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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대양수(内蒙大杨树) 지역 대법제자, 박해로 치사(1)

【명혜망 2008년 11월 27일】 내몽고 호륜패이시 악륜춘자치기대양수(内蒙古呼伦贝尔市鄂伦春自治旗大杨樹) 진중앙거리 6위에 한 평범한 가정이 살고 있었다. 그들중 모친 위슈란, 부친 리진룽(李金荣), 딸 리하이옌은 파룬궁 수련을 하였으며, 이 집 사람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1999년 7월,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부터 이 좋은 가정은 박해로 인해 사람들은이 흩어지게 되고 집은 망하게 되었다.

* 모친 워슈란이 박해로 치사

워슈란, 여, 60여 세. 대양수진 파룬궁 연공장의 보도원인데, 2002년 12월 25일에 내몽보안 노동교양소 악경의 고문으로 인해 치사했다.

수련 전에 워슈란은 엄중한 혈관종(脉管炎), 위염으로 다리가 아파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년 동안 도처로 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병의 시달림으로 인해 그는 살래야 살 수도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곧 이렇게 삶에 희망이 없을 때, 1996년에 행운으로 법을 얻어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여 신체는 점차적으로 좋아졌고 오래 동안 앓던 질병들이 모두 없어졌다. 파룬따파는 그에게 하나의 건강한 신체를주었고 새로운 생명을 주었는데, 그가 어찌 대법에 감격해하지 않을 수 있고 견정하게 수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99년 7월 20일, 하룻밤 사이에 시비를 전도하며 요언과 비방이 하늘땅을 뒤덮었다. 워슈란은 사부님 법상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북경에 청원하러 갑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 이렇게 좋은 대법에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사부님 오늘 법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나는 곧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999년 9월 26일, 워슈란과 남편 리진룽 그리고 딸 리하이옌은 함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베이징 악경에 의해 납치당하고, 현지 공안국에 이송된 후, 불법(不法)으로 대양수 간수소에 갇히게 되었다. 워슈란은 감옥에서도 연공을 견지하였고, 파룬궁을 비판하는 소위 “삼서(회귀서, 결렬서, 보증서)”에 견결히 서명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리허(阿里河) 감옥에 납치당하여 10여 개월을 갇혔다. 2000년 7월 10일, 가족들이 여러 번 요구하고 보증하여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워슈란은 “쩐(眞), 싼(善), 런(忍)”에 대한 신념을 견지하고, 보증서를 쓰지 않고, 동시에 장씨 집단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세인들에게 파룬따파가 박해당한 진상을 말하여 몇 번이나 악경의 박해를 받았고 불법적으로 갇혔던 것이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슈란은 집에서 양수진 중앙파출소 소장 바이리(白丽), 악경 류창샤오(刘长校), 펑진바오(彭金宝)에 의해 납치당해 장기적으로 악륜춘자치기(鄂伦春自治旗) 제2간수소에 갇혔다. 당시 그를 직접 박해하는데 참여한 악인들은 공안국 부국장 리수량(李树良), 치안과장 리번쉐(李本学), 중앙거리 파출소 쉬창파(许长发) 등이다. 워슈란이 단식으로 불법감금을 항의하였고, 2001년 12월 하순에 워슈란의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지자, 악경은 후과를 책임질까봐 두려워 집안 사람들의 보증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2002년 말, 전 공안국과 중앙거리 파출소의 수 명의 악경들이 워슈란의 집에 들이닥쳤다. 당시 워슈란의 신체는 매우 허약하였지만, 악경은 강제로 법원에 붙들어 가서 그의 남편 리진룽과 대법제자 쉐창칭에 대한 불법(不法)적 심판을 했다. 워슈란은 당시 경련상태가 나타났고, 인사불성이었다. 법원은 할 수 없이 식구들로 하여금 병원에 보내 치료하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법원에서 천펑(陈鹏) 등 일행이 집에 쳐들어와서 집에서 법정을 연다고 하면서 워슈란을 3년 판결하고 리진룽, 쉬창칭은 3년 집행유예 판결을 하였다. 천펑은 말하기를 “상부의 지시이기에 변호를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2002년 4월 2일오전에 진 사악당 위서기 옌리화(闫立华) 등이 워슈란의 집에 찾아와 관심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워슈란의 정황을 탐문하러 온 것이었다. 당시 워슈란은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신체는 이미 회복되었던 것이다. 옌리화가 나간지 몇 분 만에 간수소 소장 랜썽(连胜), 펑진보오(彭金宝), 감옥의사 쑤바오화(苏宝花), 더위린(德玉林) 등 10여 명의 악경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강제로 워슈란을 납치하였다. 그날밤, 보안조 노동교양 대대에 넘길 때 악경 더위린이 고의적으로 한 여경찰에게 말하기를, “이 워슈란은 잘 다룰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잘 다룰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악경은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당신들은 안 되지만 우리는 방법이 있어 다룰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한 마디는 사악의 음모를 토로한 것이었다.

