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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익히 알고 있는 동수들을 추모하며(사진)

글 / 독일 대법제자, 곽거봉(郭居峰)

[명혜망 2008년 7월 23일] 이 문장을 정리하면서 나의 심정은 무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침통한 화제, 파룬궁이 중국에서 박해받고 있으며, 이 박해는 이미 9년이나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이 무수한 사람들의 생명과 행복한 가정을 훼손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닌 대학은 흑룡강성 치치하얼시에 있고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쌍압산시에 있으며 나의 직장은 요녕성 대련시에 있다. 불법으로 수감된 나날에 나는 많은 견정한 대법제자들을 알게 되었고, 이 대법의 위대함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는 생명으로 하여금 위난중에서 비할 바 없이 견강하게 하였으며, 비할 바 없는 바른 믿음으로 영원한 기념비를 세웠다. 나는 바로 진감과 감동속에서 인생의 한 차례 한 차례의 겁난을 넘어 왔다.

나는 일개 서생으로서 어려서부터 고생을 별로 겪어보지 못하였다. 파룬궁을 위해 북경으로 상소하러 가게 되면서부터 나는 다른 일종의 인생을 체험하게 되었다. 북경의 거리에서 남들이 버린 도시락을 주웠고, 집 밖에서 노숙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네 번의 불법수감을 당했는데, 마지막 한 차례는 세 개 교양원을 전전하였다. 마지막에 납치된 때는 천안문 분신자살 위조사건이 발생한 후로써, 중공 사당은 전반 중국에서 미친듯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당시 요녕성 대련시 남석 가도 악경 진금이 대련으로부터 흑룡강성으로 달려와 나를 체포하였다. 나로 하여금 잊지 못하게 하는 말은 그가 술을 마신 후에 나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내가 왜 널 잡아왔는지 알아? 공을 세우기 위해서야!” 얼마나 적나라한 마음속의 말인가!


2002년 6월, 단식 24일 후 석방된 곽거봉의 사진

대련 교양원에서 나는 처음으로 전기고문을 당했다. 전기 곤봉이 내 목에 놓였을 때 찌륵찌륵 하는 소리가 남에 따라 나의 전신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두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갑자기 공기중에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나중에 나는 넉 달간 엄한 관리를 당했고, 또 그 후에는 20명의 대법제자들과 함께 요녕성 관산자 교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파룬궁 수련생들을 성원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100일간 수갑을 찼고, 박해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작은방에 두 번 갇혔다. 후에 나는 또 요녕성 후루도 교양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나는 대법제자 조옥강과 함께 단식을 하여 나중에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위의 이 사진은 바로 내가 단식 24일 후 출옥한지 한 시간만에 찍은 사진이다. 이번 박해는 나의 심신에 거대한 해를 끼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의 침대에 누워서도 자신의 두 손이 침대에 수갑채워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행히도 살아서 자유세계에 왔고, 언론의 자유를 갖게 되어 말할 수 있고, 펜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또 세상을 하직한 그런 동수들을 대신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중국대륙에 아직도 더욱 많은 박해가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피해자들이 어느날엔가 나처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바다 밑 95% 빙산이 수면에 떠오르면 사람들에게 두 가지 결론을 가져다줄 것인즉, 하나는 도덕이 없는 시대에 그렇게 많은 파룬따파 수련자들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견지하면서, 심지어 생명마저 바치면서 그들은 그렇듯 강인하였는데 미래의 인류는 대법제자가 어떻게 생명으로 진리를 수호하였는가 하는 이야기를 영원히 전해내려갈 것이다. 다른 하나의 결론은 이러한 미친듯한 박해 가운데서 사람들은 더욱 직관적으로 공산사당의 피비린내나는 죄악을 감수했을 것이다.

