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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관리원, 구이저우 더우윈감옥에서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구이저우보도) 구이저우성(貴州省) 슈원현(修文縣) 중의원 약국 관리원이자 올해 39세인 파룬궁수련생 후다리(胡大禮·남)가 2011년 1월 19일에 더우윈(都匀)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하고 시신은 강제로 화장당했다.

그날 감옥에서는 후다리의 가족에게 사람을 데려가라는 통지를 내렸다. 집의 남동생과 여동생 세 사람이 갔으나 이미 사망한 후였다. 감옥에서는 가족이 책임을 추궁할까 두려워 급히 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겠으면 해부를 해도 된다고 말했다. 가족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시신은 감옥 측의 고집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은 2011년 1월 20일에 집으로 보냈다.

후다리는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의학원을 졸업한 후, 슈원현 중의원에서 약국 관리원을 맡았다. 1996년에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줄곧 파룬따파 ‘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 하나의 좋은 사람이 되었으며 자기의 직책을 다했다. 특히, 약국 관리원을 맡으면 병원 ‘부수입이 짭짤한 보직’이라 말할 수도 있는데, 병원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약을 집에 가져가서 가족에게 사용한 적이 있지만 그는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마저도 병원의 처방을 쓴 다음에 돈을 내고 약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약을 파는 사람이 질이 낮은 약을 여러 차례 그에게 팔려고 하면서 또 그에게 사례금을 주었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 많은 환자들도 그의 복무태도가 좋으며 인내심이 있고 예의가 있다고 칭찬했다.

후다리가 중공 당국에게 박해를 당한 후에도 병원의 의사와 원장 및 가족마저도 모두 후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병원의 의사는 집에서 말다툼을 하면 다들 가족에게 “후 씨를 따라 파룬궁이나 연마해라. 후 씨는 성격이 얼마나 좋냐.”고 알려주면서 모두 그를 좋은 본보기로 삼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1999년에 노동교양박해를 당하고 2002년 5월에야 석방됐다. 2003년 8월에 그는 또 10년의 불법판결을 선고받고 각종 잔인한 박해를 당해 몸에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며, 두 다리는 거의 마비되어 쌍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악경 랴오스룬(廖仕倫)은 악경 왕스쥔(王世軍)과 공로를 다투면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감구역과 감옥에 재차 후다리에 대해 학대와 궁젠(攻堅)박해를 진행토록 지시할 것을 청했다.

불법노동교양 당해 여동생이 연루되고, 약혼녀는 상심해 이별

1999년 7월 20일, 중공 장쩌민 정치깡패집단이 대규모로 파룬따파를 박해한 후, 후다리는 11월에 헌법규정에 따라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에 대한 견해를 표시했다. 그러나 도리어 현지 구치소로 납치당해 15일 불법구류를 당했다. 직장과 전체 위생계통마저도 그가 청원한 것 때문에 중공 현위원회와 현 정부에 의해 연말상여금을 한 달 취소당했다.

그 후, 현지에서 또 몇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파룬궁을 위해 평화적으로 청원하러 베이징에 갔는데, 중공의 악경은 후다리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해 그를 붙잡아 이 파룬궁수련생들이 가기 전에 어떤 외지의 수련생들과 연락을 했는지를 심문하며 고문한 적이 있다. 후다리는 이것에 대해 원래 모르고 있었는데, 1박 2일간 고문당해 수갑이 살 속 깊이 파고들어갔다. 후다리가 확고하게 굴복하지 않고 곧 며칠이면 설을 쇠야 했으므로, 슈원현 공안국의 악경은 후다리를 구이저우성 중바(中八)노동교양소로 납치해 3년의 불법노동교양을 당하게 했다.

후다리의 집은 슈원현의 농촌에 있어 집 형편이 어려웠기에 대학공부를 할 때 모두 부모가 돌을 캐고 품팔이를 해서 그를 공부시켰다. 그 후, 여동생이 대학공부를 할 때는 후 씨의 월급과 학자금 융자로 학업을 완수했다. 그리고 여동생이 직업을 갖자 가정형편이 좋아져 원래는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행복하게 만년을 보내시면서 품팔이를 못하시게끔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가 ‘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도리어 박해를 당하고 연루를 당해 여동생도 직업을 잃고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집 형편은 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3년의 불법노동교양을 당한 탓에 후다리의 약혼녀는 너무 상심해 노동교양소로 가서 그를 몇 번 만나고 1년 넘게 기다리다가 끝내는 각종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와 이별했다.

