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간쑤성 보도) 간쑤(甘肅)성 톈수이(天水)감옥에서는 2003년 7월부터 파룬궁수련생을 불법 감금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는 모든 수련생들을 ‘교육과’의 모든 감옥경찰들에게 맡겨서 매일 이른바 ‘담화’를 감행했다. 어떤 사람은 파룬궁 창시자를 마구 욕했고, 어떤 사람은 대법을 모독하는 책을 들고 읽었다. 수련생들은 인내심을 갖고 진상을 이야기했고 수련생이 박해당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경찰은 이른바 파룬궁수련생을 ‘전향’(강제로 신앙을 포기시킴)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또 다른 방법을 썼다. 수련생을 각 감금구역에 분산 했고 매 감금구역과 감옥에서 전향 책임부서를 만들었다.
2003년 12월의 어느날 저녁, 합반 수업(上大課)(감옥에서 매 주 조직한 죄수에 대해 감행한 세뇌를 가리킴) 중, 교육과 전 과장인 웨이쥔밍(魏俊明)은 파룬궁창시자를 모함하는 일부 말을 했다. 수련생 왕융밍(王永明)이 회의장을 떠나려 하자 감옥경찰은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4감금구역 간사 류장타오(劉江濤-파룬궁을 박해하는 데 최선을 다 한 이유로 그 후 감옥에 의해 ×교과과장으로 발탁됨)는 전기봉을 들고 왕융밍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다. 왕융밍은 높은 소리로 “경찰이 사람을 때려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다)!”를 외치자 한 무리 경찰들이 다가와서 왕씨를 땅위에 때려눕혔고, 아래층 사무실로 끌어다가 박해를 감행했다.
감옥에서는 2004년에 끊임없이 수련생 자오허우위[趙後雨-또 자오란저우(趙蘭州)라고 함]와 상쥔빈(尚君斌)에 대해 박해를 감행했다. 특히 상쥔빈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했다. 상씨에 대해 격리를 실행해서 하루 24시간을 사무실에 가뒀고 전문적으로 감옥경찰의 주시가 있었다. 낮에는 경찰이 윤번으로 담화를 하고 저녁이면 구타하고 욕했으며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들은 전기봉과 수갑을 전기선으로 연결해서 손으로 전기봉의 스위치를 눌렀다. 졸기만 하면 눌렀는데, 깜짝 놀라게 깨게 했고 긴장을 놓지 못하게 했다. 빈번한 전기충격은 결국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었다. 상쥔빈은 온몸에 전기충격을 당해 탄 자국이었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에 따르면, 당시 전기충격을 가할 때 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죄수들까지도 그 경찰을 짐승이라고 욕했다.
파룬궁수련생 쉬펑(徐峰)에 대한 박해: 네 명의 형사범(살인, 절도, 강도, 마피아 인물)을 파견해 감시하는데 감옥 숙소를 나서지 못하게 했고 화장실에 가도 사람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다른 사람, 특히는 수련생과 말하지 못하게 했고 말만 하면 위협했으며 심지어 손찌검을 했다. 그 당시 ×교 대회에서 쉬펑이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는데, 한쪽 손을 침대 다리에 1개월 넘게 채워놓아 잠을 잘 때까지도 열어주지 않았다.
3감금구역에서는 수련생 리춘성(李春生)에 대해 ‘촨강쯔(穿杠子)’라는 고문으로 박해를 감행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또 가장 사악한 4감금구역으로 옮겨져 ‘아오잉’(즉 장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음)이라는 고문을 채용했다. 바로 몇 명의 죄수(주로는 중형을 받은 범죄자로 그들은 공을 세워 형기를 줄이려고 생각하기에 표현이 적극적이다. 말하면 그대로 따르는데 어떤 자은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방법을 내놓았음)를 시켜 감독하게 하고, 잠을 재우지 않았는데 졸기만 하면 곧 두드려 깨웠다. 꼬박 며칠 동안 지새우게 했는데 사는 게 죽느니만 못했고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혹독한 구타 고문이 외부에 폭로되자 그들은 대신 이런 고문을 채용했다. 3감금구역에서는 여전히 양징춘(楊景春)과 디샤오이(狄小藝)에 대해 사악한 박해를 감행했다.