99년에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해서부터 부동한 처지, 부동한 심리상태, 부동한 단계로 동수들이 세상 뜬 소식을 알게 되었고, 매번 이런 소식에 접했을 때마다 그런 충격은 참으로 사람을 너무도 괴롭혔다. 괴로운 것은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을 왜 박해해 죽이는가? 왜 진리를 견지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알아야할 것은 그들은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친구들이란 사실이다. 그건 당신이 문장에서 요해한 박해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박해가 바로 신변에 있다는 것을 더욱 직감적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 이번 박해를 겪고난 후에야 당신은 무엇이 잔악무도이며, 무엇이 천인공노할 일인지를 알게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박해로 치사한 이런 동수들은 많이는 99년 이전에 서로 알게된 것인데, 어떤 이는 한 고향의 동수이거나 내가 사업하고 있는 지역의 동수이며, 또 일부는 내가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는 과정에 알게된 사람들이다. 그들 매 사람마다 모두 살아 숨쉬는 사람들로서 원래부터 마땅히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인데, 예외없이 박해로 치사하였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건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박해로 치사한 사례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있는 사진들을 정리하였는데, 목적은 선량한 사람들께서 나의 서술을 통해 사당이 파룬궁 수련생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를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의 문장을 본 사람들은 생각해보기 바란다. 박해받는 한 파룬궁 수련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허다한 동수들이 박해로 치사당했을 것인데, 그럼 중국의 매 한 파룬궁 수련생의 처지는 어떠하겠는가? 이 몇 년 동안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사당의 박해는 일종의 무슨 상황인가? 파룬궁 수련생은 또 어떠한 압력하에서 진상알리기를 견지하고 있는가? 그런데 나 자신, 박해받는 당사자로서, 세상을 먼저 뜬 동수들의 대변인으로서, 원래 자신의 나라에 속하지 않는 나라에서 언론자유를 얻어 박해를 폭로하는 것 또한 어떤 심정이겠는가? 나의 이 문장이 저 세상으로 간 파룬궁 수련생의 영혼에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들이 영원히 고히 잠들기 바란다.

1. 파룬궁 수련생 왕츄샤, 여, 48세, 요녕성 대련시 사람, 자영업자, 2001년 6월 10일 요녕성 대련시 교양원에서 박해로 치사하였다. 중국에서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 우리는 한 연공장에서 함께 연공하였고, 나는 늘 그녀 집에 가서 법공부하였다. 그녀가 불법수감되었을 때 나는 대련에 가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경찰이 담배불로 파룬궁 수련생의 얼굴을 지지는 혹형을 묘사하였다. 그녀가 대련간수소에 갇혀 있을 때 나는 그녀와 그녀의 언니(불구자)에게 겨울을 날 솜옷을 보내주었다. 후에 나도 납치당했고, 그녀가 박해로 사망했을 때, 나와 그녀는 같은 교양원 – 요녕성 대련 주수자 교양원에 수감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왕츄샤

2001년 6월 9일 , 왕츄샤는 교양원 3층에서 사업인원에게 포위당했었는데, 폭도들은 각종 수단으로 혹독하게 때리고 괴롭혔다. 장시간의 시달림으로 왕츄샤는 정신이 흐리멍덩한 가운데 “회개서”를 썼다. 이튿날, 6월 10일 아침, 그녀가 청성해졌을 때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즉시 “회개서”를 돌려 달라고 했으나, 도리어 폭도들의 더욱 혹독한 매를 맞았다. 연속 그치지 않는 혹독한 매는 점심 무렵까지 계속 되어 왕츄사는 이미 숨이 겨우 붙어 있었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저녁 9시쯤 되어서야 교양원에서 가족에게 통지하였다. 가족이 본 그 당시 왕의 전체 얼굴은 퉁퉁 부어 변형되어 있었고, 온 몸은 흑자색이었으며, 두 다리는 검은 자색으로 부어 있었다. 대련 교양원은 여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박해가 아주 엄중하다. 주요 박해 방식으로는 몽둥이로 음도를 찌르기, 고추물 부어넣기, 끓는 물로 사지를 데우기 등이다.

