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전 판즈화(攀枝花) 건설국 설계관리원 펑중량(馮忠良·남·1963년 3월 출생)은 쓰촨 난부현(南部縣) 사람으로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몸이 건강하고 근무에 적극적이며 뇌물을 받지 않은 우수 공무원이다. 이미 전에 세 차례 건설위원회에서 발급한 선진 공작 적극분자의 영예를 획득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연속 4년 동안 중공(중국 공산당) 사악한 당의 박해를 당했다. 2009년 4월 28일에 감옥에서 나을 때 그는 이미 걷지도 못하고 신체 각 장기가 심각하게 쇠약해져 호흡이 곤란하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 인사국에서는 그가 판결 당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향인 난부현의 농촌으로 돌아가 80여 세인 부친과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병이 심각했던 2009년 8월에 병원은 폐기종, 폐결핵, 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시 인사국에서는 이 기회를 틈타서 그를 핍박해 ‘반성문(悔過書)’을 쓰게 했다. 그제야 매달 그에게 225위안의 최저 보장 생활비를 주었다. 2010년 11월에 병세가 가중되고 또 보살펴주는 가족이 없었기에 친구는 펑중량을 주민위원회로 보냈으나 업무가 끝났다며 사무실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주민위원회의 사람이 펑중량을 쫓아냈다. 펑중량은 갈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흘 밤을 추위에 떨고 굶주리면서 밖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일반인이 위생국에 전화를 걸었고, 위생국에서는 또 주민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주민위원회의 사람은 그제야 그를 판즈화시 제4인민병원으로 보냈다.
중공(중국 공산당) 사악한 당 인원은 자신들이 어떻다는 것을 선양하기 위해 사람을 병원으로 파견해 녹화를 했다. 녹화를 할 때 간호사더러 펑중량의 손톱을 깎고 얼굴을 씻어주게 했으며, 아울러 이것으로 세상 사람을 미혹시켰다. 원래 몸이 건강하고 근무에서 적극적이던 사람이 그들의 박해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책임과 법률 제재를 감당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그들의 죄행을 보기 좋게 꾸몄다.
다음은 펑중량이 직접 고소한 것으로서 이미 전에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공동으로 경험한 것을 소개한 상황이다.
2006년 여름에 스(石) 씨 성을 가진 시 임업국 직원이 사람을 찾아 일을 보러 건설국에 왔는데 펑중량이 그를 접대했다. 그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 구원을 받게 하려고 펑중량은 진상자료 한 부를 그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도리어 자료를 직장에 바쳤고 임업국 책임자가 또 시 정부에 넘겼다. 이 진상자료는 시 정부에서 또 시 공안국으로 옮겨졌고 다시 연변의 현(縣) 공안국으로 옮겨졌다.
연변공안국 국장은 10여 명을 거느리고 펑중량을 시 공안국 사무동 2층으로 납치해 2박 2일간 박해를 가했다. 악인은 온갖 수법을 다 써가며 그를 괴롭혔는데, 그로 하여금 심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했다. 그 기간에 수갑을 거꾸로 채워 사무용 책상에 채워놓아 반 쯤 쭈그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 있지 못해 앉으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7~8명의 청년과 장년 남자들이 번갈아 가며 구타했다. 낮에는 그를 핍박해 마보(馬步)자세를 취하고 쭈그리고 앉게 하거나 혹은 이마를 벽에 대고 몸은 사선으로 해서 지면과 45도로 된 자세로 서있게 했는데, 몸이 떨리고 체력이 견디지 못해서야 맨 마지막에 앉게 했다.
연속 이틀 동안의 고문박해를 당한 후, 판즈화 완야오수(彎腰樹)구치소로 납치돼 5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불법감금 중에 펑중량은 핍박에 못 이겨 마음을 어기고 수련을 포기한다는 이른바 보증서를 쓰고 3년 형 집행유예 3년을 판결 당했다. 그제야 풀려나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집으로 돌아간 후, 거주지 빙차오강(炳草崗) 파출소에서 계속 펑중량을 박해했다. 매일 강제로 그에게 도착 보고를 하게 하고 이른바 ‘범죄분자표’에 기입하게 했으며 기입하지 않으면 수감하겠다며 위협했다.
