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2010년 4월 10일】(밍후이통신원 산둥보도) 2010년 설은 칭다오(青島) 핑두(平度)시의 장 씨 가족에게 있어서 비범한 의미가 있는 새해였다. 왜냐하면 중공에 의해 8년간 불법감금 당했던 친인 장베이치(張倍齊)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친인들과 모였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장 씨 가족 몇 십 명이 8년 동안 손꼽아 기다린 꿈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현실이 되자마자 또 중공의 악경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정월 14일 그날, 장베이치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정원에서 한창 일광욕을 하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현지 말투인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와서 다른 사람을 탐문한 후에 문을 나섰다. 그리고 잠깐 지나 또 한 무리의 사내들을 데리고 뛰어 들었는데, 두 사람이 올라와서 장베이치의 팔을 꼈다. 가방을 낀 남자가 손으로 장베이치를 가리키면서 보통말로 “바로 그 사람이다.”고 하였다. 장 씨의 가족이 “당신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라고 묻자 현지 말투인 남자가 “우리는 공안국 직원이다. 훙치루(紅旗路) 그곳이다. 치안대대의 1대대이다.”라고 하였다. 가방을 낀 남자는 귀찮아하면서 “어서 가자.”고 말하였다.
장 씨의 가족은 사내 7~8명이 장베이치를 한 소형 버스에 밀어 넣고 거들먹거리며 떠나는 것을 보았다. 정월 15일 보름날, 장 씨의 집안 어른과 아이들이 방안에 꽉 차 앉았으나 모두 얼굴이 초췌했고 한숨만 지었다.
장베이치는 1964년에 태어났고, 본적은 칭다오 핑두시이다. 1990년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 안투(安圖)현으로 이사하여 건축, 장식, 자영업 등에 종사하였고, 안투현 제2건축공사의 경리로 임직한 적이 있다. 1996년에 장베이치와 아내 류메이쥔(劉美君)은 전국에서 한창 기공 붐이 일어날 때 바로 파룬궁을 알게 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쩐·싼·런(眞·善·忍)’을 준칙으로 삼아 성실하고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참고 양보하는 것을 배웠다. 장베이치와 아내 류메이쥔은 딸 장야오인(張耀尹)을 데리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수련한지 오래지 않아 장베이치는 몇 년간의 술, 담배를 끊고 급한 성미를 고쳤다. 아내 류메이쥔은 각종 질병이 나았다.
중공이 오늘날까지 파룬궁을 박해하는 과정 중에 장베이치와 아내는 여러 차례 불법으로 구류, 노동교양, 판결을 받았고……, 딸은 핍박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돌아갈 곳도 없었다. 원래 행복한 가정이 중공의 박해로 산산조각이 났고, 아내는 마지막에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룬궁수련을 포기하였으며, 박해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딸은 본과대학을 포기하고 전문대학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식당에 가서 품팔이를 하며 자신과 딸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1. 납치 , 노동교양의 박해를 당하다
1999년 7월 19일, 장베이치 일가족 세 식구는 옌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갔다가 다시 바꿔 타고 베이징(北京)으로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롄비행장에서 내릴 때, 장베이치와 14살 된 딸은 다롄비행장의 공안에게 불법으로 구류 당하였고, 핍박으로 아내 류메이쥔과 갈라졌다.
장베이치는 안투현 공안 국보대대의 악경 진전산(金鎭山)과 다른 한 경찰에게 납치되어 안투로 돌아왔고, 불법으로 안투현 간수소에 한 달 가까이 불법감금 당했다. 그 기간에 국보대대의 악경 위쉐(於學) 등이 여러 번 간수소에 와서 재심하고 장베이치에게 공갈협박을 하면서 수련을 포기하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간수소에서는 공동식사 비용이 매일 10위안이라는 이유로 장베이치의 가족에게 300위안의 돈을 강탈한 후에야 사람을 풀어 주었다. 그 후의 1년 동안, 장베이치는 현지 국보대대에 의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아울러 불법으로 몇 차례 납치되어 감금당했다.
