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8년 9월 18일] (명혜기자 쉬징, 취재보도) 2008년 8월 27일, 청화대학 토목공학과 부교수인 쉬인(须寅)일가 세 식구가 중공의 봉쇄를 벗어나 성공적으로 미국에 갔다. 그날 오후에 시카코에 도착하여 현지 파룬궁 수련생들과 청화대학 출신 동료 여러 명과 친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추석 때 쉬인 씨는 해외에서 취재를 받아들여, 자신의 생활상황을 말하였다. 특히 파룬궁 수련을 한 것 때문에 불법체포되어 퇀허 노동교양소에 수감된 기간 동안 당한 일들을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학생들과 전 세계 인민들로 하여금 중공의 철의 장막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한 상황을 알게 하겠다고 하였다.
* 글을 가르쳐 인재를 기르다 – 전 학과 계열에서 36개의 “웃는 얼굴” 따 냈는데, 쉬인 혼자서 11개를 땄다
쉬인 교수와 담화해 보면 그가 학문을 가르치면서 인재를 키우는 이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1995년 청화대학 토목공학과에서 토목구조공사를 연구하는 역학 과제를 통해 박사학위를 얻은 후, 청화대학 토목공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학문을 가르치면서 인재를 키워온 지도 어언 13년이 되었다.
막 교편을 잡았을 때는 두 개 학과의 교수를 맡은데다 연구생을 모집하고 가르치는 작업과 본과 졸업반 한 개 반의 반주임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이는 쉬인 교수 본인에게는 너무도 힘에 부친 과부하 운행으로서 반 년 동안에 일년 반의 사업량을 하는 것과도 같아 그의 지도교수마저 보고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쉬인 교수의 전 가족은 북경에 친척도 없고 집도 없는데다 애도 금방 교편을 막 잡은 등등의 요소로 인해 이 젊은 과학 연구 사업자는 너무도 힘들었다. 사업 압력이 너무도 커서 신경이 쇠약해졌는데 밤이면 잠들기가 어려웠다. 1995년에 파룬궁을 접촉하게 되면서부터, 그가 한 말대로 적는다면 바로 “나는 하루에 <<전법륜>> 한 권을 다 읽었어요. 날이 어두워졌는데 전등 켜는 것 마저 잊었지요. 다 보고나니 무엇이든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홀가분한지. 그만 꼬꾸라져 잠이 들었어요. 그때로부터 잠을 자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였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쉬인교수는 정신이 특별하게 좋은 감을 느꼈다. 사업효율이 높아졌고, 심신도 건강해졌다. 교수 일에서의 뛰어난 표현으로 인해 여러 번 청화대학 학계의 선진사업자로, 여러 개 국가급 교수의 영예와 과학연구 성과상 등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여러 학기가 결속된 후, 학생들이 준 평가에서는 전 학과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어떤 학생은 평어에 이렇게 썼다. “쉬인 교수님은 내가 중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는 사이에 만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시다.” 그는 또 교수 종합 평가에서 총점수가 연속 몇 학기 동안 전교의 앞자리 5% 이내에 들었다. 청화대학에서는 매번 한 선생님의 교학 평가항목이 본교의 상위 20% 안에 들면, “웃는 얼굴” 하나를 주어 격려한다. 한 학기가 끝나 토목공학과 교수들은 모두 36개의 웃는 얼굴을 따냈는데, 쉬인 교수 혼자서 11개를 따게 되어 거의 3/1을 혼자 차지하여 동료들에게 영락없는 교수 “득점자”로 불리게 되었다.
* 풍운이 돌변했지만 근무지를 지켜 마음을 움직이지 않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 한 후, 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교수는 부득이 새로운 조직과 학교 610 사무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조직은 주요하게 각 단과대학의 퇴직한 당위서기들로 이루어졌고 또 본 학과의 당위서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날마다 윤번으로 모두 중공의 것들을 선전하고 또 이상야릇하게도 쉬인 교수에게 “공회 체육위원”이란 직함을 주어 수시로 회의를 한다고 명분으로 그를 감시했다. 특히 이른바 “민감시기”가 닥쳐오면, 쉬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땐 나도 모릅니다. 왜 오늘 갑자기 회의를 여는지. 집에 가서야 오늘은 바로 16대를 연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나중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의 이 따위 연극을 비난했지요. 그렇게 하니 그들도 아주 난처해 했지요.”
