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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룽장 이춘시 우家 삼형제, 몇 년 동안 당한 박해 (사진)

【밍후이왕】(밍후이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黑龍江) 이춘(伊春)시 유하오(友好) 지역의 부녀 우원진(吳文錦·40여 세 )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배운 이래, 쩐(眞)·싼(善)·런(忍)의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2009년 11월 2일 저녁, 유하오구 공안분국 610 불법조직에게 납치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했으며, 현재는 이춘 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다. 유하오 공안분국 디칭펑(翟淸峰), 610 푸궈즈(付國志), 류밍천(劉明晨), 멍판진(孟凡金) 등이 납치에 참여했다.

1999년 중공 사당이 미친 듯이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한 후 10여 년 동안, 우 씨 집안 형제자매 4명 중 3명은 모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박해를 당했다. 그중 우원펑(吳文鋒·50여 세)은 두 눈이 실명된 장애인이었지만 여전히 오랫동안 중공 사당 인원들의 소란, 납치, 구타, 불법감금, 강탈 등 박해를 당했다. 셋째 우원장(吳文章)은 여러 번 박해를 당했다. 현재는 불법으로 허베이(河北) 탕산(唐山) 지둥(冀東)감옥에 감금되어 있다. 설날 전에 한때 생명이 위급했으며 음식물을 주입할 수 없었고 시력도 흐렸다. 하지만 감옥측은 여전히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다.

(1) 우원펑


두 눈이 실명된 우원펑(사진)

우원펑은 70년대에 곰의 습격을 받아 두 눈을 실명했고, 이때부터 기쁨과 행복을 잃었다. 80년대에는 줄곧 자신이 속한 구석에서만 생활했다. 상심에서 절망, 그리고 어쩔 도리가 없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는지는 아마 그 자신만 알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에 그는 여러 가지 기공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어느 날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해 돈을 벌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 자매들은 되도록 큰 형(오빠)의 심원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어 많은 기공 서적을 찾아 주었다. 우연한 기회에 셋째 우원장이 《전법륜》을 가져와 그에게 한 번 읽어 주었는데, 그는 이 기공이 너무 좋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백 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문제들을 모두 이곳에서 답을 찾게 되었고 동시 마음도 정화되었으며, 그가 접촉했던 어떠한 기공보다도 좋은 진짜 공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셋째는 공을 배우고 나면 돌아와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파룬궁을 배운 후에 그는 마음의 고통이 없어졌고 기쁨과 웃음이 다시 얼굴로 되돌아왔다. 우원진은 두 형이 연공한 후에 신심의 변화가 매우 큰 것을 보고 같이 따라 배우게 되었다.

2003년 6월 7일 밤 1시 넘어서 친황다오(秦皇島) 산하이관(山海關) 공안국 1과, 시관(西關)파출소 악경은 우원펑 등 파룬궁 수련생들의 거처에 불법으로 뛰어들어 우원펑 등 파룬궁 수련생들을 납치했다. 그리고 컴퓨터, 복사기, 녹음기, 테이프 등 많은 개인 물품을 몰수했으며 또 많은 현금도 강탈당했다. 악경들은 또 우원펑 등이 임대한 주인을 위협하고 소란을 피워 임대료 1700위안을 빼앗고 또 1000위안을 벌금 물렸다.

우원펑은 시관파출소로 납치된 후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몽둥이로 악경에게 구타를 당했다. 양융(楊勇, 파출소 악경)은 “말을 하지 않으면 생매장할 것이다.”라고 위협하면서 20여 분 동안이나 그를 구타했다. 이튿날 저녁 제2구치소로 보내 불법 감금하려고 했지만 제2구치소는 거절했다. 산하이관 악경은 제2구치소에서 사람을 강제로 수용하도록 뒷거래를 했다.

우원펑은 친황다오 제2구치소에서 나온 후에 2003년 7월 2일 열차를 타고 고향 이춘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열차에서 자무쓰(佳木斯) 철로분국 공안 정보과에게 납치당해 불법으로 몸을 수색 당했다. 우원펑은 1000위안을 빼앗긴 뒤에 유하오분국 융훙(永紅)파출소로 납치되었다.

