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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설법을 들었던 소중한 시간을 회상하며

글/ 치치하얼 대법제자

[명혜망] 그것은 1993년 초의 일이었다. 밤에 두 차례 꿈에서 깼는데 검은 도포를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허리에 비단 띠를 두르고 등 뒤에 보검을 찬 매우 키가 큰 도사를 똑똑히 보았다.

치치하얼시 전업(電業)문화센터에서 사부님의 설법 경청

1993년 7월 16일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운 좋게 사부님의 치치하얼 설법반에 참가할 수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자비롭고 위엄 있으신 사부님을 뵈었을 때, 마치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다. 알고 보니 사부님은 바로 내가 꿈에서 뵈었던 그 도사셨고, 내가 이 법을 얻도록 하기 위해 미리 날 찾아오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매일 저녁 우리에게 설법해주셨다. 매번 강의 시작 30분 전쯤 회의장에 도착하셔서 수련생들이 제출한 문제에 답해주시고, 정각이 되면 강의를 시작하셨다. 당시 내가 제출했던 쪽지에는 “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온갖 난잡한 것들을 청해 소위 불당을 세웠습니다. 이제 파룬궁을 수련하게 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일념(一念)만 움직여도 순식간에 청리(淸理)해줍니다”라고 답해주셨다.

메이(梅)씨 자매 수련생이 있었는데 사부님 덕분에 몸이 회복되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사부님께 200위안을 부쳐드렸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보내온 주소 그대로 돈을 다시 돌려보내셨다.

수업 중간에 전업문화센터 로비에서 사부님을 뵈었는데 깔끔한 차림이셨다. 흰색 반팔 셔츠에 평범한 회색 바지를 입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소박하시구나’라고 생각했다.

법을 얻기 전에 나는 여러 질병을 앓았고, 전국 각지의 큰 병원을 다녀봤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대법을 수련한 후로는 모든 병이 사라졌고, 병의 고통과 삶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창춘에서 열린 사부님 설법반 참석

1994년 4월 말, 나는 수련생과 함께 창춘(長春)시로 갔다. 창춘 지린(吉林)대학 명방궁(鳴放宮)에서 다시 사부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다. 설법반은 총 10일간 진행됐고 인원이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사부님의 노고가 많으셨다. 매일 자택에서 버스를 타고 지린대학에 오셔서 설법하셨다.

한번은 내가 대학 교정 숲속 작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멀리서 사부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격동된 마음에 “아,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자애롭고 평온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나는 마치 무언가에 제약된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치치하얼 수련생 왕웨이쥔(王偉君)이 무대 뒤로 가서 사부님을 찾아뵙고 오랫동안 앓고 있는 여동생의 사진을 건네며 “사부님, 제 여동생의 병을 좀 봐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사부님께서는 사진을 받아 휘휘 흔들더니 돌려주셨다. 그는 또 “제 여동생이 연공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사부님께서는 “문제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지금 그의 여동생은 아주 건강하다.

설법반이 끝날 무렵, 각지에서 온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명방궁 계단에 사부님을 비롯한 모두가 서 있는데 단지 한 수련생만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었다. 이때 사부님께서 그에게 “지팡이를 내려놓으세요”라고 하셨다. 그 수련생은 오성이 매우 좋아 즉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는 “앞으로 걸어보세요”라고 하셨고 그는 곧바로 걷기 시작했으며 양쪽에 있던 수련생들이 그를 위해 길을 터주며 박수를 쳤다. 그 수련생은 걷다가 조금씩 뛰기 시작했는데 그곳에 있던 많은 수련생이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하얼빈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사진 촬영을 할 때 나는 사부님을 뵙고 싶었고 사부님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부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여기 서세요”라고 하셨다. 하지만 다른 수련생이 “당신은 하얼빈 사람이 아닌데 거기에 서면 나중에 사진을 인화했을 때 어디 가서 당신을 찾겠어요”라며 서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주저하다 난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렸다.

나중에 내 오빠가 사부님께 다가가 “선생님, 모두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는데 저는 늦게 왔습니다. 저도 사부님과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사부님께서는 “그럼 혼자 말고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찍읍시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 설법반에 참가한 수련생들 모두가 사부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드디어 나도 사부님 옆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매번 이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사부님의 음성과 미소가 떠올라 날 더욱 정진하게 격려한다.

다롄 설법반 참가

1994년 7월, 나는 한 수련생에게 “사부님께서 다롄(大連)에서 설법반을 여신다고 하니 같이 가요”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막상 그 수련생이 출발할 때 내게 언제 갈 건지 물어보자 나는 또 가지 않겠다고 말해버렸다. 수련생은 내가 가지 않아도 자신은 가겠다고 했다. 그 수련생이 표를 여러 장 샀는데 자리가 하나 남는 것을 발견하고는 우연히 날 만나 “자리가 하나 남았으니 안 갈래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상의한 후 또 법을 들으러 가겠다고 하니 남편은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다롄에 도착했다. 내가 강의를 듣던 자리는 2층이었는데 마침 무더운 여름이라 날 포함한 거의 모든 수련생이 강의를 들으며 부채질을 했다. 그래서 집중해서 법을 들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사부님이 “부채를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부치면 부칠수록 더욱 덥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오성이 낮아 계속 몰래 부채질을 했다.

어느 날 강의 전, 한 수련생이 방송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랑스 수련생이 사부님께 아이의 무도병을 고쳐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그 아이의 사진 있나요?”라고 물으셨고 없다고 하자 “그럼 당신 집이 어디인지 생각해보세요”라고 하셨다. 다음날, 그의 가족이 장거리 전화로 “어제 커다란 붉은 불덩어리가 집에 들어오더니 아이가 나았어요”라고 알려왔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흥분했으며 수련에 대한 신심이 더욱 굳건해졌다.

매번 설법반에는 좋은 사람과 선행이 많았다. 지갑, 목걸이, 손목시계 등 분실물은 모두 주인을 찾아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분실물이 있으면 수업 끝나고 가져가세요”라고 하셨다.

광저우에서 열린 마지막 설법반 참가

광저우에 가기 전, 나는 광저우의 물가가 비싸서 숙식비가 많이 든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금이 부족했지만 또 강의를 듣고 싶어 한 수련생과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 둘은 라면 한 상자와 과자 한 상자를 등에 메고 길을 떠났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머물 곳을 준비해두셨다. 광저우중의대학이 마침 방학 기간이었는데, 세 사람이 학생 기숙사 침대 두 개를 쓰면 하루에 20위안밖에 들지 않았다.

당시 중의대학 기숙사에 묵은 사람들은 거의 다 설법반에 참가하러 온 이들이었다. 한번은 사람들과 교류하던 중 어떤 수련생이 우리가 라면과 과자만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며칠 후 한 수련생이 내게 “제가 여러분 상황을 사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사부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어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날 밤, 사부님께서는 광저우 상공에 일련의 파룬(法輪)을 보내셨고, 우리 중의대학에 있던 모든 수련생과 두 명의 속인까지 모두 이 장관을 목격했다. 이 숭고한 광경은 2시간 넘게 지속됐다. 수련생들은 격동하여 모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환호하며 기뻐했고, 나중에는 함께 연공을 했다.

설법반 전 기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대법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왼쪽 앞 상공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설법반이 끝나고 돌아가는 기차에는 모두 수련생들뿐이었다. 수련생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분위기가 매우 조화롭고 친근했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원문발표: 2008년 10월 3일
문장분류: 나의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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