취재 중에 그는 말하였다. “파룬궁은 나에게 어떠한 환경에서나 모두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으므로 나는 사업을 잘하고 교수직도 잘 하였기에 나의 교수 실적은 갈수록 좋아졌고 학과의 엘리트 교수가 되었지요. 학과 지도자는 내 마음이 평온한 것을 보았고, 동료들과 기타 지도교수들도 나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았기 때문에, 내가 연공하는 것을 묵과하였고, 학생들도 내가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나에게 관심을 가졌고, 내가 탄압을 받을까봐 걱정하였습니다.”
하지만 “610” 사무실 사람은 쉬인 교수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여전히 교수직을 하고 있고, 과학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일종의 방식으로 위협하였다. 당신은 이렇듯 학문 가르치기를 좋아하는데, 파룬궁 수련 때문에 학문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해고되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쉬인 교수는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때 그들에게 정중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해고하겠으면 반드시 정식통지를 내놓아 전교생들로 하여금 내가 해고당한 것은 업무 때문이 아니라 나의 신념 때문이란 것을 모두 알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하여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방법도 감히 쓰지 못하였다.
* 갑자기 감옥에 갇혀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고, 무고한 가족이 연루
2006년 3월 13일, 예나 다름 없이 딸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쉬인은 전국 연구생 시험문제를 내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20여 명의 하이댄 공안분국 중공 경찰들이 뛰어들어 집안을 수색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법률적인 증명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마구 뒤지더니 파룬궁 서적을 들추어 냈다. 그런 다음, 백지 상태인 “심문령”과 “검사령”을 내놓고는 당장 써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구실로 쉬인 교수와 아내를 체포하였다.
파출소에 하루 동안 수감된 후, 쉬인 교수의 이치가 있는 강력한 논쟁을 거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 본인은 오히려 하이댄 간수소에 불법수감되었고, 이튿날 “국가안전 보위처” 사람에게 심문을 받았다. 쉬인 교수는 일찍이 청화대학 연공장 보도소의 부소장을 담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중점중의 중점 인물로 되어 국보처 사람이 큰 소리를 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은 놓아줄 수는 있어도 쉬인만은 놓아줄 수 없다.” 쉬인은 그렇게 되어 불법 노동교양 2년을 당했다.
나중에 어떤 경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우리가 사람을 붙잡는데는 지표가 있다. 형사범을 잡자면 우리에게도 위험이 있지만, 파룬궁 수련생을 잡자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없거니와 또 상금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사람을 잡는 것도 2년 후의 올림픽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당신이 올림픽 전에 나올 수 있다 해도 당신은 어쩌지 못할 거야.”
쉬인 교수는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국가테러주의가 아닌가? 그들은 마음대로 사람을 붙잡는데, 잡힌 사람의 가정, 사업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그들은 생각해 보는가? 우리는 북경에 친척이라곤 없는데, 아내 혼자서 모든 가정 부담을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나의 생명안전을 위해 근심하면서 내가 하루 빨리 석방되게 하기 위하여 속을 썩을대로 썩으면서 무거운 정신적 압력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딸애는 14살도 채 안 되었는데, 그 애의 우수한 성적을 보면 본교의 수준높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나의 급작스런 체포는 그 애에게 매우 큰 심리적 압력을 주어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빠가 잡혔다는 말도 감히 하지 못했어요. 그것은 남들이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할까봐 그랬던 것이었지요. 나의 부모님들은 나중에 북경에 와서 집을 돌봐 주었어요. 나의 부친은 80세가 다 되었어요. 부모님들은 나의 일로 뛰어다니시다 보니 병이 악화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지만, 수감되어 있는 나에게는 감히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온 가족의 심리적 압력은 생각해 보아도 알 것입니다.”
