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자무쓰시(佳木斯市) 파룬궁수련생 정리빈(鄭立彬)은 중공(중국공산당) 당국의 각종 고문을 당했다. 그는 양심이 없는 비열한 수단들로 고문을 당했다. 정리빈은 중공 당국이 파룬궁을 모함하기 위해 날조한 ‘시체를 버린 사건(抛尸案)’에 대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다. 당국은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악랄한 고문을 했고, 정리빈은 여러 차례 생명의 위험을 겪었다. 결국 2010년 6월 1일, 겨우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리빈의 생전 사진
정리빈은 자무쓰시 정다(正大)집단의 직원이다. 1994년에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眞ㆍ善ㆍ忍’의 법리에서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 그는 직장과 생활에서 ‘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명리(名利)를 쫒지 않고 남을 돕기를 좋아했다. 직장상사, 동료, 친척, 친구들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신임했다. 1999년 7월, 중공(중국 공산당)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전면적인 박해를 발동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은 불법 체포와 가택수색을 당했다. 대법 수련으로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그는 대법의 진귀함을 깊이 알고 있었다. 천지를 뒤덮을 듯한 파룬궁에 대한 모독에 직면해 그는 줄곧 확고하게 수련의 길을 걸었다.
11년 동안, 중공 사당의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박해 중에서 정리빈은 납치, 불법감금, 노동교양으로 여러 번 사당 소굴의 잔혹한 박해를 겪었다. 독극물을 주입당해 여러 차례 생명위험이 나타나 사경을 헤맸다. 자무쓰노동교양소, 베이징시 안전국구치소, 베이징시 제1구치소(7처), 베이징시 퇀허(團河)파견처, 베이징시 퇀허노동교양소, 베이징시 하이뎬구(海澱區)구치소, 베이징시 공안병원, 베이징시 309병원(부대병원) 등에서 참혹하기 그지없는 박해를 당했다. 여러 차례 고압 전기충격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당 텔레비전의 모함으로 검은 방에 17일 동안 갇히는 등 장기간 막심한 정신과 육체의 괴로움을 감당했다.
정리빈은 크나큰 곤란 속에서 금강 같은 의지와 자신의 생명으로 그가 신앙하는 ‘眞ㆍ善ㆍ忍’을 실현했다.
중앙 텔레비전에서 모함한 내막을 폭로
2001년 7월 17일, 중공사당은 ‘초점 거짓말 취재’에서 파룬궁을 모함하는 또 하나의 가짜 사건을 만들었다. 바로 중공사당에 의해 광범하게 조작된 ‘퉁저우(通州)에서 시체를 버린 사건’이다. 이것은 ‘천안문 분신자살 가짜 사건’을 뒤이은 중공 사당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로, 세상 사람들을 선동해 파룬궁을 적대시하게 하고, 피비린내 나는 탄압의 구실을 제공하려는 거짓말이었다. 사당은 ‘초점 거짓말 취재’ 프로에서 ‘시체를 버린 사건의 당사자’의 한 사람이 되라고 전기충격과 구타를 하고 거짓자백을 강요했지만, 정리빈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 후 중앙텔레비전에 나온 정리빈의 일부 장면은 그가 고문 박해를 폭로한 화면인데, 오히려 당국에 의해 세상 사람을 속이는데 사용되었다.
정리빈은 3년 동안 중공사당의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거의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얻은 정리빈은 중공사당이 세상 사람을 속인 거짓말을 밍후이왕에 폭로했다.(상세한 상황은 밍후이왕 2005년 7월 24일 문장 ‘3년을 감금당하고 사경에서 다행히 살아남아 하루아침 자유를 얻어 내막을 폭로’ 라는 문장을 보길 바란다.)