우원펑은 유하오 지역으로 돌아온 뒤, 처음에는 그의 여동생 집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그의 남동생 집에서 살았다. 융훙파출소 소장 후야쥔(胡亞軍,·音)과 성이 장(張) 씨인 경찰이 늘 시간을 가리지 않고 소란을 피우고 협박해 남동생과 여동생은 두려워서 누구도 감히 그를 남길 수 없었다. 2003년 9월 22일, 우원펑의 남동생은 그를 두이산(對山) 농장으로 보냈다. 두이산 농장과 이춘 지역 차오양(朝陽) 지역, 이춘 지역 610은 서로 결탁해 우원펑을 둥성(東升) 경로원으로 보내 불법으로 감시했다.

우원펑은 단식으로 항의했지만 이춘 지역과 함께한 610은 농업은행에서 월급카드를 폐기(우원펑의 월급은 월급카드로 얻은 것이다)했다. 10월 13일, 우원펑은 두 번째로 꼬박 18일간 단식 항의를 했고, 악인들은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질까봐 두려워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원펑이 경로원에 있던 기간 동안의 일체 비용은 모두 월급에서 강제로 공제되었다. 2004년 3월에서 2006년 3월까지 이춘 지역 610은 우원펑의 월급을 조종해 정지시키고, 아울러 우원펑을 압박해 수련을 포기한다는 전향서를 쓰게 했다. 지금까지 15개월의 월급을 주지 않았다.

2007년 12월부터 2008년 4월까지 이춘 지역 610은 다시 우원펑의 월급을 정지시켰다. 여러 번이나 이춘 지역 610 두목 시밍(習明)을 찾아 가서야 우원펑은 월급카드를 받게 되었다. 우원펑은 2008년부터 유하오 지역의 한 경로원에서 살게 되었다. 우원펑의 매부 한융셴(韓永先) 및 한(韓)의 어머니는 악당 불법인원과 결탁하여 6월 5일에 그를 납치해 불법으로 이춘 상간링(上甘嶺) 구치소에 감금시켰다. 우원펑은 구치소에서 뛰쳐나온 후에 또 양로원으로 보내졌다. 몇 개월이 되어서야 유하오 공안국은 우원펑에게 월급카드를 주었다. 양로원은 우원펑을 데리고 유하오 공안국에 가서 mp4를 요구했으나 유하오 공안국은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양로원 관리원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2) 우원진

우원진, 1999년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치유되지 않던 저혈압, 위장병과 신장염이 수련 후에 아주 빨리 나았다. 그녀는 대법 쩐(眞)·싼(善)·런(忍)의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고 사람에게 선하게 대했으며, 각 방면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했다.

99년 중공 악당이 미친 듯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에 그녀는 불법으로 친황다오 제2구치소에 감금되어 박해 당했다. 이춘으로 돌아온 후인 2003년 9월에 현지 파출소 610 등이 여러 번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시어머니는 늘 심장병이 발작해 하루 종일 약만 먹게 되었다. 또한 종일 답답했으며 항상 그녀가 납치당할까봐 걱정했다.

2004년 3월 하순, 구(區) 610과 신제지(新街基)파출소는 또 여러 번 집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사람을 찾지 못하면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가족들더러 그녀가 돌아오면 파출소로 오라고 전해 주라고 했다. 4월 2일 오후 약 2시 반, 구 610 사무실 두목 왕x쉰(王x馴), 신제지파출소 지도원 둥다펑(董大鵬)과 주민위원회 주임 세 사람이 그녀의 집으로 와서 대법책, CD, 스티커를 내놓으라고 그녀를 압박했고, 또 이미 다른 사람이 그녀를 고발했다는 등등으로 위협했다. 우원진은 그들에게 “파룬궁 수련자는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쩐(眞)·싼(善)·런(忍)’을 수련하는 것은 잘못이 없어요. 장쩌민 깡패집단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들은 그녀를 세뇌반으로 납치하겠다고 위협했다. 우원진은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2006년 3월 7일, 우원진과 큰 오빠 우원펑은 같이 친황다오로 납치되었는데, 우원진은 구치소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2009년 11월 2일 저녁, 우원진은 유하오 공안분국 610에게 불법적인 납치를 당했으며, 아울러 가산까지 몰수당하고 이춘 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다. 좋은 사람이 이런 박해를 당한 것은 천리가 용납할 수 없다.

