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성 보도) 파룬궁이 1992년에 중국 대륙에서 전해지기 시작한 이래, 사람들은 파룬따파가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가르치고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를 직접 목격하고 잇달아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흔히 한 사람이 배우기 시작해 이로움을 얻으면 그는 곧 자신의 가족과 친구에게 알려주는데 그 결과 일가족이 모두 수련하게 된다.
랴오닝(遼寧)성 링위안(凌源)시 베이루향(北爐鄕)에 후(胡)씨 집안이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 부친 후뎬신(胡殿新), 아내 추이위즈(崔玉芝,), 셋째 딸 후옌진(胡艶金), 며느리 궈샹화(國向華) 그들은 차례로 파룬따파 수련생이 됐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 후뎬신과 몇 몇 딸들은 모두 심각한 기관지염에 걸려 중노동을 할 수 없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질병이 전부 없어지고 몸은 신기하게 좋게 변했으며 가정도 화목하고 화기애애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후씨네 전 가족 사람들이 변했다고 말했다. 둘째 딸 후옌룽(胡艶榮)은 파룬따파가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에게 가져다 준 신체상 변화와 도덕상 제고를 직접 보고 1999년부터 그녀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한 중공(중국 공산당) 사악한 당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후뎬신 일가는 파룬따파의 신기함과 아름다음을 직접 체험했기에 그들은 마음속으로 파룬따파가 정법임을 매우 똑똑히 알고 있었다. 천지를 뒤엎을 듯한 거짓말 중에서, 잔혹한 탄압과 강압 하에서 그들은 대법수련을 견지했다.
1.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박해당해, 아버지 후뎬신이 억울하게 사망
중공의 잔혹한 탄압중에서 중공의 라디오 방송국과 TV방송국에서는 매일 전력을 다해 거짓말을 만들어 대법을 모독하고 대법사부님을 헐뜯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고 집안에 앉아 개인수련만 생각할 수 없었다.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국민들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다)!’를 알게 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몸이 건강하고 도덕이 고상한 사람으로 되도록 하기 위해 2000년 12월 6일(음력 11월 11일)에 후씨네 수련생 중에서 아버지 후뎬신과 어머니 추이위즈, 딸 후옌룽, 후옌리(胡艶麗)는 대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으로 갔다.
중공의 사악한 당의 통제 하에 경찰이 도로와 차량들을 봉쇄한 원인으로 그들은 도보로 베이징으로 가는 길고 긴 여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부친 후뎬신은 등에 짐을 메고 안에는 그가 손으로 쓴 파룬궁 진상자료를 넣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진상을 알렸다. 어디까지 걸어 갔으면 곧 대법의 진상을 어디에 알리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와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를 그곳에 붙혀놓았다. 이렇게 그들은 절반 노정을 걸어 가다가 링위안시 쑹링쯔(松嶺子) 파출소에 납치돼 전 가족은 링위안시 공안국에 보내졌다.
그들이 소속된 베이루향(北爐鄕) 파출소 경찰이 소식을 듣고 링위안시 공안국으로 달려왔다. 소장 우궈언(吳國恩)은 후옌룽을 다른 방안으로 끌어가 심문하고 구타했으며 전기봉으로 후옌룽을 구타했다. 후는 구타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으며 시퍼렇게 멍들었다. 우궈언은 또 후뎬신을 불러내 심문하면서 뺨을 때렸으며 심문을 끝내고 그들을 유치장에 가둬 넣으려 했다. 문을 나서기 전에 우궈언은 다가가서 후옌리에게 뺨을 두 대 때렸는데 후는 현기증이 났다.
쑹링쯔(松嶺子) 파출소에서 경찰은 노인에게 겨우 3백 80여 위안밖에 없는 돈을 수색해 빼앗았다. 목격자가 실증했는데 1백 80여 위안은 전부 1~2위안짜리 잔돈이다. 두터운 한무더기의 낡은 종이돈 중에는 한 성실한 농민의 얼마나 많은 고생과 땀방울이 스며들었겠는가. 이것은 가난한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후뎬신 일가의 저축 전부였다.
