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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좡시 소학교 교사 뤄신수가 박해로 사망한 진상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보도)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시(石家莊市) 쑨춘향(孫村鄕) 타탄(塔談)소학교 교사 뤄신수(吕新書)는 8년 불법판결을 받았다. 허베이성 제1감옥(바오딩(保定)감옥)에서 온갖 감당하기 어려운 학대와 고통을 겪은 뒤, 결국 2009년 5월 23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이다.

吕新书

뤄신수(吕新書)

허베이성 제1감옥의 박해 책임자는 뤄신수가 간복수(肝腹水)로 피골이 상접하고 발이 부어오르며(사람이 생명이 위독할 때에 나타나는 상태), 밥을 먹지 못하고 여위고 허약한 몸으로 큰 배를 억지로 지탱하며 눕지도 못하고 온밤을 꼬박 앉아서 잠을 못자는 것을 보자, 2008년 7월 19일에 총망히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가족은 상황을 목격하고 비통하고 분했다. 긴급히 병원에 보냈는데 간암말기란 진단이 내렸다. 당시 의사는 “왜 이제야 왔는가?”고 묻자 가족은 부득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건 허베이성 제1감옥에 물어야 한다.”

吕新书在河北省第一监狱(保定监狱)被迫害成严重肝腹水

뤄신수가 허베이성 제1감옥(바오딩감옥)의 박해로 심각한 간복수증세가 나타나다.

1. 공안의 납치와 혹독한 구타를 당하다

1999년 ‘7.20’ 중공(중국 공산당) 사당 장쩌민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뤄신수는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진상을 설명했는데 베이징에서 불법체포를 당했다. 그 후 스자좡 쑨춘파출소에 20일 동안 불법 감금을 당하고 게다가 불법 가택 수색을 당했다. 쑨춘파출소는 집에 있는 텔레비젼, VTR, 녹음기, 연공 테이프, 대법책, 사부님 법신상, 사부님 강법 테이프를 전부 수색해 갔다. 파출소에서 풀려난 후, 개학하기 4~5일 전에 파출소의 핍박에 못 이겨 수련을 포기했다.

1999년 10월 23일, 쑨춘 향정부는 재차 강제로 파룬궁수련생으로 하여금 수련을 포기하게 하고, 파룬궁수련생을 강박해 3서(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 등)를 쓰게 했다. 그로부터 뤄신수는 진상에 똑똑하지 못한 사람에게 감독 통제, 미행을 당했다.

2000년 7월 초의 어느 하루, 뤄신수는 쑨춘학교에서 농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시합이 끝난 후, 쑨춘파출소에서는 직접 뤄신수를 납치하고 7일 간 불법 감금했다. 7월 20일 이전, 또 불법으로 가택 수색과 납치를 당했다. 같은 해 10월 말, 11월 초에 뤄신수는 재차 납치 당했고 아울러 불법 가택 수색을 당했다.

2000년 12월 5일 오후 2시, 스자좡시 공안국은 쑨춘파출소와 결탁하여 학교로 가서 뤄신수를 납치했으며 아울러 불법 가택 수색을 했다. 그리고 뤄신수를 직접 스자좡시 솽환(雙環)호텔 안으로 납치했다. 한 방안에 불법 감금을 되었으며 몇몇 악인과 악경들에 의해 구타를 당해 반 주검이 되었다. 다른 방안의 파룬궁수련생은 뤄신수가 구타를 당해 마음이 찢어지고 폐가 파열될 듯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치아는 악경에게 맞아 몇 개가 빠졌다. 며칠 후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알려 준데 따르면, 12월 6일 공안이 그에 대해 이른바 ‘심문’을 할 때, 공안은 일찍이 초안을 작성해 놓은 ‘사실’을 꺼내 그를 핍박해 ‘자백’하게 했다고 한다. 뤄신수가 단호하게 부인하자 혹독한 구타를 했다. 공안은 무고한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죄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멈추지 않는 고문 학대에 직면해 뤄신수는 굴복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악경은 부득이 고문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동정심이 있는 인사가 폭로한데 의하면, 뤄신수는 그 후에 스자좡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을 당했는데 얼굴 절반과 눈은 여전히 퍼렇게 멍들고 부어있었다 한다.

2. 아내가 혹독한 구타를 당해, 핍박에 못이겨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뤄신수의 아내 쑨샹쥐(孫香菊)는 일자무식인 전형적인 농촌부녀이며 거의 집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렇다 할지라도, 뤄신수가 납치당한 그 날, 쑨샹쥐는 파룬궁수련생 왕훙빈(王宏斌)의 집에서, 왕훙빈을 체포한 스자좡시 창안(長安)분국 정보대대 및 둥다제(東大街) 파출소의 일행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그날 저녁 어떠한 증서도 내보이지 않고 도리어 시 공안국의 사복경찰이라 자칭하는 세 사람에 의해 솽환호텔로 끌려가 이른바 ‘심문’을 당했다. 쑨샹쥐가 자신의 이름과 가정주소를 거부하여 말하지 않은 이유로, 리(李)대장이라고 자칭하는 사복경찰이 기타 사복경찰을 지시하여 ‘심문’을 실시했다.

