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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수련생 캉윈청, 시달림에 세상을 뜨다

[밍후이왕] (미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무단장시(牡丹江市) 파룬궁수련생 캉윈청(康運誠)은 원래 무단장시 파룬궁 의무보도소의 소장이다. 1999년 파룬궁이 박해를 당하기 시작한 후, 수련을 견지한 원인으로 여러 차례 중공(중국 공산당) 경찰에게 납치, 불법 판결을 당한 적이 있으며, 아울러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7년에 무단장 감옥에서 박해로 위독해져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되었다. 결국 2010년 11월 16일경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6세이다.

캉윈청은 1954년에 출생했으며 원래는 무단장시 부동산 총공사의 총지배인이다. 1995년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해 또 모두를 위해 의무적으로 복무하기를 원했기에 자연히 무단장 파룬궁 의무보도소의 소장이 되었다. 1996년, 보도소는 둥싼탸오루(東三條路) 라오다오커우(老道口)철도의 모 회의실에 있었다. 매달 두 차례씩 9일 강의 학습반을 열었다. 보도원이 책임지고 매일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9일 학습 비디오를 틀어놓았다. 그런 다음 큰 울안에서 수련생이 연공을 가르쳤다. 1997년, 무단장보도소는 더 이상 9일 강의 학습반을 조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각 연공장에서 스스로 조직해 함께 법공부를 하고 사부님의 강의를 보았다.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좋지 않은 사상과 행위를 고쳐 사회풍조를 호전시켰으며, 신체를 잘 단련하여 국가와 가정의 의료비 절감에 기여했다. 적지 않은 사람은 대법 수련으로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 단결했다. 어떤 이는 병고 중에서 몸부림치고 심지어 사망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는데 신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또 산산조각이 나는 가정에 직면했다가 다시금 행복을 얻고 단란하게 지내는 많은 신기한 이야기도 생겼다. 무단장시 자오구(郊區) 톄링허진(鐵嶺河鎭)에는 다칭베이(大青背)라고 부르는 산골이 있는데 그곳에는 통행 버스가 없고 도로는 걷기가 매우 어려웠다. 다칭베이에는 두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술과 담배로 온몸에 병들고 안색이 누렇게 떴으며 몸이 수척했다. 두 부부는 늘 말다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매우 안정되지 않았다. 남편도 술과 담배는 신체를 해치고, 가정에 대해 불량한 영향을 산생한다는 것을 알고 각종 방법을 다 하여 여러 차례 술과 담배를 끊으려고 생각했다가 모두 실패했다. 아내도 다년간 질병으로 앓았다. 두 부부는 인연이 있어 파룬따파를 수련하게 되었는데. 단지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만 보았는데 남편은 갑자기 자신이 수련자임을 의식하고 술과 담배도 전부 끊어버렸다. 이로부터 하루하루 건장해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병 상태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얼굴의 혈색이 좋았는데 정말로 환골탈태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내도 다년간 완쾌되지 않던 난치병이 사라지고 다신 두 부부가 다투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가정이 화목하고 생활은 점점 좋아졌다.

1. 1999년 4.25 청원한 후 감독 통제, 교란을 받다

1999년 4월 11일, 허(何) ××는 톈진(天津) 교육학원 《청소년 박람》잡지에서 파룬궁을 모독하는 문장을 발표했다. 허의 모독은 광대한 파룬궁수련생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정기 간행물 편집은 정부에서 기공에 대해 ‘몽둥이로 때리지 않는다’는 정책을 위반했다. 톈진의 일부 파룬궁수련생은 톈진 관련 방면에 사실을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울러 잡지의 편집부를 통해 진상을 알리는 것으로 이 문장의 열악한 영향을 없애려 했다. 때문에 4월 18일부터 24일에 일부 파룬궁수련생들이 톈진 교육학원 및 다른 관련 기구를 방문하여 실정을 알렸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것으로 편집들에게, 파룬궁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신에 이로움을 얻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4월 23일과 24일, 톈진시 공안국은 폭동 방지 경찰들을 동원하여 참여한 파룬궁 수련생들을 구타해, 수련생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게 했으며 아울러 45명을 붙잡았다. 파룬궁 수련생들이 사람을 풀어주도록 청구했을 때, 톈진시 정부에서는, 공안국이 이 사건에 끼어들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만약 베이징의 조치가 없다면 체포당한 파룬궁 수련생들은 석방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톈진의 공안도 역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당신들은 베징으로 가시오. 베이징으로 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마침 이런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 하에, 정부에 대한 믿음에서, 자유스럽고 안정된 수련 환경을 위하여 4월 25일에 파룬궁 수련생들은 중난하이(中南海)로 가서 평화적으로 청원을 했다. 그 시기 국무원 총리를 임했던 주룽지(朱镕基) 등 관원들은 파룬궁수련생 대표와 회담을 진행했다. 기본적으로 문제해결이 된 그날 저녁, 수련생들은 저마다 떠나갔다. 전체 과정은 조용하고 상화했으며 질서가 정연했다. 떠나기 전에 분분히 땅위의 쓰레기와 파지를 주웠고 경찰이 던진 담배꽁초마저도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일의 적절한 처리는 국제 전달 매체에도 ‘중국정부에서 개명하게 민중의 건의를 접수’하며 아울러 “중국 민중이 소질이 제고”한 시작을 개척한 것으로 찬양했다. 이것은 바로 중외를 놀래고, “중국 청원사(上訪史)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이성적이고 평화적이며 가장 원만한 청원”으로 불려 국제 사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4.25 청원 이후, 캉윈청과 다른 일부 파룬궁수련생들은 끊임없이 공안국 등 단위의 교란을 받았으며 심지어 한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무단장 시내 구역의 모든 연공장은 공안에게 감독 통제, 녹화를 당하고 적지 않은 공안과 국가보안원들이 연공장에 침투해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연공을 했다. 당년 무단장 정부는 파룬궁에 대한 조사 보고에서 언급했다. “무단장 시내 구역의 연공장에는 얼마나 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있고, 다른 도시의 현에는 얼마나 되는 파룬궁 수련생이 있지만 정치적 색채가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2. 불법 판결박해로 시달림을 다 겪고 세상을 뜨다