워슈란은 올 때는 신체가 건강했고 몸은 깨끗했다. 그가 노동교양소에 납치당한 후, 정면으로 악경에게 선고하기를, “나는 무고하게 박해를 받는 것이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였고, 노동교양소의 강박적인 일체 요구를 거절했다. 악경 즈우잰화(周建华)는 참혹한 수단으로 워슈란을 7개월 동안 괴롭혔는데, 박해로 치사할 때 까지였다.

악경 즈우잰화는 워슈란을 장기적으로 감금실에 가두어놓고 혹형을 가하였다. 사지를 크게 벌리고 족쇄를 장기간 잠그고 대소변 때도 족쇄를 늦추지 않았다. 배고프면 범인에게 입안으로 몇 숟가락의 밥을 떠먹이고 생명이 위급하면 한 이틀 놓아 두었다가 조금 나으면 또 작은 감금실에 가두어(실로 앉으면 허리를 펼 수도 없고 누워도 다리를 펼 수 없는 아주 작은 쇠철창 안) 계속 괴롭혔다. 즈우잰화는 더울 때는 워슈란을 햇볕에 쪼여 혼미하게 했고, 평소에는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감금실에 가두어 놓았다.

악경의 참혹한 박해 아래 워슈란은 뇌혈전 증상이 출현하고, 걷지도 못하고 뼈만 앙상하여 말도 정신이 청성하지 못했다. 집안 식구들이 노동교양소에 요청하여 집에 데려가 치료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악경의 대답은, “규정이 있다. 전환하지 않으면 죽어도 놓아주지 않는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사람은 놓아주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노동교양소의 두목이 친히 말하기를, “전환하지 않으면 죽어도 내보내지 않고 죽으면 정상적인 사망으로 처리한다.”라고 하였다.

워슈란은 2002년 12월 22일 박해로 치사했는데, 사망 당시 장작처럼 여위어 있었다. 워슈란이 죽은 후 악경 즈우잰화는 범죄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워슈란은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목격자는 말하기를, “그는 정말로 산채로 엄청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2002년 12월 25일, 보안쇼 노동교양소 악경은 워슈란의 집에 전화를 걸어 시신을 가져가라고 하였다. 악경은 후안무치하게 죄수복도 벗기지 못하게 했다. 이 일로 불법(不法)으로 갇힌 대법제자들이 단체로 죄수복을 입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집안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 하에, 나중에 감옥당국은 죄수복을 벗게 했다. 노동교양소는 집안 사람에게 한 장의 “사망보고”를 주고 총망히 화장했다.

곧 이렇게 신앙을 견지하고, 바른 신념을 가졌던 한 대법제자가 장씨 사악집단과 그 정책을 집행하는 각급 사악 관원, 악경들에 의해 참혹한 박해로 치사한 것이다.

* 아들을 인질로 부친이 불법적인 판결을 받다

워슈란의 남편 리진룽은 북경에서 내몽판사처에 납치당한 후 그날밤에 그곳을 탈출했다. 악도 리쑤랑(李树良)이 이 사실을 알고 사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찾았지만 찾지 못하자, 악경 옌리화(闫立华), 리슈량(李树良)은 리하이옌(李海燕)의 큰오빠(수련하지 않음)를 공안국에 붙잡아들여 인질로 삼았다. 혹형으로 부친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하면서 리하이옌의 모든 친척들에게, 리진룽이 돌아오지 않으면 인질은 놓아주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할 수 없는 정황에서 리하이옌의 둘째 오빠가 부친을 찾아 큰형님을 맞바꾸었다. 이것은 장씨 사악집단의 반인간성에 의한 비극인 것이다. 리진룽은 나중에 사악당 법원이 불법으로 판결했는데, 집행유예 3년이었다.

