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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쭤푸 부자(父子)가 박해로 사망한 상황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장시성 보도) 장시성(江西省) 루이창시(瑞昌市) 파룬궁수련생 저우쭤푸(周佐福)는 8번이나 ‘610’(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과 공안국에 의해 납치돼 감금박해를 당했다. 그는 마자룽(馬家壟)노동수용소에서 심각한 박해를 당했는데 수용소측에서 독극물을 음식물에 섞어 넣어 정신이상이 됐다. 당시 노동수용소로 들어올 때만 해도 몸무게가 65kg이었지만 약 40kg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2007년 3월 6일, 6시경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저우쭤푸의 아들 저우즈빈(周志斌)은 당시 루이창시 판전진(範鎭鎭)의 재정소 소장을 맡았는데 1년 반 불법 강제노동을 받고 심각한 박해를 당해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었다. 석방된 후 아픔에 시달리다가 결국 2005년 5월 14일 오후 6시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겨우 31세였다.

진상에 똑똑한 사람들은 저우쭤푸 부자가 중공(중국 공산당) 사악한 당 당국에 의해 박해로 사망했음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은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대중을 미혹시켜 ‘연공을 해서 사망했다’고 말했다. 저우쭤푸에게는 커루이하이(柯瑞海)라고 부르는 경찰일을 하는 사위가 있다. 그는 공안 펀청(湓城)분국 국장으로 임직했을 때, 그의 장인이 파룬궁을 연마해 그가 출세하는데 영향을 준다고 말했으며, 뜻밖에 그도 저우쭤푸에 대한 감시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것을 가로막고 체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의 장인이 세상을 뜬 후, 그는 도처에서 거짓말을 퍼뜨리며 ‘연공을 해서 사망했다’고 말했는데 인성마저도 없었다.

저우쭤푸(남, 1950년 출생)는 루이창시 마방적(麻紡績) 공장 직원이다. 말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었는데, 특히 아내 쉬롄자오(徐蓮姣)는 불치병인 위암 말기에 걸려 의사들도 그녀가 다만 3~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97년 2월, 파룬따파를 수련해 몇 달 이후 쉬롄자오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23세인 아들 저우즈빈의 몸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파룬궁의 신기한 효과를 목격하고 부모를 따라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으며, 그 후 보도소 보도원이 됐다. 일가족 네 식구는 딸을 제외하고 모두 파룬궁을 연마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악한 당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저우쭤푸는 중공 사악한 인원의 박해를 당해 차례로 루창시 ‘610’과 공안국에 의해 불법 납치, 가택 수색, 감금, 세뇌, 강제노동을 당했다. 그 중 일곱 번째는 2001년 1월 26일부터 4월 28일까지 루창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세뇌박해를 당한 것이다. 3개월 반 동안의 박해도 저우쭤푸의 ‘진선인(眞, 善, 忍)’에 대한 신념은 동요할 수 없었다. 뒤이어 주장시(九江市) 마자룽노동수용소에 불법으로 보내져 3년 강제노동을 당했다. 주장시 마자룽노동수용소에 있은 기간, 장시간 심각한 형벌학대를 당해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어 몸은 극도로 허약했다. 2001년 4월 28일에 갓 노동수용소로 들어갔을 때만도 몸무게가 66.5kg이었는데, 2003년 4월 7일에 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됐을 때 몸무게가 40kg으로 줄어들었으며 이미 외모도 변했다.

마자룽 노동수용소에서는 저우쭤푸에 대해 장시기 여러 가지 고문을 가했다. 2002년 11월 중순과 하순, 노동수용소에서는 ‘전향율’을 높이기 위해 저우쭤푸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으며 독극물을 음식물에 넣어 독해를 진행했다. 12월 초, 저우쭤푸는 주장시 제5인민병원(정신병원)으로 보내져 박해(당시 노동수용소에서는 말로는 그에게 신체검사를 한다고 말해 그를 속였으며 그도 그곳이 정신병원인지 몰랐음)를 당했는데 병원에서 수감을 거부한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자룽 노동수용소로 압송해왔다. 이때부터 저우쭤푸는 몸이 극도로 허약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이상이 나타났다.

