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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맞아 죽고, 왕루이치는 박해 받아 세상을 뜨다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遼寧)성 후루다오(葫蘆島)시 파룬궁수련생 왕루이치(王瑞奇)는 2010년 6월 8일 이른 아침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아내 스잉춘(史迎春)이 사망한지 겨우 80여 일만이다. 스잉춘은 파룬궁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베이징올림픽을 며칠 앞두고 납치를 당한 후 비밀리에 7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3월 17일에 랴오닝성여자감옥에서 감옥경찰이 8명의 죄수들에게 사주하여 그녀를 구타했으며 결국 구타로 사망됐다. 불법적으로 강제노동을 당한 아들 왕줘(王茁)는 부모가 세상 뜬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다.

왕루이치와 아내 스잉춘

왕루이치가 세상을 뜬 후, 가족은 원래 아들 왕줘가 그의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한번 보게 하려고 하였다. 그의 모친이 박해로 사망했을 때, 랴오닝여자감옥에서 시일을 끌었기에 가족은 왕줘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까지 왕줘는 아직도 모친이 세상을 뜬 일을 모르고 있다. 왕줘의 아내는, 왕줘가 이제 두 달 있으면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가 와서 부모가 모두 갑자기 사망한 일을 알게 되면 그에게는 충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흘 휴가만 주는데, 그가 다시 강제노동수용소로 돌아가 강제노동생활을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했다.

왕루이치는 원래 좋은 직장과 좋은 가정이 있었다. 일가족 세 식구는 모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모두 심신에 수혜를 받았으며 행복하고 상화하였다. 왕루이치는 업무든 생활이든 막론하고, 하는 일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했다. 직장 동료든 친척과 친구든 지를 막론하고 왕루이치의 말을 꺼내기만 하면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1999년 7.20 이후 왕루이치의 일 가족 세 식구는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이로부터 행복하던 한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게 됐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11 년간 일가족 세 식구는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이 아주 적었다. 집안에 오래 동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에 아주 두터운 먼지가 쌓였다. 일부 타일이 떨어졌고, 창문마저도 떨어져 나갔다. 오직 2007년 6월부터 2008년 8월 2일 이 기간에만 일가족 세 식구가 모두 집에 있었을 뿐이다. 왕루이치는 네 번 구류를 당하고 세 번이나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당했는데, 이미 불법적으로 8년 동안 감금되었다. 여태껏 아직도 마싼자(馬三家)노동수용소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다.

1. 노 부부가 파룬궁을 연마하여 심신에 수혜를 받다

왕루이치, 1948년 9월 24일 출생, 전문대학 출신, 후루다오시 롄산(連山)구 베이닝단지(北宁社区) 보하이(渤海)가도, 보하이거리 2조 베이닝 12동 4라인 19호에 살고 있다. 후루다오시 롄산구 농업국 기관공무원이며 사무실주임이었다. 왕루이치는 직장에서 이미 전에 연속 여러 해 동안 우수업무수행자, 우수공무원 등으로 평가 받은 적이 있다. 업무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성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공정한 우수직원이었다. 생활 속에서 그는 효자이고, 좋은 남편이며, 좋은 아버지였다.


왕루이치


스잉춘

왕루이치는 몸에 마른버짐, 위궤양을 앓고 있었는데, 기타 기공을 연마하여 효과를 보지 못했기에 1996년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련한지 오래지 않아 두 가지 병이 모두 나았다. 대법이 가져다 준 생명의 은혜 왕루이치가 수련하는 신심(信心)을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스잉춘은 이미 전에 치통, 담낭염, 신경쇠약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려는 생각으로, 그녀는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련한 지 약 1개월이 되자 모든 병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眞, 善, 忍’ 법리의 지도 아래, 수련자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요구하여, 이미 친척들과 이전의 모순을 없앴다. 수련 중에서, 스잉춘은 몸과 마음 모두 개선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일가족 세 식구는 대법을 수련하여 행복하고 상화하였다.