첫 번째 사복경찰이 다가와서 좌우 양 손으로 번갈가며 쑨의 두 귀뺨을 흉악하게 때렸다. 리대장은 때리는 것이 그다지 흉악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직접 때렸는데 뜻밖에 쑨샹쥐를 혼절하게 했다. 쑨이 깨어난 다음 이 리대장은 손바닥으로 쑨의 이마를 맹공격했다. 쑨은 단시간에 타격으로 벽에 부딪쳤는데 즉시 호텔의 침대위에 기절해 넘어졌다……. 리가 때리다 지치면 세 번째 사복경찰이 온 힘을 다해 극히 흉악하고 잔인하고 호되게 쑨샹쥔의 귀뿌리부위를 때렸다. 당시 쑨샹쥐는 귀가 심하게 아픔을 느꼈으며 완전히 청력을 잃었는데 장기간 아픔이 멈추지 않았다.

쑨에 대해 ‘고문’을 한 리대장은 “당신들은 ‘선하면 선한 보응을 받고, 악하면 악한 보응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결과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오늘 나가서 자동차에 부딪쳐 죽는지를 두고 보겠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쑨샹쥔은 쑨춘파출소의 철창 안에 갇혔다.

12월 10일, 쑨이 또 이 세 사복경찰에게 호텔로 끌려가 심문을 당할 때, 쑨샹쥐는 사복경찰에게 “당신들은 왜 나에 대해 불법 감금을 하고 불법 고문을 하는가?”라고 질문하고는 아울러 그들에게 공작증명서를 내보이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주지 않았으며 또 감히 주지도 못했다. 12월 13일 오후, 쑨샹쥐는 재차 호텔로 끌려갔다. 몇몇 폭도들은 곧 자료사건에 대해 쑨에게 심문을 진행했다. 쑨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는 계속해서 쑨을 쑨춘파출소의 철창 안에 불법 감금했다.

줄곧 2000년 12월 21일까지, 쑨춘파출소에서는 쑨의 몸이 학대로 나날이 허약해지고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죄책을 감당하기 두려워 쑨의 아들에게 통지해 돈 만 위안을 가져와 사람을 되찾아가게 했다. 쑨의 집 가정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착취에 직면해서 단호하게 거부했다. 쑨춘파출소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내면서 “2만 위안을 주지 않으면 사람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쑨춘파출소에서는 나날이 허약해지는 쑨샹쥔에 직면해,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불법으로 기한을 초과해 감금했던 쑨샹쥔을 풀어주었다.

쑨향쥔은 집으로 돌아 온 후, 여전히 시 공안국 교구(郊區)분국 쑨춘파출소의 교란을 받았다. 노인은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처로 유랑했다.

2001년 1월 16일, 시 공안 교구분국 쑨춘파출소에서는 또 와서 교란했으며 아울러 무고하게 사람을 붙잡으려 했다. 때마침 쑨샹쥔이 집에 있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파출소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문 밖에서 하루 동안 지켰다. 1월 17일 오후, 파출소의 지키고 있던 사람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그만 양심을 버리고 미친 듯이 문을 부수었다. 쑨샹쥔은 무고하게 그들에게 붙잡혀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핍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졌으며 몸져누워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3. 왕훙빈이 학대를 당하다

2000년 12월 5일, 파룬궁수련생 왕훙빈은 집에서 이유 없이 붙잡혀 둥다제파출소에 갇혔다. 선량한 인사가 제공한 소식에 따르면, 12월 6일 왕훙빈은 솽환호텔로 끌려가 공안에 의해 억지로 ‘거주지 감시’에 써넣게 했다고 한다. 공안은 그에 대해 이른바 ‘심문’을 할 때, 이미 초안을 작성해 놓은 이른바 ‘뤄신수의 구두자백’을 꺼내놓고 왕훙빈이 이전에 뤄신수에게 시디 3개를 준 적이 있다는 ‘죄를 인정’하도록 핍박했다.

