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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이성 수련생 구이쉰화, 경찰에게 살해당해 (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후베이보도)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현(黄梅縣) 파룬궁수련생 구이쉰화(桂訓華)는 2002년 3월 11일에 자신이 도급 받은 신허(新河)여관에서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공안국 루산(廬山)분국에 납치당했다. 납치 후 80여 일 동안 불법 감금을 당해 각종 학대를 받아 몸은 피골이 상접해졌다. 같은 해 6월 1일, 나이 어린 세 아이들을 남겨두고 박해로 사망했다.

구이쉰화(桂訓華)

구이쉰화(남, 1964년 생)는 후베이성 황메이현 샤오츠진 신허촌 사람으로 촌에서 회계를 맡았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 여러 해 동안 B형 간염을 앓고 있었는데 병세가 아주 심각했다. 각 종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었다. 1997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한 아내의 영향으로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수련을 시작하자 그의 몸은 신기하게도 재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이번에 현에서 신체 검사를 하러 사람이 왔다가 그를 검사 할 때, 매우 놀라면서 말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은 검사했는데 당신 신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구이쉰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대법의 초상적인 신기함을 보았다.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중국공산당(중공)이 천지를 뒤엎을 듯이 파룬따파에 대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함하고, 비방하고, 군대와 경찰 그리고 특무를 이용해 미친 듯한 탄압을 감행하였다. 사람들은 여러 차례 그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바로 한마디 말만 했다. “한 방울의 은혜를 받으면, 샘물만 한 것으로 갚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부님께서는 우리 두 부부의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오늘 사부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당하시는데 저는 은혜를 받은 자로써 양심에 따라 일어서서 한마디 공정한 말을 해야 합니다.”

구이쉰화는 헌법이 국민에게 부여한 청원 할 권리, 상소 할 권리, 신앙의 자유에 따라 3차례나 베이징으로 청원을 가 파룬따파를 위해 억울한 사정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도리어 직장에서의 해고 처분과 불법 체포였다. 그는 샤오진 파출소( 지금의 공안분국임)에 의해 3 차례 납치와 3 차례나 황메이현 제1구치소에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그의 아내도 샤오진 파출소에 의해 우한시(武漢市) 사양(沙洋)노동교양소에서 1년간 박해를 당했다. 이들 사악한 경찰과 관리들은 학대로도 구이쉰화가 파룬따파에 대한 확고한 바른 믿음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동시에 그의 몸은 점점 좋아지고 점점 젊어졌다.

2002년 3월 11일 장시성 주장시 루산구 공안분국에서는 후베이성 황메이현 샤오츠파출소의 리춘팡(李春芳-파출소장)과 왕윈위(王雲雨) 두 악경은 결탁해서 경찰차를 몰고 구이쉰화가 머물고 있는 신허여관으로 가서 그를 납치했다. 후베이성에서 납치할 때, 구이쉰화는 단호하게 악경을 박해를 저지하고 거부해 경찰차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명 악경들은 사람들이 두 눈을 뻔히 부릅뜨고 있는 백주대낮에, 악독하게 그를 구타했다. 그의 아내는 있는 힘을 다해 저지하다가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구이쉰화는 악경들에게 장시성 주장시 루산구 공안분국으로 납치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다. 구이쉰화는 당시 장시성 주장시 10리(十裏)구치소에 납치돼 함께 불법 감금당해 있던 샤오츠진 다이잉촌(戴營村)의 파룬궁수련생 다이셴민(戴先民)에게 말했다. 악경들은 그의 두 손을 두 개의 수갑으로 공중에 매달았는데,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한 쪽 손의 수갑이 풀렸다. 악경이 다시 몇 번을 채웠지만 계속해서 풀렸다. 마지막에 그는 한쪽 손으로 매달려 있었다. 당시 그의 몸무게가 90여kg인데다 또 발에 채워 진 족쇄 9kg를 보태고, 다시 두 명의 악경이 구이쉰화의 허리를 안아서 아래로 끌어당겼다. 구이쉰화는 한쪽 손으로는 수 백kg이나 되는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악경들은 담배꽁초로 그의 배꼽을 지지고 혹독하게 구타했다. 고문으로 박해를 당한 후, 다이센민과 그의 몸은 마치 산산 조각난 듯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했다.

