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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억울한 옥살이 당했던 엔지니어 다시 납치당해(사진)

[밍후이왕통신원 톈진보도] 전 톈진시 철도 제3조사측량설계원(鐵道第三勘測設計院) 공경처(工經處)의 건설비용(造價) 엔지니어 저우샹양(周向陽)은, 2003년 5월 31일에 9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는데, 톈진 강베이(港北)감옥에서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져 2009년 7월 28일에 앞당겨서 출옥한 적이 있다. 2011년 3월 5일 오후, 탕산(唐山)의 셋집에서 저우샹양과 아내 리산산(李姍姍)은 다시 탕산시 원화루(文化路)파출소로 납치를 당했다. 저우샹양은 이미 톈진 강베이감옥에 보내졌고, 리산산은 탕산시 유치장에 불법 감금당해 있다.

전 톈진시 철도 제3조사측량설계원의 엔지니어이자 파룬궁수련생 저우샹양

저우샹양은 허베이성 친황다오시(秦皇島市) 창리현(昌黎縣) 출신으로 올해 38세다. 그는 중국 북방교통대학을 졸업하고 톈진대학에서 연수했으며 건축공업ㆍ관리학과 경제투자 전공 두 가지 학력을 갖고 있으며 최초로 전국 건설비용 엔지니어 자격을 얻었다.

저우샹양은 1999년부터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여러 차례나 중공 당국의 심각한 박해를 당해, 차례로 톈진 철도구치소, 톈진 칭보와(靑泊窪)노동교양소, 톈진 솽커우(雙口)노동교양소, 톈진 지현(薊縣) 위산(漁山)노동교양소, 톈진 허시(河西)구치소, 톈진시 리위안터우(梨園頭)감옥, 톈진 강베이감옥 등에서 불법 감금을 당했다. 그 기간 고문학대를 무수하게 당했다. 온밤 전기 충격을 당해 온몸에 상처투성이 되고 연속 30일 동안 밤을 새웠으며, 여러 차례 독방에 갇히고, 묶이고, 구타당하고, 야만적인 음식물주입 등등을 당해 그는 늘 부상을 입고 있었으며 여러 차례 생명이 위독해졌다. 2008년 6월 말, 그는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강베이감옥에서 1년 넘게 단식을 해서 몸무게는 40여 kg밖에 되지 않았다. 몸은 허약해져 걸을 수 없었고 대소변도 스스로 가리지 못해 목숨이 경각에 처했다. 줄곧 2009년 7월 28일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될 때까지 그러했다.

저우샹양이 박해를 당한 상황이 특히 심각한 점에서 보아, 파룬궁인권 업무팀은 2009년 7월 17일에 이 박해사례를 유엔 인권이사회에 올렸다. 2010년에 개최한 유엔 인권이사회 제13차 회의에서 유엔 전문 특별조사원인 만프레드 노왁(Manfred Nowak)이 직접 조사한 연례조사 중에 저우샹양 사건이 포함했다. 이 보고는 각국 정부에게 전해져 중공의 박해가 전 세계적으로 폭로됐으며 아울러 각국에 의해 인권 위반 사건으로 기록됐다. 국제관례에 따르면, 일단 유엔 전문 특별조사원이 모 박해사례를 회원국에 질의하기만 하면 이 회원국은 반드시 답장과 추적조사에 협조해야 한다.

저우샹양은 2009년 7월 28일에 출옥한 후, 친황다오시 창리현의 부모집으로 요양을 하러 돌아갔다. 8월 4일에 파룬따파 밍후이왕에서는 아침 6시 경에 ‘저우샹양 사례는 이미 유엔에 회부’란 제목으로 해외소식을 발표했다. 이 소식이 나온 그날 오전 약 10시쯤, 강베이감옥 두목, 파출소 및 창리파출소 일행 6명은 차를 몰고 신속하게 저우샹양의 집으로 다그쳐와 행방을 뒤쫓겠다고 경고했으며, 이어서 수단을 바꿔가면서 박해했다. 게다가 저우샹양과 그의 가족의 생활을 속박하고 제한했다.

2011년 3월 5일 오후, 탕산(唐山)의 셋집에서 저우샹양과 아내 리산산(李姍姍)은 탕산시 원화루(文化路)파출소의 납치를 당했으며 셋집에 봉인 용지를 붙혀놓았다. 현재 리산산은 탕산시 유치장에 불법 감금당해 있다. 납치에 참여한 경찰들 말에 따르면 저우샹양은 이미 톈진 강베이감옥에 보내졌다.

저우샹양의 아내 리산산(33)은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우아하고, 온화한 목소리에 조용한 탕산 여성이다. 1999년에 박해가 시작된 초기에 신앙을 확고히 한 것 때문에 대학학업을 박탈당했고, 탕산 구치소에 갇혀 박해를 당해 하마터면 정신분열증에 걸릴 뻔 했다. 2003년에 저우샹양과 사귄지 몇 번 만나지 않아, 저우샹양은 곧 납치돼 9년 불법 판결을 당했다. 당시 판결을 당한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은 집과 가족을 잃고 이산가족이 된 상황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은 경찰들을 포함해 리산산에게 저우샹양을 포기하고 자신의 청춘 시절을 지체하지 말라고 권했다. 이 선량한 소녀는 도리어 이 때문에 저우샹양을 단호하게 지켰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파룬궁수련생들은 박해를 당하지 말아야 하고 일체를 잃지 말아야 함을 알도록 하고 싶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고 또 저우샹양에게도 격려와 희망을 주려 했다.

그녀는 저우샹양을 구원하기 위해 톈진으로 가서 삯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엄동설한이든지 혹서든지를 막론하고 그는 감옥으로 가서 면회를 견지했다. 감옥에서는 저우샹양이 박해를 당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친척과 면회하는 권리를 박탈했다. 큰 눈이 내리는 날에 이 연약한 소녀는 감옥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멀리에서 보면 눈사람으로 변해 행인들도 감동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또 저우샹양을 구원하기 위해 납치돼 1년 반 노동교양을 당했다. 나올 때는 여위고 허약하고 초췌했는데, 20여 세의 소녀가 마치 40여 세인 사람으로 보여 하마터면 가족들이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오늘날, 막 결혼한 지 1년인 이 젊은 부부는 다시 납치를 당했다.

 
고문 시연: 전기봉 충격

문장발표: 2011년 03월 11일
문장분류: 시련의 길> 주보 205호
원문위치: http://zhoubao.minghui.org/mh/haizb/205/A06/83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