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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하얼의 53명 파룬궁수련생 박해로 사망(사진)

——치치하얼시 중공인원이 파룬궁을 박해한 종합기록보도 (1)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99년 이후, 53명 파룬궁수련생들이 중공 박해로 사망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는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나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2010년 11월 20일까지 이미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이 53명으로 증명되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치치하얼시 건설은행 간부학교 퇴직 간부이자 78세인 파룬궁수련생 황징쿤(黄景昆)이고,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생이자 겨우 23세인 왕웨이화(王偉華)이다.

치치하얼시에서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들이 생전에 찍은 사진들:

쉬훙메이(徐宏梅), 선쯔리(沈子力), 류징밍(劉晶明), 판훙둥(潘洪東), 루위핑(廬玉平), 장구이친(張桂芹), 천웨이쥔(陳偉君), 인수윈(尹淑雲), 장윈즈(張雲芝), 자오야전(趙亞珍), 푸즈위(付志宇), 량진위(梁金玉), 황징쿤(黄景坤), 쉬린산(徐林山), 마원성(馬文盛)(사진)

 徐宏梅、沈子力、刘晶明、潘洪东、卢玉平、张桂芹、陈伟君、尹淑云、张云芝、赵亚珍、付志宇、梁金玉、黄景坤、徐林山、马文盛

사진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쉬훙메이(徐宏梅), 선쯔리(沈子力), 류징밍(劉晶明), 판훙둥(潘洪東), 루위핑(廬玉平), 장구이친(張桂芹), 천웨이쥔(陳偉君), 인수윈(尹淑雲), 장윈즈(張雲芝), 자오야전(趙亞珍), 푸즈위(付志宇), 량진위(梁金玉), 황징쿤(黄景坤), 쉬린산(徐林山), 마원성(馬文盛)

다싱안링의 청렴한 세무공무원 루위핑이 박해로 사망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다싱안링(大興安嶺) 쑹링구(松嶺區)의 루위핑(廬玉平)은 파룬따파 ‘眞ㆍ善ㆍ忍’을 굳게 믿었다는 이유로 납치박해를 당해 온갖 고문을 받을 대로 받고 14년의 억울한 재판을 받았다. 치치하얼시의 타이라이(泰來)감옥에서 박해로 피골이 상접해졌는데 결국 2009년 5월 30일 오후에 타이라이감옥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겨우 51세였다.

地税局清正廉洁建设先进个人卢玉平

세무국의 청렴하고 공정한 건설선진개인 루위핑

루위핑(1958년 출생, 전문대학출신)은 다싱안링지역 쑹링구 세무국에서 공인하는 청렴하고 공정한 모범으로 1996년에 ‘청렴하고 공정한 건설선진개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차례로 교육업무와 세무업무에 종사했고 이미 전에 다싱안링지역 쑹링구 세무국에서 비서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 루위핑은 여러 해 전에 흉부에 물이 고이는 등 질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1995년에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심신이 건강했다. 그는 眞ㆍ善ㆍ忍의 원칙에 따라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했고, 이전에 직장에서 가져갔던 물건들을 모두 직장으로 보내왔으며 주동적으로 동료들과 모순을 없앴다. 직장에서는 그를 원래의 과실(科室)업무에서 기층으로 옮겨 비용을 받아들이게 했지만 그는 분배에 복종하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정부패하지 않으면서 주동적으로 업무를 잘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다싱안링지역 쑹링구 정법위원회, 610, 공안 및 쑹링구 세무국 공무원들은 루위핑을 위협하고 협박해서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 그는 시종 자신의 신앙을 굳게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 1999년 다싱안링지역 규율검사위원에서는 루위핑에 대해 이른바 전문사건팀을 성립했고, 그에 대해 사회상에서 직장 업무와 모든 일을 함에 각 방면의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맨 마지막에 다싱안링지역 세무국 국장 량싱중(梁興中)이 조사 결과를 선포했다. “……다년간 세무전선에서 한 푼의 부정부패도 하지 않았고, 뜯어내거나 요구하고 보고하는 등 규율을 위반한 행위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세무국의 한(韓)국장은 구치소로 와서 그를 면회하러 왔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루위핑은 보기드문 좋은 간부입니다!” 그러나 사건 처리하는 인원은 도리어 말했다. “당신이 ‘연마하지 않는다’는 세 글자를 말하지 않으면 곧 이유를 찾아 당신에게 판결을 내리겠다!” 맨 마지막에 루위핑은 14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고 감옥 안에서 살해당했다.

