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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교사 딩파둥, 박해로 사경 중에 살아남다

[밍후이왕](밍후이통신원 닝샤보도) 딩파둥(丁發棟)은 원래 닝샤(寧夏) 인난1소중학교(銀南一所中學)의 우수교사이고, 닝샤 우수 키보드 연주자인데, 그의 음악작품은 이미 전에 제1차 전국 중국음악대회에서 상을 탄 적이 있다.

딩파둥은 1998년 말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련한지 오래되지 않아, 20여 동안 그를 괴롭히던 질병이 기적적으로 사라졌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법리는 그로 하여금 인생의 진정한 참뜻을 깨우쳐주었으며, 이로부터 신념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딩파둥은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고,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려 한 이유로 여러 차례 중공 당국에게 불법적인 납치를 당했으며, 불법적인 강제노동을 세 번 받았다. 수감소, 노동수용소에서 사악한 경찰(이하 악경)은 그를 핍박하여 수련을 포기시키려는 목적에서, 수감된 죄수들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그를 학대하였는데, 그 기간에 사경 속에서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래는 딩파둥이 말한, 그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의 심신변화와 10여 년 이래 당한 갖가지 박해이다.

대법을 얻은 전후는 두 세상이다

나는 딩파둥이라고 부르는데, 올해 48세이다. 부모가 출신 성분이 높다는 이유로 중공 전제 아래에서 갖가지 마난을 겪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심신상으로 엄청난 타격을 겪었으며 또 늘 피를 토하였다. 당시 농촌의 생활환경하에서 비록 나이가 아주 어렸지만, 항상 아픔을 참아가면서 일을 하였다. 그러한 환경 아래에서 일가족이 온 힘을 다해 1년을 고생해도, 집안 식구를 가까스로 부양하는 정도 밖에는 안되었다. 어느 집에 환자가 나타나 병치료를 하자면 그건 정말로 가산을 탕진해야 한다. 병치료를 하는 이런 일은 우리와 같은 그런 가정에 대해서는 정말로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항상 꿈에서 놀라 깼는데, 심한 아픔에 온 몸이 땀 범벅이 되었다.

나는 병마의 시달림 속에서 독학으로 대학 음악과에 합격되었다. 졸업 후 인난1소중학교에서 교사가 되었다. 근무기간에 이미 전에 우수교사, 닝샤우수키보드연주자로 선정되었으며, 첫 인난 교가를 창작한 적이 있다. 음악작품으로 전국 제1차 중국음악대회에서 상을 탔으며, 여러 차례 교육계의 문예합동공연에 참가하여 다방면으로 창찬을 받았다.

나는 비록 업무 하는 가운데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되어 즐거웠지만, 신체의 병고는 경감되지 않았다. 아울러 내가 일하는 데 있어서 더욱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 일체에 직면해서 나는 부득불 사람이 살아 있는 최종의의와 가치는 무엇인가, 사람은 현실 중의 자아를 초월하여 진정한 의의에서 생명의 갱신을 실현할 수 있을 지를 골똘히 생각해야 했다.

1998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인촨(銀川)공원에서 어떤 사람이 땅 위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는데, 곧 차를 불러 이 사람을 병원에 보내어 응급치료를 하도록 했다. 이번의 선행으로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만나게 되었다. 대법을 얻은 후, 짧은 몇 달 동안에 나는 병 없이 온 몸이 거뿐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이로부터 20여 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역사가 끝났다. 나는 평생에 처음으로 생명과 그 미래에 대해 이처럼 완전히 새로운 인식과 체험이 있게 되었다. 진리의 그런 관대하면서도 홍대(洪大)한 지혜와 역량에 감동되어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나는 점점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해야 사람이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항상 자신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감을 느꼈다. 걷는 것도 나는 듯이 가볍고 빨랐다. 완전히 과거에 발걸음을 내딛기가 어렵고, 걸음이 좀 빨라지면 곧 피를 토할 것만 같던 곤란하던 증상이 없어졌다.

수련의 신념을 견지하여 박해를 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개인의 질투에서 출발하여, 헌법을 위배하고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나는 단지 정부와 진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이야기해 준 이유만으로 닝샤 당국의 여러 차례 불법납치, 감금,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세 차례 당했다. 수감소와 노동수용소에서, 나는 핍박으로 혹독한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악경은 수감된 죄수들에게 지시하여 나에 대해 여러가지 학대를 진행하였다. 강제적 세뇌와 강건책과 유화책을 함께 쓰는 박해로 나는 사경 속에서 요행히 살아 남게 되었다. 후에 악인은 또 끊임없이 나의 거주지를 여러 차례 교란하였는데, 나는 핍박으로 거처를 잃고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아래에 간단명료하게 내가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한 것들을 이야기 하겠다.

