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보도) 허베이성(河北省) 줘저우시(涿州市)의 한 정직한 농민이 현지의 불법(不法) 관원에 의해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10년의 중형 판결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는 참혹한 고문으로 오른쪽 다리 절단수술을 받았다. 8년 후, 감옥에서 집에 돌아온 지 16일 째 되는 날 저녁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매장하는 날 저녁에 북풍이 세게 불었고 50년 만의 큰 눈이 온 천지를 삼킬 듯이 내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년이 지난 후에도 불법 관원과 사람을 구타한 흉수들은 어떠한 법률적인 추궁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에 연루된 주요 인원이 높은 지위에 올랐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하늘의 경고에 대해서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박해로 사망한 사람은 파룬궁수련생이다. 그는 왕강(王剛-41세)이라 불리며 이허좡향(義合莊鄕) 시웨이퉈촌(西韋佗村) 사람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왕강은 의리가 있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왕강은 어느 날 집에 사온 화학비료가 한 자루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서 그 돈을 돌려주었다. 돼지를 팔러 가는 길에 한 사람이 차가 뒤집혀 라디에이터에 의해 화상을 입은 것을 보고는 그를 위안하고 백 위안을 주었다. 그 후 이 사람이 집에 찾아와 감사를 표시하고서야 아내는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외지에서 온 두 아이가 길을 잃어 본지까지 유랑해 갔는데 그는 급히 알아보고 사람을 돌려 보내주었다. 그 해 한 사람이 병들어 큰 길 위에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녀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두말없이 사람을 업고 곧장 병원으로 달렸다.
왕강은 평소에 ‘眞ㆍ善ㆍ忍’ 에 따라 행동하고 장사를 해도 부당한 재물을 한 푼도 받지 않아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고객 사이에서 신의를 지킨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파룬궁은 사람을 각 방면에서 좋은 사람으로 되게끔 가르치는데 중공(중국 공산당)은 오히려 ‘사교(邪教)’라는 큰 죄명을 씌웠다. 10년 전에 32세이던 왕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에 가서 연공을 시작한 후에 심신에 이로움을 본 진실한 상황을 말했다가 향 간부에 의해 꼬박 3일 동안 밖에 매달려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왕강은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매체가 ‘살인, 톈안먼 분신자살 가짜 사건, 재물 수탈’ 등의 유언비어를 날조한 진상을 폭로했다. 현지 관원들은 법원과 공모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입을 막았다.
바오딩감옥에서 감옥장 가오잉(高英)은 왕강에 대한 박해를 감독했다. 2005년 5월 19일, 그를 ‘감옥 속의 감옥’에 가두어 손과 발을 묶어서 변형된 나무 침대위에 고정시켰다. 27일, 감옥경찰 판젠리(範建立)는 사납게 그의 오른쪽 다리를 수차례 발길질해 일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이튿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오른쪽 다리 혈관, 근육, 뼈가 괴사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가오잉 등은 왕강의 아내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30일에 그의 오른쪽 다리를 절단수술을 해서 겨우 10센티미터만 남겼다. 그 후 바오딩 감옥에서는 2년 넘게 소식을 봉쇄했다. 이 기간 가족들은 소문을 듣고 여러 차례 만나보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감옥 측에서는 전혀 절단 수술을 한 일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사람을 몰래 탕산으로 옮겼다. 지둥(冀東) 감옥에서는 왕강의 신앙을 포기시키기 위해 그의 지팡이를 3개월 동안 빼앗았다.
오랜 기간의 학대는 왕강의 심신을 손상시켰다. 감옥 측에서는 병보석으로 밖에서 치료를 받게 하려 했지만 이허좡향 관원 사오창전(邵長鎭), 푸웨이후이(付偉輝), 왕진펑(王金豊)이 거부했다. 2009년 5월, 감옥측은 생명이 위독한 왕강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줘저우시 ‘610’사무실 주임 가오젠(高建)은 향정부와 파출소 직원들을 불러 왕강의 집에서 회의를 소집해서 다시 거부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옥 측에서 사람을 내던지고 나서 차를 몰고 도망가자 그 자리에서 즉시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해서 가로막았다. 이렇게 되어 왕강은 또 탕산으로 끌려갔다. 관원들은 왕강이 죽고 사는 문제와 가족이 다년간 감당해 온 막대한 고통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생각한 것은 모두 그들의 명리에 약간의 손실도 보지 않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오딩감옥은 어두운 내막이 폭로될까 두려웠고, 지둥감옥은 사람이 안에서 사망해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웠으며, 줘저우 각급 관원들은 왕강이 계속해서 억울함을 고소해 ‘정치 업적’과 ‘관직’에 영향 받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저마다 이해득실을 따졌는데 말을 안 해도 서로 통했다.