2000년 6월, 안투 국보대대의 위쉐 등 악경들은 여러 번 장베이치의 집에 와서 감시, 소란을 피우고 개인물품을 강탈했다. 장베이치는 강제로 옌지시 간수소에 납치되어 수감자에게 혹독하게 구타를 당했다. 위쉐 등 악경들은 장베이치의 가족에게 공갈협박을 하면서 돈과 물품을 보내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장베이치는 간수소에서 목숨조차 보장 받을 수 없다고 했다.
2000년 7월, 장베이치는 옌지에서 한 달 가까이 감금당했다. 그 기간에 안투현 공안 국보대대의 위쉐 등이 장베이치를 비밀리에 옌지시 호텔에 구류하여 공갈협박을 했고,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혹형을 가했다. 위쉐 등 악인은 또 장베이치를 안투현 간수소에 구류해 구타와 욕설을 퍼부었다. 7일 후에 안투현 공안국 법제과 악경 왕(王) 씨가 노동교양통지서를 가져와 장베이치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장베이치는 서명을 거절했지만 불법으로 노동교양 1년을 받았다. 장베이치는 또 옌볜(延邊)노동수용소에 감금되어 박해를 당했다.
장베이치가 불법으로 옌볜노동수용소에 감금된 이후, 소장 왕창(王強), 부소장 단(單) 씨가 교육과장 리원빈(李文斌), 악경 왕(王) 모, 류(劉) 모에게 직접 지시를 내려 장베이치에게 공갈협박을 해대면서 수련을 포기하라고 했다. 장베이치는 1대대에 감금당했는데, 당시 1대대의 교육 대대장 진광르(金光日)와 각 소대의 악경들이 협조하여 파룬궁수련생들을 박해하고, 강제로 매일 10여 시간이 넘는 초강도 노역을 하게 하였다. 장베이치는 이곳에서 1년 가까이 노역을 하였다.
2. 두 번째로 노동교양을 당하다
2001년 11월, 장베이치와 가족은 또 한 차례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다. 그러나 베이징시 퉁저우(通州)에서 공안 악경에게 납치되어 퉁저우 공안국의 독방에 갇혔고, 쑨청린(孫成林) 등이 서둘러 퉁저우로 왔다. 쑨청린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장베이치를 구타해 코피를 흘리고 안경이 다 깨졌다. 장베이치 등은 베이징주재 옌볜판사처에 감금당했다. 장베이치는 철 난간을 헤치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그곳을 탈출했으나 랴오닝(遼寧)성 하이청(海城)시 공안국에 불법으로 납치되어 하이청시 공안국에 감금당했으며, 두 손은 걸상에 수갑으로 채워져 움직이지 못했다. 이튿날 안투공안 국보대대의 경찰 스(石) 씨 등이 장베이치를 안투현 간수소에 감금했다. 당시 쑨청린이 간수소에 와서 장베이지를 혹독하게 때렸으며, 안투공안 국보대대의 위쉐 등도 동시에 장베이치에게 혹형을 가했다.
2001년 12월, 장베이치는 두 번째로 노동교양을 당했다. 옌볜노동수용소에서 장베이치는 연속해서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교육과장 리원빈 등이 장베이치에게 부드러운 수단과 강경한 수단을 함께 사용하여 유혹하고 공갈협박 하였으며, 혹형 박해…… 엄동설한에 속옷만 남기고 발가벗겼다. 매일 그늘지고 차디찬 독방에 가두고는 15~16시간 앉혀 놓았고, 늘 수감자 진저화(金哲華) 등은 구타와 욕설을 퍼부었다. 음식은 야채수프 약간과 옥수수 찐빵 조금밖에 안 주었다. 그렇게 한 달 후에는 몸에 뼈만 남았다. 장베이치는 1대대에 감금되어 매일 14시간씩이나 노동을 하고, 매 달 벌점을 가하며 매 달 열흘 혹은 반달씩 형기가 늘어났다. 노동수용소에서 형기가 가장 많이 늘어난 사람이 바로 장베이치이다.
