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다롄(大連) 파룬궁수련생 총르쉬(叢日旭)는 2009년 1월 13일에 거리에서 진상자료를 붙이다가 다롄 간징쯔(甘井子)분국의 사복경찰에게 납치돼 3년의 불법판결을 당했다. 그의 모친 장슈전(張秀珍)은 지나치게 상심한데다 또 중공(중국 공산당) 경찰이 여러 차례 집으로 찾아와 공갈 협박과 교란을 일삼아 두 눈이 거의 실명에 가까워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아들 한 번 보지 못한 채 2010년 1월 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의 부고를 접한 총르쉬의 할아버지도 마비될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자리에 몸져누웠다.
가족은 총르쉬가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노인을 만날 수 있게 석방을 요구했으나 감옥경찰이 거절했다. 현재까지 총르쉬는 이미 2년의 불법감금을 당했으며, 지금 다롄 난관링(南關嶺)감옥 제4감구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다.
모친 장슈전, 강제로 세뇌박해 당하다
총르쉬의 모친 장슈전은 몸이 엉망이었으나 1997년 파룬궁을 수련한 후부터는 얼굴 혈색이 좋아지고 마음씨가 착하게 변했다. 여러 가지 질병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또 과거의 많은 나쁜 습관과 나쁜 결점을 고쳐 더욱 상화하고 더욱 선량하게 변해 주변의 이웃들도 파룬궁의 신기함을 목격했다.
그러나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한 후,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1년에 판진(盤錦)의 현지 파출소 경찰이 구치소와 세뇌반에 붙잡아 넣고 박해를 감행했다. 불법감금을 당한 3개월 사이에 중공의 사악한 사상 전향과 강렬한 정신적 자극에 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놀랐다. 그로부터 원래 파룬궁을 수련해서 심신이 건강하던 그녀의 몸이 다시 갈수록 나빠져 병상태가 나타났다.
2009년 1월에 아들이 경찰에 불법체포를 당했다는 소식을 알고 그녀는 갑자기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몸져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으며, 입원해 응급처치를 거친 후에 의식을 회복했다. 2009년 ‘10.1’기간에 ‘안정’을 유지하고 민중이 청원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중공 사악한 당의 현지 악경은 또 여러 차례 집에 찾아와 공갈 협박하고 교란했다. 이 탄압으로 장슈전은 너무 비통함을 느껴 피골이 상접해져 두 눈이 거의 실명되었다.
올해, 자리에 몸져누웠던 그녀는 이 심각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11년 1월 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였다.
출중했던 청년이 오늘날에 감옥에 갇히다
총르쉬는 1997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으며, ‘眞ㆍ善ㆍ忍’의 원칙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2005년 7월에 랴오닝 공정기술대학 방송연출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학생 간부를 맡았으며 여러 차례 학교에 의해 ‘3호 학생’으로 평가받아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다(3호란, 사상적 인품이 좋고, 학습이 좋으며, 몸이 좋음을 뜻함). 동시에 그는 문학적 수양이 매우 좋아 많은 시사(詩詞)가 문예 간행물에 발표됐다. 졸업한 후, 그는 서부(西部)건설을 지원하는 지원자 활동에 1년 동안 참가해 칭하이성(靑海省) 먼위안현(門源縣)의 과학기술 문화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근무에 충실히 임하고 임품도 좋아 국가에서 발급한 ‘출중한 지원자’증서를 얻었다. 서부에서 돌아온 후, 총르쉬는 다롄 원더우(文都) 연구원(考研) 양성 학교에서 교장의 비서를 맡았다.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한 좋은 아들이었고, 직장에서는 사람을 대함에 늘 싱글벙글하면서 성질을 내지 않고 일에 부딪치면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해 선생님, 동료, 친구를 막론하고 모두 이 젊은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상에서 사람마다 칭찬하던 이렇게 좋은 청년이 오늘날 도리어 감옥에 갇혀 대다수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운명에 처했다. 2009년 1월 13일에 총르쉬와 아내 톈루(田璐)는 다롄 샹저우루(香周路) 부근에서 파룬궁 진상자료를 붙이다가 다롄시 간징쯔(甘井子)분국 형사 수사대대의 사복 중대 몇몇 악경(사악한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체포당한 기간, 악경은 그를 마구 두들겨 팼으며, 아울러 검은색 머리씌우개로 그의 머리를 씌워 차안에 밀어 넣고는 다롄 간징쯔분국으로 납치했다. 간징쯔분국에서 몇몇 악경이 둘러막고 그를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하고 또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했다. 악경들은 그의 머리를 잡아당겨 벽에 부딪히고 다시 그를 차서 넘어뜨린 다음, 발로 그의 몸 위, 머리, 가슴, 허리를 여러 번이나 찼다. 야만적인 구타를 당한 총르쉬의 코와 입에서 출혈이 발생했고, 오른쪽 관자놀이와 오른쪽 머리 뒷면도 부었다. 그리고 폐에 지속적으로 동통이 생겨 호흡이 곤란했으며 또 내상을 입었다.