2. 파룬궁 수련생 류영래, 남, 36세, 택시기사. 여섯 번 불법구류 당한 적이 있고, 2001년 3월에는 불법 노동교양 3년형을 받았다. 우리는 단체연공과 법공부할 때 서로 알게 되었고, 박해가 발생한 후에도 우리는 서로 접촉이 있었으며, 대련 요가 간수소에서는 서로 다른 감방에 갇혀 있다가 후에 우리는 대련 교양원으로 보내어졌다. 그는 나보다 먼저 한 무리 경찰에게 혹형 시달림을 받았다. 당시 그는 지속적으로 7시간 시달림을 받았는데, 널판자에 오르기, 호랑이 의자에 앉기, 경찰이 끈으로 입을 졸라매기, 8대의 전기곤봉으로 동시에 몸을 충격하기 등이었다. 2001년 7월 7일 불행히 세상을 떴는데, 당시 그의 입은 경찰끈에 졸려 다물 수가 없었고(입 양측이 밖으로 5cm 정도 째져 그는 장시기 동안 먹을 수 없었고 기타 수련생이 음식을 떠넣어 주었다), 몸은 전기충격으로 한 곳도 성한 살이 없었다. 당시 그의 아내 왕영매(파룬궁 수련생)는 대련 요가 간수소에 수감되 있었고, 집에는 14살된 아들이 혼자 있었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류영래

3. 파룬궁 수련생 진용, 남, 34살, 요녕성 대련 개발구 대법제자. 2002년에 박해로 치사되었다. 진용은 선량하고 정직하여 주변 이웃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였고, 그 역시 아주 우수한 은행 직원으로서 곳곳에서 진선인으로 자신을 요구하였기에 95년부터 98년 연속 4년간 직장에서 모범사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2000년에 불법 노동교양 3년형을 받아 대련시 교양원과 요녕성 관산자 교양원에 갇혔다. 관산자 교양원은 성급 교양원으로서 요녕성의 모든 교양원중 가장 공포적인 곳이다. 우리는 2001년 8월에 함께 대련교양원으로부터 관산자 교양원에 보내졌다. 그는 나에게 친히 대련교양원에서 호랑이의자 혹형 시달림을 받던 과정을 말해 주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집에는 8살 남자애 혼자만 있었다. 나는 그때 바로 관산자의 작은방(小号)에 갇혀 있었다.


진용

4. 파룬궁 수련생 조옥강, 남, 40살, 요녕성 보란점시 사람, 일반 노동자. 2004년 4월 8일 박해로 치사하였다. 그는 네 번 불법 수감당했고, 우리는 교양원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요녕성 대련 교양원, 관산자 교양원, 후루도 교양원에 함께 수감 됐었다. 후루도 교양원에서 우리는 한 감방에 갇혀 서로 고무격려해 주었다. 후에 우리는 함께 단식하여 자유를 얻었다. 기억 가운데 그는 옷차림새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늘 옅은 곤색 겉옷과 곤색 조끼를 입고 있었고, 후리후리한 키에 짙은 대련 말씨를 했다. 그가 나에게 준 가장 깊은 인상은 강직하다는 것이었는데, 악경이 어떻게 그를 박해하든, 심지어 발로 그의 머리를 짓밟아도, 또 기타 보통 죄수들과 말할 때에도 그가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바로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였다. 관산자 교양원의 한 차례의 대법제자 박해계획 중에는 우리 여러 명의 대법제자를 제각기 각 대대에 보내는 것이 있었다. 경찰차가 경적을 울리며 마지막 역 – 온장자 벽돌공장(6대대의 바깥 노역점)에 이르렀을 때 대법제자를 전부 차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조옥강이 맨 앞에서 걸었다. 당시 현장에는 관산자 교양원 원장 고뢰 등 많은 악경들이 있었다. 하지만 악경이 “꿇어 앉아!” 하고 명령을 내린 후에도 그는 여전히 머리를 높이 추켜들고 힘을 다해 저항하였고, 나중에 사악의 명령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후에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쓰러질 수 없었소. 왜냐하면 내가 제일 첫 위치에 있었고, 현장에는 그렇게 많은 악경과 속인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대법을 위해 존엄을 지켜야만 했소.”