2001년 10월, 대법제자 왕톄쑹(王鐵松)은 전체 노교인원대회에서 악인이 대법과 사부님을 모독하는 것을 제지하다가 악경에게 독방의 철우리 안에 감금되어 혹형을 당했다. 왕톄쑹은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다 폭력적으로 음식물 주입을 당했고, 음식물이 폐로 흘러들어가 사망했다. 당시 장베이치는 왕톄쑹이 박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왕톄쑹을 구원하려고 단식으로 항의하면서 왕톄쑹을 만나게 해 달라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단(單) 씨인 소장과 노동수용소에서 지내고 있는 검찰관이 대답을 해서야 밥을 먹었다. 두 번째 날 아침 4시경, 노동수용소에 갑자기 비밀명령이 떨어졌다. 불법으로 감금당한 모든 대법제자들을 비밀리에 주타이(九臺)노동수용소로 옮겨 새롭게 박해를 진행했다. 장베이치는 나중에서야 왕톄쑹이 이미 박해로 사망한 것을 알았다. 그는 왕톄쑹을 마지막까지 만나지 못했다.
2001년 말, 장베이치는 주타이노동수용소 4대대, 지젠(基建)대대로 옮겨져 감금당했다. 당시 대대장은 정화쉬(鄭華緖)이고, 악경은 펑융(彭勇, 99년10월 말에 파룬궁수련생을 여러 차례 박해함)이었다. 2002년 초, 또 새로 경찰을 바꿨다. 대대장 장밍차이(張明財)와 장춘푸(張春富), 간사(幹事)인 장신(張新), 악경 궈이핑(郭一平)과 펑웨이(馮偉, 99년부터 주타이노동수용소에 불법감금 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 주요 흉수)가 불법으로 감금된 파룬궁수련생에게 폭력적인 혹형으로 전향박해를 진행했다. 장베이치가 박해에 반대하면서 늘 경찰과 수감자에게 진상을 알리자 악경 궈이핑, 장밍차이, 장신, 펑웨이가 그를 격리실에 감금했다.
2002년 5월, 장밍차이와 궈이핑, 장신 그들 몇몇의 악경들은 비밀리에 장베이치에게 혹형을 시도했다. 그들은 전기곤봉 10여 개와 수갑, 끈 등의 형구를 가져오고, 수감자에게 장베이치를 격리실에서 사무실로 데려오게 했다. 장밍차이와 장신이 동시에 달려들어 장베이치의 두 손을 철관에 수갑으로 채웠다. 궈이핑, 장신은 전기곤봉을 2개씩 들고 장베이치의 전신에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특히 민감한 부위에 전기충격을 더 가했다. 그들은 1시간 가까이 고문을 했는데, 전기곤봉의 전기를 다 쓴 다음에는 다시 전기곤봉을 바꾸었다. 궈이핑은 전기충격을 가하면서 장베이치에게 “그래도 연마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장베이치는 “연마한다!”고 했다. 최후에는 오히려 궈이핑과 장신이 지칠 지경이 되었다. 이 참혹한 혹형고문은 당시 현장에 있던 수감자 4명이 직접 보았다.
2003년 4월, 장페이치는 지린(吉林)성 퉁화(通化)노동수용소로 옮겨져 감금당했다.
3. 맞아서 다리 마비, 그럼에도 불법으로 5년 판결을 받다
2003년 7월, 장베이치는 노동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2004년 3월, 아내 류메이쥔은 또 납치되어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받고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여자노동수용소에 감금당했다. 3월 20일, 장베이치도 안투현 110과 국보대대에 불법으로 납치되었다.