1개월 넘게 불법 감금을 당한 후, 줄곧 2001년 1월 23일까지 이를 테면 음력 12월 29일, 즉 설을 쇠기 전날에 후뎬신과 아내 추이위즈는 겨우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사악한 경찰은 여전히 이 두 노인에 대해 박해를 감행했다. 우궈언, 쥐원샹(鞠文祥), 마쥔(馬軍)을 우두머리로 한 베이루향 파출소 경찰들은 끊임없이 후씨네 집으로 가 교란해서 노인으로 하여금 심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정신이 혼란하게 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두 딸들이 모두 여전히 유치장에 감금당하자 노인은 이 같은 정신적 괴로움과 박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2001년 2월 8일 즉 음력 정월 16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는데 향년 62세이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시신은 집에 놓아두었다. 10여 명의 친척들은 공안국으로 가서 딸 후옌룽과 후옌리의 석방을 요구해, 딸들이 노인의 마지막을 볼 수 있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지상정에 부합된 합리한 요구는 결국 거부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후옌룽은 링위안 유치장에서 8개월 동안 불법 감금을 당한 후, 선양(沈陽) 마싼자쯔(馬三家子)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했다. 후옌리는 링위안시 유치장에서 4개월 동안 감금당한 후 가족이 4천 위안을 갈취당해서야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아들이 겨우 8세인데 밤낮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남편은 놀라움을 당해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집에서 마구 가마를 때려부쉈다. 그리고 70여 세 시어머니는 매일 며느리를 걱정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2. 딸 후옌룽이 링위안시 공안국에 의해 박해로 사망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 후옌룽은 강제 세뇌 및 강도를 초과한 장시간 노동으로 박해를 당했다. 후옌룽은 정신적, 육체적인 박해를 견뎌내지 못해 정신과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랐다.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는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워 후옌룽이 8개월 동안 고통과 학대를 겪은 후, 2002년 4월에 그녀를 석방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후옌룽이 불법 감금을 당한 기간에 집에는 5살인 아들과 12살 딸 그리고 70세 고령의 시아버지가 있었다. 다른 집 아이들은 모두 천진하게 어머니 품속에 꼭 기대있지만 그들 어머니는 도리어 장시간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기에 마음의 상처는 더 언어로 형용할 방법이 없다. 남편은 무거운 정신적 부담을 짊어지고 또 나가서 삯일을 해 전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그녀 가족은 늘 그녀가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와 한자리에 모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후옌룽은 집으로 돌아온 후, 링위안시 유치장과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했던 정경은 오래 동안 잊혀지지 않았으며 정신은 매우 큰 자극을 받았다. 계속 수련해 좋은 사람으로 됨을 견지함도 그녀는 감히 하지 못했다! 한 단락 고통스러운 사고를 거쳐 후옌룽은 의연히 결정을 내렸다. 계속 대법을 수련하겠다! 좋은 사람으로 됨은 잘못이 없고 파룬궁은 잘못이 없으며 대법제자는 잘못이 없다!
2007년 8월 1일 저녁 8시, 링위안시의 40여 명 파룬궁수련생(그 중에 후옌룽, 후옌리 자매 및 남동생 아내 궈샹화가 있음)들은 링위안시 베이루향의 한 파룬궁수련생의 집에서 ‘眞ㆍ善ㆍ忍’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는 수련 심득체험을 교류했다. 저녁 10시 10분, 베이루향 파출소 소장 리정화(李政華)와 지도원 판즈타오 등 7명의 경찰들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그들 손에 경찰봉과 나무몽둥이를 들고 따로 따로 창문과 대문을 막았다. 지도원 판즈타오(潘指)는 한 명의 경찰을 데리고 수갑을 들고 집안에 뛰어들었다.
10시 30분, 링위안시 국보대대 부대장 천즈(陳志)는 완전 무장한 20여 명의 경찰들은 데리고 7~8대의 경찰차를 몰고 궈펑셴(郭鳳賢)의 집으로 가서 포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납치해 경찰차 안으로 납치했다. 어떤 경찰은 한 자 길이로 된 쇠몽뭉이를 들고 어떤 경찰은 전기봉과 수갑을 들고 있었다. 그런 다음 파룬궁수련생을 링위안 공안분국으로 보냈다. 경찰측 말에 의하면, 납치 도중에 후옌룽이 경찰차에서 뛰어내려 벗어나려 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이 말에는 여러 곳이 의문점이 있는데 아래 문장에서 자세히 말하겠다. 당시 후옌룽은 줄곧 심각한 혼미상태에 처해져 링위안감옥 관리분국 병원에서 두 차례나 개두(開頭) 수술을 했다. 결국 8월 5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겨우 42세였다.