단체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2000년 6월 2일, 170여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자무쓰 쓰펑산(四豊山) 저수지에서 수련심득 교류회를 조직했다가 중앙경찰에게 겹겹의 포위를 당했다. 교류회가 끝난 뒤 정리빈 등 7~8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자무쓰구치소에 납치 당했다. 장리빈이 구치소에서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자, 구치소 부소장 리더촨(李德權) 등은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고 죽판으로 치아를 치켜들었다. 죽판이 깨물려 끊어지자, 끊어진 죽판을 그의 입안에서 이리 저리 비틀어 일시에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자 음식물 주입을 진행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경찰들은 그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워 ‘대(大)’자로 펴게 한 다음, 침대와 바닥에 20여 일 동안 채워놓았다. 게다가 독극물까지 주사했다. 20여 일이 지난 후, 정리빈은 강제로 자무쓰시 시거무(西格木)노동교양소에 보내져 1년의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자세한 상황은 밍후이왕 2005년 2월 27일, ‘자무쓰 파룬궁수련생 장리빈이 박해를 당한 일부 경험’이라는 문장을 보길 바란다.)
시범사진
2000년11월 3일, 정리빈 등 11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단체로 시거무노동교양소에서 정념으로 뛰쳐나왔다. 중공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뤄간(羅幹)은 이에 격분해 서둘러 헤이룽장에 가서 “이 사람들을 붙잡기만 하면 때려죽여라”는 명령과 함께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당시 도처에 적색 공포로 가득 찬 사악한 형세 하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이 단체로 노동교양소에서 뛰쳐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사악에게는 정말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정리빈이 정념으로 노동교양소에서 뛰쳐나온 후, 그의 가족들도 극심한 정신적 압력을 받았다. 자무쓰시 샹양(向陽)분국 국보대대장 추이룽리(崔榮利, 이미 악보를 받아 사망했음)는 명령을 받고 선양에 서둘러 가서 정리빈의 여동생을 위협해 정리빈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고, 여동생의 전화까지 도청했다. 자무쓰시공안국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산둥성(山東省) 둥아현(東阿縣)의 정리빈의 한 친척집을 교란하는 등의 박해도 했다.
고문으로 금강지(金剛志)를 움직일 수 없다
정리빈은 자무쓰노동교양소에서 정념으로 뛰쳐나온 후, 사악한 당인원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나 2001년 2월 22일, 불행하게도 베이징시 스징산(石景山) 융러(永樂) 주택단지에서 베이징시 국가보안안전국에 의해 다시 납치를 당했다. 당시 핍박에 못 이겨 유랑하던 저우건정(周根正) 등 파룬궁수련생이 함께 납치당했다.
안전국에 납치당한 후, 경찰은 연속 3박 3일 동안 정리빈을 심문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납치와 불법심문을 당한 정리빈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3일 후, 정리빈은 눈이 가려진 채 베이징 교외의 한 별장으로 끌려갔다. 6~7명의 국가보안 인원은 별장 2층에서 정리빈을 의자에 묶어 놓고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다. 당시 베이징시 노교국(勞教局) 신안(新安)노동교양소의 부소장을 맡았던 리징(李靜), 대장청추이에(程翠娥)와 자오쉐셴(焦學先) 등은 그를 전향시키고 다른 사람의 근황을 알아내기 위해 장시간의 전기충격 등 고문박해와 인격모독을 진행했다. 매 차례 여러 개의 전기곤봉의 전기가 없어질 때까지 전기충격을 가했다.
고문 시연사진
사악은 그의 의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시간을 분별하지 못할만큼 어두운 방안에 17일 동안 가뒀다. 이 일체의 박해에 대해서 정리빈은 단호하게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2001년 3월 9일에 정리빈을 자무쓰로 돌려보내 불법으로 자무쓰시 시거무노동교양소에 감금했다. 정리빈은 노동교양소에서 1개월 동안 독방에 갇혔다. 독방 안은 춥고 축축했는데 침대도 이불도 없었다. 정리빈의 몸은 심각한 손상을 받아 하반신이 헐어서 곪기 시작했다.(고문사진은 정리빈 본인이 시범한 것임. 상세한 것은 뒷면에 붙힌 ‘자무쓰 파룬궁수련생 정리빈이 박해를 당한 일부 경험’을 보길 바란다.)