조옥강

2003년에 그는 또 불법으로 납치당했다. 이하는 그의 한 단락 이야기이다. “내가 단식을 한 사흘 후에 그들은 나에게 음식물 주입을 하였소. 죄수는 니에게 억지로 소금과 물을 주입했소. 주입당한 후 나는 하늘땅이 빙빙 돌아 가는 듯 하여 모두 토하고 의식을 잃었는데, 그때 그들은 나를 이미 7일째나 자지 못하게 하였소.” 당시 그는 95일을 단식하였는데 그가 사망할 때는 시달림으로 인하여 겨우 25킬로그램밖에 안 되었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로 믿기 어려웠고 심정이 몹시 침통했다. 조옥강이 간 후 아내는 재가하였고 미성년인 9살 아들 조효동이 남았다. 그의 어머니 장금영도 파룬궁 수련생이었는데, 조옥강의 죽음은 그의 어머니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어 불행히도 2005년 8월 23일에 세상을 떴다. 아들 조효동은 66세인 할아버지 조홍옥과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번 나는 조옥강 형님과 그 아들의 사진을 볼때면 그 아픈 가슴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조옥강의 아들 조효동

5. 파룬궁 수련생 왕철호, 남, 27세, 요녕성 대련사람, 컴퓨터 관련 직업. 그는 2004년 12월 25일 원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왕철호는 1995년에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였고 1999년 전에 우리는 한 고향, 한 연공장에서 연공하였으며, 나이도 비슷하여 피차 서로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6번 불법 수감 되었었는데 그 중 두 번은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고, 마지막 한 차례는 불법노동교양 3년형을 받았다. 선후로 4개 교양원에 수감되었는데, 대련 교양원, 관산 교양원, 본계 교양원, 후루도 교양원 등이었다. 나는 대련 교양원에서 관산자 교양원으로 보내진 첫 패의 파룬궁 수련생이었고 그는 두 번째 패였다. 대련 교양원에서 그는 손발을 모두 침대에 묶이는 혹형을 받았고, 본계 교양원에서는 맞아서 온 몸에 피가 낭자하였으며, 여러 번 작은 방에 갇혔다.


왕철호

2003년 5월, 그가 후루도 교양원에서 사악한 박해에 항의하여 단식할 때, 악경은 6대의 전기곤봉으로 그의 등과 양 겨드랑이를 충격하여 물집투성이였고, 그런 다음 두 손을 침대에 묶어놓고 위장에 관을 꽂고는 대량의 약물과 맥주를 주입해 넣었다. 사흘되는 아침에 왕철호는 정신을 잃었고 응급조치 후에 악경은 계속하여 주입하였으며 사람을 시켜 윤번으로 지키면서 그를 자지 못하게 하였다. 장시기 동안의 박해중 그의 몸은 엄중항 상해를 입어 2004년 12월 25일 원한을 품은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어느날엔가 이곳을 떠나 외국으로 가겠다고 하였는데 생각밖에도 내가 오늘 외국에 있고 그는 도리어 세상을 떠났다. 관산자 교양원에서 박해로 치사한 4명의 파룬궁 수련생 중 세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6. 파룬궁 수련생 번흥복, 남, 31살, 흑룡강 쌍압산시 사람, 우체국 간부. 그는 선후로 흑룡강 7대하 감옥, 목단강 감옥에 갇혔었는데 2005년 1월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떴다. 아내 장력은 9년형을 받고 지금은 불법으로 흑룡강성 여자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번흥복은 나와 동갑이고 우리는 99년 이후에 알게 되었다. 그는 본지에서 보기 드문 우수한 인재로서 초등학교때 두 개 학년을 월반하였고, 16살 때 화중 이공대학의 소년반에 다녔으며 졸업후에는 쌍압산시 우전 계통에서 사업하면서 쌍압산시 전신국 교환 센터 부주임 겸 우의현 전신국 부국장을 담임하였다. 1998년에 그는 흑룡강성 전신계통에서 세기를 뛰어 넘은 인재로(전 성에 오직 50명 뿐이었고 쌍압산시에는 오직 한 명 뿐이었다) 평가되었다. 동년배 중에서 그는 가장 출중한 사람으로서 누구도 그의 사업 업적을 따를 사람이 없었고, 특출한 기술력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번흥복