연공해서 납치와 구류를 당하다

1999년 ‘7.20’이후인 어느 하루였다. 나는 한창 공원에서 연공을 하다가, 펑황제(鳳凰街)파출소의 경찰에게 납치 되었다. 그들은 허위로 꾸민 신문, 방송 보도를 반복적으로 내게 보여주며 연속으로 나를 기만하고 독해하였다. 그들은 기만하는 행위로 가족에게서 대법서적 몇 권을 사기해 갔으며 아울러 연공하는 사람은 모두 정신병이라고 비방하였다. 나는 그 당시에 그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려주지 않아, 그들이 여전히 기만 당했으므로 공산당을 도와 나쁜 일을 하게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불안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걸어 나와서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는 결심을 내렸다.

어느 날 내가 한창 연공장에서 연공을 하고 있었는데, 진상에 똑똑하지 않은 노부인이 경찰에게 고발했다. 두 경찰은 나를 싱칭구(興慶區)공안분국으로 납치하였으며, 나에게 15일 불법구류를 시켰다. 막 구치소에 들어가서 나는 그들에게 “머리는 가히 떨어질 수 있고, 피도 흘릴 수 있지만 파룬따파는 잃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에게 파룬궁은 박해를 당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당신은 들어가 연마 하십시오. 어떻게 연마해도 다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구치소 안에서의 급식은 채소국물 두 끼거나 혹은 거의 국물만 있는 칼국수뿐이었다. 어떤 때에는 옥수수떡 하나를 더 보탰는데,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들 말하였다. 나는 언제나 겨우 그것뿐인 칼국수거나 혹은 옥수수떡을 다른 수감자들에게 남겨주어 먹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대법이 좋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란 것을 인정하였다.

합법적으로 청원을 해 불법감금을 당하다

2000년 7월, 관련부문에 솔직한 말을 하기 위하여, 나 자신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나는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민원사무소를 찾는 과정에 여러 차례 경찰의 세밀한 조사를 받았고, 구타와 욕설을 당했다. 내가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기에 그들은 그래도 나를 가게 하였다. 어느 날 나는 집에 돌아 가려고 하였다. 광장에 앉아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 경찰이 다가와 내가 한창 『전법륜』을 보고 있는 것을 보더니 곧 나를 현지 역 파출소로 납치 했다. 그리고 또 베이징주재 닝샤사무소로 보냈다. 그날 밤 베이징주재사무소에서는 나에게서 겨우 70위안 밖에 남지 않은 돈마저 빼앗아 갔다. 며칠 후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닝샤 인촨시 신청(新城)공안국으로 납치 당했다. 그 다음에 또 나를 싱칭구(興慶區)분국으로 보냈다. 두 경찰이 나를 심문할 때 한 사람이 흉악하게 나를 땅 위에 때려 눕혔다. 한참 후 두 사람은 모두 앉아 있지를 못했는데, 그 중 나를 때린 그 경찰이 어찌된 일인지 배가 왜 이렇게 아프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누가 금방 대법을 모독하고 대법사부님을 욕했냐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몇 사람은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막 수감소에 오자마자 오른쪽 눈 위를 한대 가격 당했다. 나를 때린 감옥졸개는 살인범인데 이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큰형이라고 불렀다. 방 안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 오기만 하면, 감옥졸개가 눈짓만 하면 다른 죄수들이 곧 한꺼번에 떼지어 몰려와 사람에게 한바탕 폭력을 가하거나 혹은 바지를 벗기고 신발바닥으로 둔부를 후려치거나, 혹은 냉수를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끼얹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고비를 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도 이렇게 대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수련생을 이렇게 대하면 죄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일부 죄수들은 사악한 경찰의 지시를 받고, 내가 연공하고 진상을 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연공하면 그들은 곧 라이터나 기이한 물건으로 나의 발을 태웠으며, 기이한 물건으로 나의 콧구멍을 찔렀다. 매일 일하러 가서는 주로 아교를 떼어내는 작업을 했다. 대장은 수감된 죄수에게 지시하여 고의적으로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임무를 더 많이 분배하였는데 시간이 돼도 임무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면 때리고 욕하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 환경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모두 모순이 있게 된다. 손톱틈새가 갈라져 상처가 생겨 밖으로 피가 흘러나왔으며, 손가락에 상처가 났는데, 치아로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아교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돌볼 틈이 없었다. 어떤 때에는 고추를 찧었는데, 마찬가지로 임무를 분배했다. 다 하지 못했거나 혹은 맨 마지막 하나를 하고 있다고 해도 ‘철인자국을 박는’ 처벌을 받게 된다. 죄수는 강박으로 나에게 감옥규정을 외우게 하였다. 나는 줄곧 협조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파룬궁은 박해를 당한 것이고 우리는 무고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는 흐지부지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심신변화와 수련계 중의 일들을 알려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듣기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원한이 없었으며 오직 선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38일간 불법감금 당했다.