치치하얼시 여 대법제자 쉬훙메이와 선쯔리가 박해로 사망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의 파룬궁수련생 쉬훙메이(徐宏梅)와 선쯔리(沈子力)는 칭윈제(青雲街)파출소의 악경 이잔후이(衣湛暉) 등에게 납치돼 5박5일 동안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한 후 각혈 증상, 음식물을 먹지 못하는 증상, 몸에 부종이 생기고 경련을 일으켰으며 심각한 혼미 상태가 나타나 2007년 2월 13일에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제2병원 내과병실에 보내졌다. 치치하얼시와 룽사구(龍沙區)610, 정법위, 공안분국의 인원들이 빈번하게 오고갔다. 이전에 가족에게 2만 위안을 바치면 사람을 풀어준다고 협박한 적이 있다. 가족은 돈을 바칠 능력이 없자, 중공 인원들은 뜻밖에 죽어도 풀어주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쉬훙메이와 선쯔리는 따로따로 2007년 2월 27일 16시 30분과 20시 50분에 심신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중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쉬훙메이는 당시 나이 겨우 37세이고 선쯔리는 49세이다.

徐宏梅
쉬훙메이

沈子力
선쯔리

2007년 1월 13일 오후 4시, 박해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던 쉬훙메이와 선쯔리, 허우야쳰(侯雅倩) 세 명이 허우야쳰의 거처로 갔을 때, 치치하얼시 칭윈가(青云街)파출소의 경찰 이잔후이 등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그녀들은 칭윈가파출소로 납치해갔다. 악경 이잔후이는 전혀 인성이 없이 쉬훙메이를 4층에서 1층으로 끌어내렸다. 쉬훙메이는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가 악경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악경들은 그녀에 대해 고문박해를 감행했다. 큰 괘에 올리기 고문, 일자(一字)로 올리기 고문, 네 차례나 거꾸로 걸고 한 차례는 바로 걸어놓았으며 또 각종 형구를 바꾸어가면서 쉬훙메이를 학대해서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악경 이잔후이는 또 냉수를 그녀에게 끼얹어서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계속해서 고문 학대를 감행했다. 그 후 또 그녀를 쇠우리 안에 가뒀다. 선쯔리는 칭윈가파출소의 악경에게 테이프로 쇠의자 위에 묶였다. 폭도는 그녀의 머리칼을 틀어잡고 머리를 벽에 막았는데, 줄곧 기절할 때까지 구타했다. 정신을 차린 후면 계속해서 혹독하게 구타하고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酷刑演示:绑在铁椅子上

고문 연시: 쇠의자 위에 묶이다

1월 18일에 악경들은 온몸에 상처투성이고 사경을 헤매는 선쯔리와 쉬훙메이를 치치하얼시 구치소로 옮겨 불법 감금해 연속 박해를 가했다. 2007년 2월 13일 오후에 생명이 위독해진 쉬훙메이와 선쯔리는 족쇄가 채워진 채 치치하얼시 제2병원 내과 병실 423호와 424호실에 보내졌다. 칭윈가파출소의 악경 이잔후이와 저우환위(周環宇)가 그녀들에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기 때문에 몸에 내상을 심각하게 입어 수시로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치치하얼시 610, 공안국, 정법위, 룽사구610, 룽사구정법위, 칭위가파출소에서는 즉시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뜻밖의 박해를 당한 가족에게 2만 위안의 돈을 갈취해야 사람을 풀어주려 했다.

쉬훙메이의 9세인 딸 톈톈(恬恬)이 병원으로 가서 울면서 엄마를 부를 때, 엄마는 이미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적고 헤어져 있던 시간이 많던 고난이 많았던 이 엄마는 영원히 그녀 곁을 떠났다. 아이의 아버지는 파룬따파를 확고하게 신앙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타이라이감옥에 불법으로 감금당해 있다.