그의 연로하신 부모와 아내 그리고 형제자매는 여러 차례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악경들은 만나지 못하게 했다. 5월 31일에 이르러서야, 구이쉰화의 가족은 갑자기 샤오츠진 파출소 악경의 통지를 받았다. 구이쉰화를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의 가족에게 내일은 무슨일이 있어도 꼭 장시성 주장시 루산공안분국으로 가서 구이쉰화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가족들은 5월 31일에 루산공안분국으로 가서 수속을 밟았다(사실 이들 악당들은 일찍이 수속을 밟아놓고 그의 가족이 하루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임). 그의 가족이 서명한 다음, 악경들은 말했다. “구이쉰화는 장시성 주장시 제1인민병원에 있다.”고 했다.

구이쉰화의 가족이 장시성 주장시 제1인민병원에 서둘러 갔을 때, 구이쉰화는 산소공급기에 의지한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사람을 알아 볼 수도 없었다. 가족이 애타게 불러도 그는 대답 하지 않았다. 그의 하반신에 꽂은 카테터에서는 끊임없이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내장 기관이 구타로 파손되었을 음을 짐작). 오후에 두 명의 악경(남녀 각 1명)이 병원으로 와서 가족에게 치료비를 결산하라고 요구했다가 그의 가족에게 거부당했다. 악당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원에 압력을 가했고, 아직 숨이 남아있는 구이쉰화를 장시성 주장시 제1인민병원에서 쫓아냈다.

장시성 주장시 제1인민병원의 선량한 간호사는 구이쉰화 가족에게 입원 당시 상황을 알려주었다. 5월 28일에 구이쉰화가 병원에 도착 했을 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악경들은 여전히 잔인하게 그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의사들은 죽음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직업의식으로 악경들에게 수갑과 족쇄를 풀라고 요구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악경들은 그때서야 족쇄를 풀어주었지만 수갑은 여전히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5월 29일에 이르러 의사가 다시 한 번 수갑을 풀어주도록 요구했고, 그 때야 수갑을 풀었다(의사는 사실 구이쉰화가 병원에 왔을 때 상황은 이미 살아 날 가망이 없었지만, 이 무리 악당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원에서 회의를 열어 약물을 투입해서 그의 가족이 서둘러 도착할 때까지 유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구이쉰화의 가족이 그를 집으로 데려 왔을 때는 이미 한 밤중이었고 그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가 사랑하던 아내와 나이 어린 세 아이들을 영원히 떠났고, 그가 깊이 사랑하던 연로하신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떠났으며, 그가 사랑하던 세상과 작별을 하고 억울함을 품고 떠나갔다!

구이쉰화의 장례식에도 장시성 주장시 루산구 공안분국과 샤오츠진 공안분국에서는 대량의 악경과 경찰차를 출동시켜, 후베이성 황강시(黄岡市) 황메이현 샤오츠진(小池鎭)에서부터 장시성 주장시 길을 따라 초소를 가득 설치하였고, 소식을 엄밀하게 봉쇄했다. 악경들은 악행이 폭로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종이로는 불을 싸지 못하듯이, 샤오츠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구이쉰화는 파룬따파를 수련해 좋은 사람으로 되려한 이유로 핍박에 못이겨 박해로 사망했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감정이 격분되어 분분히 말했다. “하늘이 어둡구나! 이런 정부를 누가 감히 다시 믿겠는가? 백주대낮에 뜻밖에 감히 이렇게 명목장담하게 사람을 살해하다니! 국민들이 이런 국가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어디에 편안한 날이 있겠는가?!” “파룬궁이 좋은것이 맞다. 무슨 근거로 연마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것은 장씨 정치 깡패집단이 저지른 또 한 건의 살인 행위이다. 80여 일만에 건장하던 젊은이가 이렇게 고문과 학대로 사망했다. 이것이 바로 중공사당이 줄곧 선양하고 있는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구이쉰화 박해에 참여한 악경 명단은 아래와 같다.

후베이성 황강시 황메이현 샤오츠진파출소 (지금의 공안분국임))

리춘팡(李春芳)(소장을 맡았음)

왕윈위(王雲雨)

장시성 주장시 루산구 공안분국

톈루훙(田汝宏)(1과) 핸드폰:13807926626

뤄쓰인(羅嗣銀) 핸드폰:13507026976

문장발표: 2011년 02월 1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14/湖北桂训华被江西警察虐杀经过(图)-2362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