링위안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링위안시 공안국, 베이루향 파출소, 베이루향 향정부, 보뤄수촌(桲羅樹村) 위원회에서 연합해 후씨 가족을 감시하고 협박했다. 이상 부문에서는 2007년 8월 12일에 강제로 후옌룽의 시신을 화장했다.
후옌룽이 세상을 뜬 후, 링위안시 공안분국 국장 양밍후이(楊明輝), 자오양시(朝陽市) 공안국 부국장 장밍화(張明華), 베이루향 정부 관원은 그의 가족에 대해 “후옌룽은 ‘파룬궁 핵심’이기 때문에 살았다 해도 15년 이상의 판결을 내려야 한다.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일체 후과는 가족 자신이 감당해야 하므로 2만여 위안의 의료비도 가족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시신을 끌어다가 스스로 화장하도록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로 화장하겠다고 했다.
후옌룽이 사망한 과정에는 여러 곳이 의문점이 있었다. 경찰은 가족에 대해, 그들은 120을 이용해 후옌룽을 병원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목격자 말에 의하면 경찰은 경찰차로 후옌룽을 병원으로 보냈다. 경찰은 병원의 입원 접수처에서 후옌룽에게 등기할 때 이름은 ‘이름이 없음’이라고 적어 넣었다. 가족이 발견한 후 병원의 업무 인원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녀는 이름이 있어요. 후옌룽이라고 불러요.” 업무 인원은 그제야 이름을 고쳤다. 이 외에 가족은 검시할 것을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오양시 공안국과 링위안공안국에서는 강제로 가족을 격리시키고 어떠한 가족도 현장에 없는 상황 하에 강제로 검시를 했다. 검시한 결과 이른바 ‘차에서 뛰어내려 사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옌룽의 몸은 한 곳도 외상이거나 찰과상을 입지 않았다. 여름에 입은 옷이 얇은데 만약 차에서 뛰어내려 조성한 것이라면 몸에는 꼭 외상이 있을 것인데 다만 머리부위만 중상을 입을 수는 없다. 박해에 참여한 경찰 자신들의 말을 제외한 외에 다른 목격자가 없다.
후옌룽은 젊은 나이에, 남편과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두 아이, 아직 학교로 다니고 있는 아들 딸들 및 80세에 가까운 시아버지를 두고 일찍 사망했다. 후옌룽의 남편은 늘 밖에서 삯일을 했기에 본래는 농사일과 집안일을 모두 그녀 한 사람에게 의지했다. 후옌룽이 없게 되어 이 가정은 한 가닥의 ‘기둥’을 잃었다.
후옌룽이 경찰에게 살해당한 소식이 유치장 감방에 전해지자, 후옌룽의 여동생과 후옌룽의 남동생 아내는 울면서 언니의 마지막을 한번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소장 장(張)모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했다. 게다가 전기봉으로 후옌리 얼굴에 전기충격을 가했으며 또 다시 소란을 피우면 곧 족쇄를 채우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결국 언니의 마지막을 볼 수 없게 됐다. 후옌리는 또 한 차례 감옥에 갇혀 가족을 잃어도 마지막 한번을 볼 수 없는 비참한 조우를 겪었다. 2001년 정월에 역시 링위안시 유치장 안에서 부친 후뎬신이 박해로 사망한 소식을 접하고 후옌리는 부친의 마지막 한 번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경찰에게 거부당했다.
3. 딸 후옌리가 마싼자노동교양소에서 박해 당해
링위안시 유치장에서 1개월 동안 불법 감금을 당한 후, 후옌리는 1년 동안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아 2007년 9월 20일에 선양 마싼자 여자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했다.