이 일은 쉬인 교수의 백여 명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돌연 선생님을 바꾸어야 하니 교무처에서도 어찌된 일인지 몰라 했으며, 대체교수를 학생들이 만족해하지 않아 또 바꾸었지만 여전히 만족해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두 그들에게 익숙한 쉬인 교수를 찾고 있었다. 쉬인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연구생은 간수소에 옷을 가지고 보러 가서 말하였다. “나의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 확고히 대법을 수련하여 정정당당하게 노동교양소에서 나오다
2006년 11월 3일, 쉬인 교수는 북경 퇀허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었는데, 그중 8달 동안 “작은 방(小号)”에 격리되어 그 중 1/3의 시간 동안 30센티미터 높이 되는 쪽걸상에 앉히게 되었는데, 온 하루 종일 벽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움직여도 안 되고, 눈을 감아도 안 되었다. 앉아서 받는 힘의 면적이 작았기 때문에, 시간이 길어지기만 하면 아프기 그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쉴새 없이 그를 찾아와 담화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정신과 육체적으로 쉬인 교수를 괴롭혀 그가 아무런 희망도 바라볼 것이 없게 하였고, 어떠한 사람과도, 심지어 눈길조차도 접촉하지 못하게 했고 어떠한 격려를 받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이렇게 그의 정신을 붕괴시켜 나중에는 수련을 포기하게 하는데 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동교양소에서는 가족과의 전화도 제한을 받았는데, 노동교양소에서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내용이면 곧 차단하였다. 가족의 편지는 모두 먼저 검사되었고, 아울러 그들은 집에서 온 편지를 사용하여 쉬인 교수를 유혹하는데 이용하였다.
쉬인 교수는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부친께서 병환중에 계셨는데, 그들은 집에서 온 편지를 들고 와서 집에 일이 생겼다면서 전화로 물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나는 물론 전화로 물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럼 보증서를 쓰면 마음대로 전화를 하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는 정말이지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연마하지 않겠다는 보증은 제1보이고, 보증을 쓰고난 뒤면 반드시 “폭로비판 재료”를 써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파룬궁을 욕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매 두 달에 한 번씩 또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파룬궁에 관련된 선택에 관한 문제이다. 합격돼어야만 형기를 줄여주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학습순서’이다.”
“나는 이 순서를 따르지 않았으며 협조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중점 대상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암암리에 “감시인”을 시켜 나를 괴롭게 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파룬궁을 감시하는, 수감된 일반 죄수들이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조그마한 은혜도 지대한 유혹이 되는데, 감시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찰이 지시하면 그들은 미친듯이 우리를 학대한다. 나는 경찰 앞에서 직접 감시인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한 모든 나쁜 짓은 바로 경찰이 한 짓이다 라고 말하였다.”
“후에 그들은 나를 협박하여 단독으로 녹화를 보게 하고 사오(邪悟)한 사람들의 말을 듣게 하였다. 보고난 후에 나는 말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이 아니다. 내가 파룬궁 수련생이다. 이 문제를 나는 이렇게 본다.’ 그런 다음에 나는 진상을 말했다. 나중에 녹화를 보고나서 나는, 방금 녹화에서 방송한 내용을 비난했다. 경찰은 아주 실망하여 말했다. “안되겠어, 또 헛보여주었구나. 나중에는 더이상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경찰은 파룬궁을 모욕하면서 이렇게 나에게 말하였다. ‘한 파룬궁 수련생이 강에 종이연꽃을 놓고는 그 위로 걸어가다가 강 복판에 왔을 때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것은 가짜라고 말하였다. 그 종이로 된 연꽃은 첫 번째 것을 밟자마자 물에 떨어졌을텐데 어떻게 강 복판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사이비 과학을 비판 폭로’라는 이 영화는 경찰이 우리를 세뇌시키는데 쓰는 것으로서 수감된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이 모두 여러번 본 것이다. 내가 보니 그 영화는 마술사의 마술법으로, 특이공능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경찰에게 말하였다. ‘마술사의 마술법의 전제가 가짜인데, 어찌 가짜로 진짜 특수공능을 가짜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노동교양소에서는 더이상 이 영화를 돌리지 않았다.”