타이라이감옥의 고문으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판훙둥

2001년 9월 4일에 치치하얼 파룬궁수련생 판훙둥(潘洪東)은 치치하얼시 톄펑구(鐵鋒區) 신궁디(新工地)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돼 호랑이의자 등 고문을 당했고 전기곤봉으로 생식기를 전기충격당했다. 판훙둥은 3일 동안 단식했고, 그 후 치치하얼시 제2구치소로 납치돼 불법 감금을 당했다. 2002년말, 판훙둥은 10년의 불법판결을 당했다. 2003년 중국 전통설이 지난 후 타이라이감옥으로 불법으로 보내져 박해 당했다. 2005년 5월 15일 오전 8시18분에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酷刑演示:老虎凳(绘画)

고문 연시: 호랑이의자 (그림)

판훙둥(남, 37세)은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생으로 원적은 랴오닝(遼寧) 창투현(昌圖縣)이다. 그는 ‘촨다(川大)’계산기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점잖고 고상했으며 또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학식이 매우 깊었다. 박해를 당한 후 반응이 느리고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潘洪东

판훙둥

타이라이감옥에서 판훙둥은 매일 강제로 논밭에 나가 노역을 했다. 이전에 궁(工)’자로 된 받침대에 채워진 적이 있었고, 구타로 귀가 찢어졌다. 2004년 8월 26일에 타이라이감옥 9감구역(지금은 둥리(動力)감구역이라고 함) 2분감구역에서는 그에게 ‘보증서’를 쓰게 하기 위해, 대대의 부교(副教) 차오민장(曹閔江)은 명령을 내려서 판훙둥을 고정된 받침대에 채워놓고, 두 손과 두 발을 ‘궁(工)’자로 된 받침대의 네 곳에 채워놓았다. 앞가슴에는 철근을 씌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멘트 땅위에 앉혀놓았으며, 낮에는 또 들고나가서 대중들에게 보였다.

2004년 11월부터 감옥에서는 가족과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박해를 당한 후 판훙둥은 끔찍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어떤 형사 죄수마저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몰래 방석을 넘겨주었는데 악경에게 발각된 후 혹독한 질책을 들었다. 판훙둥은 악도에게 무참하게 구타당해 사망했다. 사람들은 판훙둥이 혹독한 구타를 당한 후, 오랜 한 단락 시간동안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를 들었다. 줄곧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맞아 죽었습니다.”는 한마디를 들은 후, 갑자기 단시간에 사면은 조용하고 소리없이 변했다.

판훙둥은 2005년 5월 15일 아침 8시 18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시신의 여러 곳은 상처투성이고 입가, 귓구멍, 콧구멍에는 핏자국이 있었으며, 흉부에는 원형으로 된 상처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 등 여러 부위에는 뚜렷한 혈흔이 있었다.

치치하얼시 중의원의 우수한 구매담당직원이 타이라이감옥에서 학살당하다

헤이룽장성 파룬궁수련생 류징밍(劉晶明)은 치치하얼시 중의원에 부임한 우수한 구매담당직원이다. 2007년 2월 8일에 타이라이감옥으로 보내졌는데 46일 이후에 박해로 사망했다. 그때 나이 겨우 39세였다.

法轮功学员刘晶明

파룬궁수련생 류징밍

파룬궁수련생 류징밍(1968년 7월 23일 출생)은 치치하얼시 중의원에 부임한 우수한 구매원이다. 그는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해서, ‘眞ㆍ善ㆍ忍’의 원칙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고려해 주었다. 그는 구매업무를 할 때 종래로 부정부패하지 않았고, 사람됨이 온화하고 착해, 전 원의 모든 직원들이 공인하는 좋은 사람이다. 1995년에 병원의 보위과를 위해 발명한 ‘2절몽둥이(二節棍)’이 영예롭게 특허국에 의해 특허제품으로 비준되었다. 2001년에 중의원에는 전 병원에 물이 새나오는 현상이 심각했다. 많은 수도꼭지는 오랫동안 물이 흘렀는데 병원에서 돈을 얼마나 써도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선량하고 총명한 류징밍은 어떠한 보수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손을 대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전 병원의 수도꼭지를 다 수리해서 직원들에게 편리를 주었다. 게다가 병원을 위해 매년 물을 절약한 돈이 몇 만 위안에 달했다. 2002년 여가시간에 무상으로 중의원을 위해 병원의 휘장을 새겨주었는데 여태껏 병원 사무동 안에 걸려있다.

바로 이렇게 하나의 어질고 너그럽고 선량하며 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은,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여러 차례나 불법 구금, 불법 노동교양, 재물 갈취, 불법 판결을 당했으며 줄곧 박해로 사망할 때까지 박해를 당했다.

