를 열었다가 투무지 수련생들의 항의를 받았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곧 임시로 작은 독방에 끌려가 감금당했다. 보름 동안 갇힌 사람은 류샤오신(劉曉欣), 류슈룽(劉秀榮), 리춘샤(李春霞), 궈쥔슈(郭俊秀), 펑후이이(彭慧宜) 등이다. 다른 수련생은 단식으로 항의했고 일하러 나가지 않았으며 독방에 갇힌 수련생을 석방해달라고 요구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 후쑤민(胡素敏), 우옌란(吳艶蘭)은 모두 강제로 음식물주입 등 박해를 당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은 단식하는 1~7일 동안에도 협박하여 매일 일하게 했다. 투무지의 여름 날씨는 몹시 무덥다. 7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을 먹지 않은 채, 여전히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이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흉악한 경찰들의 감시와 감독이 특히 심했으며, 수련생들과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세면실이거나, 밖에서 일을 하거나 또는 숙소에서 휴식할 때면 줄곧 모두 바오자(包夾)가 뒤따랐다. 그리고 수시로 그들의 언행을 감시해 경찰에게 보고했다. 한번은 정란펑이 정원에 끌려가 오전 내내 수갑에 채워져 있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은 늘 옷을 모조리 벗겨진 채 경문을 수색 당했다.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을 박해에 적극 참여한 흉악 경찰은 우훙샤(武紅霞), 뤄진팡(羅進芳), 저우궈링(周國玲) 등이다.
투무지 노동교양소 기간에 흉악한 경찰 저우궈링이 한 번은 저우차이샤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없어서 총살당해도 당신의 시신을 거둬 줄 사람이 없다. 어쩌면 내가 저우씨 성을 가졌기 때문에 당신의 시신을 거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 말했다.
3. 박해로 사망
2001년 7월에 저우차이샤와 6~7명의 수련생은 투무지 노동교양소에서 후허하오터시 여자노동교양소로 옮겨져 연속으로 박해를 당했다. 다만 홑옷을 몇 벌 가져가게 했을 뿐 솜옷, 털옷은 모두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더욱 사악한 고문박해로 저우차이샤는 생명이 위독해졌다. 그 후 그녀의 남동생이 집으로 데려갔다. 츠펑시 ‘610’과 훙산구 ‘610’ 및 공안국의 흉악한 경찰들은 집으로 가서도 교란했는데, 한 정법위의 두목은 “저우차이샤가 완고하게 전향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며 소란을 피웠다.
2003년 정월 12일, 저우차이샤와 정란펑은 다시 납치당했다. 10여일 후, 정란펑은 훙산구 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가족이 그녀에게 옷을 입힐 때, 그녀의 입이 아주 크게 벌려져 있고 눈은 뜨고 있었으며 얼굴이 극히 고통스러웠음을 발견했다. 가족은 손으로 그의 눈을 감겼으나 감겨지지 않았다. 시신의 등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심하게 구타당한 상처가 있었으며 열 손가락의 손톱은 전부 시퍼랬다. 저우차이샤는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가 여러 차례 생명이 위독해졌다.
당시 츠펑 ‘610’은 흉악한 경찰을 조종해 저우차이샤를 각종 수단으로 괴롭혔지만 전향시키지 못하자, 곧 불법 판결을 내렸다. 츠펑 ‘610’두목 양춘웨(楊春悦)는 위선적으로 저우차이샤의 생명이 위독해 졌을 때, 연공하는 것을 허락하여 단식을 중지하게끔 했다. 저우차이샤가 매일 연공을 하자 곧 몸이 다소 회복됐다. ‘610’은 이 틈을 타서 저우차이샤를 바오안자오감옥으로 납치해 갔고, 사전에 모의해 놓은 더욱 사악한 박해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2003년 7월 4일, 저우차이샤가 감옥에 납치된 그날 감옥장 저우젠화는 곧 죄수에게 명령을 내려 그녀를 강제로 숙소로 잡아갔는데, 그녀의 긴 바지가 벗겨져 팬티만 남겨졌다. 흉악한 경찰 저우젠화는 곧 저우차이샤를 수갑을 채워 그녀로 하여금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누우려 해도 누울 수 없게 했다. 저우차이샤는 단식으로 그녀에 대한 박해에 항의했다. 그러나 저우젠화는 도리어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혔으며 수갑을 채워 손목까지 곪았고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저우젠화는 저우차이샤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그녀를 괴롭혔다.
7월 12일 저녁, 흉악한 경찰 저우젠화는 감옥 숙소로 와서 직접 저우차이샤를 혹독하게 고문했는데 30여명이 그 자리에서 목격했다. 졸개가 된 죄수는 쿵판리(孔凡麗), 바이진롄(白金蓮), 천쓰친(陳斯琴), 리펑윈(李鳳雲)이다. 흉악한 경찰 저우젠화는 죄수들에게 명령하여 바닥을 닦은 걸레로 저우차이샤의 입을 막게 하고 직접 독수를 뻗쳤다. 미친 듯이 신바닥으로 저우차이샤의 얼굴과 입을 20여 번이나 때렸는데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저우차이샤가 이미 정상적인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어서야 멈추고 “아직도 믿겠는가? 아직도 연마하겠는가?”며 물었다. 저우차이샤는 정기에 가득 차 말했다. “믿습니다! 연마합니다!”
저우젠화는 노발대발하면서 죄수 쿤판리, 바이진롄, 리펑윈에게 명령하여 저우차이샤를 연속으로 밟고 구타하며 끌어가게 했다. 그리고 두 손에 수갑을 채워 농구틀 위에 매달았다. 이때가 7월 12일 저녁 10시가 넘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4시경, 저우차이화는 농구틀 위에 매달려 무참히 사망했다. 흉악한 경찰 저우젠화는 사력을 다해 그의 범죄 사실을 감췄고 천쓰친 등 사람들이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게 위협했다. 그런 다음 상부에는 저우차이샤가 갑자기 급사했다고 보고했다.
저우차이샤가 박해로 사망한 후, 츠펑시 ‘610’의 양춘웨(楊春悦), 천샤오둥(陳曉東), 멍허핑(孟和平)은 모두 주동적으로 외부에 유언비어를 꾸며 퍼뜨렸고, 고의로 저우차이샤가 박해당한 진실한 상황을 감추었다. 츠펑 ‘610’은 저우차이샤가 박해당해 사망한 자세한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외부에는 줄곧 저우차이샤가 후허하오터시에서 사망했다고 말했다. (츠펑 ‘610’두목 양춘웨는 이미 악보를 당했다. 그의 아들 양즈후이(楊志慧)는 2005년 8월에 차를 몰다가 앞쪽에 멈춰서 있는 큰 화물차 밑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는데, 두개골이 갈라졌다. 그러나 운전석에 앉지 않은 다른 사람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무사했다. 흉악한 경찰 저우젠화는 죄수를 기한을 넘겨 감금하여 신고 당했으며, 경제 사건으로 조사받아 체포당했다고 함).
네이펑구 노동교양소 내부소식통에 따르면, 저우차이샤를 박해하여 사망하게 한 일은 네이멍구 ‘610’이 직접 조종하고, 사망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우젠화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장발표: 2011년 04월 2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4/24/赤峰市总工会女工部长被迫害致死前后(图)-2394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