1999년 ‘7.20’이후, 중공 장쩌민집단은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하였다. 왕루이치 일가족은 각각 노동수용소에 보내져 박해를 당했으며, 행복하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게 됐다.

2. 왕루이치가 당한 두 차례 강제노동 박해

2000년 12월 30일은 새 천년이 다가오는 날이다. 왕루이치는 이날 베이징으로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를 설명하러 가려는 결심을 내렸다. 국사무실 관련업무를 다 정리한 후, 국장 양바오타이(楊寳泰)가 왕루이치를 찾아 와 물었다. “베이징으로 가려 합니까?” 왕루이치는 가려 한다고 말했다. 직장의 다른 사람들도 와서 이른바 ‘공작’을 폈는데, 줄곧 오후 5시경까지 했어도 왕루이치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농업국에서는 보하이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는데, 파출소에서 경찰 두 명이 왔다. 한 사람은 양룽구이(楊榮貴)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18, 19세인 성이 차이(蔡)라는 경찰이었다. 왕루이치가 청원하려는 것을 포기하도록 핍박하였고, 이어서 그를 납치해 보하이파출소로 데리고 갔으며, 한밤중인 11시에 후루다오시구치소로 보냈다.

구치소에서, 왕루이치는 ‘파룬따파는 좋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이다’를 외쳤다. 후루다오시 롄산구공안국 국보대대 대대장 장쥔성(張俊生)은 왕루이치를 행정구류로부터 형사구류로 고쳤다. 2001년 1월 8일 후루다오시수감소로 보냈는데, 왕루이치를 지키던 경찰 이름은 류리성(劉力生)이었다. 37일 후 후루다오시노동교양소로 보내 강제노동 박해를 2년간 했다.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루이치는 후루다오시강제수용소에서 강제노동과장 류궈화(劉國華)에 의해 여러 차례 강제적으로 전향을 진행하였다. 당시 파룬궁을 박해한 대대의 대대장은 류자원(劉佳文)이고, 부대대장 추이샤오둥(崔曉東), 교도원 멍칭화(孟庆华), 소대장 류하이허우(劉海厚), 지청궈(季承國)는 일상적인 강제노동으로 박해하는 일을 했다. 왕루이치는 후루다오시위와 시 정부에 상소해서, 사부님의 결백을 말했고, 무조건적으로 불법적으로 감금된 파룬궁수련생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공개적으로 사부님과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루이치는 2001년 11월 30일 저녁에 무고하게 후루다오시공안국 폭동진압 경찰대대에서 두 번째 박해를 당했다. 노동수용소의 10명 악한 경찰들의 혹독한 매를 맞고, 4개의 전기곤봉으로 전기충격을 당하는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2년 어느 날, 롄산구 구위원회서기 리화이위(李懷瑜)는 사람을 데리고 후루다오시 수용소로 와서 왕루이치에 대한 세뇌를 진행하였다. 왕루이치에게 “당신이 지금 전향(수련을 포기)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일자리를 배정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믿는가?”라고 물었다. 왕루이치는 말했는데 “내가 지금 머리가 희어졌다. 설령 머리가 모두 빠졌다 해도 나는 전향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리화이위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어서 사람을 데리고 가버렸다.

불법으로 2년 감금 된 후, 2003년 1월 8일 왕루이치 가족은 후루다오시 노동수용소로 그를 데리러 갔다. 후루다오시 수용소에서는 그가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어 주지 않았으며, 롄산구 보하이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보하이파출소 부소장 류주둥(劉久東)과 구역경찰 쭤융펑(左永鵬)이 경찰차를 가지고 후루다오시노동수용소로 갔으며, 왕루이치와 가족을 함께 보하이파출소로 데려갔다.

직장으로 돌아 온 후, 왕루이치는 평소 업무성적이 특별히 좋았었기에, 그가 2년 강제노동기간의 월급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2003년 7월 27일 오후 세시가 넘어서, 농업국기관의 간부회의가 끝나자, 부국장 구전펑(谷振峰)가 왕루이치를 불러 함께 국장 류징쯔(劉景字)사무실로 찾아 갔다. 앉은 후, 류징쯔는 왕루이치를 ‘싱청(興城)세뇌반’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왕루이치는 집에 가서 준비하겠다고 말하고는 이 기회를 타서 집을 나갔다.