黑龙江省泰来监狱

헤이룽장성 타이라이감옥

2007년 3월 22일, 이른바 순회강연단이 타이라이감옥으로 와서 강연을 했는데 회의를 하는 사이에 류징밍과 런잉췬(任英群) 등 4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을 일어나서 거짓말을 폭로했다. 경찰들은 그들에 대해 고문을 사용해 비인간적인 박해를 감행했다. 2007년 3월 24일 저녁 7시에 타이라이감옥 집중훈련대의 교도관 지헝타이(紀恒泰)가 류징밍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 류징밍이 3월 24일 1시 40분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근 8년 동안 중공 정부인원들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여 죽인 후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변명의 하나이다.

그지없이 고통스러운 가족은 타이라이감옥으로 와서 분해하며 물었다. “당신들이 그들을 구타했지요? 류징밍이 이미 새벽 1시 40분에 사망했는데, 무엇 때문에 저녁 7시에야 가족에게 통지를 하나요. 이 18시간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어요?! 류징밍의 두 다리와 무릎부위는 흑자색을 띠고 어혈과 상처를 입은 흔적이 있는데 꼭 장시간 동안 꿇어앉는 고문을 가해 생겨난 것입니다.” 옥정과 부과장 메이지밍(梅繼明)은 구타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가족은 즉시 류징밍의 시신의 오른쪽 허벅지 외측에 직경 약 6센티미터인 구멍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물었다. 그들은 도리어 검찰원에서 이미 검사를 했다는 구실로 핑계를 대고 대답하지 않았다.

37차나 고문학대를 당한 헤이룽장성 대법제자 천웨이쥔이 박해로 사망

2007년 6월 3일, 헤이룽장성 넌장현(嫩江縣)대법제자 천웨이쥔(陳偉君-49세)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천둥번개가 치고 큰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하늘도 천웨이쥔을 위해 울고 있었다. 줄곧 새벽 3시가 넘어서 빈이관(殯儀館)으로 가는 도로 남쪽 길에서 검은 색 천에 흰색 글자로 된 현수막에 ‘천웨이쥔이 중공의 박해로 사망한 것을 침통하게 애도한다. 파룬궁은 잘못이 없다. 중공은 8천만 사람을 살해했다!’ 는 짧은 말이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진상을 알게 했다.

陈伟君生前照片

천웨이쥔이 생전에 찍은 사진

파룬궁수련생 천웨이쥔은 납치돼 감금박해를 당했는데, 6년 동안 37차례나 고문학대를 당했다. 2005년 3월 18일, 그 한 차례는 어두운 독방에 갇혀 3개월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천웨이쥔은 2000년,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다가 기차역에서 붙잡혔고, 2000년 4월 5일에는 1년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아 치치하얼 솽허(雙合)여자노동교양소에서 대대장 왕옌(王巖)에게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당하고 구타까지 당했다. 이전에 매달려 야만적인 음식물주입을 당했고, 독방 안에 갇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천웨이쥔은 2001년 11월, 넌장공안국에 의해 불법 체포됐고, 2002년, 11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고 그녀의 남편(당시는 파룬궁수련생이 아니었음)은 7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 받았다. 2002년 7월 29일,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으로 납치당했다.

酷刑演示:长时间吊打(绘画)

고문 연시: 장시간 동안 매달고 구타하다 (그림)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서 천웨이쥔은 심한 손상과 학대를 받을 대로 받았다. 큰 괘에 올리기, 앉히는 고문, 등 뒤로 채우기, 독방에 가두기, 호스를 꽂고 음식물주입하기, 호스를 꽂았다뺐다하면서 괴롭히기, 호스를 위속까지 꽂고 장시간 동안 뽑아주지 않아서 녹색 곰팡이가 생기게 하기 등등의 고문학대를 당해, 여러 차례 생명이 위독해졌다. 2006년 양력 1월부터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서는 그날 음식물을 손으로 주물러서 부수어 믹스로 갈았는데, 대량의 마늘 등을 섞어 넣었다. 또 파와 매운 짠지 등도 있었으며 ‘살균’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는데 사실은 고의로 이런 자극적인 음식물을 빈속에 주입해, 위와 창자 등 내장을 상해하려는 것이었다. 음식물을 주입당한 사람은 또 왕타오(王濤), 옌수화(闫淑華), 쭤윈샤(左雲霞), 주샹친(朱香芹), 장린원(張林文), 장리핑(張麗萍), 류수펀(劉淑芬) 등이다.