저우쭤푸는 원래 고생을 참는 능력과 인내력이 매우 강한 파룬궁수련생이다. 그의 집은 류후(柳湖)공원 옆에 있었으며 바로 법공부 장소와 연공장이다. 그는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아주 잘 견지했다. 홍법(弘法)을 위해 재력이나 정신력 등 각 방면에서 최선을 다 했다. 2003년 4월 7일에 노동수용소에서 석방돼 집으로 돌아온 뒤 정신이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저녁이면 꼬박 하룻저녁을 3층 꼭대기에 서서 잠을 자지 않았으며, 날씨가 추울 때면 실내에서 벽을 마주해 꼬박 하룻저녁을 서있었는데, 잠을 잔다고 해도 침대에서 자지 않고 땅위에 꼬부리고 잤다. 그 후 얼마간은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고 식량도 매우 적었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쉰내나는 밥과 묵은 밥만 골라 먹었는데 일상생활이 완전히 비정상이었다. 특히는 2005년 5월 14일, 그의 아들 저우즈빈이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해 사망한 후 정신손상이 더욱 컸다. 결국 2007년 3월 6일, 6시 경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저우쭤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노동수용소에서 나는 2대대 3반에 갇혔다. 두 명의 마약범이 나를 지키고 바오자(包夾-수감자 중 파룬궁을 감시하는 자)가 나에게 이른바 ‘3서’를 쓰게 했는데 즉 연공을 하지 않고, 홍법하지 않으며, 노동수용소 규칙과 대대 규율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것들이다. 나는 즉시 거부했다. 바오자는 나에게 노동교양인원의 행위규범 80조를 외우게 했다가 그것도 내가 거부하자 나를 곧 작업실 안에서 다리를 쭈그리게 하기(蹲腿- 즉 두 발을 벌리고, 허벅지를 아래로 쭈그리게 하는데 아랫다리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며 중간은 비어있게 함) 고문을 가하고는 손에 80조를 들고 자기절로 읽게 했다. 이렇게 3일 동안 지속됐지만 나는 줄곧 읽지 않았다. 맨 마지막에 반장은 발에 구두를 신은채로 내 두 발을 10여 번 힘껏 밟고 난 뒤에 또 발로 내 두 발가락을 수차례나 문질렀다. 대략 10여 일이 지나 나에게 백서를 공부시켰다. 그 후 여러 차례 강제로 나에게 백서를 공부시키고 여러 차례 강제로 대법을 모독하는 텔레비전 녹화를 보게 했으며, 여러 차례 강제로 배신자를 시켜 이른바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하고 나에게 ‘전향’(신앙을 포기함을 가리킴)하도록 요구했지만 모두 나에게 거부당했다. 3반에 돌아와서 감방 안에 앉아 있자 반장과 바오자는 발뒤축으로 차고 주먹으로 나를 구타했다. 몸이 구타를 당해 부어오르면 곧 손가락으로 뚫었다. 반에 들어와서부터 매일 이렇게 학대를 가해 내 다리는 매일 부어올랐다. 이렇게 약 반 달 넘게 지속됐다. 가장 많이 부어올랐을 때는 다리와 발목이 똑같이 굵어졌다.

