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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장구이즈, 불법 박해 당하다

[미후이왕] (밍후이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黑龍江) 퉁허현(通河縣) 파룬궁 수련생이자 부유 보건원(婦幼保健院) 담당의사 장구이즈(張桂芝)는 2009년 12월에 하얼빈(哈爾濱)에서 네이멍(內蒙) 에치(鄂旗)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그 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는데 줄곧 박해로 병이 중해져서야 풀려났다. 파룬궁수련생 쑹위훙(宋玉紅)과 장하이밍(張海明) 등도 같은 기한에 납치 및 박해를 당했다.

장구이즈, 여, 42세,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퉁허현 부유 보건원 주치의이며 하얼빈 이과대학 본과 졸업생이다. 1999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한 후 그녀는 쩐ㆍ싼ㆍ런(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요구하며 각 방면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과감하게 책임을 감당했다. 그리고 식사 초대와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약품에서 공제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품성은 동료들과 환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2009년 12월 4일, 직장에서 장구이즈를 하얼빈 의과대학1원(哈醫大一院)으로 파견, 연수를 받았으며 임시로 하얼빈 다오와이구(道外區)에 머물렀다. 12월 14일 밤, 그녀는 깊은 잠을 자다가 경찰(네이멍구 에원커치(鄂溫克旗) 공안국)에 의해 깼다.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창문으로 향하게 해 객실의 소파에 앉혀놓고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핸드폰 및 호주머니안의 금품마저 경찰에게 강탈당했다. 그녀는 당시 경찰에게 자신은 하얼빈시에 연수 받으러 왔다고 설명하고 현장에 증인도 있었으며, 근무복 안에는 병력 기록과 그 날 의과대학에서 쓴 병의 경과 기록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에원커치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동시에 납치당한 사람은 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후린현(虎林縣) 파룬궁수련생 가오리핑(高麗萍), 쑹위훙(宋玉紅) 및 솽청시(雙城市)의 장하이밍(張海明)이 있었다. 자무쓰의 옌지궈(闫繼國)도 에원커치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하얼빈역 경찰 업무실에서 옌지궈는 병증세가 나타났지만 에치경찰은 발로 그를 차버렸다. 그 후 생각해 냈는데, 당시 납치에 참여한 인원으로는 네이멍구 에원커치 공안국의 왕하이쥔(王海軍), 궈즈궈(郭智國), 에원커치 다옌(大雁)파출소의 류빙량(劉炳良)과 이름 모를 경찰이 있었다.

2009년 12월 15일, 에원커 공안국의 궈즈궈, 다옌 파출소의 류빙량 등은 장구이즈, 쑹위훙, 가오리핑 등을 따로 따로 불법 심문했다. 심문할 때 류빙량은 쑹위훙을 고문했다. 쑹위훙의 머리칼을 잡아당겨 그녀의 귀뺨을 때리고, 드라이버로 쑹위훙의 척추를 찔렀다. 경찰은 쑹위훙에게 밥을 먹이지 않았으며(그 후 어떤 사람이 몰래 그녀에게 찐빵 하나를 주었음), 꼬박 3일 동안 쑹위훙을 재우지 않았다. 3일 후, 쑹위훙이 감방으로 돌아 왔을 때에는 사람이 이미 탈진하고 머리칼이 한줌씩 빠졌다. 옌지궈는 감금당한 며칠 동안 경찰에게 야만적인 음식물주입을 당해 대변을 바지 안에 누었다.

2010년 1월 18일, 에원커치 검찰원의 마단단(馬丹丹)과 바이자밍(白佳明) 등 사람은 재차 장구이즈 등 파룬궁수련생들을 심문했는데, 공안국에서 그들에게 정한 죄명이 ‘×교 조직을 이용해 법률실시를 파괴했다’로 바뀐 것을 보았다.

2010년 1월 29일, 에원커치 공안국 국보대대의 궈즈궈 등은 장구이즈, 쑹위훙, 장하이밍을 구치소에서 구류장으로 이송해 불법 감금했다. 동시에 세 사람이 10일 동안 구류한 처벌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말로는 풀어준다고 했지만 장구이즈는 서명을 거부했다.

2010년 2월 4일, 에원커치 공안국 법제과의 부런부허(布仁布和)와 밍화(明華)는 세 사람을 불법 심문했다. 5일, 에원커치 공안국에서는 세 사람을 강제노동을 시키려는 결정을 내렸으며(장구이즈와 쑹위훙은 1년 반, 장하이밍은 1년), 아울러 만일 불복한다면 상소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2010년 2월 8일, 에원커치 공안국에서는 세 사람에게 강제노동 집행 통지를 하달했지만, 서면 문건은 공안국 부국장 아오윈타오(敖雲濤)와 국보대대 부대장 장펑(張鵬)이 빼앗아갔으며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시에 세 사람을 구치소로 이송해 연속해서 불법 감금했다.