酷刑演示:折磨性灌食

고문 연시: 학대적인 음식물주입

치치하얼시의 일부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명단:

쉬훙메이(徐宏梅), 선쯔리(沈子力), 류징밍(劉晶明), 마원성(馬文盛), 판훙둥(潘洪東), 장구이친(張桂芹), 천웨이쥔(陳偉君), 인수윈(尹淑雲), 장윈즈(張雲芝), 자오야전(趙亞珍), 푸즈위(付志宇), 량진위(梁金玉), 황징쿤(黄景坤), 쉬린산(徐林山), 루위핑(廬玉平), 자오전성(焦振省), 쑨훙원(孫洪文), 왕웨이화(王偉華), 가오더융(高德勇), 왕바오셴(王寳憲), 류샤오링(劉曉玲), 리쉐롄(李雪蓮), 하오즈메이(郝治美), 간슈윈(甘秀雲), 리훙(李紅), 머우샤오루(繆小露), 천웨이쥔(陳偉君), 리구이친(李桂芹), 가오화(高華), 탄슈눠(譚秀娜), 커펑란(柯鳳蘭), 가오싱롄(高性蓮), 차오량이(曹良義), 웨후이민(岳會民), 추원빈(邱文斌), 리구이친(李桂勤), 린리메이(林麗梅), 추원빈邱文斌(), 청위란(程玉蘭), 리구이친(李桂勤), 장옌팡(張艶芳), 궈슈전(郭秀珍), 황위징(黄玉晶), 위수란(于淑蘭), 커펑란(柯鳳蘭), 쑹메이잉(宋梅英), 왕위헝(王與恒), 리페이성(李佩生), 리훙제(李宏傑), 위중주(于忠柱), 차이융(蔡勇), 왕쭤화(王左華), 웨위팡(岳玉芳).

하나하나, 한 건 한 건의 살인 사건은, 이것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참을 수 없이 분하게 한다. 파룬궁은 사람을 도덕이 있고 고상하고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좋은 사람으로 되게 가르친다. 중국의 파룬궁수련생들은 ‘眞善忍’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서, 공인이든, 농민이든, 지식분자이든, 가정부녀이든, 집에서든지, 이웃사이에서든지, 업무 중인지를 막론하고 모두 칭찬이 자자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많은 것이 싫은가? 중공은 무엇 때문에 사회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향하게 하는 대법을 용인하지 못하는가?

중공의 사령(邪靈)은 질투하는데 습관이 되어 마음이 옹졸하고, 권리욕이 극히 강할 뿐만 아니라, 흉악하고 잔인하며 난폭한 것으로 ‘眞善忍’대법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민중은 점점 이 일체를 똑똑히 보고 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폭로할 때면 중공의 거짓말은 다시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배경설명

파룬따파는 중국의 오래 된 불가(佛家)의 상승(上乘) 수련대법(修煉大法)이다. 1992년 5월, 리훙쯔 선생님께서 창춘(長春)에서 전하셔서 지금까지 이미 백여 개 국가와 지역(대만, 홍콩, 마카오)에 전해졌고, 각 국가에서 이미 3천 여 항목을 넘는 표창을 받았으며, 파룬궁서적은 이미 30 여 종의 언어와 문자로 번역됐다. 眞ㆍ善ㆍ忍의 정신은 인종, 국경을 초월해 세상의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덕(高德)대법은 도리어 중국에서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1999년 7월 20일에 장쩌민은 질투심과 사리(私利)에서 출발해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발동했다. 1999년 6월 10일에 장쩌민은 국가 헌법 위에 군림하고 당시 ‘문화대혁명’팀과 비슷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기구 ‘610사무실’을 만들었다. 각 지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이름을 더럽히고,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며, 육체적으로 소멸’하는 말살 정책을 감행해서, 치치하얼 지역의 여러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받아 사망하게 했다. 그리고 많은 수련생들은 불법판결, 노동교양,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녔으며, 무수한 가정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각 감옥, 노동교양소와 치치하얼시 제1병원에서는 서로 결탁해 파룬궁수련생들의 장기를 적출해 팔고 시체를 불태워 흔적을 없앴다…….