2003년 8월 중순, 롄산구 구 정부에서는 구장사무회의를 소집하고, 왕루이치가 무단으로 15일 이상으로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루이치의 공무원직무를 해직시켰다. 당시의 소장 왕후이옌(王會巖), 인사국국장 왕궈장(王國江), 농업국국장 류징쯔가 모두 회의 장소에 있었으며, 왕루이치에 대한 국가공무원에서 해직시키는 박해에 참여하였다. 그로부터 왕루이치는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직업이 있어도 출근할 수 없이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2004년 4월 2일 오전 10시가 넘어서, 왕루이치는 바로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 베이닝(北寧)에서, 베이닝시 공안국과 현지 파출소의 결탁으로 불법적으로 납치 당했다. 당시 납치된 사람들로는 또 다른 세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있었다. 왕루이치는 계단 입구를 걸어 나오면서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는 좋다”, “파룬따파는 좋다”라고 외쳤다가, 경찰에게 죽도록 맞았으며 자동차에 밀어 넣어졌다. 사악한 경찰들이 성매매를 한 사람들을 붙잡는다고 하는 거짓말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둘러싸고 구경하던 1백여 명 민중들로 하여금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를 당한 진상을 알도록 폭로 하였다. 당시 베이닝구치소로 보내졌고, 오후에 베이닝시간수소로 보내졌는데, 이번 납치를 책임진 대장은 야오청(姚成)이라고 부른다.

베이닝시수감소의 소장은 왕스쉐(王世學)라고 부른다. 사형수인 성이 훙(洪)가인 살인범에게 여러 차례 발길에 채이며 맞았다. 맨 마지막에는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3년을 받고, 진저우시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진저우시교양원에서 파룬궁을 전관대대(專管大隊)의 대대장은 바이진룽(白金龍), 부대대장으로는 양팅룬(楊廷倫),장춘펑(張春風), 교도원은 리쑹타오(李松濤), 대장으로는 한젠쥔(韓建軍),장자빈(張家彬), 무진성(穆錦生)등 사람이다. 사악한 경찰 장춘펑은 왕루이치의 뺨을 때린 후, 당시 무지막지하게 “난 당신을 때리지 않았소. 누가 내가 당신을 때리는걸 보았는가.”라고 말했다. 당시에 자리에 있던 장자빈이 왕루이치에게 질문을 받았다. “저 사람이 나를 때렸는데, 당신은 왜 제지하지 않았는가?” 장이 말하기를 “제지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완전히 깡패 짓 하는 몰골이었다. 왕루이치는 진저우시수용소에서 불법적으로 3년 감금을 당했는데, 그 기간에 여러 차례 혹독한 구타와 고문박해를 당했다.

3. 스잉춘이 당한 두 차례의 강제노동 박해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스잉춘은 여러 차례 중공당국의 납치박해를 당했으며, 이미 두 번이나 불법적으로 강제노동을 당하고 5년간 학대를 받았다. 1999년 10월 5일, 스잉춘은 연공을 계속 견지한다는 이유로, 롄산구공안국에 납치된 다음, 불법적으로 후루다오시수감소에 감금되었으며, 수감소 소장 리야제(李雅傑), 저우제(周潔)와 다른 한 이름을 모르는 실팍한 경찰(50여 세)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그 중 한번은, 리야제가 스잉춘을 복도로 불러냈는데, 사람을 시켜 그녀의 바지를 벗기고, 그녀를 땅 위에 엎드리게 하였다. 그런 다음 “당신이 연공하자고 하지 않는가. 자, 우리 둘이 먼저 연습합시다.”라고 말하면서 리야제는 곧바로 고무 도관을 들고 스잉춘의 둔부를 한바탕 혹독하게 때렸다. 어떤 때 그녀들은 때리다가 지치면 두 사람이 교대로 번갈아 가며 때렸다.