안투현 공안 국보대대의 선징주(申京柱), 진전산(金鎭山), 위쉐를 우두머리로 한 악경들은 장베이치에게 검은 머리씌우개를 씌워 비밀리에 안투현 하이거우(海溝) 진쾅(金礦) 공안분국 2층으로 납치해 감금시켜놓고 7일 동안 밤낮없이 혹형을 가했다. 이 박해에 참여한 자는 하이거우 공안분국 탄광밍(譚廣明), 안투 국보대대의 위쉐, 진전산, 선징주, 가오보(郜波)와 110 등 악경 10여 명이다.
3월 28일, 장베이치는 하이거우에서 안투간수소로 끌려갔다. 그날 밤 5시 넘은 시각, 간수소의 당직경찰은 구타당한 장베이치의 모양새를 보고는 “사람이 이미 이 지경이라니. 나는 못 받겠다. 만일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지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위쉐가 “그는 지금 꾀를 부리고 있다, 방금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다. 게다가 국장이 꼭 감금시키라고 동의했다. 일이 생기면 국장이 감당한다.”고 했다. 당직경찰은 하는 수없이 양심을 어기고 감금하는 수밖에 없었다.
2004년 3월 28일, 장베이치는 안투간수소에 감금당했으며 매일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맸는데, 7일 동안 물 한 방울도 넘기지 못했으며 생명이 매우 위급하였다. 안투현 검찰원에서는 장베이치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을 내렸다. 허리를 맞아 두 다리가 불구가 된 장베이치를 법정경찰 4명이 의자에 앉혀 강제로 법정에 들고 갔고, 안투현 법원에서는 불법으로 비밀리에 개정하여 5년 판결을 내렸다. 장베이치가 상소하려고 변호사를 요구했지만 권리를 박탈당했다. 박해에 참여한 이는 안투현 공안국장, 안투현 검찰원, 법원, 및 ‘610’과 간수소의 악경 왕(王) 씨, 리(李) 씨이다.
2004년 10월 말, 장베이치는 불법으로 5년 판결을 받고, 지린성 톄베이(鐵北)감옥에 보내졌는데, 톄베이감옥은 장베이치의 다리가 불구가 된 것을 알고는 수감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 씨인 악경이 장을 버리고 달아났고, 감옥에서는 왕 악경에게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부었다. 그 후에 감옥에서는 장베이치를 감옥병원에 감금해놓고 매일 24시간 동안 수감인원 2명에게 돌아가며 지키게 했다. 주사도 약도 먹지 않고 몇 달간 연공을 하여 장베이치의 몸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으며, 수감인원과 의사도 모두 대법의 기적을 보았다.
2005년 봄, 장베이치는 톄베이감옥의 라오찬(老殘)대대에 감금되어 다시 박해를 당했다. 독방에 갇혀있는 대법제자 량전싱(梁振興)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베이치는 감옥장 등에게 편지를 써서 무조건적으로 사람을 풀어주라고 요구했다가 독방에 갇혔다.
4. 잔인한 혹형
2006년 4월 초, 톄베이감옥에서는 감옥 안에 감금했던 백 명에 가까운 대법제자를 쓰핑(四平), 궁주링(公主嶺), 지린감옥에 나누어 옮겨 감금시켰다. 장베이치와 다른 동수 9명은 지린감옥으로 옮겨져 감금, 박해를 당했다. 장베이치는 7감구역에 감금당했다. 장베이치는 소대의 악경 류톄쥔((劉鐵軍, 몇 년간 대법제자를 박해한 데 참여한 주요 흉수)에게 진상을 알렸으나 그는 듣지도 않고 “일 저지르지 말고 여기에 가만히 있어.”라며 으름장만 놓았다.
6월, 대법제자 쑨첸(孫千)이 전자책을 보고 법공부를 하자 교육과 악경 리융성(李永生, 몇 년간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직접 참여한 주요 살인 흉수)이 그를 엄관(엄하게 관리)에 감금하였으며, 신체를 늘리는 침대(抻床)를 사용하여 혹형(사람의 사지를 침대의 네 모퉁이에 달아 매놓고 네 면으로 잡아당기는 혹형)을 가했다. 장베이치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동수들과 협조하여 쑨첸을 구원했으며, 대법제자에게 함부로 혹형을 가하는 것을 제지하였다.