장리빈과 동시에 납치당한 저우건정 등의 파룬궁수련생은 베이징시 안전국의 고강도 세뇌하에서, 어떤 사람이 청원하는 도중에 죽은 소식을 정리빈이 말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때문에 베이징시 안전국에서는 이른바 ‘시체를 버린 사건’을 꾸미는데 정리빈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2001년 4월 17일, 베이징시 안전국에서는 한창 자무쓰노동교양소의 박해를 당하고 있는 정리빈을 긴급히 베이징으로 돌려보내 베이징시안전국구치소에 불법 감금했다. 그곳에서 전기충격과 구타로 사악한 당의 선전기구와 타협해 거짓말 선전을 하도록 하기위해 그를 핍박했다.
2001년 5월 중순, 예심처에서 사람이 와서 녹화를 하려했으나 정리빈은 거부했다. 16~17일경에 구치소의 류(劉)가 성의 과장과 당직 간경은 아침밥을 먹은 후 정리빈을 담화실로 끌고와 땅에 내던지고 발로 밟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전기곤봉으로 고문하고 강제로 전향자료를 씌웠다. 정리빈은 ‘전향서’를 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심때까지 내내 학대를 당했다. 그 후 류과장은 종이, 펜, 자전을 찾아와 정리빈에게 점심 휴식시간에 자료를 다 쓰도록 요구했다. 오후 한시 이후, 류가성의 과장이 정리빈에게 말했다. “당신을 핍박해서 전향서를 쓰게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상부의 뜻이다. 내가 이렇게 젊어서 과장으로 되기까지 쉽지 않았기에 나는 성적을 내야 한다.” 정리빈이 여전히 쓰지 않자, 몇 명의 경찰은 또 한바탕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전기충격까지 가했다. 류가 성의 과장은 두 개의 전기곤봉을 교차로 정리빈의 겨드랑이에 꽂고 갑자기 전기를 넣었다. 정리빈은 심장이 세차게 뛰면서 즉시 구토할 것 같았는데 그 고통은 가히 상상하기 힘든 정도였다.
저우건정 등 다른 세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이른바 시체를 버린 당사자’로 간주되어, 사악한 당부문에서는 그들에게 강압세뇌, 전기충격 등의 고문으로 심문을 감행했다. 장시간의 학대는 그들의 의식을 흐리게 하고,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이미 극한의 고통을 당한 수련생들은 결국 ‘프로에 협조하면 풀어준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퉁저우에서 시체를 버린 사당의 거짓사건의 녹화에 이용되어 세상 사람을 속이는 공구 역할을 했다. 그후 저우건정은 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양심도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저우건정은 신속히 사당의 유인과 속임으로 위증을 한데 대해 항의했고, 모든 녹화 프로를 폐기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없었고, 곧 13년의 중형판결을 당해 국경에 가까운 지역에 수감되었다. 이어서 모든 ‘당사자’들은 분분히 중형 판결을 당해 외지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유독 정리빈만 중공 사악의 모함을 승인하지 않아 기소할 사유가 없었으므로 불법으로 베이징시 퇀허노동교양소로 보내져 2년의 노동교양을 선고 받았다.
퇀허노동교양소로 보내지기 전에 정리빈은 베이징시 제1구치소(7처)와 베이징시 퇀허파견처로 옮겨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정리빈은 봉쇄된 환경에서 극심한 정신적 압력을 감당했다.