리야제는 스잉춘이 연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어느 날 사람을 시켜 스잉춘에게 수갑, 족쇄를 채우고는 더러운 수건을 가져다가 한쪽 끝은 족쇄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은 스잉춘을 핍박하여 이로 물고 있게 하였다. 손은 등뒤로 채웠고, 허리를 곧게 펼 수 없었는데, 그녀를 핍박하여 앞으로 걷게 하였다. 발을 들거나 내리기가 매우 무거웠으며, 한걸음 걸을 때마다 역시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그 다음 또 그녀를 핍박하여 꿇어앉아 있게 하였는데,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꿇어앉아 있게 하였다. 땀이 얼굴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 마루바닥도 온통 젖었다. 저녁에는 잠을 자게 못하였고, 앉아있지 않으면 서있게 하였다.

이렇게 스잉춘은 수감소에서 20여 일 동안 박해를 당한 후, 불법으로 2년 강제노동을 받고, 선양 마싼자(沈陽馬三家)수용소로 보내졌다.

마싼자 여자2수용소에서, 스잉춘은 자신의 수련에 대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단식으로 불법박해에 항의했다. 지리(吉利)라는 경찰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 지리와 다른 한 경찰 두 사람이 각각 손에 전기곤봉을 들고 동시에 스잉춘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다. 한 사람은 발에 충격을 가했고, 한 사람은 상반신과 얼굴에 충격을 가했다. 전기곤봉은 팍팍하는 소리를 냈는데, 스잉춘은 전기충격으로 온몸을 격렬하게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또 벌주어 서게 했는데, 스잉춘은 이렇게 서있기 시작해서 10여 시간 서있었다. 어느 한번은 스잉춘이 강박으로 걷게 하는 것을 거부하자 지리는 다른 두 사람을 데려와 세 사람이 함께 세 개의 전기곤봉을 들고 동시에 스잉춘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고, 동시에 발바닥, 손바닥, 얼굴과 입에 전기충격을 가하였다. 게다가 소란을 피우면서 “당신을 전기충격으로 굴복시키지 못하면 그만 두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개월 동안 박해한 후, 경찰은 스잉춘을 1수용소로 보냈다. 1수용소의 박해는 더욱더 엄중하였다. 파룬궁수련생을 두 죄수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감시했는데, ‘바오자(包夾)’라고 부른다. ‘바오자’는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걸어도, 일해도, 화장실을 가도, 잠을 잘 때마저도 한쪽에 한 사람씩 있었다. 경찰은 죄수를 충동질하여 마음대로 파룬궁수련생을 때리고 학대 하였다. 어느 한번은 두 죄수가 스잉춘의 손을 잡고 벽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쳤으며, 던져져서 시퍼렇게 멍들었다. 다 던져버린다음, 또 그녀의 손을 침대 위에 묶어놓았다. 이튿날 경찰에게 스잉춘이 화장실에서 잤기에, 그녀를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게 했다고 거짓보고를 했다. 경찰 둥빈(董彬)과 장(張)모라는 경찰이 이를 들은 후, 즉시 스잉춘을 사무실로 불렀으며, 그녀의 옷을 벗겨버리고, 손을 등뒤에 채워놓았으며, 그녀를 강제로 꿇어앉게 하고는 두 사람이 전기곤봉 두 개로 ‘팍팍’ 한바탕 전기충격을 가했다.

또 한번은 연공을 했다는 이유로 성이 장가인 대대장이 스잉춘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녀의 옷을 벗겨버리고, 등에 수갑을 채웠다. 장 모라고 하는 경찰이 전기곤봉 하나는 손에 들고, 벽에 또 전기곤봉 하나를 꽂아서 한창 충전하고 있었다. 한참 얼굴을 충격했다가는 한참 허리를 충격했다. 한참 후 또 죄수 한 사람을 불러와 충격을 가하는 것을 도와주게 하였다. 그 죄수는 전문적으로 발바닥에 전기충격을 가했다. 즉 이번에 그녀들은 스잉춘을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한 연공을 견지한 다롄(大連)파룬궁수련생도 옆 사무실로 끌고가, 그녀를 스잉춘이 박해를 당하는 소리를 듣게 하였으며 이것으로 그녀를 공갈하고 위협하였다.

