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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악경에게 학살, 아내는 억울한 7년 감옥형 받아

[밍후이왕] (밍후이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黑龍江) 허강시(鶴崗市) 자오궈신(趙國新)선생과 왕잉(王影)여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부부이다. 2010년 7월 28일, 남편 자오궈신은 파룬궁진상자료를 지닌 이유로 자무쓰(佳木斯)철로경찰에게 납치됐으며, 몇시간 만에 악경에게 학살당했다. 아내 왕잉은 2002년에 7년 불법 판결을 받고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서 혹형과 정신박해를 받았다. 왕잉의 부친과 시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집에는 10여세 딸이 있었는데 맡길 곳이 없었다.

“백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좋은 남편이 학살 당해”

남편 자오궈신은 원래 헤이룽장성 허강시 신화(新華)제지공장 직공으로 이후 자영업에 종사했다. 그는 1964년에 출생했고 이미 전에 요추가 탈구되는 심한 병에 걸린 적이 있는데 움직이기만 하면 허리뼈가 어긋났으며 또 산업 재해로 출근하지 못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이 두가지 병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쩐(眞)ㆍ싼(善)ㆍ런(忍)’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를 잘아는 신화농장(新華農場) 사람들은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혹은 이웃지간을 막론하고 모두 그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가정에서 맡은 바를 다하고, 아내에 대한 감정이 한결 같았다. 그리고 양쪽 노인과 이웃 노인들을 잘 보살펴주고 존경했으며 모두들 그를 백 명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2001년 7월 28일, 자오궈신은 자무쓰 기차역에서 헤이룽장성 자무쓰 철로공안처에게 납치 됐다. 악경은 그의 진상자료의 출처를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다. 이 기간 그의 딸이 한 여경의 감시 하에서 윗층 대합실 화장실로 갔다가 대략 20여분 후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땅바닥 위에 쓰러진 것을 보았다. 병원에 보내 응급 처치를 받았는데 의사는 뇌부위에 10ml의 출혈이 생겼다는 진단을 내렸다. 몇시간 후 자오궈신은 억울하게 사망했다. 이후에 변호사를 자문했는데 변호사는 무거운 물건으로 머리를 쳐서 조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무쓰 공안은 책임을 서로 떠넘겼으며 게다가 자오궈신이 출관(出棺)하는 날 경찰력을 출동시켜 많은 사복경찰이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으며 또 그의 이웃집에서 잠복근무까지 했다.

아내 왕잉, 억울하게 7년 감옥살이 하다

아내 왕잉은 올해 40여세이며, 허강시 신화제지공장 직공이다. 그녀는 2000년 말 베이징에 정상적인 청원을 갔다가 허강시 제1간수소로 납치돼 2개월 박해를 당했다.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팡루(解放路)파출소 소장 왕칭원(王慶文), 부소장 우(吳)모 등 이다.

2001년 11월 23일 저녁, 제팡루 파출소 소장 왕칭원, 부소장 우모가 5,6명의 경찰을 데리고 왕잉의 집을 포위했다. 당시 왕잉의 남편 자오궈신이 금방 자무쓰 철로공안처에서 박해로 사망했을 때다. 악경은 왕잉을 납치하고 집에 10여세 딸을 남겨 뒀다. 밤 10시반경, 경찰은 그녀를 제팡루파출소에 가둬놓았으며, 공농분국(工農分局)부국장 리수장(李樹江)은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부위를 마구 구타했다.

이튿날 그들은 그녀를 제2간수소로 납치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의 박해에 직면해, 왕잉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제2간수소 소장 리수린은 죄수를 지휘해 그녀에게 아주 많은 소금을 넣은 옥수수죽을 주입시켰는데 과량의 소금으로 뱃속이 불타는듯 뜨거워 고통스러웠다. 이 기간 또 악인의 감시와 욕설을 참아내야 했는데 아침부터 시작해 줄곧 마좌(碼坐)를 한밤 중까지 앉혔다. 몇 달 후 궁눙구(工農區)법원에서 불법 재판을 했으며 왕잉에게 억울하게 7년 판결을 내렸다.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재판장 장리신(張立新), 검찰원 검찰관 뤄위보(羅玉波) 등이다.