7월 25일 오후 3시경, 장베이치는 엄관에 감금당했다. 지린성 감옥의 엄관을 관리하는 수감자 쉬즈강(徐誌剛), 왕천(王臣), 장쉰(江旬, 다년간 대법제자에게 혹형을 가함. 많은 사람을 불구, 사망에 이르게 한 주요 살인 흉수들) 등이 강제로 장베이치의 옷을 홀딱 벗기고 신체를 늘리는 침대로 끌고 갔다. 장베이치는 사지를 늘리는 혹형을 당했는데, 몸이 허공에 떠서 ‘대(大)’자 형을 이루었다. 동시에 수감자 쉬즈강이 고무공으로 장베이치의 입을 틀어막고 마구 두들겨 팼다. 장베이치는 나중에 병원에 보내져 구급치료를 받았다. 하루 저녁의 시달림을 거쳐서야 장베이치는 의식을 회복하였다.
7월 26일 아침 7시, 장베이치는 또 한 차례 늘리는 침대에 고정됐고, 밤 9시경에 또 까무러쳤다. 그러자 수감자가 그를 늘리는 침대에서 내려놓고 인중을 눌렀으며, 왕천은 장베이치의 입속에 무언가 밀어 넣는데……, 장베이치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7월 27일 오전 7시경, 수감자 쉬즈강은 또 장베이치를 늘리는 침대에 고정해 놓았다. 밤 10시경에 장베이치는 또 까무러쳤다! 쉬즈강 등은 연속적으로 잔인한 수단을 써서 장베이치를 20시간 동안 고문했는데, 장베이치의 몸은 이미 늘어나 불구가 됐고 사지는 마비돼 감각이 없었으며, 전신의 아픔은 참기가 어려웠다…….
8월 24일, 장베이치는 7감구역의 악경 류톄쥔에 의해 감구역으로 돌아왔다. 2년 남짓한 동안에 장베이치는 여러 차례 감옥에 편지를 써서 감옥의 엄관독방에서 대법제자가 혹형박해를 당하는 진상을 반영했지만 감옥에서는 여태껏 답변이 없다.
2009년 3월 19일, 출옥하기 전인 아침 5시 반에 장베이치는 수련생을 보러 11감구역에 갔다가 그곳의 수감자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11감구역의 당직경찰은 수감자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11감구역으로 끌고 가서 수갑을 채워 걸어 놓아라. 제기랄. 그가 출옥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부추겼다. 당시 11감구역과 아래층 7감구역의 수감인원 20여 명이 모두 현장에 있었다. 11감구역의 수감자는 장베이치를 3층에서 2층까지 끌고 내려가면서 구타했고, 그 바람에 장베이치의 안경이 깨졌다. 7감구역의 수감자 리샤오청(李小成)이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와서 제지하였다. 11감구역의 감옥경찰과 수감자가 많아 세력이 컸기에 장베이치는 맞아서 엄중한 상처를 입었다. 호흡도 곤란하였고 연한 갈비뼈 부위가 참기 어려울정도로 아팠다…….
장베이치가 이 8년간 감옥에 감금되어 감당한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멀리 칭다오에 있는 연로하신 70여 세의 아버지는 항상 자신의 아들을 염려하였다. 아들이 감옥 안에서 계속해서 각종 혹형을 당하고, 수차례 죽음의 변두리에서 기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게 된 노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끝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8년 겨울에 집 울타리 안의 무화과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
5. 재차 납치를 당하다
장베이치는 여러 차례 중공의 마수 아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견정한 신념으로 8년간이라는 비인간적인 감옥생활을 마침내 끝마쳤다. 그래서 2009년에 가족과 함께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지 1년도 안 된 2010년 2월 27일에 또 옌지 국가보안스파이에게 칭다오의 고향집에서 납치되었다. 지금 불법으로 옌지시 간수소에 감금되어 있다. 장베이치의 어머니는 근심, 걱정으로 애가 타서 매일 심장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유지하고 있다.