이렇게 스잉춘은 마싼자노동수용소에서 2년 학대를 받았다. 2001년 10월 23일 떠나기 전, 마싼자에서는 스잉춘에게서 음식물을 주입한 비용 6백 위안을 강탈하였다.

집으로 돌아 온 후 6일째 되던 날, 2001년 10월 29일, 스잉춘은 재차 공원에서 연공을 했다는 이유로 보하이파출소로 납치되었다. 그 후 롄산구공안국으로 보내졌으며, 그날로 후루다오시구치소로 보내졌다. 구치소에서 불법으로 1개월 감금된 후, 마싼자노동수용소로 보내져 불법으로 3년 강제노동을 받았다. 이번에 마싼자에서 육체적 박해보다 더욱 엄중한 것은 정신적 학대였다. 경찰 추핑(邱萍)의 미혹과 고혹 아래에서 스잉춘은 ‘전향’하였고, 이른바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 그 후 정신적으로 막심한 압력과 고통을 감당하였고, 항상 알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다음 강제로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이른바 ‘진찰’을 받았다.

4. 노 부부는 중공당국의 박해로 사망하다

2008년 8월 2일 저녁, 왕루이치의 아내 스잉춘은 나가서 진상소책자를 배포하다가 악인에게 무고 당해, 후루다오시 롄산구 보하이파출소의 경찰에 의해 납치 되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서, 후루다오시 롄산구 국보대대, 보하이파출소, 국가보안등 6, 7명사람들이 스잉춘의 몸에서 불법적으로 빼앗아 온 열쇠를 가지고 스잉춘의 집문을 열고는, 방에 들어가 강도 짓을 하였다, 왕루이치는 한창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스잉춘과 함께 보하이파출소로 붙잡혀 갔다. 당시 롄산구 국보대대 부대장 천위룽(陳玉龍)과 왕(王)모라고 하는 경찰, 보하이파출소의 마(馬)모라고 하는 부소장이 있었다.

노 부부는 보하이파출소에 의해 불법적으로 하룻밤 감금당한 후 8월 3일 오전 보하이파출소의 리(李)모모 부소장, 양(楊)모모 경찰에 의해 후루다오시간수소의

임시소재지인 쑤이중(綏中)수감소로 보내져 감금당했다. 당시 왕루이치를 관할한 경찰소장은 성이 쑨(孫)가이다.