그러나 진리는 강권과 폭력 때문에 잃지 않을 것이다. 파룬따파를 믿는 자는 거짓말에 속지 않았고, 또 고문과 학살에 눌려서 무너지지 않았다. 10여 년 동안, 파룬궁 수련생들은 강권과 폭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종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바른 믿음(正信)과 초상적인 의지로, 평화롭고 이성적으로 박해를 반대했으며 해이해지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굴복하지 않는 의지는 천지를 감동시켰다. 또 피와 눈물로 진리를 수호하여 역사의 한 장을 썼다!

치치하얼시 1999년 7월 22일의 그 날

프랑스인 “노스트라다무스” 가 그의 《제세기(諸世紀)》예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1999년 7월, 공포대왕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1999년 7월에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해 일순간에 전국은 검은 구름이 뒤덮혔다. 공포가 정말 하늘로부터 내려와 사람을 붙잡고, 구타하고, 판결하고, 고문학대……각종 비난, 모함들로 온 천지를 뒤덮을 듯 했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4시쯤, 치치하얼시의 라디오방송국과 텔레비전방송국에서는 중앙라디오방송국과 텔레비전방송국에서 파룬궁을 먹칠하는 이른바 ‘중요 뉴스’를 연속 방영했다. 뉴스 중 참혹한 하나하나의 장면들은 파룬궁수련생의 평소 조용하고 상화한 수련 상태와 완전히 정반대였으며,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각종 모함은 더욱 전혀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고 속임수였다. 사람들은 공기가 응결되고 질식할 것만 같은 감을 느꼈는데, 마치 ‘문화대혁명’이 다시 온 듯 했다.

치치하얼시에서 파룬궁으로 이로움을 얻은 많은 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치치하얼시 시정부 청사 앞으로 가서 평화적으로 청원했다. 그들은 정부에 진실한 상황을 반영하고 사실을 분명히 밝히려 했다. 헌법에는 ‘공민의 신앙은 자유다’라는 규정이 있다. 국가 언론매체에서 파룬궁 창시자와 수련생들을 모함하는데 이용된 행동은 《헌법》을 위반했다. 당시 시위원회 건물 앞에는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길을 사이 둔 맞은편의 시 중심 광장에서 구경하는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시 위원회의 건물 앞길은 차단당했다. 길에는 무장경찰과 경찰 그리고 정부 인원들이 무척 많았다. 시 공안국의 국가보안 인원은 군중 속에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녹화를 찍었다.

오래지 않아 대형 버스 두 대가 갑자기 도착하더니, 차에서 위장복(僞裝服)을 입고 철모를 쓰고 손에 기관총을 든 무장경찰들이 파룬궁수련생들을 포위했다. 시 정부 정원 안에서는 고성의 나팔로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신속하게 퇴거하도록 외쳤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뒷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파룬궁수련생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끌려 대형 버스에 올랐다. 당시는 마침 무더운 여름철이었다. 차 위에서 완전군장한 무장경찰들은 더워서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옷은 푹 젖었다. 수련생들은 자리를 그들에게 양보해주었다. 나이가 많은 수련생은 손수건으로 그들에게 땀을 닦아 주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이미 몇 대나 되는 버스로 파룬궁수련생들을 교외에 있는 여름방학 기간에 시간이 난 학교로 끌고갔으며, 지역에 따라 나눠서 교실 안에 가뒀다. 수련생은 온화하고 우애적으로 공안들에게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한 공안은 “당신들의 연공은 어떻게 하는가?”고 물었다. 한 수련생은 곧 현장에서 시연해서 몇 장의 공법을 연마했다. 그들은 편한 공법동작을 본 후 말했다. “이것도 문제가 없구만. 또 무력도 행사하지 않고.” 그들은 수련생들에게 각자의 직장과 가정주소 그리고 집 전화번호를 쓰도록 요구했다. 밤이 되자, 또 대형 버스로 수련생들을 지역에 따라 따로따로 각각 관할하는 공안분국으로 보냈다.

이때부터 파룬궁수련생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며, 7월 22일에 시 정부에 평화적인 청원을 하러 갔던 모든 파룬궁수련생들은 더욱 치치하얼시 중공(중국 공산당) 당국에서 중점으로 박해하는 대상으로 되었다. 그리고 매일 불법으로 미행당하고, 전화는 도청당하고, 직장의 파출소와 가도의 업무인원은 그들에게 압력을 가해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도록 핍박했는데, 매일 끊임없는 교란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문장발표: 2011년 3월 1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3/11/齐齐哈尔五十三位法轮功学员被迫害致死(图)-237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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