진상을 알리어 1년 반 불법 강제노동을 받다

2000년, 나는 진상을 알리는 문장 한편을 써서 여러 장을 프린트해 공개적으로 내다 붙였다. 이튿날 오후, 원화제(文化街)파출소의 세 사람이 나의 집에 뛰어 들었다. 그 중 성이 장(張)가인 주임이 나에게 “당신의 이곳에 또 무엇이 있는가? 꺼내어 우리도 학습 합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남은 몇 장을 꺼내놓았다. 그들은 자료를 손에 넣은 후 “아이를 잘 맡겨두고, 우리를 따라 갑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수감소에 납치 되었다.

5일간 지난 후, 나는 싱칭구분국의 경찰 세 명에 의해 우중 바이투강쯔(吳忠白土崗字)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금방 차에서 내리자 한 경찰이 종이 한 장을 꺼내고는 “위에 서명하시오!”라고 소리를 쳤다. 그리하여 나는 위에다 “마음 닦고 선을 행하였는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썼다. 그 경찰은 또 “죄를 승인하지 않고 거부하면 강제노동 5년을 더 가한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 목숨은 진리를 위해 왔다. 5년이면 또 어떠한가, 당신에게 결정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노동수용소의 궈원즈(郭文智) (이 사람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여 이미 업보를 받아 의외의 사고로 사망)는 나를 큰 방안에 가뒀는데, 안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한 수련생을 보고 다가가서 그와 악수를 하였다. “당신은 어떻게 되어 이곳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아직 대답도 듣기 전에 곧 3, 4명의 죄수들이 나를 때려눕혔으며 또 끊임없이 나를 밟았다. 10여 분이 지나서 그들은 그제야 멈추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곳의 사악함과 공포감을 느꼈다. 때린 사람은 바로 그들 민관회(民管會)의 사람들이다.

이 노동수용소에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부터 저녁 전등을 끄기까지, 때리고 욕하는 사건은 늘 발생하는데, 누가 눈에 거슬리게 되면 곧 때린다. 사악한 경찰(이하 악경)은 평소에 ‘5화(五化: 세뇌박해를 하는 항목), 노래 부르기, 위생검사, 체조 훈련’등 형식을 사용하여 사람을 못살게 군다. 그 수단의 악독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몸서리 나게 한다. 누구의 문제인지를 검사 해내기만 하면, 그럼 바로 그가 재수없게 된다. 어떤 것은 바로 사람을 못살게 굴려고 트집을 잡는다. 처음 처벌받는 어떤 사람은 끌려 나가서 얼굴 위를 한 대 가격당하는데 당시 곧장 그 사람을 땅 위에 때려 눕힌다. 어떤 사람은 곡괭이 자루로 후려 쳤으며 게다가 손과 발로 치고 박고 하고는 귀뺨을 때렸다. 이렇게 때리고 욕하는 것은 밥 먹 듯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종 그들에게 진상을 알게 하고, 眞, 善, 忍 은 좋고 파룬따파는 좋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와 그 수련생은 함께 협력하였다. 진상을 알리는 것을 통해 차츰 환경이 개변 되었는데, 후에 또 어떤 사람은 묵묵히 『홍음(洪吟)』을 외웠다. 그러나 매번 이때면, 대장은 파룬궁을 못살게 구는 목적에 도달 할 수 없음을 발견하는데, 곧 다시 하나의 새로운 환경을 바꾸어 계속해서 박해 하였다.

평소에 체조를 훈련시킬 때, 그들은 고의적으로 트집을 잡아 나를 박해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동수용소 인원을 시켜 나에게 뺨을 때리게 하거나 혹은 체조 훈련을 시킬 때 고의 적으로 나를 틀리게 하였다. 악경은 대두신발을 신고 나를 밟았으며, 손에 가죽수갑을 끼고 뺨을 때렸다. 어떤 때에는 또 벽돌을 주워와서는 나의 등에 박았다. 한번은 그들이 때리고 욕한 후에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을 강제로 노동수용소운동장의 큰 바람이 통하는 곳으로 끌고 갔다. 겨울에 찬바람이 매섭게 추웠다. 우리는 얼어서 계속 덜덜 떨었다. 이렇게 1시 넘게 서있었는데, 거이 손발이 다 얼어 붙게 되게 되어서야 우리를 숙소로 돌아 오게 하였다.