2002년에 번흥복은 불법판결 5년형을 받고 7대하 노동교양소로 강제 이송당했고 후에는 목단강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그는 핍박을 당했던 일들을 나에게 말한적이 있다. 그는 돼지를 먹이고, 밀가루 반죽울 하고, 바닥을 닦았다. 그렇듯 우수한 인재가 감옥에서 그렇듯 하찮은 일을 하다니 참으로 사람을 가슴아프게 한다. 2004년 6월, 그는 복도에서 걸어가다가 갑자기 졸도하여 쓰러졌는데 검사해보니 빈혈이었다. 그 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고 감옥에서는 책임을 지기 두려워 그를 쌍압산시 전염병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흥복의 어머니는 밤낮 그리던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들은 이미 병에 시달려 원래의 모습을 잃었고, 걷지도 못했으며 일어나고 앉는 것도 부축해야만 했으며 사람은 피골이 상접하여 몸무게가 36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아 64세된 어머니가 그를 업을 수 있었다. 2005년 1월 말에 복흥의 신체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불행히도 2005년 1월 31일 원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시내에는 눈꽃이 날렸고 또 하나의 백발 노인이 검은 머리의 사람을 보내는 비극이 중국에서 발생하였다. 번흥복이 세상을 떴지만, 그의 아내는 흑룡강 여자감옥에 불법으로 감금되어 있었고, 집에는 어머니와 5살 아들만이 서로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번흥복의 아들

7. 파룬궁 수련생 오월경, 흑룡강 쌍압산 사람. 내가 중국을 떠날 때 나는 친히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그런데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내가 외국에 온지 한 달 후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었다. 사진중의 용모가 뛰어난 남자애의 이름은 오영기인데, 오월경의 아들로서 14살이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그는 너무도 일찍 인간세상의 고초을 맛보았다. 지금 그는 가목사시 고아원에 있다. 오영기는 어려서 차사고로 엄마를 잃었고, 부친 오월경은 파룬궁 수련을 했다는 이유로 박해로 치사하였다. 오영기의 유일한 보호인인 고모 오월하는 역시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탓으로 가목사 노동교양소에 불법 수감되어 있다. 2001년 12월, 오월경은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사당 악도들에게 납치되어 잔혹한 시달림을 받았고, 2002년 1월에 불법판결 12년형을 받고 흑룡강성 목단강 감옥 11감시구 23분감시구에 수감 되었다. 목단강 감옥은 생활조건이 극히 나빠 전염병이 범람하고 있었다. 5년 넘어 수감되어 받은 박해는 오월경의 심신에 커다란 손상을 주었고, 불행히도 엄중한 폐결핵이 옮아 장작개비처럼 여위었다. 바로 그의 폐가 썩어 커더란 구멍이 뚫린 것이었고, 체중이 40여 킬로그램 밖에 안된 상황에서도 목단강 감옥은 백방으로 방해를 놓다가 나중에 가서는 사람이 안 되게 되니 책임이 무서워 집으로 돌려보냈다.