2001년 11월 7일, 정리빈은 퇸허노동교양소에 불법 납치되어 세뇌 박해를 당했다. 베이징시 퇀허노동교양소는 사당이 파룬따파 수련생을 박해하는 가장 잔혹한 곳 중 하나이다. 극도로 암담한 감옥에서 2년 동안 감금되어 감시를 당한 동안 퇀허노동교양소 소장 리아이민(李愛民)과 7대대의 악경들은 그들이 마약복용 죄수들에게 마약을 판매한 사실을 정리빈이 외부에 폭로할까 두려워 구실을 찾아 그를 박해했다. 미친 듯이 구타했고, 그의 의지를 철저히 때려 부수려했다. 정리빈은 각종 방식으로 사악의 박해를 제지했다. 노역노동 참가와 퇀허노동교양소의 일체 규정과 배치를 거부했고, 체조를 할 때 단호하게 나가지 않았으며, 기회만 있으면 감방의 죄수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퇀허노동교양소에서는 전향하지 않은 파룬궁수련생이 만기되면 석방하지 않았고 기한을 연장했다. 정리빈의 2년 불법노동교양이 만기된 후, 그를 장시간동안 불법감금하고 공포적인 세뇌를 감행한 것을 감추기 위해 대장은 한창 정리빈의 자료를 모아 그의 기한을 연장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정리빈은 고소장 방식으로 노동교양소의 죄악을 널리 폭로했다. 새로 전근되어 온 부소장 리징(李靜, 전 신안여자노동교양소의 부소장)은 새로 부임한 관리로서 정리빈이 그를 고소할까 두려워 있는 방법을 다해서 관례를 깨고 급히 그를 자무쓰로 돌려보냈다.
2003년 4월 17일, 자무쓰에서 샹양파출소 소장 장훙광(張宏光)과 다른 한 명의 경찰은 정리빈을 자무쓰시로 데려가 자무쓰노동교양소로 속여 보냈다. 자무쓰노동교양소 관리과 과장 쉬헝지(許恒基)는 불법으로 접수해 연속해서 정리빈을 박해했다. 정리빈은 어두운 독방에서 ‘사인 침대(死人床)’위에 채워져 일어날 수 없었다. 두 손은 따로따로 침대의 양측에 3개월 넘게 채워져 척추가 변형될 정도였다. 정리빈은 단식으로 항의하고, 여러 차례 노동교양소 주재 검찰관에게 공소를 제출하여 노동교양소와 공안 기관을 제소하려고 했다. 검찰원의 감사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제소하라고 알려줬으며, 이것은 책임자의 결정이라고 말했다. 정리빈은 자무쓰 노동교양소에서 또 3개월 20일을 감금당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현지 파출소에서는 정리빈이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리빈의 가족에게 난처하게 굴어 서명으로 보증 받고서야 2003년 8월 7일에 정리빈을 석방했다.
매우 많은 마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다
2004년 11월, 정리빈은 일자리를 찾으러 베이징에 가서 하이뎬구(海澱區) 파룬궁수련생 리쉬펑(李旭鵬)의 거처에서 잠시 머물렀다. 11월 27일 새벽 1시가 넘어서 파룬궁수련생 정리빈, 리쉬펑, 마완리(馬萬裏)가 깊이 잠들었을 때 10여 명의 마롄와(馬蓮窪)파출소 경찰들이 불법으로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세 사람은 머리에 씌우개가 씌워진 채 경찰차로 강제로 납치당했고, 방안의 프린터, 시디, 진상 전단지 등을 수색 당했다. (자세한 상황은 2007년 3월 11일 밍후이왕 문장 ‘그들은 나의 장기를 적출하려고 모의하다가 성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를 보기 바란다.)