2010년 설은 칭다오(青島) 핑두(平度)시의 장 씨 가족에게 있어서 비범한 의미가 있는 새해였다. 왜냐하면 중공에 의해 8년간 불법감금 당했던 친인 장베이치(張倍齊)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친인들과 모였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장 씨 가족 몇 십 명이 8년 동안 손꼽아 기다린 꿈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현실이 되자마자 또 중공의 악경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장베이치의 가족은 도처로 소식을 알아보다가 그가 핑두시 공안국 간수소에 감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베이치를 납치한 사람들은 지금 간수소에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두 지린성 옌볜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은 장베이치가 다시 비인간적인 박해를 당할까봐 근심되었다.
3월 5일, 옌볜 국가보안스파이는 장베이치를 비행기에 태워 웨이팡(濰坊)에서 옌지시로 데리고 돌아왔다. 옌지시 공안국에서는 구류통지서를 하달하여 ‘×교 조직을 이용하여 법률실시를 파괴’라는 죄명으로 형사 구류를 시켰고, 곧이어 장베이치를 옌지시 간수소에 불법감금 하였다. 장베이치의 아내가 공안국에 왔다가 남편이 입고 있던 옷 전부가 침대 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근심되어 간수소 관계자에게 남편은 지금 뭘 입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간수소에서는 통일된 복장을 입는다고 했다.
아내가 처음 옌지시 간수소에 갔을 때,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감옥경찰에게 전화로 지금 자신의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자 감옥경찰이 그는 지금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 가족은 또 간수소에 갔다. 감옥경찰은 나와서 가족을 접견하면서 “장베이치는 지금 아주 좋다.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했다. 남편이 잔인한 박해를 당하고 있을 수 있다고 근심하자 감옥경찰은 혹형을 당하지 않으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감옥경찰의 말만으로는 더욱 안심할 수 없다. 두 번의 차이가 이렇게도 크다. 첫 번째는 전화로 아직 괜찮다고 알려주고는, 두 번째에는 감옥경찰이 주동적으로 나와서 접견하면서 혹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대법제자 장베이치의 박해에 주요하게 참여한 일부 악경
안투현 국보대대 : 위쉐, 진전산. 선징주, 탄광밍, 장칭밍, 왕후이링(王慧玲) 등.
안투현 밍웨(明月)진 서기 : 쑨청린(孫成林)
안투현 정법위서기 : 정안춘(鄭安春)
610사무실 부주임 : 장춘옌(薑春彥)
공안국 부국장 : 장샹(張祥)
옌볜노동수용소 :
소장 왕창(王強)
부소장 단(單) 씨
교육과장 리원빈(악경 : 왕 모, 류 모-직접 대법제자를 박해한데 참여했음)
진광르(金光日,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데 참여),
수감자 진저화(金哲華, 옌지시 사람 전문적으로 폭행, 파괴, 약탈. 현재 옌지감옥에 수감)
주타이노동수용소 :
정화쉬(鄭華緖), 악경 펑융(彭勇), 장밍차이, 간사 장신, 악경 궈이핑, 펑웨이, 가오커(高科)
지린감옥 :
7감구역소대 악경 류톄쥔(다년간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한 주요한 흉수)
교육과 악경 리융성(다년간 직접 대법제자를 박해한 데 참여한 주요한 살인 흉수)
감옥정치과 과장 탄푸화(譚富華, 2007년 가을이 지난 뒤에 궁주링감옥으로 전근)
부감옥장 양옥강(楊玉江, 2008년 궁주링감옥에서 지린감옥으로 전근. 부감옥장으로 임직,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
감옥정치과 과장 리이자오(李軼皎, 다년간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
수감자 쉬즈강, 왕천, 장쉰(다년간 대법제자에게 혹형을 가해 많은 사람을 불구, 사망에 이르게 한 주요한 살인 흉수들)
문장발표 : 2010년 4월 10일
문장분류 : 박해진상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4/10/2212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