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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사망한 수련생 쑹유춘을 애도하여 (사진)

글/ 산시성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산시(山西) 다이현(代縣) 파룬궁수련생 쑹유춘(宋有春)은 2000년 윈청(運城) 노동수용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그의 부고는 2년 후에야 외부로 알려졌다.


쑹유춘이 생전에 찍은 사진

'宋有春遗照(身后是师大的4号教学楼)'
산시 다이현 파룬궁수련생 쑹유춘   ‘쑹유춘이 생전에 찍은 사진(몸 뒤쪽은 사범 대학교 4호 강의동임) ’

나와 쑹유춘은 산시 사범 대학교의 동창이다. 쑹유춘은 학교에 있을 때 쑹융쥔(宋永俊)이라고 불렸다. 그는 사범 대학교 중문학과 1997년 졸업생이다. 졸업 후 산시성 다이현2중학교에서 국어교사를 맡았다.

쑹유춘은 1996년에 산시 사범 대학교에 있을 때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사범 대학생들의 연공장 보도원이었다. 그때 우리의 그 연공장은 모두 10여 명의 수련생이 있었다. 매일 아침 5시에 운동장 옆에서 동공(動功)을 연마했고 점심때 단체로 정공(靜功)을 연마했으며 저녁 9시에는 단체로 법공부를 했다. 우리는 2년간 늘 함께 지냈다.

쑹유춘과 아내 두신쥐(杜新菊)는 예과반(預科班) 동급생이었다. 1학년 때 두신쥐는 역사학과로, 쑹유춘은 중문학과로 나뉘어갔다. 1997년 졸업해서 쑹유춘과 두신쥐는 모두 다이현2중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후에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게 됐다. 그들 전 가족은 그의 둘째 남동생 이외에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1999년 7월 22일, 나는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타이위안(太原)으로 갔다가 타이위안성 정부 문 앞에서 쑹유춘을 만났다. 당시 그의 부모, 그의 아내는 몇 달 안 된 딸 위안위안(圓圓)을 안고 함께 청원하러 왔었다. 이번 이별이 뜻밖에도 영원한 이별로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후 쑹유춘이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씻어주려고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0년에 납치당한 다음 중국공산당에 의해 불법적으로 강제노동을 당했다. 산시 윈청노동수용소에서 그는 굳건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잔혹한 학대로 사경에 이르게 됐다. 노동수용소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가족에게 통지하여 쑹유춘을 데려가게 했다. 가족이 데려왔을 때 쑹유춘은 이미 박해로 정신이 희미한 상태였다. 가족이 들것에 들고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쑹유춘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겨우 30세였고 젊은 아내, 어린 아이와 연로하신 부모님을 남겼다.

쑹유춘이 박해로 사망한 뒤, 그의 아내 두신쥐는 극심한 슬픔을 지니고 어린 딸과 함께 취워(曲沃)현 친정집으로 갔다. 그들의 딸은 현재 이미 12세이다. 중공사당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많은 쑹유춘처럼 이렇게 원래 행복하고 화목하던 가정으로 하여금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가정을 파괴했으며 가족을 죽게 했는가?

문장발표: 2010년 08월 22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22/2286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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