“나를 전향시키려는 경찰을 다룰때 나는 가급적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말하였다. 특히 나는 이공계 학과의 교수로서 엄밀한 과학적 사유 논거로 경찰들의 그따위 중공 깡패식의 정치 논거와 맞섰다. 나는 자연과학의 각도로부터 그들에게, 파룬궁은 아주 훌륭한 공법임을 증명하였으며, 그들은 내가 사용한 자연과학 논거를 반박할 수 없었고, 경찰도 나는 사유가 이지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들과 말할고자 하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문제를 묻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유를 견제하였다. 바로 이렇게 하여 전향 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는 경찰도 패배를 인정하고야 말았는데, 그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 이곳에서는 당신을 설복할 만한 사람이 없으며 우리 이곳의 비디오와 책은 당신에게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그들 중 누구도 나와 담화하기를 싫어하였다.”
“그 후에는 나를 ‘전향’시키고 ‘교육’하려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경찰도 내가 그들에게 시끄러움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어서 가버리기를 바랬다. 나중에 내가 노동교양소에서 만기석방될 때, 나를 맞으러 온 학교 지도자에게 경찰은 이렇게 말하였다. ‘노동교양소에 들어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돌아가서도 엄밀히 감시하시오.'”
* 다시 자유를 얻어 해외에서 박해를 폭로
2008년 3월 13일, 쉬인 교수는 석방되었으나, 청화대학은 그에게 또다시 착오를 승인하고 연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쓸 것을 강요하였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교수협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렇게 되어 우수한 한 대학교수는 학생들에게 “전도(傳道), 수업, 해학(解惑)”해줄 사업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온 가족을 거느리고 미국에 왔으며,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강불식(自强不息), 후덕재물(厚德载物)은 “주역”에서 베껴낸 것인데, 청화대학의 교훈(校訓)이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동경하는 곳인가? 본래는 마땅히 진리와 정의를 발양, 전파, 수호해야 할 곳이다. 그런데 청화대학의 한 교수로서 무단히 2년이나 수감된 후에도 뒤따른 것은 오히려 신념을 배반하라는 학교측의 요구였으며, 십여 년 교수생애와 바꾸어온 것은 도리어 생활터전의 박탈이었다. 정상적인 한 교수 가정이 파괴되었고, 정상적인 교학 질서가 망쳐져 버렸으면서도 중공은 오히려 쉬인 교수가 파룬궁을 수련하였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교란했다고 했다. 도대체 누가 정상적인 질서를 교란했는가?
명혜망 자료가 나타낸 바에 의하면 지금 청화대학에는 적어도 40여 명의 사람들이 수감, 판결, 노동교양을 당했는데 판결 시간이 가장 긴 것은 13년이다.
쉬인교수의 성명 가운데는 이런 한 구절이 있다. “나는 나의 사업을 사랑하고, 나는 나의 학생을 사랑하며, 나는 나의 친인을 사랑한다. 나는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중화대지를 사랑한다. 나는 나에게 익숙해진 교실과 기대로 가득찬 학생들의 눈길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념과 이익이 서로 모순될 때,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하여, 중공의 박해를 폭로하기 위하여, 중공의 사악한 거짓말에 미혹된 백성들을 깨워주기 위하여, 나는 오직 내가 사랑하는 이 일체를 포기하고 중국을 떠나 내가 능히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나의 마음속 말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의 몸소 겪은 경험으로 나의 학생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중공은 죄가 있다. 따라서 가급적 빨리 내가 겪은 불행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 전 세계 사람들이 중공의 철의 장막 뒤에 숨겨진 진실한 상황을 알게 하고자 한다.”
문장발표 : 2008년 9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9/18/1861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