마싼자노동교양소에 도착해서 막 노동교양소의 대문에 들어서자, 3대대의 대대장 스위(石宇)가 괴상하게 물었다. “아직도 연마하겠는가?” 3대대 문에 들어서자 배신자 다이무셴(代木仙)이 후옌리를 끌고 한 교실로 들어갔다. 첫 날, 다이무셴은 그녀에게 중공이 파룬따파를 모독하는 강변을 주입했다. 이튿날 아침, 다이무셴이 죄수복을 가져다가 그녀에게 입히려 하자 그녀는 입지 않았다. 셋째 날에 4명의 배신자가 함께 와서 위선적으로 그녀에게 허리부위까지 드리운 긴 머리카락을 베도록 권고했다. 거부를 당하자 이 4명의 배신자는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고 곧 그녀를 땅위에 눌러놓고 강제로 머리카락을 마구 잘라버렸다. 이어서 곧 그녀가 죄수복을 입도록 핍박했다가 후옌리의 거절을 당했다. 넷째날 또 이 4명의 배신자가 함께 그녀를 땅위에 눌러 넘어뜨리고 강제로 그녀에게 윗옷을 입혔다. 그날 오후, 이 4명의 배신자는 또 그녀를 핍박해서 ‘3서(三書-즉 대법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사부님을 욕하며 핍박으로 사부님과 결렬되게 하는 등등의 반성문을 가리킴)’를 씌웠다. 그녀들은 후옌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미 다 써놓은 ‘3서’ 위에 지장을 누르게 했다. 후옌리는 이런 박해를 부인하며 이치가 정당하고 날카롭고 엄숙하게 말했다.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쓴 것이 아니다!”
이어서 후옌리는 일반죄수와 함께 1대대에 감금당했다. 3대대와 같지 않은 것은 이곳의 노동 강도가 더욱 심했는데 주요하게는 면으로 된 군장을 생산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6시에 아침밥을 먹고, 밥을 먹은 후에 직접 작업실로 가서 줄곧 11시 반까지 일한 다음 점심밥을 먹으러 갔다. 줄곧 저녁 5시가 되어서 저녁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먹은 다음 또 직접 작업실로 가서 밤중 12시까지 일해서야 일을 끝냈다. 어떤 일반 죄수는 지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 받침대에 엎드려 잠들었다. 이미 전에 어떤 사람이 졸다가 손가락이 기계 안에 들어갔다. 그 후, 인터넷에서 마싼자노동교양소에서 시간을 초과하고 사람 수를 초과[일하는 시간, 감금자의 연령, 인원을 초과한 것을 간단하게 3초(‘三超’)라고 함]한 것이 폭로된 이유로, 노동시간을 줄여서 저녁밥을 먹은 후에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악한 경찰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세뇌박해를 더욱 다그쳤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줄곧 파룬궁을 모독하는 강변과 사설을 주입했다.
2008년 3월 말, 후옌리는 매달 한 차례 있는 심사에 거부해 서명하지 않았다. 대대장 류궈룽(劉國榮)은 그녀를 화장실로 불러가 그녀의 뺨을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모른다. 그녀는 구타로 땅위에 쓰러졌고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류궈룽은 가죽신을 신은 채 머리든지 아니면 얼굴이든지 가슴이든지를 막론하고 마구 찼다. 후옌리는 높은 소리로 외쳤다. “사람 때려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후옌리는 박해로 이튿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앞가슴이 특별히 아픈 감을 느꼈는데 마치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류궈룽을 찾아서 노동교양소 의무실로 치료하러 가겠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합법적인 요구는 거부를 당했다. 후옌리는 즉시 치료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핍박으로 일하러 나갔다. 후옌리는 단호하게 병원으로 치료하러 가겠다고 요구했다가 거듭 거부당한 후, 곧 대대장 장춘광(張春光)을 찾았다. 장춘광은 사악하게 “당신은 발에 차이는 것을 그렇게도 견뎌내지 못하는가?”고 말했다. 후옌리는 대답했다. “이렇게 차요. 당신이 시험해 보세요!” 다시 한 번 거절을 당한 후 그녀는 또 대대장 리밍위(李明玉)를 찾아갔다. 리밍위는 핑계를 대서 거절하며 말했다. “시간이 있으면 다시 가겠다!” 이렇게 10여 일을 끌다가 4월 10일에 그녀는 그제야 의사에게 가도록 허락했다.