노동수용소의 악경은 우리를 ‘전향’(즉 우리를 핍박하여 수련을 포기시킨다)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들의 위선과 기만 수단은 우리에게 간파 당했다. 그들은 곧 우리를 벽돌로 쌓은 아치형 동굴 집에 보내 노역 일을 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데,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10여 시간을 무게가 이 천여 근 되는 차를 끌고 가마를 실었다. 매번 내가 끌 수 없게 되면, 왕바오바오(王寳寳 수감자 반장)은 가죽 채찍으로 나를 후려쳤는데, 줄곧 내가 맞아서 땅 위에 쓰러질까지 후려쳤다. 또 강박으로 나를 일어나게 하고는 연속해서 후려쳤다. 이렇게 하고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다 때린 후 또 연속해서 차를 끌게 하였으며, “무거운 차면 달리고, 빈 차면 날아라!”라고 말했다.

어느 하루는 큰 눈이 내리며 눈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얇은 옷을 입고 끊임없이 달렸다. 온 몸은 모두 땀에 푹 젖었으며, 옷은 몸 위에 달라 붙었다. 나는 추위도 잊고 고통도 잊었다. 마음속에는 사부님이 있고 대법이 있었기에, 고난은 나를 개변할 수가 없었다. 이 기간에 대장은 항상 나를 찾아 담화를 하였다. 이런 강제적인 노동에 의거해 나의 의지를 개변할 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은 또 포기해 버렸다. 당시 바로 겨울철 벽돌공장의 일이 금방 끝나자 곧 다른 대대로 옮겼다. 이 2대대의 겨울철 노동임무는 벽돌공장의 흙을 쌓는 일이다.

노동수용소의 2대대는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하는 가장 사악한 곳이다. 하급분대로는 네 개 분대가 있다. 한 수련생은 3분대로 갔다.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2분대로 나뉘어 왔다. 이 2분대에는 두 반이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각각 한 반에 한 사람씩 나뉘어 갈라지게 되었으며, 매 반에는 20명이 있었다. 그날 저녁 1분대와 2분대를 합하여 함께 회의를 열게 되었다. 반장이 둘 이었는데, 하나는 왕샤오융(王曉勇)이라고 부르고, 하나는 저우중핑(周仲平)이라고 부른다. 그들과 몇몇 죄수는 나의 머리 위, 얼굴 위를 손바닥으로 맹공격하거나 혹은 뺨을 때리거나 혹은 발로 가슴을 찼으며 주먹으로 갑자기 등 뒤를 가격하였다. 반장이 말하기를 “마음대로 때리고, 마음대로 욕해도 좋다. 마음대로 그들을 모욕해도 괜찮다.”라고 했다. 후에 그들은 두 손으로 나의 목 주변의 대동맥을 눌렀다. 순간적으로 나는 숨이 끊어지는 듯하면서 졸도하였다. 그들이 말하는데 이것을 ‘작은 죽음을 한번 당하다’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매 하나의 뒤틀려 일그러진 얼굴들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간사하게 웃고 어떤 사람은 음랭하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으며, 어떤 사람은 크게 웃었다. 그들은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는 각서를 쓰라고 하였다. 내가 쓰지 않자 그들은 사악하게 “좀 처리하기 곤란한데, 노력을 들여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후의 나날에, 이 두 반장은 나쁜 사람과 어울려 함께 못된 짓을 할대로 다 했다. 또 다른 죄수가 있었는데 대장에게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앞당겨 집에 갈수 있음) 자신의 영혼을 팔아 먹는 것도 서슴지 않고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하였다.

2대대에 온 후, 나는 매일 반드시 3시에 일어나야 했는데 다른 사람은 5시에 일어났다. 일어난 후 바로 서게 하고 이른바 ‘23호령’을 외우거나, 혹은 낡은 털옷이나 털 내복 바지로 땅을 닦았다. 그때는 겨울철이어서 나의 두 손이 얼어 벌겋게 부어 올랐다. 7시경부터 일하러 나가 흙을 쌓았다. 사람마다 모두 임무가 있으며,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면, 노동수용소로 돌아와 철 의자에 앉거나 혹은 곡괭이 자루로 혹독한 매를 맞는다. 어떤 사람은 곡괭이 자루에 맞아서 다리를 다쳤는데, 이튿날 여전히 일하러 나가야 했다. 무슨 원인으로 일하러 나갈 수 없게 되든 지를 막론하고, 반장은 곧 소리 치는데 “화타(華佗)를 모셔라!”라고 한다. 그러면 즉시 몇몇 사람들이 곡괭이 자루를 들고 “엎드려라! 화타가 살아 있다, 전문적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을 치료한다!”라고 고함치면서 즉시 곡괭이 자루로 한바탕 혹독하게 때린다. 병이 있는 사람도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러 나갔다가, 휴식하려고 대장에게 요구하려 해도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12시 전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이들 죄수들은 잔혹하고 변태적인데 사람을 학대하는데 쓴 수단은 공포적이고 잔인하다. 어느 한번, 나는 ‘성성이’라고 부르는 죄수에게 “파룬궁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게 가르친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눈을 겨냥하여 한 대 때렸다. 나의 눈은 당시에 곧 아주 크게 부어 올랐다. 매일 일하러 나갔다 와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식하지만 반장은 나를 강박하여 끊임없이 마룻바닥을 닦게 하였으며, 또 ‘나는 바닥을 닦기 좋아한다, 나는 바닥을 닦기 좋아한다’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줄곧 일하러 나가는 시간까지 닦았다. 그런 다음 또 함께 일하러 나갔다. 반장 저우중핑은 한 수련생이 쓴 연공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가져와서는 나에게 쓰라고 했으며 “노동수용소에서만 연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부터 누구도 당신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대장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또 말하는 것이 “당신들은 진, 선, 인을 수련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주지 않는가? 당신이 이렇게 우리에게 주는 압력이 너무나도 크다. 우리는 매일 모두 당신을 위해 걱정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다 쓴 다음, 그들은 또 대장에게 가져다 바쳤다. 나는 그제야 이것이 그들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음험한 수법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나는 단호히 내가 썼던 것들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박해를 가중시켰다.