2002년 5월에 노동교양소에서 각종 학대를 당할 대로 당한 후다리는 이른바 ‘앞당겨’ 석방됐다. 중공 인원은 이것으로 그가 직장에 ‘3서(신앙을 포기한다는 반성문 등)’를 쓰면 즉시 출근 할 수 있다고 유혹했으나 후다리는 거부했다. 그는 직장에 “내가 ‘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됨은 절대 잘못이 없다.”고 알렸다. 그는 차마 냉정하게 직장과 전체 위생계통에 경제상의 손실과 다른 시끄러움을 줄 수 없어 고통을 참고 애착하는 직업을 버리고 사직 보고를 쓴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돌을 캐고 품팔이를 하며 농촌 도로를 수리했다.

박해로 불구가 되고 10년의 불법판결을 당하다

2002년 9월에 농촌에 할 일이 없었기에 후다리는 성 정부 소재지인 구이양(貴陽)으로 가서 일했다. 중공 사당의 16회 인민대표대회 전야에 불법악도들은 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몇 번이나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교란하고 잠복감시를 했다. 그를 붙잡지 못하면 곧 병원의 직원을 찾아와 구이양으로 가서 잠복감시를 했다.

오래지 않아 후다리는 불법체포를 당해 이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2003년 7월에 어떤 사람이 후 씨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전에 후 씨와 함께 감옥에 있었는데, 그는 박해로 불구가 되어 설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후, 가족은 즉시 가서 후다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면회를 거부당했다.

2003년 8월에 구이양시 우당구(烏當區)법원과 구이양시 ‘610(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설립한 불법조직으로 공안, 검찰, 법원 위에 군림)’은 이른바 ‘법률실시 파괴죄, 방송통신시설 파괴죄’란 죄명을 뒤집어씌워 후다리에게 10년의 불법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악도들이 내보인 물증은 전부 공안기관에서 발급한 물품을 압수한 명세서였고, 그들의 판결서 위에는 이른바 ‘범죄행위를 한 공구 명세서’라고 되어있었는데, 그들이 강요한 죄명을 증명할 만한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리고 스테이플러, 손전등, 이어폰, 가위, 테이프, 전기선, 텔레비전 등 생활용품, 서표와 대법서적마저도 악경은 ‘범죄행위를 한 공구’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다

후다리는 불법으로 비밀리에 재판을 당했지만 중공은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가족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아버지는 매우 비통해하고 어머니는 울고 싶어도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구이양 제1구치소에 가서 자신의 아들을 면회하려다 악경에게 무수히 거부를 당했다. 그가 설 수 없게 되었냐고 묻자 악경은 도리어 영양부족일 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무수하게 왔다 갔다 했다. 집은 본래 형편이 어려웠는데 자신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어머니 장광셴(張光仙)은 적지 않은 비용을 쓰고 눈물은 흐르다 못해 말라버렸다. 비용은 거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빌린 것인데, 아들을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빚까지 졌다.

중공의 사악한 무리들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위법임을 알고 그 후, 후의 어머니를 핍박해서 이른바 ‘판결서’를 내놓게 했다. 그러나 후의 어머니는 불법감금당한 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또 종래로 이른바 ‘판결서’를 받은 적도 없다.

불법감금당한 기간에 후다리의 어머니 장광셴은 여러 차례 불법감금한 곳으로 가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감옥 측은 난처하게 굴면서 거부했다. 후다리가 신앙을 포기하는 ‘3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후, 구치소에서는 후다리를 구이저우성 더우윈감옥으로 이송했다. 그 후에 후다리는 또 악경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 되어 구이양 공안병원에 의해 소위 ‘응급 처치’를 받기도 했다.

후다리의 어머니도 파룬궁을 수련한다.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여러 가지 질병을 앓다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는 전부 낫고 몸도 아주 건강했다. 아들이 박해를 당한 상황 하에서 그녀도 현지 중공 정부의 불법인원에게 공갈 협박을 당했다. 몇 사람이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겨 ‘3서’에 지장을 찍게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저지했다. 그 후, 거듭 박해를 당했고 결국 2004년 2월 22일에 자신의 아들이 전에 근무하던 구이저우성 슈원현 중의원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01월 2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톱기사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8/药房管理员被贵州都匀监狱迫害致死-2354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