2009년 6월 16일, 다롄 간징쯔법원에서 불법재판을 열었는데, 정의로운 변호사 두 명의 무죄변호 하에 그날 휴정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곧 다롄 간징쯔법원에서 총르쉬에게 3년 판결을 내렸다. 불법감금을 당한 기간에 다롄 난관링감옥 감옥경찰은 또 여러 차례 가족과의 면회를 저지하며 면회권리를 박탈했다. 감옥의 환경은 매우 악랄했다. 총르쉬는 늘 밥을 배불리 먹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해 안색이 누렇고 몸이 수척해져 저혈압 증상이 나타났다. 현재 감옥에서는 여전히 늘 각종 구실로 가족이 와서 면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변호사가 구타당해 다리가 부러지고 무고하게 7년 판결까지 당하다
중공 당국은 이 젊고 유망한 청년에게만 박해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죄악한 마수를 또 총르쉬를 위해 무죄변호를 한 정의로운 다롄 변호사 왕융항(王永航)에게도 뻗쳤다.
인권변호사 왕융항
왕융항은 랴오닝(遼寧) 간쥔(乾均) 법률사무소 변호사로서, 2007년에 여러 차례 파룬궁 수련생을 위해 법률적 도움을 제공했다. 그는 따지위안(大紀元)신문에 ‘중국 최고급사법기관에 보내다’라는 제목의 편지 등 7편의 문장을 차례로 발표했다. ‘과거의 커다란 착오로 인한 우환을 오늘 빨리 없애야 한다’라는 공개서한에서는 ‘사교(邪教)조직을 이용해 국가 법률과 행정법규를 파괴한 죄’로 중공 당국이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압력을 가한 치명적인 착오에 대해서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을 겨냥해 공개편지의 방식으로 호소를 진행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중에서 그는 형법 ‘300조’로 파룬궁수련생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운 위법행위, 또 법률적 각도로 본 범죄 구성 4가지 요소에서 이 죄명은 법률 원칙에 어긋남을 지적했다. 게다가 최고급 사법기관에서 문제의 엄중성을 똑똑히 가려 불법감금을 당한 파룬궁수련생을 즉시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그 후, 그가 근무하고 있던 변호사 사무소는 압력에 못 이겨 그와의 계약관계를 해지했다. 그의 변호사증도 역시 중공 사법 당국이 지금까지 압수하고 있다.
2009년 6월 16일, 왕융항 변호사는 파룬궁수련생 총르쉬(叢日旭)를 무죄변호 해서 재차 중공의 핍박을 받았다. 2009년 7월 4일, 중공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두목 저우융캉(周永康)은 ‘국외 인터넷에 문장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20여 명의 경찰에게 왕융항을 체포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체포당한 기간에 왕융항은 구타를 당해 다리뼈가 부러졌지만 치료를 제때에 받지 못해서 뼈가 어긋났다. 피부는 부분적으로 손상되었고 상처 부위는 심각하게 감염되어 부상이 악화되었다. 상처 부위는 악화된 후 걸을 때에 절뚝거렸다. 다롄 구치소에 있던 기간에 왕융항은 파룬궁수련생을 구타하는 것을 제지했다는 이유로 감옥 의사와 수감자들에게 고통스럽고 야만적인 음식물주입을 당했다. 호스를 한 번 꽂아 호흡기관에 출혈이 생겨도 수차례 꽂아 넣어 거의 질식하게 했다. 그런 다음 수갑으로 그를 바닥에 48시간 동안 채워놓았다.
2009년 11월 27일에 왕융항은 제1심에서 다롄 중급인민법원에 의해 7년의 불법판결을 당했고, 2010년 2월 4일 제2심에서 원심이 유지되었으며, 2010년 4월 22일에 비밀리에 랴오닝성 제1감옥 18감구에 납치당했다. 2010년 10월 11일 저녁, 선양(瀋陽) 제1감옥 18감구에 불법감금당하고 있던 다롄(大連)의 정의로운 변호사 왕융항(王永航)은 몇 명의 수감자들에게 야만적인 구타를 당했다. 이 수감자들은 감옥 경찰 리스광(李士廣), 펑리(彭力), 류창(劉敞) 등의 지시 하에 박해를 자행했다. 2010년 10월 12일 오전에 왕융항은 구타를 당한 뒤 독방에 갇혔다. 지속된 박해와 혹형의 시달림으로 왕융항은 온몸에 상처투성이였다.