같은 해 가을, 펑중량의 아내는 날이면 날마다 지속되는 정신과 경제적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그와 이혼을 하고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가게 했다. 집과 재산도 그녀들에게 판결해 주었다. 펑중량은 어쩔 수 없이 과쯔핑(瓜子坪)에서 세든 집에서 살아야만 했다.
9월 하순, 빙차오강 파출소와 과쯔핑 파출소에서는 또 세든 집으로 와서 교란하고 강제로 수색해 대법자료를 강탈해갔다. 그리고 펑중량에게 수갑을 채워 파출소로 압송해 쓰촨(四川) 러산(樂山) 우마핑(五馬坪)감옥으로 보냈으며 2년 7개월 동안 불법감금 했다.
우마핑감옥에 불법감금 당했을 당시는 때마침 겨울이라 얼음과 눈이 온 대지를 뒤덮었다. 펑중량은 강제로 매일 15~17시간을 실외에서 군대자세로 서 있는 박해를 당했다. 밤 9시에 수감된 후, 또 땅에 앉은 채로 감옥 규정을 외우고 11시가 넘어서야 침대에 누워 잠을 자게 했다. 이 외에, 감옥 경찰은 또 사악한 당의 노래를 부르도록 요구했는데, 부르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하게 하는 박해를 가했다. 수감자 팀장 장웨이핑(張偉平), 뤼슝차오(吕雄超), 후다젠(胡大健)은 또 늘 세워두는 고문을 가했다. 이 일 이후로 펑중량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두 달 동안 박해를 당한 후, 펑중량은 2감구역으로 분리되었다. 이때는 이미 고열이 한 달간 지속돼 끊임없이 기침을 하고 걸을 힘조차도 없었다. 감옥 측에서는 그가 정말 노동을 못하고 더 지탱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를 감옥 병원에 보냈다. 검사 결과 폐결핵이라며 그를 병원 1감구역으로 보냈는데, 일반 수감자 황밍(黄明)이 연속 10여 일 동안 구타를 하고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다른 한 수감자는 황융(黄勇)이라고 하는데, 그는 전염된다면서 고의로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그가 침대 위에서 연공하면 그들은 담배꽁초로 그의 발을 지졌다. 어떤 수감자는 法輪大法(파룬따파) 사부님을 욕하고 대법을 욕했으며, 겨울에 냉수를 그의 머리에 끼얹어 베개를 전부 적셔놓았다. 또 한 편으로 흉악하게 웃으면서 한 편으로 욕했다. 그는 그 수감자들에게 응보를 당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지만 그 수감자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그 후 이 수감자의 폐결핵이 더욱 심해졌다. 펑중량은 이어서 선한 마음으로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이 수감자는 응보를 받았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다. 수감자 황밍도 자신의 병세가 가중된 것은 응보를 받았음을 깨닫고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으며, 파룬궁수련생이 연공을 할 때 다시는 교란하지 않았다.
펑중량은 박해로 섬유 공동형 폐결핵(纖維空洞型肺結核) 증상이 나타나 생명이 위독했다. 감옥에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을 옮기는 것을 회피했다. 하지만 최후에 다른 파룬궁수련생들이 강력하게 질책하고 항의하자 병원을 옮겼다. 펑중량은 청두(成都) 병범(病犯)병원에 보내졌다가 9개월 후에 또 감옥병원 1감구역에 압송돼 돌아왔다. 2009년 4월 28일에 만기돼서야 풀어줬다. 나올 때 그는 이미 걸을 수도 없고 호흡도 곤란했다.
현재 펑중량은 판즈화시 제4인민법원에 있는데 보살펴주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그를 만날 수 없다. 만약 병원으로 문병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간호장 및 주민위원회와 610이 즉시 나서서 간섭했으며(간호사와 간호장이 주민위원회와 610에 전화를 걸었음), 아울러 문병을 간 사람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고 또 등기하게 했다. 이 기간에 사회구역 주민위원회와 그의 작은아버지가 병원에 갔다. 사회구역에서는 그에게 집을 찾아 주고 최저 보장 생활비를 줄 수는 있으나 이른바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쓰지 않았다. 그의 작은아버지와 주민위원회의 사람은 그를 욕했다. 그리고는 집도 최저 보장 생활비도 주지 않았다.
문장발표: 2011년 01월 0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4/优秀公务员冯忠良被迫害至身体衰竭-23449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