왕루이치가 불법으로 수감소에 감금된 기간, 악경은 여러 차례 불법으로 그를 심문하였다. 그는 악경이 물어보는 어떠한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그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매일 출근하다. 저녁에 한창 잠을 자고 있는데 당신들이 나를 데려왔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당신들은 이렇게 나를 대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만 했다. 어느 한번 불법적으로 그를 심문할 때, 그는 경찰 앞에서 수갑을 손목에서부터 벗겨서 책상 위에 놓았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경찰들마저도 아주 놀라게 하였다. 맨 마지막에 경찰은 그에게 2천 위안의 ‘보석금’을 요구하였는데, 왕루이치는 없다고 말했다. 사악한 경찰은 친척에게서 빌리라고 시켰다. 왕루이치는 친척은 모두 농민인데 돈이 없다고 말했다. 8월 16일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은 상황에서 스잉춘은 불법적으로 비밀리에 7년 판결을 받았으며, 10월 22일 랴오닝성여자감옥으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전날, 아들 왕줘가 2008년 10월 21일 약 3시경에 집안에서 납치당했다. 왕줘가 살고 있던 주택 단지 보안원이 ‘점검’한다는 이유로, 왕줘의 집 문을 두드려 연 후, 후루다오시 롄산구 화지(化機)가도파출소의 사악한 경찰 리광위(李廣玉)와 후루다오시 롄산구 국보대대 등 몇 명의 악인들이 방에 들어와 강탈하였다. 왕줘는 후루다오시 싱청서우산(興城首山)구치소에 납치되었다. 그 후 랴오닝성 마싼자노동수용소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스잉춘은 불법으로 랴오닝성여자감옥 8감구에 감금 되었다. 2010년 3월 17일 아침, 스잉춘노인은 오전에 류(劉)모모 과장이 담화하자고 사무실로 불러갔다. 오후에 또 교도관이 사무실로 불러 담화를 했다. 담화내용은 스잉춘에게 파룬궁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나온 후, 그들은 스잉춘에게 감옥규정을 학습하게 하였다. 그날 당직은 류과장과 양(楊)대장이었다. 스잉춘이 수련을 포기하지 않은 것 때문에, 류와 양 두 사람은 곧 죄수 가오란(高嵐)에게 지시하여 노인에 대해 더욱 엄하게 지키게 하였으며, 강제로 ‘전향’시켰다. 그날 저녁 11시, 가오란은 황예칭(黄葉青), 두슈윈(杜秀雲), 뤼징(吕晶), 왕슈쥐안(王秀娟), 리리리(李莉莉), 왕퉁(王彤), 야오위안위안(姚圓圓), 팡리리(方莉莉) 8명의 죄수를 거느리고 404호실에서 스잉춘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때 스잉춘 노인은 이미 맞아서 생명이 위급하게 되었는데, 그녀들은 노인을 온수 공급실로 끌어가 물을 끼얹었다. 2시30분, 가오란은 노인이 이미 혼미해 진 걸 보고, 곧 대장과 함께 스잉춘을 감옥의 병원으로 보내어 응급구조를 하였다. 감옥의사가 치료를 할 수 없게 되어, 또 감옥 밖의 병원으로 보내어 응급구조를 하였지만, 결국 효과가 없다고 하여 사망하였다.

일가족 세 식구는 단지 ‘眞, 善, 忍’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장기간 동안 중공의 잔악무도한 불법감금과 고문박해를 받았는데, 그들의 심신은 모두 각기 다른 정도로 심한 손상과 상처를 입었다. 특히 아내 스잉춘은 2008년 10월 22일에 불법으로 비밀리에 7년 판결을 받은 후, 랴오닝성 여자감옥에 감금당해 박해를 받았다. 아들 왕줘는 2008년 10월 21일에 또 납치되고, 랴오닝성마싼자노동수용소에 감금되어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미 60여 세인 왕루이치는 정신과 몸의 이중고통이 그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하게 하였고, 몸도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밥도 넘기지 못했는데, 먹는다해도 다 토해냈다. 몸은 날마다 수척해졌고, 온몸에는 기운이 없었다. 이미 직장에서 해고당했기에, 경제력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또 1만 3천 위안의 양로보험(養老保險)을 추가로 내야 했다. 그는 줄곧 빚을 졌었는데, 그는 부득이하게 나가서 일하며 생활을 유지하는 동시에 빚을 갚았다.