주말에 실시하는 모든 위생검사는 가장 공포적이다. 사람마다 한 구역씩 책임지고 청소한다. 만약 그 사람을 못살게 굴려면 청소를 어떻게 깨끗이 했든 지를 막론하고, 그들은 이것도 트집을 잡아 이 사람을 때리지 않으면 욕한다. 매번 위생검사에 불합격인 사람 중에 모두 파룬궁수련생이 있다. 사람을 때릴 때, 만약 곡괭이 자루를 찾지 못하면 또 삽 자루를 쓴다. 어느 한번 내가 검사에 불합격되었는데, 몇 사람이 나를 눌러놓고 뒤에서 한 사람이 못이 달린 삽 자루로 나의 둔부를 호되게 네 번이나 후려쳤다. 나는 즉시 땅 위에 쓰러졌으며, 피물이 순간적으로 나의 바지를 적셨는데, 아울러 바지와 함께 붙었다. 며칠 후 한 죄수가 나를 좀 봐줬는데 “염증이 생겼습니다. 또 밖으로 핏물이 흐릅니다! ”라고 말했다. 피가 흐르고 고름이 생겨서 나는 몸을 기울여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만약 어느 날에 비가 내리거나 혹은 눈이 내려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면, 곧 나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5화’항목을 외우게 하여 박해했다. 입을 열지 않으면 곧 때렸다. 몇 글자를 잘못 불러도 곧 손바닥을 몇 번 때리는데, 나무 오리로 손을 때렸다. 손이 맞아서 부어 오르면 곧 발바닥을 때렸다.

하루는 한 밤중 세시에 두 명의 민관회의 두 사람이 왔는데, 하나는 가오커(高克)라고 부르고, 하나는 왕웨이(王維)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을 일으키고는 “어제 저녁에 중앙텔레비전의 프로그램 푸이빈(傅怡彬)의 살인 사건을 보았다. 당신들은 전향(수련을 포기)하지 않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가짜이다. 진, 선, 인의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즉시 우리 두 사람을 복도로 끌고 가서는 마구 구타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호흡이 곤란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욕하면서 나를 일어나게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또 날뛰면서 팔꿈치로 힘껏 나의 등을 찧어 놓았으며, 입으로 “지금 당장 각서를 써라. 쓴 것이 부적합하면 혼날 줄 알라.” 라고 욕했다. 우리 두 사람은 단호히 쓰지 않았으며 그들은 화가 나서 노발대발하였다. 맨 마지막에는 흐지부지해졌다. 후에 그들 두 사람은 깨우쳤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우러나와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에 참여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깨우친 것에 대해 진정으로 기뻤다.

어느 날 저녁, 반장 저우중핑이 고의로 전등을 끈 후, 반장 왕샤오융이 온갖 방법으로 나를 학대했다. 터무니없이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웃옷으로 나의 머리를 씌우고, 삽 자루를 잡아 쥐고는 나의 머리부위를 가리키면서 흉악하게 “오늘 말을 똑똑히 하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려니 생각지도 말라.”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나를 벽 모서리로 잡아당겨갔으며, 두 손으로 나의 어깨를 꽉 잡고는 무릎으로 나의 흉부와 복부를 맹공격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방법을 바꾸어가며 줄곧 한 밤 중 1시경까지 학대했는데, 그는 지쳐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떠나기 전에 화가 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이 어른이 있는 한, 당신이 하루라도 전향하지 않으면 이 어른이 당신을 하루라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 어른을 비틀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 함께 두고 보자.”라고 말했다.