(3) 우원장

우원장은 수련하기 전에는 성격이 난폭하고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시던 사람이었으며,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아도 안 되는 성격이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던 나쁜 습관을 고치게 되었고, 성격도 아주 크게 변했다.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일에 부딪치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으며 원래 있던 신장병도 나았다. 산하이관 역에서 식당을 차렸을 때, 여러 번 핸드폰 등 귀중 물품(그때 핸드폰은 아주 비쌌다)을 주우면 때로는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시켜 기차역으로 보내 주인을 찾아 주었다. 주인들은 모두 아주 기뻐했으며 또 아주 감사하다고 했다. 식당에 사람이 오면 우원장은 손님들의 필요에 따라 주동적으로 소개하고, 요리 양은 많으니 적게 시켜서 돈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손님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렇게 그는 대법 수련을 통해 각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신념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그는 몇 년 동안 여러 번 중공 불법인원들의 박해를 당했다. 2000년 11월 23일, 우원장과 한 대법제자는 진상을 알리고 대법 실증하러 베이징(北京)에 갔다. 천안문 광장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라는 현수막을 펴자 잇따라 불법 경찰들이 강제로 경찰차로 납치했다. 그는 악경이 대법제자를 구타할 때, 즉시 앞으로 다가가 제지하고 아울러 ‘파룬따파하오’를 높이 외쳤다. 우원장은 베이징 교외의 다싱(大興) 공안분국에 속한 파출소로 보내져 잔혹한 혹형의 괴로움을 당했다. 파출소에서는 집 주소와 이름을 말하라고 그를 압박했으나 그는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들에게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고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악경들은 그를 구타해 온 몸이 상처투성이 되었으며 얼굴에는 큰 상처가 생겨 피가 흘러 내렸다. 힘들어서 때리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손을 멈추었다. 방법이 없자 최후에 다싱공안국의 부국장이 와서 “자신이 사람의 인격으로 담보하는데, 이름과 주소를 말해주면 바로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또 “당신이 이곳에 있으면 어떻게 법을 실증하겠는가. 나가서야만 법을 실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원장을 속이고 즉시 현지로 되돌려 보내 15일 불법 구류를 시켰다.

2003년 6월, 친황다오 산하이관 불법인원들이 함부로 대법제자를 납치해 우원장은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2004년 4월 30일, 우원장은 산하이관 창서우(長壽)산에서 진상표어를 쓰다가 산하이관분국 푸융(付勇) 등에게 납치당해 잔혹한 혹형 괴로움을 당했다. 그가 단식으로 항의하자 또 산하이관 제3구치소 왕융헝(王永恒) 등이 구타를 했으며, 아울러 강제적인 음식물 주입도 했다. 그리고 15일 후에 그는 또 불법적인 형사구류를 당했다. 그는 서명을 거절해 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도리어 산하이관 위법 법정에서 불법 재판을 받고 불법 판결 3년 반을 선고받았다. 현지 검찰원의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그들을 판결하는 조건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법원의 원장은 그에게 “‘전향서’를 쓰면 즉시 풀어주겠다. 집으로 돌아가 어떻게 연마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고 당신을 간섭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만약 계속 연마하면 판결할 것이다.”고 말했다. 옛 부터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관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당이 파룬궁을 탄압하는 데 대해서는 도리어 법률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심지어 변호사마저도 현재 도리를 이야기 할 곳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했다.

11월 11일, 우원장은 탕산 지둥감옥 1지대 2중대로 보내져 계속 박해를 당했으며, 얼마 후에 뇌수종이 생겼고 혈압이 높았다. 후에 또 물건을 볼 때도 시력이 흐렸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정신도 흐릿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몸이 극도로 허약해 졌다.

우원장은 설날 전에 한 때 위독해 음식물을 먹을 수 없었고 시력이 흐렸다. 하지만 감옥측은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다.

문장발표 : 2009년 11월 27일
문장분류 : 대륙 > 박해진상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11/27/2133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