노동수용소에서는 강제로 전향시키기 위해 강제로 노역노동을 시켰다. 7월 중순과 하순, 나에게 두 차례 매달아 채우기 고문을 진행했다. 두 차례 모두 악경(사악한 경찰) 톈번구이(田本貴-교도원)과 악경 덩안안(鄧安安-부 대대장인데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전향을 관할함)이 마약복용죄수 저우광화(周光華) 등 바오자를 지시해 박해를 실시했다. 나를 매달아놓고 엄지발가락만 땅위에 닿게 했으며, 또 땅위에 초까지 발라놓았다. 어떤 때에는 물을 끼얹어 엄지발가락도 땅에 닿지 못하게 했다. 두 번째는 매달아 놓은지 오래지 않아, 악경 덩안안이 현장에서 살펴보다가 더 높이 매달아 놓으라고 말하자 악인 저우광화는 즉시 더 높이 매달았다. 내 엄지 발가락은 거의 땅에 닿지 못하게 됐으며, 한 쪽 엄지발가락이 땅위에 닿으면 다른 발가락은 좀 휴식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반복해 교대로 매 분, 매 초를 어렵게 넘겼다. 수갑은 전부 두 손목 살속까지 깊이 파고 들어갔다. 저녁 7시 30분부터 이튿날 7시까지는 모두 신음소리 속에서 지냈다. 수갑을 풀어 내려놓자 내 두 손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수갑은 전부 살속까지 패어 들어가 있었다. 특별히 오른쪽 손까지 변형됐으며 손목 부위의 수갑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풀어낼 때 일부 피가 흘렀다. 악경 덩안안은 이 상황을 보더니 ‘빨리 천을 가져와 손을 덮어놓으라. 여자대대에서 보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은 너무 잔안하다’고 말했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나는 수갑을 찼던 주위에 많은 큰 물집이 생겨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후 또 수갑을 차고 다시 매달려야 했다. 8월 말, 이들 악경은 또 바오자를 지시해 꼬박 6일 동안 나에게 잠을 재우지 않았다. 그 후 낮에 강제노동을 한 것을 내놓고도 저녁에 또 강제노동으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나는 9월 중순에 2대대에서 1대대로 옮겨졌다. 가자마자 나에게 백서를 보게 했지만 내가 보지 않자, 곧 한 사람이 억지로 읽고 두 사람이 나를 둘러싸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듣게 했다. 며칠 동안이나 듣게 하려고 애썼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곧 대법을 모독하는 녹화를 보게 하고 배신자를 시켜 나를 권고하는 등 방법으로 전향을 진행했다. 내가 ‘파룬따파는 정법이며 파룬따파는 좋다’는 이 진리를 견지했기에 악도들이 나에 대한 박해는 차츰 심각해졌다. 그들은 마약범들 속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을 선택해 바오자로 만들었다. 리춘웨이(李春偉)는 전 노동수용소에서 가장 사악하고 가장 악독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마약범 리춘웨이는 나에게 “뤼(呂)교도원[뤼런쿠이(呂任奎)]이 누가 당신을 전향시킨다면 우리에게 3개월 형기를 줄여 준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전향했는데 당신은 또 무엇이 아쉬워서 전향하지 않는가? 당신을 말하지 말고도, 노동수용소 간부마저도 나를 보면 양보해야 한다. 내가 때린 어떤 사람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해서 병원에 보내 응급처치를 받게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뼈가 몇 대 부러졌다. 나는 당신 저우쭤푸를 감히 이 반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이 침대에서 잠을 자지도 못하게 하며 보기만 해도 공포감이 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악경 뤄런쿠이(교도원)은 어느 한 번 나를 찾아 담화할 때 “내가 이미 30~40명을 전향시켜도 보응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지금부터 시작해 당신은 우리들이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라”고 말했다. (의미인즉 고문박해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악경 중자푸(鍾嘉福-노동수용소 정위인데 지금은 이미 전근됐음), 뤼웨이핑(呂衞平-교도관과 과장), 뤼런쿠이(2대대 교도원) 등 악경들의 지시 하에, 마약복용죄수 리춘웨이와 또 다른 악인들이 나에 대해 학대하고 박해를 진행했다. 2002년 7월부터 12월까지 악인 리춘웨이는 나의 바오자를 맡았다. 특히 뒤의 3~4개월 동안은 거의 매일 나를 학대했다. 쇠틀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게 하고, 발은 부어올랐는데도 수갑으로 두 발을 꽉 채워놓아 일부분이 살 속까지 파고들게 했다. 그리고 끈이나 다른 수갑을 침대머리에 철난간 위에 걸어놓고 두 손은 머리 쪽에서 난간 쪽으로 펴게 한 다음 수갑으로 단단히 꽉 채워놓았다. 그런 다음 리춘웨이는 두 손으로 수갑을 찬 내 손을 여러 번 내리눌렀다. 대략 이렇게 일주일 동안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은 한 쪽 발로 내 손목에 찬 수갑을 밟았는데 그것도 일주일 동안 밟았다. 맨 마지막에는 두 발로 밟았다. 전부 리춘웨이 혼자서 내 손목 위의 수갑을 밟았는데 이렇게 연속 20여 일 밟았다. 매일 반에 들어오면 매달아놓고 이렇게 내리누르고, 이렇게 밟아 줄곧 내가 밟혀서 머리 위와 몸 위에 식은땀이 나거나 혹은 거의 쇼크상태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그러나 매일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으며 적어도 저녁 10시 반까지 채웠다. 어떤 때는 밤중까지 채우고 어떤 때는 날이 밝아서야 풀어주었다. 어느 한 마약범은 이 정경을 보고 “이렇게 당신을 채워놓고 또 밟고 내리누르고 하는 것은 말하지도 말자. 바로 한 쪽 발로 허공에 매달아놓은 것만으로도 괴롭겠다. 당신은 죽기만도 못하다” 고 말했다. 나는 “우리는 파룬따파를 위호한다. 파룬따파는 좋으며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하든 그것들의 일이고 나는 스스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번 이런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마약범 리춘웨이는 모두 “견뎌낼 만한가?”고 물어보곤 했다. 그 의미는 견딜만하면 밟는 심도와 횟수를 더 강하게 더 오래 내리눌러, 견딜 수 없으면 곧 전향자료를 쓰라는 것이다. 나는 매일 그것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매일 학대하고 수갑을 채워놓은 이유로 손목은 파여 피가 흐르고, 물이 흘러 상처가 곪아 썩는 면적도 점차 확대됐다. 수갑을 채운 팽팽한 정도와 밟아 내리누르는 심도와 악인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느 한 번은 내 두 손에 수갑을 팽팽하게 꽉 조이고, 다른 한 부 수갑으로 손위에 찬 수갑을 창문 쇠기둥 위에 채워놓았다. 그리고 죄수 리춘웨이가 내 머리를 아래로 향해 내리누르고 몸을 힘껏 앞으로 잡아당기면서 힘껏 휘저어 놓았다. 내가 견딜 수 없이 아파 신음소리를 내자 범인 리춘웨이는 구린내나는 양말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 손이 마찰로 피범벅이 되고 선혈이 창턱 위에, 벽 위에, 몸 위에, 땅 위에 떨어져서야 그만두었다.