어느 날 점심, 내가 한창 땅바닥을 닦고 있는데, 별명이 아룽(阿龍)이라고 부르는 죄수가 다가와서 나를 향해 맹렬하게 한 발 찼다. 나는 당시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빙빙 도는 감을 느꼈으며, 땅바닥에 쓰러져 갑자기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약 5분 정도 지나서야 나는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흉악하게 “죽은 체 하지 말라.”라고 소리질렀다. 나는 다만 온 몸의 세포마다 모두 질식할 것만 같은 감을 느꼈다. 후에, 나는 천천히 침대로 움직여가서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이 죄수의 행위는 뜻밖에도 기타 죄수의 칭찬을 받았다. 반장 저우중핑은 또 위협하면서 “누구도 대장에게 보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 눈을 크게 뜨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봐라! 당신 하나 죽어도 헛되이 죽게 된다. 작은 병아리를 꽉 잡아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없다.” 라고 말했다. 왕샤오융이 덮쳐와 “회보하든지 말든지, 그 사람은 이곳이 그의 집 노동수용소인가 하고 여긴다.”라고 말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극심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나는 일하러 나가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저우중핑은 즉시 “화타를 모셔라!” 하며 고함쳤다. 그리하여 한 무리 사람들이 덮쳐와서 멀쩡한 물건을 산산조각 내듯이 나를 들어올렸다. 무수한 주먹이 나의 몸 위에 떨어졌는데, 나는 그 고통이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고, 죽지도 못하고, 외치려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즐거워하면서 계속 비웃었다. 저우중핑은 여전히 끊임없이 나의 예민한 부위를 때렸다. 극도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당시 죽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렇다 할지라도, 이튿날에는 또 일하러 나가야 했으며, 임무도 예정대로 완성해야 했다. 갈빗대가 부러진 것과 갖가지 상처의 고통은, 나로 하여금 시시각각 모두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생활하게 하였고, 걸을 때는 반드시 허리를 구부려야 했으며, 손으로 힘껏 왼쪽 갈빗대를 받쳐주어야 했다.

어느 한번은 아침 체조를 끝내고 감옥 숙소에 돌아왔는데, 저우중핑은 내게 3대대의 파루궁수련생과 말을 한적이 있냐고 질문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와 말을 할 수 있냐고 말했다. 저우는 느닷없이 나의 배를 명중해서 힘껏 발길질을 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빙빙 돌았으며, 즉시 질식했다.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는 몰라도, 극도의 아픔이 나로 하여금 의식을 회복하게 하였으며, 곧 그 흉악한 얼굴을 보았다. 몸부림치면서 땅 위에서 기어 일어나려고 하였는데, 저우는 “당신 뭘 멍청한 척 하는가! 누구도 그를 부축이지 말라!”라고 고함질렀다.

연속해서 혹독한 구타를 당하고 매일 노역을 하였는데, 나는 화장실마저 가기도 곤란해졌다. 매번 걸을 때면 반드시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옮겨야 했다. 저우는 내가 이렇게 된걸 보고, ‘서로 협력해서 감시할 것’을 분부하여 누구도 나를 부축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대장이 이 일을 알게 되었으며, 나에게 무슨 요구사항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휴식해야겠다고 말했다. 대장은 내가 가히 두 달 동안 휴식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나에게 이렇게 처리하면 만족하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 어쨌든 나는 무고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나는 거절하였다. 그들은 곧 강제로 나에게 약을 주었다. 내가 협조하지 않자, 그들은 곧 강박으로 나에게 약을 먹게 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즉시 변했으며, 나를 계속해서 일하러 나가게 하였다.

그들은 내가 당한 박해가 외부의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 가족이 나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그래도 방법을 강구하여 나를 만났다. 그들이 노동수용소의 대문에서 나를 만났을 때 내가 학대로 피골이 상접해지고, 걸을 때에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한 손으로 갈빗대를 받치고는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문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전부 다 울었다. 여동생은 당시 울며 기절해 넘어갔다. 그들에겐 여전히 내가 당한 박해를 숨겼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조심하지 않아 넘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속였다.

우리를 ‘전향’시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들은 온갖 수를 다 짜냈다. 대장들은 노동수용소의 수감자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도 목적에 도달할 수 없게 된 것을 발견하고는, 나를 찾아와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수용소의 쉬(徐)간사가 나를 찾아 반복적으로 물어 보았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꼭 파룬궁을 굳게 믿으려 하는가, 그래 이 세계에서 단지 파룬궁만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우려할 것 없이 집을 버리고 사업도 버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세상이 이렇듯 큰데, 진리를 따르는 이것이 왜 이렇게도 어려운가?”고 생각하였는데, 눈물이 샘솟듯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정말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부님의 『시드니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자살은 죄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 또 이 생각을 포기하였다. 또 어느 한번, 지도원 후중린(胡忠林, 이 사람은 이미 악보를 당했음)이 나와 얘기를 하였다.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저녁 9시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시종 내가 대법을 굳게 믿는 태도를 개변하지 못했다.