* 딸 리하이옌이 박해로 치사

워슈란의 딸 리하이옌는 1999년 9월부터 2005년까지 박해로 치사했다. 이 기간에 수차례 납치당하고 갇히고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

1999년 9월 리하이옌과 모친 워슈란, 부친 리진룽, 자오훙즈 등 사람들이 파룬궁을 위하여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 그러나 그들은 청원실의 대문도 찾지 못한채 악경에 의해 납치당해 현지로 압송당해 와서 대양수 간수소에 갇혔다. 그날 밤에 악경 더위린과 두 명의 무장경찰이 미친듯이 리하이옌을 때리고 그의 두 발을 짓밟았다. 리하이옌의 얼굴은 변형되었고 이빨도 흔들려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두 발은 경찰에게 짓밟혀 신발도 벗지 못했다. 악경은 곧 이렇게 그를 10개월 동안이나 괴롭혔다.

2000년 11월에 리하이옌은 대양수 공안분국 악경의 혹형에 의해 흉막결핵병에 걸려 2001년 6월에 만여 원의 돈을 빼앗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리하이옌은 집으로 돌아온 후 법공부와 연공을 하여 병은 없어지고 신체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후 리하이옌은 모친과 같이 또 납치당하여 아리허(阿里河) 간수소에 갇혔다. 출옥후 리하이옌은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세 번째로 악경의 납치를 당하고 후에는 병치료로 출옥한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2002년 5월 19일, 흑륭강성 눈강(嫩江)현의 악경과 93농장밑 쟈그다치(加格达奇)의 악경이 쟈그다치시의 자료점을 파괴하여 리하이옌은 쟈취에서 93농장 경찰의 납치를 당했다. 이것은 그가 네 번째로 납치당한 것이었다.

리하이옌은 불법적인 고문중에 악인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성명과 주소를 말하지 않아, 악도들은 14시간이나 혹형과 구타를 가했다.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악도들이 그를 호랑이 의자에 매고 철편과 혁띠로 때렸다. 그의 등은 얻어맞아 푸른 자색이었고 다리는 상처로 인해 걷지 못했다. 악도들은 형벌을 가하면서 그의 코구멍에 피우던 담배를 끼워 넣고 입에는 술을 먹이는 야만적인 혹형을 가했다. 참혹한 혹형은 보기조차 끔찍했다. 리하이옌은 박해기간에 단식으로 20여 일 항의하였고, 악도는 그에게 여러 번 박해성적인 관식을 가하였다.

리하이옌은 후에 흑룡강성 쟈그다치 법원에서 불법으로 13년 판결을 받아 하르빈 감옥 7감구에 갇혔다. 거기에서 그는 또 여러 가지 혹형의 괴로움을 받았고, 나중에는 비인간적인 박해로 인한 폐결핵에 걸려 대량의 피를 토했다. 폐엽은 썩어서 없어져 생명이 위급해지자 병실 감방으로 옮겨졌다.

리하이옌의 식구들은 여러 번 감옥측에 요청하여 밖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오랜 교섭 끝에 생명이 위급한 리하이옌은 2004년 9월 2일 밖에서 치료받도록 놓이게 되었다.넉 달 후, 정신과 육체적인 괴로움을 받을대로 받은 리하이옌은 2005년 1월 13일 새벽 4시 경,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겨우 30세였고, 체중은 원래의 54킬로그램에서 박해를 받아 30키로그램 밖에 되지 않았다.

당일 오전 9시가 넘자 경찰 장시링(张喜龄)과 민정 가도위 주임 등 몇 사람이 총망히 와서 리하이옌의 시체를 화장하려고 싣고 갔다.

한 젊고 건강했던 좋은 사람을, 사악당 인원은 왜 급급히 화장시키려고 하면서 화장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하는가? 이 젊고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은, 박해로 인해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의 참상인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워슈란의 사망 안건은 2003년 2월 5일, “파룬궁박해조사추적위원회”의 박해치사 안건에 수록되었다. 이조직은 파룬궁수련 단체의 기본 생존권을 보호하고 정의를 보좌하는 특별히 설립된 전문적인 조사위원회이다 – (파룬궁수련 단체에 대한) 학살 죄행을 조사하는 위원회이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 전면적으로 파룬궁수련 단체를 학살한 흉수와 개인 및 상관된 책임부문을 추적한다. 그들은 개인이나 단위를 막론하고, 하늘가와 바다끝까지는 물론이며 시간이 짧게 걸리든 적게 걸리든 반드시 끝까지 추적한다!

 
문장완성 : 2008년 11월 26일
문장발표 : 2008년 11월 27일
문장수정 : 2008년 11월 27일 00:45:40
원문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8/11/27/190554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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