악인 리춘웨이는 내가 법공부를 하는 것을 보더니 소리내서 읽었다고 하며 두 손가락을 한데 모아 내 목구멍을 찔렀다. 이렇게 연속 20여 일 동안 거의 매일 찔러 내 목구멍부위는 커다랗게 부어올랐다. 악인 리춘웨이는 세 번이나 내 두 손의 상처(수갑을 찼던 두 손목부위는 마찰로 약 3.5cm의 길이에 2cm 너비로 피부가 없다)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수갑을 팽팽하게 꽉 조였다.

악인 리춘웨이는 악경의 지시 하에, 나를 세워두는 고문과 쭈그려 앉히는 고문을 며칠 동안 진행했다. 어떤 때 그들은 내 손발을 다 채워 나를 들어서 땅위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힘껏 사납게 내 입을 두 차례 때렸는데 매번 약 1시간 동안 때렸다. 구타로 나는 코피를 두 차례나 흘렸다. 그리고 늘 주먹으로 내 급소인 두 겨드랑이부위, 허리, 태양혈을 구타했다. 그리고 또 테이프로 입을 봉했는데(입에서부터 뒷머리를 감아서 봉했음) 감방 안이든지 작업실이든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두 눈을 뻔히 뜨고 보고 있는 상황 하에도 늘 이렇게 학대했다. 어느 한 번 죄수 리춘웨이는 내 속눈썹, 눈썹,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리고 내 태양혈 부위에서 큰 면적으로 가죽을 쥐어뜯은 다음, 자신은 머리카락 몇 대를 쥐어뜯을 때 정말로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나에게 ‘당신은 왜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감방안과 작업실 안에서 나에 대해 다른 형식으로 매달기, 욕하고 구타하기 등을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또 다른 죄수들도 나에 대해 괴롭히고 박해했다. 죄수 장자오후이(張朝輝)은 저녁에 내 태양혈을 구타했는데 내가 맞아서 태양혈이 부어오를 때까지 때렸다. 매일 구타하거나 혹은 며칠이 지나서 구타했는데 이렇게 연속7~8일 동안 구타했다. 또 수갑으로 머리 한 가운데를 때려 한 차례는 출혈했으며, 주먹으로 나의 가슴부위, 겨드랑이부위, 허리부위를 약 30번 가량 구타했다. 어느 한 번은 작업실에서 정전됐는데(약 저녁 9시 경) 장자오후이는 이 기회를 틈타 주먹으로 겨드랑이를 수차례 구타했으며 또 작은 대나무 몽둥이로 나(두 손을 거꾸로 채웠음)의 손가락 관절뼈를 때려 구타로 부어오를 때까지 약 두 시간 동안 때 때렸다. 이렇게 연속 사흘 동안 구타했다. 그리고 또 죄수 장자오후이와 다른 죄수들은 늘 각종 형식으로 나를 매달아 채워놓았다. 그 중 매달아 채워 두 차례나 쇼크하고, 폭행과정에 또 한 차례는 기절했다. 저녁에 잠을 잘 때마저도 수갑을 채웠다. 손발은 각각 침대 두 끝 쇠기둥 위에 채워졌는데 어떤 때는 한 손과 한 발을 채우고, 어떤 때는 두 발을 각각 수갑으로 팽팽하게 꽉 채워놓았다. 이렇게 2001년 12월부터 2003년 4월까지 연속 15개월 동안(멈춘 적이 없음) 채웠다.