1감금구역에서는 수련생 왕웨이핑(王偉平), 가오자오밍(高招明)에 대해 박해를 감행했는데, 파룬궁을 모함하는 CD를 틀어놓고 보지 않으면 마구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2006년 1월 9일, 1감금구역에서는 딩시(定西)감옥에서 옮겨 온, 한달도 안 되는 수련생 류즈룽(劉志榮)을 박해로 사망시켰다. 류 씨는 생전에 표현이 확고했고 박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악의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않고 인원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꿇어앉지 않아 흉악한 경찰은 악도를 지시해서 류 씨를 구타하게 했다. 흉악한 경찰 탄젠(覃建)은 가장 광적이었는데 걸핏하면 마구 두들겨 팼다. 1개월도 되지 않아 류즈룽을 무참하게 때려죽였다. 류는 사망할 때 목부위에 상처 자국이 있었고 바닥에 온통 피를 흘려 사람 전신이 피못에 잠겨 있었는데, 시신을 거두는 죄수마저도 손을 댈 방법이 없었다. 그는 며칠 뒤 밥을 먹을 때도 여전히 메쓰꺼움을 느꼈다.
파룬궁수련생 루웨이룽(陸偉龍)이 박해를 반대해 단식하는 중에 그들은 루씨의 몸이 허약함도 상관하지 않고 족쇄와 수갑을 채웠다. 족쇄와 수갑을 함께 채우자 전혀 허리를 펴지 못했는데 시간이 오래되자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1개월 가까이 지속했다.
파룬궁수련생 관챵(關強), 장핑(張平)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정도의 박해를 감행했다..
교육과와 입감대(入監隊)에서도 이후 몇 년 동안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함에 적극 참가해서 죄수 ‘바오자(包夾-밀착감시원)’를 배치했다. 이들 죄수들은 주로는 감옥 경찰의 ‘관계자’인데 다수는 감금기간이 긴 사람이거나 혹은 여러 번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감옥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한 세트 방식에 대해 아주 숙련되고 마음이 독하며 수단이 악랄했고 감옥 경찰의 생각을 잘 파악하는 자들이었다. 어떤 때는 감옥 경찰의 눈길과 동작 하나로도 곧 감옥 경찰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 사람들은 감옥 경찰의 용인 하에 제멋대로 굴고 전혀 거리낌이 없었는데, 조금 따르지 않기만 하면 곧 마구 두들겨 팼다. 납치돼 감옥에 들어간 수련생의 첫 관은 바로 이들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모두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베이징 파룬궁수련생 차오둥(曹東)이 비밀리에 톈수이감옥에 불법 감금당한 이래, 감옥에서는 마치 강적과 맞닥뜨린 것 것 같았다. 당시의 옥정과 과장 야오원챵(姚文强-그 후 감옥장으로 승급), 교육과 과장 자오젠핑(趙劍平)이 책임지고 차오둥을 독방에 배치했다. 다른 감금구역에서 인원을 뽑아와 차오둥의 일언일행을 감시했고, 24시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인사를 하기만 하면 모두 꾸중을 들었다. 차오둥은 1층 뒷면에 갇혔는데 1년 내내 햇빛을 보지 못해서 몸은 한때 매우 허약했다. 그의 강력한 요구 하에 겨우 운동장에서 활동하게 허락했다. 2009년에 차오둥의 아내는 근심으로 비통해하던 중에 세상을 떠났지만 마지막으로도 차오둥을 만나볼 수 없었다. 차오둥은 상을 치르러 가겠다고 요구했지만 감옥에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찾아가서야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위안하도록 허락했다.
이상은 단지 톈수이감옥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일부분으로, 아직도 아무도 모르는 많은 죄악이 있다.
직접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톈수이감옥 감옥장 웨이싱강(魏興剛)(성 노동개조국 부국장 겸임), 부감옥장 추즈슝[楚志雄-현 우더우(武都)감옥 감옥장], 정위 정잔하이(鄭占海-그 후 감옥장으로 승급)
1감금구역 감금구역장 왕창(王强-그 후 부감옥장으로 승급), 교도원 쑤웨이밍(蘇維明)
중대장 우춘신(吳存信), 양성훙(楊盛宏)
감옥경찰 탄젠(覃建) 등이다.
3감금구역 감금구역장 왕창성(王長生)
4감금구역 감금구역장 샤젠쥔(夏建軍), 교도원 장젠화(張建華)
중대장 원옌밍(溫彦明),장쥔(張軍),장옌밍(張彦明)
감옥경찰 바이밍(白明),류장타오(劉江濤),가오톈핑(高天平),왕타오(王濤),마오쥔장(毛俊江) 등이다.
문장발표: 2011년 04월 19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4/19/2392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