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2010년 7월 12일 저녁 8시, 산둥(山東) 파룬궁수련생 둥웨화의 심장 박동이 멈췄다. 부고가 전해지자 친척과 친구들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겨우 7세인 아들은 갑자기 아빠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진상에 똑똑하지 못한 일부 사람은 도리어 “파룬궁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며 불치병도 모두 다 낫게 한다고 하지 않나? 둥 씨 집은 파룬궁을 연마했는데 어떻게 네 식구나 죽었는가?”라고 말했다.
이제 겨우 40세인 둥웨화는 젊은 나이에 왜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났는가? 사건은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둥웨화는 주청시(諸城市) 룽더우가도(龍都街道) 량허촌(兩河村)사람이며 올해 겨우 40세이다. 1997년에 부모 형제를 따라 함께 파룬궁을 수련했다. 당시 전 가족은 심신이 건강하고 집안에 행복이 가득 넘쳤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집단과 중공이 서로 이용해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11년 동안, 둥웨화 일가도 비참하게 박해를 당했다. 형 둥웨중(董月忠), 부친 둥전허(董楨河)와 모친 루페이란(廬培蘭)은 중공 당국의 위협과 압력을 당했고, 가족들이 끊임없이 납치, 불법감금, 교란을 당하는 가운데서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1999년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부진장(副鎭長) 위옌성(于彦勝)과 관할구역 주임 장샤(張霞)는 매일 40여 위안의 돈으로 몇 십 명을 고용해서 온 마을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게 했으며, 이 돈은 전부 연공하는 사람들더러 내라고 큰 소리쳤다. 아울러 둥웨화의 가족, 세 집의 파룬궁수련생들을 각자의 집에 가뒀고, 6세인 그의 딸까지도 집안에 가뒀다.
둥웨화는 뒤이어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평가를 받으러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가로 막혀 돌아온 다음 비밀리에 허우자좡(侯家莊)학교에 감금당했으며 10여 명이 감시관리를 했다. 그의 누나가 그를 보러 갔으나 결과 이튿날 둥웨화는 또 비밀리에 신눙춘(新農村)학교로 이송됐다. 이렇게 가족과 연락이 끊겼으며 10여 일 동안 불법감금을 당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후 오래지 않은 10월, 싱화루(興華路) 파출소 경찰은 또 둥웨화의 집을 불법수색하고 그를 납치해 20일 동안 불법구류를 시켰다.
둥웨화 부부는 2001년 10월에 베이징으로 여행을 갔다. 집으로 돌아온 후, 두 부부는 공안국으로 납치되었다. 당시 주청시 공안국 정보(政保)대대 부대대장 진후이(金輝)는 “여행? 왜 꼭 이때 여행을 갔는가? 구치소로 가자.”고 말했다. 이렇게 두 부부는 따로따로 불법적으로 형사구류, 치안구류를 당했다. 1개월 후 집으로 돌아 왔을 때, 둥웨화의 손가락은 구치소에서의 강제노역으로 곪아서 거의 뼈가 드러난 상태였다.
구류기한이 찬 다음, 둥웨화 두 부부는 또 촌 위원회에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게 했으나 나중에는 부진장 위옌성과 관할구역 주임 자오융신(趙永欣)의 지시 하에 또 두 부부는 두 큰 빈 집에 감금당했다. 문과 창문도 전부 철근으로 땜질해 놓았다. 그리고 대소변은 전부 그 방에서 보게 하고, 음식은 70여 세인 그의 노모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겨울날에 밖에서는 늘 눈꽃이 날렸다. 이렇게 20여 일 동안 불법감금 당했다. 이 기간에 촌 위원회의 누구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둥웨화는 부모와 큰형이 장기간의 교란박해로 연이어 세상을 떠난 비통함 속에서도 주청 ‘610’의 압력을 받았다. 강대한 압력 하에 둥웨화는 한때 강제로 전향되고 파룬궁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파룬궁이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게 가르침은 잘못이 없고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하면 심신이 건강해지며, 나라와 인민에게도 백가지 이로운 점만 있고 하나의 해로운 점이 없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2004년 초, 그는 심사숙고를 거쳐 또 새롭게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가 또 파룬궁수련으로 되돌아 와 병 없이 온 몸이 가벼운 기쁨을 깊이 체험하고 있을 때인 2004년 섣달 23일, 그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룽청(龍城)시장에서 노점을 열고 물건을 팔고 있을 때, 주청 ‘610’에서 지시한 경찰에게 또 납치를 당했다. 구치소에서 그는 경찰 쑨궈지(孫國基)에게 고무곤봉에 맞아 머리와 얼굴이 커다란 금붕어 머리처럼 부어올랐다. 성이 쑨(孫) 씨인 경찰은 때리면서 욕했다. 그런 다음 또 강제로 둥웨화의 신발을 벗기고 다리를 곧게 펴게 했다. 경찰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가 그의 아랫다리와 복사뼈를 밟았다.
2009년 3월 30일, 현지 ‘610’과 국보대대 대장이 파룬궁에 대한 또 한 차례의 광적인 박해를 진행하는 가운데서, 천훙(陳洪)을 우두머리로 한 한 무리 경찰과 폭동방지 경찰들이 억지로 담을 뛰어넘어 집안에 들어 와 또 둥웨화를 ‘전향반’으로 납치했다. 그곳에서 공갈 협박, 잠 못 자게 하기, 눈 감기만 하면 고무몽둥이로 찧기, 분무기로 얼굴에 물을 뿜기 등 수단을 이용해 세 팀이 교대로 박해했다. 고문은 둥웨화의 의식이 흐릿할 때까지 이어졌다. 꼬박 10일 동안 학대한 뒤 병보석으로 풀어줘 치료받게 했다. 가족은 그가 완전히 수척해진 것을 보았다.
2010년 4월 9일, 현지의 다른 파룬궁수련생 5명이 함께 불법 판결을 받은 뒤, 둥웨화는 심신에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 기간에 경찰 천훙과 판쭤번(範作本)이 끊임없이 집으로 찾아와 교란하고 공갈 협박했으며 그에게 파룬궁수련을 포기하라고 핍박했다. 박해로 인한 심신의 괴로움은 극한에 달했고 일가족은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네 식구의 생활을 위해 그는 허약한 몸을 끌고 한 작은 공장에서 임시로 품팔이를 했다. 심신이 괴로움을 당할 대로 당하고 아버지, 어머니, 큰형이 박해로 연이어 세상을 떠난 비통함 속에서 7월 12일 오후, 그는 일하다 갑자지 기절했다. 직장에서 사람을 파견해 병원으로 보냈으나 이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미성년의 아들딸을 남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고정된 직업이 없어 품팔이를 하며 딸의 고등학교 학비와 전 가족의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둥웨화의 전 가족이 파룬궁을 수련해 심신의 건강을 얻고 도덕이 고상해졌으며, 남을 즐겨 돕고 있다는 것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중공과 장쩌민 정치깡패집단이 온 천지를 뒤엎을 듯이 박해하고 탄압하며, 각종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심신 학대를 한 목적은 바로 강제로 수련을 포기시키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데 있다. 이번 탄압 하에 얼마나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이 참혹하게 불행을 당했는가?
문장발표: 2010년 08월 24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24/2287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