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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아닌 10년의 악몽, 결국 팔순노모 보다 먼저 사망

–오랜 감금, 잔혹한 박해로세상을 떠난엔지니어 장윈훙

청더우 공기압축기공장 엔지니어였던 장윈훙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청더우시 신진(新津)세뇌반과 구치소 그리고 우마핑(五馬坪)감옥에서잔혹하게 박해를 당했다. 우마핑 감옥에서 그는 간복수와 중증 간경화 증상으로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2009년 형기만료로 출감하는 그에게 의사는 며칠 더 살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장윈훙은 2011년 3월 8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80세 넘은 그의 노모는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쑤이닝(遂寧), 청더우(成都), 러산(樂山-우마핑)을 무수히 오가며, 관련부처와 책임자에게 박해를 중지하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심지어 노모는청더우시 칭양구(青羊區)인민병원에서 경각에 달한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병원바깥에 현수막을 걸고 구명활동을 벌였다. 이를 본 행인들은 분노하며 당국의 무리한 박해를 질책했다.

재능이 뛰어났던 장윈훙은 대학시절부터 작가협회에 가입했고, 1995년에는 특허를 내기도 했다. 그는 1995년 12월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眞ㆍ善ㆍ忍’에 따라 심신이 승화되었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그는 두 차례 불법노동교양을 선고받고, 수차 불법 감금되어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겼다.

2001년 10월 불법노동교양 선고 후 심한고문으로 ‘병보석’ 치료를 받아야 했던 그였지만, 직장, 파출소, 사무처에서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직장동료이자 5년간 함께 파룬궁을 수련한 저우융(周勇)은 그해 9월 30일 이미 박해로 사망한 뒤였다.

酷刑演示:恶警将法轮功学员反铐在椅子上,用脚踩在手铐上
고문시연:파룬궁수련생을 의자에 거꾸로 채워 수갑을 밟는 흉악한 경찰

장윈훙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주택자금도 압류 당했다. 호구와 신분증마저 발급받지 못해 기본생존조건조차 없이 장기간 떠돌이 생활을 힘겹게 했는데, 납치될 때마다 쥐꼬리만큼의 저금까지 강탈당했다.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악몽은 또 시작됐다. 그에 대해 장윈훙은 2002년 2월 2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2001년 12월 21일 임시로 머무는 방에서 잠자던 한밤 중에 한무리의 사람들이불시에 침입해 묶으려고 했다. 반항하는 나에게 그들은 집단폭행을 했고 ‘우리가 바로 흉악한 경찰이다’고 소리치며 어떤 항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나는 1개월이 지나도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입은 내상으로심하게 아팠다. 그들은 또 단식 항의하는 나를 5일째 되던 날 병원으로 보냈지만 그곳에서도 도중에 링거를 빼고 푸장현(浦江縣)구치소로 옮겨버려 나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2002년 1월 11일, 사경을 헤매던 나를 사건처리반에서 청더우로 데려가 길거리에 버렸는데, 동수의 관심과 보살핌으로비로소 소생할 수 있었다. 21일간 나는 마치 꿈을 꾼 것만 같다……”

2005년 7월 22일 파룬궁수련생의 집으로 들어간 지 15분도 되지 않은장윈훙을 납치해 청더우시 신진세뇌반에 불법 감금했다. 그때부터 그는온갖 고문과 혹형을 당하며자백을 강요받았다. 악인은 또 그의 두 손을 걸상 양측에 채워놓은 뒤 강제로 앉힌 뒤6~7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무차별 폭행, 눈 찌르기, 냉수를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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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후, 청더우시 공안국 국보대대와 ‘610’에서 파견된 악인이 장윈훙을 찾아 와 더욱더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무차별 폭행은 물론 온갖 수법으로 수갑을 채운 뒤 혹형을 가해 기절하기를 수차례. 그렇게 두 달 넘는 혹형으로 장윈훙은 결국 구치소 지정병원인 청더우시 칭양구 병원 4층 4호실에 감금됐다. 그곳은 수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이 강제약물주입 등의 박해를 당했고, 10여명의 수련생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청더우 청화구(成華區)법원에서 3년 불법판결을받은 그는산소호흡기와 들것에 실려 우마핑감옥 위생소로 보내졌다. 그후 간경화와 간복수증세가 나타났는데, 그동안 그의 가족은 그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4번 받았다.

2006년 12월 31일 장윈훙은 쑤이닝시(遂寧市) 안쥐구(安居區) 지방세무국에서 근무하는 남동생 장즈훙(蔣志宏)이 보증을 서고, 어머니 곁으로 데려와 5개월간 몸조리를 시켰다. 감옥에서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그를 다시 수감시키려 하자, 장윈훙은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보증을 섰던남동생 장즈훙은 3개월 정직을 당했다. 2007년 11월 장윈훙은 다시 납치돼 우마핑감옥에서 또 박해를 당했다.

2008년 7월 26일 불법형기만료 전날80세 노모가 우마핑감옥으로 그를 마중 나갔지만, 장윈훙을출옥시키지 않고이른바 형기를 6개월 ‘보충’한다는 것이었다. 가족이근거조항을 대라고항의하자 그들은 감옥 관리국이 결정한 것으로자신들은 단지 집행만아니 성 감옥관리국에다 문의하라고 했다. 장윈훙의 노모가 쓰촨성감옥 관리국에 찾아가 문의했을 때 그들은“우마핑감옥에서 이미 가족에게 똑똑하게 알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2009년 초 의사는집으로 돌아가는 장윈훙에게 며칠 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는데,그는 집에서도 줄곧 복부가 붓고, 출혈을 했지만 여전히 당국은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찾아 노모를 모시고자 했다. 하지만 심한박해 후유증으로결국 3~4리터의 피를 토하며 3월 8일 21시경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03월 25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3/25/屡遭关押、酷刑-成都工程师被迫害致死-2380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