또 많은 대법제자가 심한 박해를 당했는데 모두 노동수용소의 전체 계통에서 함께 진행했다. 노동수용소 정위 중자푸(鍾嘉福)가 마싼자(馬三家)에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혹독한 수단을 배워 오고, 교도관과의 과장 뤼웨이핑(呂衞平)이 전면적으로 펼쳐 놓았으며 각 대대 대장, 지도원, 경찰들이 공동으로 마약범을 지시해 무자비하게 사람을 구타했다.”

저우쭤푸가 박해를 당한 상황에서 그를 박해한 악인과 악경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심각한 고문박해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미 노동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쭤푸는 여전히 살아서 노동수용소를 걸어나왔다.

저우즈빈(저우쭤푸의 아들), 남, 1974년 출생. 1997년 파룬궁을 수련한 그 때, 루이창시 판전진(範鎭鎭)의 재정소 소장을 맡았다. 1999년 4월부터 시작해 직장 책임자들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 담화하고 그에게 보도원사업과 파룬궁수련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당시 그는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1999년 7.20에 중공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모독했다. 저우즈빈은 1999년 7월 21일과 12월 하순에 차례로 두 번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차례로 15일 동안의 불법 감금과 1년 반의 강제노동을 당했다.

저우즈빈은 노동수용소에서 심한 박해를 당해 심신에 극심한 상해를 입어 수련을 포기하게 됐다. 2002년 3월, 갑자기 한 차례 큰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었다. 파룬궁수련생과 친구의 도움을 받아 차츰 의식이 똑똑해져 또 다시 파룬궁을 수련하여 병이 재빨리 나아졌다. 그러나 그가 수련하는 가운데 저애력과 교란은 너무도 컸다. 직장에서는 밤낮 그를 감시하고 연공을 하지 못하게 하고 법공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한 번 직장에서는 그가 『전법륜』책을 보는 것을 보고 책을 빼앗아갔다. 집에는 또 파룬궁수련을 반대하는 누나와 매형(커루이하이)이 지키고 관할하고 있어 더욱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없었다. 그가 파룬궁수련을 중지한지 8개월 후, 지병이 또 도졌다. 결국 역시 난창(南昌)1병원에 입원해 몇 달 동안 치료를 받다가 병상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저우쭤푸와 아내 그리고 아들 일가족 세 식구는 모두 파룬궁을 수련했다. 세 사람을 비교해보면 곧 뚜렷하게 보아낼 수 있다. 저우쭤푸는 그런 잔혹한 정신과 육체적 박해를 당한 이유로 정신이상으로 되어 연공을 하지 않아 심신이 상처를 입어 건강을 회복할 수 없었고, 저우즈빈은 ‘610’과 공안의 엄밀한 감시로 인해 연공을 할 수 없게 돼 지병이 도져 치료해도 구할 방법이 없었으나, 쉬롄자오는 원래 3~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의사들이 판정을 내렸지만 10여 년 동안 정신적으로 극심한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도 줄곧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해 지금까지 몸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또 가정주부(딸, 사위, 외손녀를 보살펴줌)의 중임을 감당하고 있다.

문장발표: 2010년 10월 2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0/27/2315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