2008년 10월 아내와 아들이 불법으로 감금된 후, 왕루이치노인은 가족들과 이별한 그리움의 끝없는 고통과 시달림을 감당하고 있었다. 매 2~3개월 후면, 또 허약한 몸을 끌고 랴오닝성 선양시에 가서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가고, 두 모자에게 평균 매달 돈 백 위안을 주고는, 자신은 매달 생활비용을 아주 적게 썼다. 이 때 그의 몸은 이미 일할 수 없게 되었는데, 2010년 3월 18일 오후에 랴오닝성여자감옥에서 또 갑자기 아내 스잉춘이 억울하게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부고를 들었을 때까지 일을 하지 못했다. 당시 왕루이치는 여자감옥면회소 침대 위에 누워 극도로 비감하여, 목이 메이도록 통곡하였다. 슬픈 울음소리는 그 자리에 있던 경찰마저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올해 2월에 그가 여자감옥으로 가서 아내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잘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는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아내가 분명히 박해로 사망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감옥에서는 그의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하여, 왕루이치를 위협하고 팝박하여 스잉춘의 화장명세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그의 남편으로서, 한 방면은 스잉춘에게 변호사를 선임할만한 돈이 집에 없었기에, 다른 한 방면은 감옥에서 스잉춘의 가족을 위협하면서, 만약 가족이 화장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면 그의 가족 중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겠다고 말한 압력 아래, 스잉춘의 넷째 여동생은 집의 친인들이 또 연루될까 봐 두려워했고, 더군다나 왕루이치의 몸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어, 화장하는데 동의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 왕뤼이치는 비통함에 몸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다. 2010년 5월초, 이미 병석에 누워, 먹은 대로 다 토해 냈고, 얼굴에 혈색이 없었으며, 볼품없이 여위었는데, 2010년 6월 8일 이른 아침에 비통하게 세상을 떠나갔다.

여기에서, 모든 정의가 있는 조직과, 정의지사와 모든 선량한 사람들께서,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보내어, 되도록 빨리 이번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한 잔악무도한 박해를 제지하시고, 이렇게 함으로서 왕루이치네 집과 같은 이러한 불행한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를 간청드린다.

박해관련부문의 책임자:

후루다오시 롄산구농업국:

원 농업국 국장 양바오타이, 원 국장 류징쯔, 원 부국장 구전펑(谷振峰)

후루다오시 롄산구 보하이파출소:

경찰 양룽구이(楊榮貴), 차이(蔡)모모, 부소장 류주둥(劉久東), 구역경찰 쭤융펑(左永鵬), 부소장 리(李)모모,

후루다오시 롄산구공안분국 국보대대:

원 대대장 장쥔성(張俊生), 부대대장 천위룽(陳玉龍)

후루다오시교양원(葫芦岛市教养院):

노교과장(勞教科長) 류궈화(劉國華), 대대장 류자원(劉佳文), 부대대장 추이샤오둥(崔曉東), 교도원 멍칭화(孟慶華), 소대장 류하이허우(劉海厚), 지청궈(季承國)

진저우시610(錦州市610)

베이닝시 정법위원회:

서기 창카이(常凱), 0416–6625998(집)

베이닝610:

치톄청(齊鐵成), 0416–6635958(집),전화0416–6628630(사무실)

베이닝시공안국:

베이닝시 공안국국장 왕쥔런(王俊仁), 전화0416– 6600110(사무실)

왕카이(王凱) (이미 솽구이(雙規)를 받았음), 0416– 6623133(집)

리춘즈(李純志) , 0416–6624653(집)

루전푸(魯振富), 0416–6627959(주택)

국보대대 류춘샹(劉純祥), 0416–6631186(집)

국보대대 리궈챵(李國强), 0416–6600019 (집),핸드폰 13904961158

베이닝시수감소:

부소장 인이촨(尹以權), 0416–6628705 (집)

교도관 왕스쉐(王世學), 0416–6626069 (집)

진저우시 노동수용소:

파룬궁전관대대(專管大隊)대대장은 바이진룽(白金龍), 부대대장은 양팅룬(楊廷倫),장춘펑(張春風), 교도원은 리쑹타오(李松濤), 대장으로는 한젠쥔(韓建軍),장자빈(張家彬), 무진성(穆錦生)등 사람이다.

부록:

1. 왕줘가 박해당한 일부 사실은 밍후이왕2003年1月3日《3년 감옥살이 고생속의 고생, 정념은 법을 증실하는 길을 이룬다》를 보시라.

2. 스잉춘이 랴오닝여자감옥서 8명에게 구타 받고 사망

3, 스잉춘이 랴오닝여자감옥의 박해로 사망, 억울함을 아직 씻지 못함.

문장발표:2010년 06월 22일
문장분류:박해진상
중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6/22/2258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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