2002년, 왕잉은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 갇혔고 선후로 지쉰(集訓)감구, 포장감구(9감구), 3감구등 곳에 불법 감금당했다. 지쉰감구에서 왕잉은 매일 10여 시간 동안 벌을 받아았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앉아 있어서 두 다리가 모두 부어올랐다. 왕잉은 죄수 바오자(包夾-역주: 감옥측이 수감자 중에서 뽑은 감시원)에 의해 철창 안에서 고통스러운 박해를 당했으며, 억울함이 있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9감구역에서 대장 옌위화(雁玉華), 두목 정제(鄭傑) 등이 불법 감금된 50여 명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광적인 박해를 진행했다. 정제는 남자경찰을 지시해 파룬궁수련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2003년 초, 감옥에서는 감금된 파룬궁수련생들에게 밥을 절반만 주었다. 아침 5시반부터 시멘트 바닥 위에서 한밤중 12시까지 심한 마좌(시멘트 바닥 위에 꼼짝 못하게 앉게 하는데 앉은 자세가 좀만 틀려도 곧 욕설을 퍼붓고 구타했다)를 당했는데, 방석이나 작은 의자에도 앉지 못하게 했으며 종이를 조금만 깔아도 모두 빼앗겼다. 어떤 죄수가 밥을 좀 더 떠주면 경찰은 곧 그녀들의 뺨을 때리고 점수를 깎으며 형기를 줄여주지 않는다고 위협했다.

감옥경찰은 감금된 파룬궁수련생들의 현금카드를 속여 가져갔으며 그녀들의 가족이 저축해 준 돈으로 음식물을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끼니마다 밥 절반만 나눠주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그녀들을 동정하지 못하게 했다. 파룬궁수련생 차오루(曹茹), 왕완전(王萬珍)은 70세에 가까웠는데 경찰들은 이런 수단들로 그녀들을 학대했다. 이런 악행은 반 년 넘게 지속됐는데 어떤 부서에서도 이런 위법행위를 제지하지 않았다.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9감구의 악경 외에, 악인 궈수화(郭淑華), 타오훙(陶紅), 장수옌(張淑艶) 등이 있었다. 그녀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을 핍박해 노예노동을 시켰으며 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곧 묶어놓거나 혹독하게 구타했다.

2005년, 감옥 경찰 자원쥔(賈文君)은 악안 쉬전(徐臻) 등 이른바 바오자를 지시해 왕잉을 박해했다. 3개월간 매일 그녀에 대해 정신적 학대를 진행했으며 후기에는 잠을 자게 못했다. 영하 3도가 되는 빈 방안에서 죄수들은 솜옷과 솜바지들을 입었고 더 차면 곧 솜이불을 덮었다. 그러나 왕잉에게는 속옷만 입게 하고 잠을 못자게 했으며 차륜술륜반(車輪術輪班)을 사용해 박해했는데 그녀를 핍박해 신앙을 포기시키려 시도했다. 이런 학대에 직면해 왕잉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악경 자원쥔의 지시하에 그녀에게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이 진행됐다. 그녀는 박해로 혈압이 200이상 높아졌다.

왕잉이 3감구(또 4대라고도 부름)에서 박해를 당할 때, 참여한 사람으로는 대대장 자오빈(趙彬), 악경 우쉐쑹(吳雪松)등 사람이다. 3감구에서 2007년 11월 28일에 가장 심한 박해가 발생했다. 감옥에서는 감옥경찰과 악인들을 지휘해 모든 수련을 포기하지 않은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한 차례 광적인 박해를 진행했다. 왕잉은 낮에는 죄수 바오자에게 박해를 당하고 밤에도 신변에서 감시를 당했다.

또 여자감옥에서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로는 또 부감옥장 류즈챵(劉志强), 옥정과장 정제(鄭傑)(후에 옥정과로 옮겨왔음), 감옥경찰 샤오린(肖林) 등 사람이 있다.

문장발표: 2010년 06월 2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6/26/22600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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