단지 정의를 위해 해명했다는 이유로 양심 변호사 왕융항은 심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는 가오즈성(高智晟)에 잇는 파룬궁을 위해 감히 말을 하는 또 한 명의 정의로운 변호사로서 역시 가장 중한 판결을 받은 변호사이다. 2009년 12월에 ‘파룬궁 인권’에서 연합국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왕융항이 불법감금, 판결을 당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정이 나와 있다. 동시에 또 박해에 참여한 모든 중공 법집행자의 이름과 직장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 연합국 인권위원회에서는 이미 이 사건에 개입하여 독립적인 조사를 하고 있다.
왕융항 변호사가 납치당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푸단(復旦)대학의 의학박사이자 왕융항의 아내인 위샤오옌(于曉艶)도 납치당했다. 2010년 7월 4일에 왕융항의 아내는 가도의 서기인 스 씨를 찾아 자신의 남편을 박해한 데 관련된 일을 이야기했다가 가도인원에게 미행당했다. 이튿날, 위샤오옌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했다. 그러나 저녁 퇴근시간이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 오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 밤중까지 들볶아서야 노인은 그제야 며느리가 푸순(撫順)세뇌반으로 납치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식에 따르면, 왕융항의 집에는 노인과 며느리만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며느리가 붙잡혀가 노인 한 사람만 남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위샤오옌은 강제로 푸순세뇌반에 1개월 동안 갇혔다가 7월 30일에야 석방되었다.
고향을 떠난 아내, 박해 중지 호소
총르쉬와 아내 톈루(田璐)는 원래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파룬궁이 박해를 당한 진상을 민중에게 알리려고 그들은 진상자료를 붙이다가 경찰에게 불법체포를 당하고 집도 수색 당했다. 다롄 구치소에 감금당한 기간에 경찰은 그녀를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감옥의 악경과 수감자가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죄수복을 입히자 그녀는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도리어 뺨을 맞았다. 한 달 동안의 감금을 당한 후에 몸무게가 10kg 이상 줄어들었다.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와 여전히 구역경찰에게 전화교란을 당했으며, 가족들도 온종일 그녀를 위해 안절부절 하지 못하면서 눈물로 지냈다. 중공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부모는 공포감과 불안 속에서 핍박에 못 이겨 20여 년을 살던 집을 떠났다. 현지 경찰은 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집에 여러 번 찾아가 공갈 협박, 교란을 했다. 석방된 후, 톈루가 남편을 위해 베이징의 변호사를 선임한 것도 국가 보안특무의 미행을 당했다. 국가보안 인원은 심지어 또 그녀가 연구생 공부를 하는 학교에 가서 상황을 조사했다. 맨 마지막에 그녀는 부득이 혼자 유감을 품고 미국으로 와서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 총르쉬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 이 산산조각 난 가정은 더욱 황량해 보였다. 노부친 만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소식을 알게 된 후, 인성이 전혀 없는 다롄 난관링감옥 제4감구의 ‘집법(執法)’인원은 또 총르쉬가 돌아와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쌍한 모친은 마지막까지 아들을 한 번도 볼 수 없어서 세상을 떠나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중공의 사악한 박해는 이렇게 행복한 가정들로 하여금 하루저녁 사이에 커다란 변화를 발생하게 했고, 하나하나의 고통의 비극을 만들어 인간사회에서 연출하고 있다.
총르쉬의 아내 톈루
미국에 온 톈루는 박해를 멈추게 하고 남편과 변호사를 구원하기 위해 줄곧 끊임없이 국제사회에 호소하면서 미국정부와 민중이 도움을 주기를 바랐다. 톈루는 여러 차례의 집회에서 무조건 그녀의 남편과 왕융항을 석방할 것을 중공에 요구했다. 게다가 국제사회의 선량한 민중과 인권단체에서 중국에서 감금박해를 당하고 있는 수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을 도와 구원할 수 있도록 호소했다. 그녀는 전화 한 통, 축하 카드 한 장, 문자메시지 하나라도 중공에게는 매우 큰 압력을 줄 수 있으며, 또 박해를 당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음을 믿고 있다. 그녀는 이번 비인도적 박해를 질책하고 또 박해는 마땅히 즉시 멈춰야 함을 표시했다. 2010년 8월, 한 차례의 회의 중에서 서명을 받은 200여 개의 서명을 미국 국회의원 아담쉬프(Adam B.Schiff)에게 직접 건네줬으며, 아울러 그 자리에서 그에게 미국정부를 통해 그녀의 남편과 변호사를 구원해주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현지의 일부 주류의 중문 매체는 이 일에 대해 관련보도를 진행했다. 이어서 미국 국무원의 회답편지에서 이미 중국 선양 영사관과 연락해 이 일을 조사하도록 독촉했다고 했다.