후에 노동수용소에서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전향’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생들이 단체로 일주일간 단식으로 항의하자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곧 2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을 전 구(全區)의 각 노동수용소로 분산시켜 보냈다. 나와 다른 두 명의 수련생은 닝샤 싸이마(賽馬)시멘트 공장(닝샤 계독2소는 싸이마의 노동인력지점 중의 하나이다)에 나눠져 시멘트를 포장했다. 두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은 감옥에 갇혀 6년 판결을 받았는데, 온갖 마난을 겪을 대로 다 겪었다. 시멘트 공장은 도처에 시멘트먼지가 자욱하였는데, 잔타이(站臺)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 병마용(고대에 순장에 쓰였던 병사· 말 모양의 도기 모형)으로 변하였다. 봄, 여름에는 온 몸이 모두 시멘트와 땀으로 뒤섞여 몸 위에 붙어 있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아프고 가렵게 하였다. 날씨가 더울수록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때문에 웃옷을 벗는 수 밖에 없었다. 시멘트에 독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몸에는 물집이 생겼는데, 장시간 동안 가라앉지 않는다. 항상 시멘트를 메는 사람은 두 손의 상처가 벌어져 일만 하면 피가 흘렀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항상 기절하여 현장에 쓰러지는 사람이 있었다. 죽지만 않으면, 이튿날 여전히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가을에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일이 끝나서 작업복을 갈아입을 때는 모두 옥외에서 진행한다. 모두 한차례의 악렬한 고험과 단련을 거쳐야 하였다. 공사장에서 밥을 먹는데 왕왕 시멘트먼지가 섞인다. 적잖은 사람들이 엄중한 규폐병에 걸렸다. 모두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시멘트 공장에서 반 년 넘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한 후 나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3년 불법 강제노동을 당하다

2002년 6월 18일, 나는 닝샤 칭퉁샤(青銅峽)시 공안분국 국보대대에 의해 암암리에 미행당하고 아울러 칭퉁샤시수감소로 납치 되었다. 사악한 자들은 재차 모함하여 나를 3년 강제노동을 시켰다. 칭퉁샤시공안국 레이(雷)국장, 왕하오(王浩), 리정장(李正江)과 우중(吳忠)노교국에서 나를 우중 바이투강(吳忠白土崗)노동수용소로 보냈다. 재차 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소굴로 갔다. 나는 단식으로 항의하였다. 그들은 나를 속여 벽돌공장으로 가게 했으며, 나에게 벽돌을 나르게 하였다. 내가 일하지 않자, 대장 셰쥔(謝軍)은 곧 나를 시멘트 기둥에 등뒤로 수갑을 채워 놓고는, 삼복 날의 뙤약볕을 쪼이게 하였으며, 또 고의적으로 수갑을 아주 팽팽하게 채웠다. 3, 4시간을 채운 후, 나는 그 아픔을 참기가 어렵게 되었다. 거의 전신이 마비됐고, 지각을 잃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걸어야 했다. 약 일주일 후,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칭퉁샤시 시멘트 공장(노동인력지점)으로 보내져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이 지옥 같은 마굴에 들어와, 한 수련생은 이곳에서 학대를 받은 것이 상당히 엄중했다. 그는 공사장 현장에 매달아졌고, 두 발은 시멘트 속에 쑤셔 넣었으며, 사람은 3개월 시멘트 먼지 속에서 괴로움을 당했는데,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었다. 기한이 차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유는 아직 ‘전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박해에 항의하기 위하여, 다른 한 수련생은 머리를 노동현장의 시멘트기둥에 부딪쳐 선혈이 줄줄 흘러 내렸지만, 여전히 사악한 경찰에 의하여 쇠기둥에 2 주일간 채워져 있었다. 나는 노역을 하지 않으려 했기에, 역시 쇠기둥에 채워졌다. 한 번은, 그때 내가 이미 단식한지 여러 날이 지났다. 몸이 아주 허약한데다 뙤약볕을 쪼이게 하였는데, 쇠기둥에 채워진 나는 까무러쳐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을 차린 후 그들이 한창 강제로 나에게 냉수를 쏟아 붓고 있었다. 옆의 한 사람이 “깨났다, 깨났다”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계속 쏟아 부어라.”라고 말했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 나를 ‘전향’시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또 나를 바이투강노동수용소로 옮겨 갔다. 노동수용소에서는 10여 명의 사람들로 된 ‘전향’반을 만들었다. 형기를 감소시켜 주는 것을 미끼로, 각종 음흉한 수단을 동시에 진행하며 세뇌하였다. 모든 전향한 사람은 가히 앞당겨 집으로 돌아 갈수 있었지만, 나는 전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감시인을 이용하여 나에 대한 인신자유를 제한 하였다. 3년간의 강제노동기한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 가는 그 날, 원화제(文化街)파출소에서는 여전히 가만 놔두지 않았는데, 노동수용소에서부터 줄곧 나와 가족을 뒤따라서 파출소로 갔다. 서명을 요구하였는데, 나에게 과격한 말로 거절당했다.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받은 기간에 아내는 혼자 어린 아이를 데리고 힘들게 살아갔으며, 정신이 거의 붕괴되었다. 생활의 무거운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하였다. 맨 마지막에 그녀는 이혼을 선택하였다. 나는 다시 그녀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동의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은 60kg이던 나의 체중이 약 35kg정도로 약해졌으며, 피골이 상접해진걸 보았는데, 우리는 또 다시 재결합하였다.