왕훙빈은 이들이 꾸민 이른바 ‘구두자백’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경찰들은 곧 왕훙빈을 혹독하게 구타하기 시작했으며 또 그에게 수갑을 등 뒤로 채웠다. (한 손은 어깨위로 지나고 한 손은 직접 등 뒤로 거꾸로 올린다음 억지로 함께 수갑을 채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중형 죄수를 대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이어서 그들은 왕훙빈을 핍박해 땅위에서 꼬박 3일 동안 연속 세워 두고는 잠을 자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게 했으며 아울러 그에 대해 악한 말로 모욕했다. 왕훙빈은 뤄신수가 옆 방에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왕훙빈이 크나큰 육체와 정신학대를 감당하고 극도로 고통스럽고 지쳤을 때, 그들은 기만해서 자백을 시도하려고 다시 간계를 시행했다. 그들은 이른바 ‘뤄신수의 구두자백’ 한 장을 꺼내 들고는 왕훙빈에게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읽어주어 듣게 했다. 무슨 ‘9월 달에 왕훙빈이 타탄춘(塔談村)으로 가서 교환기를 조립할 때 준 시디’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뤄의 사무실에서 준 것’이라고 했다. 아주 그럴듯하게 낭독한 이른바 ‘사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거짓말을 더욱 똑똑히 가리게 했다. 9월 달에 타탄학교의 사무실이 아직 건설되지도 않았으며 뤄신수의 사무실은 당시 여전히 노동자들의 숙사였는데 어디서 온 ‘뤄의 사무실에서 준 것’이겠는가.

3일 동안의 학대에서 공안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후, 넷째 날 그들은 또 자신들이 잘못하고도 도리어 왕훙빈이 단식을 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걸어 120을 불러와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게 했다……

왕훙빈은 3년 불법 강제노동을 받고, 스자좡시 노동수용소에서 온갖 정신과 육체 박해를 당했다. 그리고 장시간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게 함) 어느 한 번 그는 견디지 못해내고 자버렸는데 뜻밖에 교도관이 죄수를 지시해 라이터로 손톱을 뿌리까지 태워 버렸다. 또 한 번은 교도관에 의해 한 쪽 손은 창문의 철난간 위에 채워지고 두 발은 지면에서 떨어지게 했다. 3일 동안 꼬박 내려오지 못하게 했으며 옆에는 교도관이 지시한 죄수가 전기곤봉을 들고 지켰다. 발이 벽에 닿기만 하면 곧 발목을 두드렸다. 2003년 10월 9일, 왕훙빈은 결국 박해로 사망했는데 향년 39세이다.

4. 뤄신수가 8년 불법판결을 받다

뤄신수는 스자좡시 제2구치소에서 1년 4개월 동안 불법 감금을 당한 후, 불법으로 8년 판결을 받고, 2004년 4월 11일에 루촨(鹿泉)감옥에 이송되었다. 이틀 후(4월 13일) 또 허베이성 제1감옥(바오딩)으로 이송됐으며 매일 강박으로 이른바 ‘교육동’으로 가서 파룬따파를 비방하는 녹화자료를 보았다.

감옥에서는 전문적으로 부 감옥장 한 명을 배치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틀어쥐게 했다. 교육과 안에는 또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610팀이 있었으며 팀장은 교육과의 과장 한 사람이 맡았다. 각 감구역의 주관 책임자와 부책임자는 감구역에서 나눠놓은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바오자(包夾)(감시인원)감시를 진행했으며 따로따로 책임자와 부책임자가 틀어쥐는 대상으로 확정해 놓았다. 각 분감구역의 구역장과 지도원들도 각자가 임무가 있었다. 직접 바오자 인원을 고르고, 바오자 인원에 대해 바오자 임무를 배치하며,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직접 감독 통제를 진행해야 했다.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바오자 감시를 진행하는 일반 죄수를 배치했다. 일반적으로 모두 4~5명인데 작은 두목 한 사람을 포함해서다. 많을 때에는 여섯 사람인데 같지 않다. 어두운 곳에 또 밀정을 숨겨놓았는데 이들은 파룬궁수련생을 감시하고 바오자 인원들이 최선을 다하는지를 감시했다.

감옥에서 박해에 참여한 인원에 대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함께 써가면서 박해를 격려한 조치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파룬궁수련생 한 사람을 전향시키면 분감구역의 교도원은 1급 월급을 더 올릴 수 있고 죄수는 공을 한 번(3개월 형기를 줄여줌) 기입할 수 있거나 혹은 한 번 표창할 수 있다(2개월 형기를 줄여줌). 예컨대 1년 중, 바오자 감시를 하는 과정에서 ‘사고’(파룬궁수련생이 연공하는 것과 대법 자료를 보고 대법자료를 베끼는 것 및 기타 죄수와 대법의 일을 말하는 것, 마음대로 기타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가리킴)가 생기지 않으면 바오자팀 구성원은 곧 공을 한 번 기입해 얻게 되는데 3개월 형기를 줄이는 것과 같다.

허베이성 제1감옥에서 뤄신수는 줄곧 진상에 똑똑하지 못한 악한 경찰, 나쁜 사람들이 6~7명의 살인범을 지시해 진행한 감독 통제를 받았다.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뤄신수로 하여금 심신이 심각한 상해를 입게 했으며 몸에 심각한 부종이 나타나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2008년 7월 19일, 감옥에서는 책임을 감당하기 두려워 생명이 위독해진 뤄신수를 집에 보내갔다. 가족은 즉시 뤄신수를 병원에 보내 응급 처치를 받게 했지만 결국 효과를 보지 못한 채, 2009년 5월 23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0년 9월 13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13/229573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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