1999년 7월 20일 이른 아침, 무단장 시내 구역의 파룬궁 수련생 캉윈청과 쑨리주(孫麗珠) 등 3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차례로 공안에게 납치당했다. 대부분 수련생들은 7월 20일 점심 전에 풀려났다. 그러나 위쭝하이(于宗海) 등 5명의 파룬궁수련생은 밤낮으로 구류 당해 감시를 받았다.

1999년 박해가 시작된 후, 캉윈청은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여러 차례 사악한 당의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 판결을 당했으며 아울러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석방돼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가, 즉시 무단장시 부동산 총공사에서 근무했는데, 부직에 배치해 모 상점의 관리 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그는 근무에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성적이 특별이 좋았다.

2003년 10월 말, 캉윈청은 또 무단장시 610에게 납치당했다.그가 근무에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성적이 특별이 좋았기에 직장의 주요 책임자가 나서서 그를 보증했다. 때문에 경찰들은 그를 한쪽에 내버려 둔 채 거들떠보지 않았다 캉윈청은 불법 판결을 받고 무단장 감옥 5감 구역에 감금당했다.

2004년, 캉윈청과 우웨룽(吳躍榮), 장타오(張濤), 류쥔(劉軍), 왕신쥔(王新軍), 진젠펑(金肩鋒), 쑨덩차오(孫登超), 뤼전장(吕振江), 허우룬중(侯閏忠), 야오궈차이(姚國才), 가오윈샹(高雲祥) 하이린(海林), 팡스싱(龎士興) 치타이허(七臺河), 장더원(張德文), 류더위안(劉得淵) 등 10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은 무단장감옥에 감금당했으며, 아울러 매우 심각하게 박해를 당했다. 악경은 강제로 그들의 신앙을 개변하기 위해, 그들은 집중 훈련대(集訓隊)에 가둬놓고, 만약 보증서를 쓰지 않는다면 줄곧 집중 훈련대에 남겨 박해한다고 공갈 협박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집중 훈련대에서 인성이 없는 학대를 받았다. 사람마다 잠을 자는 곳은 매우 작았으며 늘 몇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잤다. 낮에는 얼굴도 씻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거나 물을 마시는 것도 통제 당했다. 방안마다 죄수는 파룬궁수련생의 언행을 통제하고 늘 때렸는데 말하면 곧 때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의 몸에는 모두 이가 생겼다. 낮에 일을 하는데(젓가락을 포장하고 이쑤시개를 고르는 일임) 늘 9시거나 혹은 밤 12시까지 연장 근무를 시켰으며, 기준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곧 구타당했다. 악도들은 나무판자로 사람을 구타했는데 너무 때려서 나무판자가 늘 부러졌다. 저녁에 정시가 되지 않으면 화장실로 가지 못하게 했으며 문을 나설 때 보고를 외치지 않으면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저마다 밥마저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으며 형사 죄수는 그것마저 다 먹지 못하게 쏟아 버렸다.

2004년 8월, 악경은 강제적 전향을 시작했다. 일부 형사 죄수를 찾아 교대로 파룬궁수련생과 말했다. 꼬박 연속 6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아 파룬궁수련생들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악경은 폭력으로 수련생들의 단식을 제지했다. 방안 마다 모두 ‘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의 외침소리가 울려나왔다. 악경은 죄수를 명령해 동수들의 입을 막고 구타하게 했다. 어떤 이는 독방에 가둬지고, 어떤 이는 교실에 집중돼 강제적 전향을 당하고 정신적 학대를 받았다. 동시에 파룬궁수련생들이 가족을 면회하거나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중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박해한 흉수는 악경 대대장 딩쉐중(丁學忠), 교도원 좡추신(莊秋欣) 및 쓰하이타오(司海濤), 장쥔(姜軍), 위(于)과장, 장다즈(張大志) 등이다.

2006년 1월 18일 캉윈청은 박해를 당해 ‘독방’에 갇혔는데 원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전에 캉윈청은 심각한 박해를 당했던 이유로, 심각한 고혈압 등 증세가 나타나 감옥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당시 가족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감옥측에 의해 거부당한 적이 있다.

2007년 1월 13일에 캉인청은 생명이 위급하여 감옥측에 의해 현지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며, 그 사이에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특히 두 번째 수술에서 의사는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 후, 가족은 감옥측을 찾았다. 대략 4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캉윈청은 결국 2010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0년 12월 03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2/3/牡丹江法轮功学员康运诚历尽磨难离世-2332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