마싼자 노동교양소 의무실에서 검사한 후 의사는 일체가 정상이라고 말했다. 비록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의사는 며칠을 기다려야 X선 필름이 나온다고 말했다. 3~4일이 지난 뒤, 작은 종이쪽지를 보내왔는데 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별일 없다. 며칠 동안 몸조리하면 나아진다.” 후옌리는 필름을 얻지 못하고 어떠한 진단서도 얻지 못했다. 마싼자노동교양소에서는 이렇게 병이 있고 없는 것, 상처가 있고 없는 것은 전부 감옥 의사의 입에 의거했다. 따라서 중상을 입었을지라도 별일 없는 것으로 될 수 있다. 중국 대륙의 사악한 감옥에서 노동교양을 당하고 감금당한 인원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일체 권리를 잃는다.
이후, 다시는 후옌리를 찾아서 심사에 서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줄곧 2008년 7월 29일에 이르러서야 후옌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4. 작은 딸 후옌진과 며느리 궈샹화가 당한 박해
둘째 언니 후옌룽이 박해로 사망하고, 셋째 언니 후옌리와 며느리 궈샹화는 여전히 링위안 유치장에서 불법 감금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 추이위즈는 이어지는 충격 하에서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후뎬신이 박해로 세상을 뜬 후부터 추이위즈는 아들 후옌푸(胡艶富)와 함께 생활했다. 며느리 궈샹화가 불법 감금을 당해 병이 든 노인을 보살펴드릴 사람이 없었던 이유로, 후옌푸는 곧 여동생 후옌진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노인을 보살펴드리게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링위안시 공안국 국보대대 대대장 장구이린(王桂林)과 부대대장 천즈를 우두머리로 한 악인들은 또 한 차례 마수를 후씨네 집에 뻗었다.
천즈는 직접 링위안시 공안국 국보대대 경찰들을 거느리고 베이루향으로 가서 후옌진을 납치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후옌진도 수련체험 교류회에 참가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후옌진의 집으로 갔다가 그가 집에 없는 것을 보고, 곧 후옌푸의 집으로 갔다. 이때는 이미 밤중이기에 후옌푸네 집의 대문은 잠가 있었다. 그들은 대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정원 안에 뛰어 들어갔다. 방안 문을 두드리고 방안에 들어간 후, 그들은 후옌진이 구들에 누워 이불속에서 한창 잠을 자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후옌진이 일어나지 않자 천즈는 말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로 감싸서라도 끌어간다!” 후옌푸는 후옌진을 납치하는 것을 확고하게 저지했다. 어머니 추이위즈는 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이미 한 딸을 박해해 죽였다. 또 이 딸마저도 박해해 죽이려 하는가?!” 천즈 등 사람들은 정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곧 가버렸다. 경찰들이 또다시 납치 박해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후옌진은 남편과 어린 아이를 떠나 의지할 곳을 잃고 밖에서 몇 개월 떠돌아 다녔다.
둘째 언니 후옌룽이 박해로 사망하고, 셋째 언니 후옌리는 마싼자노동교양소에 보내져 박해를 당했으며, 궈샹화는 즉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링위안시 공안국 경찰들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또 이 기회를 틈타 재물을 갈취했다. 베이루샹 파출소 소장 리정화(李政華)는 직접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 “인원 수는 이미 찼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풀어주지 말라. 그들에게서 일부 돈을 ‘얻어’ 내자.” 상대방이 얼마나 되는 돈을 ‘얻어’ 내겠냐고 묻자 리정화는 “하늘에 닿는(通天) 돈을 얻어 내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국민을 갈취하고 대법제자의 재물을 수탈하는 것은 이미 밥 먹듯 하는 일로 됐으며, 모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전문 용어가 있었다. 그들의 전문 용어에 따르면 ‘하늘에 닿는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대법수련생의 재물을 갈취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연속 궈샹화와 다른 대법수련생을 불법 감금했고 마음대로 시간을 연장했으며 또 ‘돈을 바치지 않으면 사람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큰 소리쳤다. 궈샹화는 또 4일 동안 불법 감금당하고 2007년 9월 24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궈샹화의 가족이 앞뒤로 갈취당한 재물이 총 얼마인지 상세하지 않다.
문장발표: 2011년 03월 1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3/17/2377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