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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쓰친가오와, 노동수용소서 박해 당해 걸을 수 없게 돼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네이멍구보도) 올해 34세인 바오쓰친가오와(包斯琴高娃) 여사는 몽골족이다. 이미 전에 헤이룽장(黑龍江)대학 물리과를 다녔었다. 가오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파룬궁수련을 하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심신의 건강을 얻었다. 대학 4학년 때, 마침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때었다. 그녀는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씻어주려고 베이징으로 갔다가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이로부터 네이멍구(內蒙古) 퉁랴오(通遼)시 바오캉진(保康鎭) 집으로 돌아갔으며, 현지 전문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조직 ‘610’의 박해 대상이 됐다. 그녀는 두 번 불법노동교양을 받고, 세뇌반에 한 번 보내졌으며, 한 번 불법구류를 당했다. 10여 년 중 장시기 감독 통제를 당하고 신분증도 압수당했다.

아래에 가오와가 2007년부터 2010년 불법노동교양 기간에 당한 박해를 서술하려고 한다. 이 기간 당한 각종 박해는 그녀로 하여금 지금껏 여전히 걸을 수 없게 했다.

2007년 6월 3일 오전,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된 가오와는 지린시(吉林市)에서 세맡아 살던 작은 단층집에서 바오캉공안국 ‘610’ 두목 인웨이(殷維)와 퉁랴오시공안국 경찰에 의해 납치됐다. 그 후 가오와는 바오캉구치소로 납치됐다. 그곳에서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에 투무지(圖牧吉)노동수용소에 가둬졌다. 당시 바오캉공안국 경찰은 가오와의 부모를 속여 2008년 기한이 차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가오와는 2010년 6월에야 석방됐다.

가오와가 투무지노동수용소에 가둬진 이튿날, 즉 2007년 6월 5일에 노동수용소병원에 보내졌다. 이것은 투무지노동수용소의 관례인데, 무릇 확고한 파루궁수련생은 곧 병원에 보내 전향시킨다. 사실 바로 박해를 가중시켜 핍박으로 파룬궁수련생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가오와가 처음 불법노동교양을 당한 기간 바로 병원에서 전향 박해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곳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병원 문 앞에서 차에서 내릴 때, 가오와는 거절하며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당시 경찰 후훙보(胡洪波)는 가오와를 2층으로 끌어 잡아당겨 갔다. 이 기간 가오와는 높은 소리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멈추라’고 외쳤다. 차를 몰던 기사(임시 직원) 관융리(關永利)는 구둣발로 맹렬하게 가오와를 세 번 찼으며 마지막 한 발은 가오와의 아래턱부위를 찼는데 당시 아주 많은 피가 흘렀다. 당시 중대장 황아이링(黃愛玲)이 줄곧 그 자리에 있었고 또 두 명 여자 감독 통제인원이 있었다.

그 후는 1개월 동안의 강제 전향기(期)었다. 가오와는 음식물주입을 당하고 세우는 벌을 받았으며(장시기간 세워져 발이 찐빵처럼 부어올랐음), 뺨을 맞고 온밤 자지 못하게 했으며 인신공격을 하는 등 박해를 당했다. 경찰은 또 가오와를 다른 감옥으로 보낸다고 위협했다.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여 간부와 경찰들이 내려와 가오와를 전향시켰는데 모두 20여 명이 참가했다. 가오와의 상처를 상관하는 사람이 없어 그녀의 아래턱 상처를 때맞춰 꿰매지 못했던 이유로 큰 흉터가 남았다.

2007년 12월 12일부터 27일까지 기간, 가오와는 여자노동수용소 4층에 보내졌다. 동시에 단독으로 데리고 간 사람은 또 4명 확고한 파룬궁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따로따로 같지 않은 방안에 가둬졌다. 모든 사람은 두 명 임시로 불러온 파룬궁수련생과 두 명 경찰이 동반했다. 그리고 두 경찰은 모두 파룬궁수련생을 도맡아 전향하는 사람이다. 가오와를 책임지고 전향한 사람은 디추화(翟秋華)와 마훙윈(馬紅雲)이다. 그녀 두 사람은 고수인데 아주 사악했다. 이번 가오와는 여전히 세우는 벌을 받고 잠을 자게 못했으며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고 욕하는 등등을 겪었다. 다만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세워놓는 시간이 더욱 길었을 뿐인데 가장 오래 동안 한 번은 연속 36시간 세워놓았다. 이번엔 뺨을 파리채로 때렸는데 얼굴피부가 다 벗겨졌다. 당시 디와 마는 두 파룬궁수련생을 내보내고는 그녀 두 사람이 동시에 가오와의 얼굴을 때렸다. 당시 가오와가 박해로 심장병이 발작해서야 연속해서 혹독한 구타를 하지 않았다.