왕강의 이 사건에서 우리는 인성이 이른바 ‘당성(黨性)’에 의해 비틀려진 후의 무서움을 볼 수 있다. 왕강은 임파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지둥감옥에서 통지를 내려 사람을 데려가게 하자 촌에서 간부로 일했던 형은 도리어 “그를 데려가 뭘 하겠는가? 그더러 그곳에서 죽으라고 하라.”고 말했다. 왕강의 아내는 “그래 한 줌의 뼈마저도 우리가 남길 수 없단 말이세요?”라고 말했다. 가족으로서 박해자의 한 편에 서서 이렇게 무정한 말을 했는데 이것이 당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한계를 분명하게 긋고 친인과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된 것과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그때는 ‘친하고 안 친하고는 계급으로 구분하고’,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밀접하다 해도 당 관계보다는 밀접하지 못하다’는 등의 반인간적인 선전으로 무수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이 참혹하게 불행을 당하게 했다. 일이 끝난 뒤에야 뼈저리게 느끼면서 속았다며 크게 외쳤다. 더욱 비참한 것은 2009년 10월 31일 왕강이 세상을 뜬 날 저녁에 온 가족은 밤새 시체를 매장했다. 만약 사망한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배상을 받지 못한다고 감옥에서 말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8년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이 억울하게 사망해도 크게 울지도 못했다. 마치 흉수들에게 빚진 것 같았다. 이 일을 통해 중국 국민이 사당을 얼마나 무서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 등 지난 몇 차례의 운동이 이미 여러 해 지났지만 사람들은 진정하게 반성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전방송국 등의 매체에서 한 말을 그대로 믿고 심지어는 진리로 여겼으며 중공의 이런 매체는 바로 ‘흥분제’와 ‘독가스 탄’인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맹목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사악한 힘에 사람들이 따르게 했다. 이것을 바로 이른바 당성이 강하고 각오가 높다고 말한다. 이들 대중매체의 몇 십년동안의 행위를 보면 그것을 다시 믿어야 하는지 믿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전국에서 1묘당 단위 생산량이 만근이 된다고 허풍 떤 것도 그것이고, 류사오치(劉少奇)를 반역자, 내부첩자, 노동운동의 배신자로 규정한 것도 그것이다. 그리고 89년에 탱크로 톈안먼광장을 피로 씻은 다음 도리어 대학생들의 애국운동을 ‘반혁명 폭동’이라고 말한 것도 그것이고, 스스로 꾸미고 스스로 감독한 ‘천안문 분신자살’ 거짓 사건으로 죄과를 파룬궁에 덮어씌운 것도 그것이다.
중국 사람은 어릴 적부터 날조된 교과서와 영화 등 문예 작품 속에서 성장했기에 중공의 거짓 항일(抗日), 진정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것, 영웅모범 인물을 날조한 등의 역사의 진상을 볼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중공 매체가 천지를 뒤덮을 듯이 파룬궁을 모함하자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정의감에 불타올라 파룬궁에 대해 이유 없이 적대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중공은 영원히 자신이 ‘위광정(偉光正)’ 임을 찬양하며 사람들이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왕강의 죽음에 얼마나 큰 억울한 사정이 있든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무감각한 이유이다.
그럼 중공은 무엇 때문에 파룬궁을 박해하려고 하는가?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파룬궁의 ‘眞ㆍ善ㆍ忍’ 이란 도덕의 거울이 중공의 ‘假ㆍ惡ㆍ斗(거짓ㆍ사악ㆍ투쟁)’의 일체 바르지 못한 것들을 비췄기 때문이다. ‘眞ㆍ善ㆍ忍’에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眞ㆍ善ㆍ忍’을 지키면 중공 일언당은 민중을 속일 수 없고, 군중이 군중을 투쟁하는 정치운동을 일으킬 수 없으며, 또 매일 권리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며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 인민들의 신앙은 보편적으로 존중을 받는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사람은 선과 악에는 보응이 있음을 믿기에 나쁜 일을 하지 않아 전체 사회의 문명과 진보에 좋은 점만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룬궁은 인류의 건강 수준과 도덕 소질을 제고하는 데 신기한 효력이 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의 환영을 받았다. 많은 노 간부들은 ‘파룬궁은 나라와 인민에게 백 가지 이로운 점이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오만한 중공은 여전히 박해를 하려고 고집했고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본성은 개변하지 못했다.
우리 중화민족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되는 기본 준칙이다. 파룬궁수련생은 바로 조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발전시켜 한 층 더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며 진리를 위해 굴복하지 않는다. 바오딩 감옥의 심문실에서 왕강이 ‘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외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한쪽 다리를 잃은 극심한 고통 중에도, 박해를 당해 곧 인간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여전히 ‘眞ㆍ善ㆍ忍’에 대한 신앙을 견지해 항상 좋은 사람이 되려함은 잘못이 없다고 여겼다. 왕강의 몸에서 체현된 ‘眞ㆍ善ㆍ忍’의 정신은 바로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가장 부족한 점이다. 파룬궁수련생들 같은 좋은 사람, 의로운 사람이야말로 중화민족의 자랑이며 희망이다.
정의를 주장하는 한 변호사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유사 이래로 가장 억울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라고 지적했다. 왕강은 8년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다리를 잘리우고 목숨을 잃었다. 이는 억울한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건이다. 왕강이 사망한 후에도 사망사건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했으며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었다. 이 사건은 오늘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중국 대륙에서 이른바 도덕과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 후의 ‘조화로운 사회’의 현상이다. 2년 전, 왕강의 16세인 아들은 학교를 중퇴해 품팔이를 하고 딸은 소학교를 다니고 있다. 아내는 외지의 공사장에서 벽돌을 날라 가족을 가까스로 부양하고 있다.
왕강의 사건은 천고에 억울한 사건이다. 희망하건대 누군가가 정의롭게 일어나서 인성이 없는 박해자를 법률에 근거해 제재를 가해 하루 빨리 분명하게 인간의 정의를 체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많은 민중들도 이 사건을 통해 중공이 패거리를 만들어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와 국민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본질을 똑똑히 가리길 바란다. 우리가 사악을 멀리해 당, 단, 대에서 삼퇴 함으로써 폭정을 마무리 짓고, 왕강의 이러한 비극이 중화대지에서 영원히 재발하지 않게 하자.
문장발표: 2010년 12월 04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2/4/好人已去-奇冤犹在-2332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