인촨수감소에서 당한 박해

2005년 11월, 나는 인촨 백화상점 4층에서 보안에게 모함 당했다. 보안과 쳰진제(前進街)파출소경찰은 나를 인촨수감소로 납치해 갔다. 수감소로 막 들어가서, 사악한 경찰은 죄인을 지시하여 몸을 수색한다는 이유로 나의 몸에 지녔던 140여 위안의 돈을 갈취하여 갔다. 이어서 나는 곧 독방에 갇혔고, 호랑이 의자(혹독한 고문 방법)에 3일간 밤낮으로 앉혀졌는데, 실내는 좁고 작았으며 차가운 것이 마치 얼음 집 같았다. 나는 네 명의 사악한 자들에게 전신이 줄로 묶였으며, 인신자유가 없었다. 두 손은 철판 위에 채워졌으며, 물집이 다 생겨났다. 두 발은 호랑이 의자 아래에 채워졌는데, 진작에 지각을 잃었다. 그들은 내가 죽을 까봐 두려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였다. 나를 감옥의 감방으로 끌고 가서는, 내가 지각을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감방 안의 수감자들은 또 나를 핍박하여 일하게 하였는데, 라이터를 포장하게 하였다. 중공 당국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또 나에게 1년 반의 강제노동을 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노동수용소에서 20일 이후, 나는 또 강제로 구 제1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나의 다리는 이미 정상적으로 걸을 수가 없게 되었고, 두 손은 물집이 다 생겼으며, 얼음처럼 차고 무감각해졌는데,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곧 가족에게 알려 나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이번에는 불법으로 20여 일을 감금 당했다. 이 기간, 쳰진제파출소의 소장 리시(李喜), 쉬젠서(徐建設) 등이 또 나의 집에 와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하였는데, 가족과 이웃들도 편하게 있을 수 없게 하였다.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

2007년 여름, 원화제파출소 천완리(陳萬裏) 등 세 사람이 갑자기 나의 집에 뛰어들었으며, 무고하게 나의 전화번호와 핸드폰번호를 조사하여 물어보았다. 2008년 연초, 인촨 시공안국 국보지대 왕만(王滿), 왕스위안(王世元), 형사경찰대대 성이 천(陳)가인 세 사람이 나의 아내가 출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내가 일이 생겼다고 기만했으며, 그에게 한번 가보자고 하였다. 나의 아내가 어디에서 일이 생겼는가고 물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진상전단지를 나눠주다가 납치되었다고 기만해 말했다. 나의 아내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무사하게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 아내의 핸드폰을 빼앗아 갔고, 그녀의 가방을 뒤졌으며, 돈가방을 열어 수색하였다. 전자책과 집문 열쇠를 빼앗아 가고는, 강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택수색을 하였다. 나의 집 컴퓨터 한 대, 셋톱 박스 한 대, 프린터 두 대, 원취싱(文曲星) 반복재생기 한 부, 대법서적, 자료는 무수하게 강탈해 갔다. 나의 아내를 공안국으로 납치하였으며, 이튿날에야 풀어놓았다. 또 나의 집 부근에서 잠복감시를 하였다. 게다가 나의 어린 아들을 미행했는데,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는 핍박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10여 년 이래 나는 ‘진(眞), 선(善), 인(忍)’ 을 견지하며 따랐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하고, 사경 속에서 요행히 살아남았으나, 직장을 잃었다. 가족도 학대를 받을 대로 실컷 받았으며, 친척, 친구들도 연루 당했다.

나는 모든 장쩌민을 추종해 대법과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한 죄인들에게 권고한다. 당신들은 다 알고 있는가? 당신들의 일체 박해 행위는 모두 위법이며, 천리가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은 양심과 도덕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며, 아울러 문서에 기록할 것이다. 진상이 크게 드러날 때면, 당신들은 어떻게 역사의 심판에 직면하겠는가? 파룬궁수련생들은 개인의 안위를 내려놓고, 입이 닳도록 선을 권하는데, 바로 당신들이 자기 고집대로만 하다가 장래에 후회막급인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자신의 미래에 영원한 유감을 남기지 말라!

문장발표:2010년 07월 01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7/1/22627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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