2009년 12월 17일, 점심밥을 먹을 때, 감옥경찰 인구이쥐안(尹桂娟)은 갑자기 가오와를 나와 줄을 서게 했다. 인은 다짜고짜로 가오와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밖으로 향해 잡아당겼으며 아울러 두 일반 죄수에게 명령해 가오와를 아래층으로 들고 가게 했다. 가오와는 거부해 줄을 서지 않았다. 게다가 대장 자메이(賈梅)와 담화하도록 요구했다. 일을 해결하지 못했던 원인으로 가오와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인은 이 기간 줄곧 싸움을 걸면서 “능력이 있으면 영원히 먹지 말라. 나는 당신을 실험으로 삼아 사람이 밥을 먹지 않아서도 며칠을 견디나 보겠다. 내가 자베이에게 당신 상황을 말했다. 자대장이 말하기를 밥을 먹지 않으면 당신에게 형기를 더 가하라고 하고 당신을 독방에 가두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가오와는 7일간 단식했지만 어느 한 대장이 상황을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감옥경찰도 멀리 피해갔다.

2009년 12월 25일, 점심밥을 먹은 뒤, 인은 여전히 가오와를 세워놓았으며 아울러 식당 1층에서 마구 두들겨 패고 가오와의 귀뺨을 손바닥으로 사납게 10차례나 넘게 때렸다. 그리고는 가오와를 2층으로 들어갔으며 만약 까무러치면 침을 꽂으면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 큰 소리쳤다. 2층에서 구둣발로 가오와의 왼쪽다리 허벅지를 세번이나 맹렬하게 찼다. 고문학대를 당할 때 가오와는 줄곧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어지러운 대걸레에서 잡아당겨낸 천쪼각에 입을 틀어막혔다. 가오와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몇 명 악인이 동시에 가오와를 내리 누르고 강제로 잘라 버렸다. 이번 혹독한 구타의 학대는 가오와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얼굴이 부어오르게 했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왼쪽다리 허벅지 부위는 크게 퍼렇게 멍들었는데 한 달동안 잠을 잘 때 몸도 돌리지 못했다.

2009년 12월 27일, 가오와는 재차 단독으로 4층에 가둬져 강제 전향을 당했다. 이번 전향은 9월말부터 시작했는데 두무지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모든 파룬궁수련생을 겨냥했다. 매번 전향박해를 하기 전에는 체벌을 주로 하고, 이후에는 교란과 사오(邪悟)를 주로 했다. 가오와가 이번에 당한 것은 뒤의 것이다. 두무지 노동수용소에서는 외지에서 많은 배신자를 청해왔다. 또 이른바 전문가와 배신자를 포함해서인데 상이잉(尚意英), 우란하오터(烏蘭浩特)의 리구이밍(李桂銘), 츠펑시(赤峰市)의 자오슈펑(焦秀峰)이다. 이 세 사람은 선동력과 파괴력이 극히 컸는데 이후에 가오와 이외, 많는 매우 확고하던 파룬궁수련생들도 미혹돼 전향됐다. 가오와를 전향하지 못한 이유로 그들은 또 가오와를 이른바 중대로 돌려보냈다. 외부에서 류제(劉捷)라고 부르는 남자를 청해왔는데 그는 바오터우(包頭) 사람이다. 이 사람은 40여 세인데 파룬궁 내부에 들어갈 것을 표명했으며 뿐만 아니라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중대한 손실을 조성했다. 우란하오터의 리구이밍은 후시(呼市)여자감옥에서 3년 판결을 받았었는데 1년 넘게 있고 곧 사오하고 나왔다. 또 네이멍구대학의 한 남자 교사도 전향에 참여했다(이름은 분명하지 않음).

가오와는 2010년 6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동수용소에서 장시기 당한 각종 학대와 또 오랜 시간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이유로, 어릴적부터 소아마비에 걸렸던 가오와는 현재 걷기도 불편해져 다만 집에서 휴식하는 수밖에 없다.

가오와는 본래 재능이 출중한 대학생으로서 원래 고향의 교육사업을 위해 공헌을 할 수 있었다. 바오캉공안국의 박해 때문에 그녀는 자유롭게 걸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 변했다. 직접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바오캉공안국의 바이위화(白玉華), 샤오중(肖鍾), 허바건나(何巴根那), 위칭린(於慶林), 인웨이(殷維) 등이다. 그들은 직접 납치 박해에 참여했다. 10여 년 중, 가오와의 신분증은 바오캉 공안국에 압수당했으며, 줄곧 자유롭게 일하는 공간이 없었는데 경제손실도 10여만 위안에 달한다. 직접 가오와를 붙잡은 위칭린은 이미 악보를 당해 2004년 11월에 입으로 피를 토하고 사망했다. 인웨이도 가오와를 박해한 이유로 가족에게 화가 미치게 했다(그의 노모는 병도 없이 갑자기 사망했음).

우리가 이 사례를 폭로하는 것은 그래도 여전히 공산당을 도와 나쁜 일을 하는 그들 경찰들이 속히 박해를 멈출 것을 진심으로 희망해서이다. 바오캉의 동네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푸른 하늘을 돌려달라.

관련 정보

류제(劉捷) 15847202233

리구이밍(李桂銘) 15048259127

네이멍구(內蒙古) 퉁랴오(通遼)시 바오캉 (保康)공안국 우편번호 0293000

문장발표: 2010년 08월 23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23/228682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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