사실, 중국 대륙에서 무수한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그들과 같은 조우를 가지고 있다. 이곳의 비극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파룬궁수련생들은 근 12년 동안 끝없는 고난을 감당하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적으로 모두 같지 않은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중공이 파룬궁수련생과 인권변호사를 박해한 사악함은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설 정도로 분노하게 만든다. 수많은 행복한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고 가족도 감독, 미행, 공갈 협박과 위협을 당했다. 파룬궁이 중공의 박해를 당한 지 오늘날까지 근 12년이다. 우리는 누가 하나 하나의 가정의 비극을 만들고 있는지를 마땅히 의식해야 한다. 비극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빨리 중공의 당, 단, 대에서 탈퇴하게 하고, 진상을 알려 사악을 멀리하게끔 하자.
총르쉬를 박해한 관련 책임자 및 전화번호:
(1) 다롄 간징쯔분국 형사 수사대대 사복경찰중대 사무실 전화번호:0411-86600395 (총르쉬 체포박해에 직접 참여한 자오강(趙剛), 진중(金中), 먀오젠(苗健), 자오자장(趙嘉奬), 쩌우(鄒) 모, 자오옌(趙巖), 류원보(劉文波) 등 흉수를 찾을 수 있음)
(2) 다롄시 간징쯔구 부구장이자 다롄 공안국 간징쯔분국 국장:인안촨(남·尹安全, 이 사람은 다롄 간징쯔분국의 기소 의견서와 총르쉬의 체포증에 사인해 박해에 동의했음. 인안촨은 1964년 2월에 랴오닝 다롄에서 출생했으며, 지금 간징쯔구 인민정부 부국장을 맡고 있다. 이미 전에 다롄시 공안국 시강(西崗)분국 부국장, 다롄시 공안국 간징쯔분국 부국장, 조사 연구원, 다롄시 공안국 인사처 처장,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으며, 2008년 6월부터 다롄시 간징쯔구 정부 부구장을 맡았음.)
사무실전화:0411-86601306,0411-86601386
(3) 다롄 간징쯔분국 부국장:총구이장(叢貴江, 1956년 9월 21일 출생, 이미 전에 중산(中山)분국 형사 수사대대 부대장, 간징쯔분국 형사 수사대대 정치위원, 대대장을 맡았으며, 2008년 6월에 간징쯔분국 부국장을 맡은 적이 있다. 이 사람은 총르쉬를 박해한 ‘중대 형사사건 해결 보고표’에 ‘입안해 조사를 동의’한다고 서명하는 데 참여하고, 현재 형사수사를 주관) 사무실전화:0411-86600617
(4) 다롄 간징쯔검찰원 공소2과 과장:장신자오(張鑫釗, 이 사람은 총르쉬에 대한 기소를 책임졌음) 사무실전화:0411-86574192
(5) 다롄 난관링감옥 4감구 사무실전화:0411-86908661 (이것은 현재 총르쉬를 감금하고 있는 4감구이다. 이곳의 사무실 전화는 연결이 가능함.)
왕융항변호사를 박해한 관련 책임자 및 전화번호:
랴오닝성 선양 제1감옥:024-89296257,024-89296258
감옥장:머우자리(牟家立) 13390111106024-89296100
부감옥장:천광(陳光) 13390117358
옥정처 처장:스잉(史英) 13390117599
감옥경찰 감옥장:정쥔(鄭君) 13390117799024-89296103
정치위원:진신(金鑫) 13390118877 024-89296101
규율 검사 서기:리강(李剛) 13624040783 024-89296116
사무실 주임:천즈(陳志) 13390117709 024-89296109
감옥병원 원장:류리쥔(劉利軍) 13309117656 024-89296203
감옥병원 부원장:허페이장(何佩江) 13309117655 024-89296205
카드 진상편지를 우편으로 보낼 주소:
총르쉬의 수신주소:中国辽宁省大连邮政(公)203信箱4分箱 丛日旭收(116037)
왕융항의 수신주소:中国辽宁省沈阳第一监狱第十八监区 王永航收(110145)
문장발표: 2011년 01월 23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3/丛日旭遭冤狱-母含冤离世(图)-2352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