마롄와파출소와 하이뎬구구치소에서 파룬궁수련생 정리빈, 리쉬펑, 마완리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정도의 박해를 당했다. 리쉬펑은 전에 두 번이나 기절해 병원에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정리빈은 악경에게 구타를 당해 고막에 천공이 생겨 청력을 거의 상실했다. 불법 심문중에 정리빈은 일체 대답을 거부했고 단식으로 불법납치와 박해에 항의했다. 정리빈은 하이뎬구구치소에서 여러 차례 음식물을 주입당했다. 구치소 경찰, 죄수, 의사들까지도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에 참여했다. 음식물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정리빈이 극구 저항하고 강력하게 몸부림 쳤기 때문에 그의 구강, 비강, 귀에서 대량으로 출혈이 발생했고,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다. 이튿날 하이뎬구구치소 경찰은 정리빈을 베이징시 공안병원으로 보냈다. 공안병원의 악경은 족쇄와 수갑으로 정리빈을 침대위에 채워 놓고 매일 10여 병의 독극물을 주사했다. 대략 10여 일 동안 아침 9시부터 밤까지 링거를 주사했다. 10여일 이후, 약의 수량을 6~7병으로 줄였다. 공안 병원의사는 강제로 정리빈의 혈액을 뽑아 검사하고, 수술을 받도록 요구했다. 수술증명서에 서명하라고 했으나 정리빈은 동의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후 정리빈은 매체에서 사악한 당이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한 보도를 보았다. 그는 사당인원이 전에 그의 장기를 적출하려고 모의하다가 모종의 원인으로 포기한 것 같다고 느꼈다.) 공안병원에 있는 동안, 정리빈의 손발은 내내 침대 위에 채워져 있었다. 12월 27일, 하이뎬구 국보처에서는 정리빈을 다시 베이징 309병원(부대병원)으로 옮겼고, 309병원에서는 또 강제로 링거를 주사하려 했으나, 정리빈은 거부했다.
12월 31일, 하이뎬구 국보에서는 정리빈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일부 약물을 주사하고 부대 구급차로 기차역에 보내 기차에 태웠다. 현지공안은 그를 헤이룽장성 자무쓰시로 납치해갔다.
자무쓰시에 도착했을 때는 2005년 1월 1일이었다. 자무쓰국보대대 악경 천완유(陳萬友)는 정리빈의 생명이 위독한 것도 신경쓰지 않고 자무쓰시구치소로 납치해 불법 감금했고, 일이 생기면 그가 책임진다고 장담했다. 1월 2일, 생명이 위독해진 정리빈은 구치소의 수감을 거부당했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의 부분에 연루된 박해 세부사항, 구체적으로 박해를 실시한 책임자와 악인들의 악행 등을 기술한 문장을 밍후이왕에 이미 올렸기에 여기에서 다시 상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젊은이는 요절했으나 바른 기풍은 길이 남다
2005년 여름, 장리빈과 두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자무쓰시 교외 구역에서 진상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차오난(橋南)파출소에 의해 납치당했다. 경찰은 각기 다른 방안에서 그들을 불법 심문했다. 악경은 정리빈을 구타해 온 몸을 시퍼렇게 멍들게 했고, 얼굴에도 상처를 입혔다. 정리빈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강제로 불법 압수당했다. 정리빈은 그날 벗어났다.
정리빈은 장시간 육체와 정신적인 잔악무도한 고문을 당하고, 베이징시 공안병원에서 매일 10여 병의 독극물을 주사당한 후, 신체에 극심한 손상을 입었다. 가족의 말에 의하면,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내내 고통에 시달렸고, 집에 사람이 없을 때면 고통으로 이리저리 굴렀다고 한다. 특히 세상을 뜨기 반년 전에 그의 배는 매우 크게 부풀어 올랐고, 걷기도 어려워 많은 고통을 감당했다.
정리빈이 생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자못 감회가 깊다. 젊고 건강하며, 총명하고 낙관적인 생명이 세간에서 일체의 고난을 겪었으나, ‘眞ㆍ善ㆍ忍’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짧지만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농축한 일생이었다. 그가 신앙을 견지한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곤란과 박해를 받았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당한 일체는, 세상 사람들이 중공의 사악한 영체(邪靈)가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을 똑똑히 가리게 하고, 중생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생명도 아끼지 않고 더욱 많은 생명들이 깨닫기를 기대했으며, 더욱 많은 생명들이 구원 받을 수 있기를 바랬다.
문장발표: 2011년 02월 05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5/历尽种种酷刑-郑立彬含冤离世(图)-2358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