장구이즈의 가족은 변호사를 선임해 상소하려고 했지만 에원커치 공안국과 구치소에서는 변호사가 당사자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강제노동 통지서도 주지 않고, 또 가족에게 누구를 통해 변호사를 선임했는지, 변호사는 이런 유형의 소송을 건 적이 있는지를 캐물었으며 아울러 가족을 구류하겠다고 위협했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파룬궁에 대해 근본적으로 법률을 따져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22일, 에원커치 공안국 형사대대의 바오강(寳鋼), 궈즈궈 등은 재차 장구이즈, 가오리핑, 쑹리훙 등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불법 심문하고 실제 상황에 근거해 구별하여 대한다고 말했다. 물어본 다음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장구이즈는 감방에서 늘 남자 감방에서 어떤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후 옌지궈가 병이 도졌다고 교도관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2010년 4월 28일, 장구이즈는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으며 불법 감금박해를 반대했다. 5월 4일부터 시작해 그녀는 줄곧 사건 처리 관위 혹은 검찰원을 만나보려고 요구했지만 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불법 감금기간, 에원커치 구치소에서는 죄수들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했다. 2010년 5월 19일, 에치난툰(鄂旗南屯)의 구류 중의 인원 리눠(酈娜)는 장구이즈의 깔개를 빼앗고 대야의 물을 끼얹었으며, 정신지체 아동학교 교장 타오수잉(陶樹英)는 감방 안에서 장구이즈에게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교도관 진안(金安)은 리눠를 충동질해 사람을 구타하게 했으며, 그리고 교도관 자오나얼(教納爾)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장구이즈와 가오리핑은 단식으로 반 박해에 나섰다. 같은 감방 훙화얼지(紅花兒基)의 허우슈화(侯秀華)는 발생한 일체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는데 저녁이 돼서도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5월 24일 단식한 다섯째 날, 에원커치 공안국 부국장 아오윈타오와 국보대대 대대장 왕하이쥔이 구치소로 왔다. 여섯 째날, 장구이즈는 투무지(圖木吉) 노동수용소로 납치당했다. 그녀와 함께 쑹위훙이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검사를 거쳐 노동수용소의 의사는 장구이즈의 심장은 기관 조직의 질병이고, 쑹위훙은 심근에 혈액 공급이 부족하다고 했다. 두 사람의 몸은 검사에서 불합격으로서 노동수용소에서는 수감을 거부했다. 이틀 후, 장구이즈와 쑹위훙을 노동수용소로 납치해갔던 네 명의 경찰(공안국의 바오롄성(包連勝), 구치소의 마옌빙(馬彦兵), 난툰 제1파출소의 쑤잉(蘇櫻)과 왕위(和王宇)임)은 장구이즈와 쑹위훙을 데리고 에원커치로 되돌아왔다.

5월 28일, 에원커치 공안국에서는 장구이즈와 쑹위훙을 하이라얼멍원(海拉爾蒙院)으로 끌고 가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노동수용소의 검사결과와 마찬가지였다. 6월 1일 장구이즈가 석방되고, 6월 3일 쑹위훙이 석방됐다. 장구이즈는 납치되기 전 체중이 58kg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뜻밖에도 40kg도 되지 않았다. 장구이즈의 가족은 또 이른바 감옥 외 집행 비용(영수증을 주지 않았음) 천 위안을 갈취 당했다.

장구이즈가 네이멍구에서 불법 감금당한 기간, 퉁허현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박해 당했다. 퉁허현 정법위의 장웨(張越)는 통보를 받고 퉁허현 부유 보건원에서도 벌금을 당했으며, 원장 쑨샤오차이(孫孝才)도 처벌을 받고 위생국 리난(李楠)과 보건원의 천훙(陳虹)은 3년 안에 정상적으로 진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장구이즈는 집으로 돌아 온 후 출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현 안의 기타 직장에서도 그녀를 초빙하지 못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장구이즈는 줄곧 집에서 몸조리했다.

에원커치 경찰들의 납치는 장구이즈의 가족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공부하던 시기에 그녀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던 둘째 형부는 줄곧 몸이 좋지 않았다. 둘째 형부는 임종 전에 ‘장구이즈에게 일이 생긴게 아닌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전화마저도 없고.’라며 몇 번이나 물었다. 둘째 언니는 심한 충격으로 목석같은 사람으로 변했다. 장구이즈를 구하기 위해 그녀의 두 오빠들은 날씨가 얼마나 춥든지,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나 제일 바쁜 시기인 농번기를 막론하고, 핍박에 못 이겨 네이멍구와 헤이룽장 사이를 오갔으며, 단숨에 머리카락이 더욱 많이 희어졌다. 에원커치 공안국에서 여러 방면에서 책임을 회피하여 난처하게 만들고, 또 시종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한 상황에서 두 오빠가 정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장구이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위에서 퉁허현 정법위 장웨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를 세뇌반(이른바 법제학교)으로 가라고 요구했다가 장구이즈에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리고 쑹위훙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하얼빈에서 또 현지 경찰에게 젠싼장(建三江)으로 납치돼 연속하여 박해 당했다. 장하이밍은 하이라얼(海拉爾) 노동수용소에 보내져 1년 강제노동을 당했다. 그의 가족은 이미 하이라얼구 법원에서 관련 부문을 기소했다. 그리고 옌지궈와 가오리핑은 여전히 에원커치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해 있다.

문장발표: 2010년 09월 29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29/2303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