오월경

집으로 돌아온 오월경은 신체가 몹시 허약하고 생명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쌍압산 중학에서 교원으로 있는 누나 오월하(파룬궁 수련생)가 늘 그를 고무격려해주고 보살펴 주었기에 그의 몸은 점차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07년 9월 28일, 재난은 또 한 번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것 같은 이 가정에 덮쳐 들었다. 쌍압산시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사당의 통일적인 교란중에, 보산구 악경 방소명, 이복 등이 오월하의 집에 뛰어들어 말로는, 상황을 확인한다는 거짓말로 오월하를 억지로 끌고 갔는데 어떠한 법률적 절차도 없이 직접 그녀를 가목사에 보내어 불법 노동교양을 시켰다. 오월경은 막 집에 돌아왔고 누나는 그가 의지하는 주요한 기둥이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잡혀가자 그의 병세는 더 가중해져, 불행히도 2007년 12월 23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모가 잡혀가고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집에는 오영기 혼자 남았다. 불쌍한 아이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 가목사 고아원에 보내어졌다.


오월경의 아들 오영기


오영기의 유일한 보호인, 고모 오월하

8. 파룬궁 수련생 오령하와 기송산, 이 두 파룬궁 수령생은 모두 내 고향 사람들로서 나는 비록 알지는 못해도 그들의 이야기만은 똑똑히 알고 있다. 2001년, 오령하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탓으로 불법 노동교양을 당해 가목사시 시거무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무리한 수감은 그녀의 정신, 몸에 극도의 상처를 주어 나중에는 간경화 복수를 야기시켰고, 그리하여 집에 보내어졌다. 2002년 7월 27일, 겨우 37세인 오령하는 부스럼으로 터진 상처와 불룩한 배에서 물이 흐르는 몸을 가지고, 파룬따파에 대한 비할 바 없는 확고한 믿음을 지닌 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겨우 열 몇살 되는 아이와 칠순이 넘은 양친 부모를 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한 번은 국외에서 홍법할 때 우연히 오령하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당시 현장에서는 “천안문 광장이여, 알려달라”는 노래를 방송하고 있었고, 현장의 기분은 아주 장엄하였다. 이는 나로 하여금 이 두 장 사진에 깃든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였다. 이는 오령하의 생명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이 두 장의 사진은 수련생이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찍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없다. 사진을 찍은 수련생은 지금 이미 세상을 떴다. 그의 이름이 기송산이다. 2003년 6월 18일, 겨우 27세인 기송산은 불법납치된지 5시간 만에 쌍압산시 악경의 혹형에 의해 치사했다. 악경 룽청범은 기씨의 어머니를 위협하였고 아울러 그의 유해를 보호자 없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오령하가 노동교양소에 들어가기 전에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령하는 납치되어 가목사 노동교양소에서 당한 박해로 간경화 복수와 두 하지가 썩게 되었다

외워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역사를 덮어 감추지 못한다. 어떤 때 대륙에서 전해온 소식을 보게 되는데, 나는 그런 소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박해의 매 하나의 세절과 신념의 어려움을 나는 너무도 똑똑히 알고 있다. 매 한 글자의 배후에 또 얼마나 많은 슬픈 이야기가 있을 것인가? 정보가 층층의 전달을 통해 해외까지 전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가! 신앙의 힘은 무궁하고, 공정한 것은 늦게 올 수도 있지만 영원히 빠지진 않을 것이다. 대법제자는 더구나 이왕의 역사와는 다르다. 우리는 간고한 환경에서, 공포적인 박해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

진선인을 신앙하는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사당의 9년 동안의 박해 중, 상해를 가장 크게 받은 이들이 바로 어린 아이들이다. 그들은 핍박으로 인해 부모와 갈라졌고, 핍박으로 돌아갈 집이 없게 되었으며, 핍박으로 학교를 그만 두었다. 양친을 잃었거나 심지어 박해로 치사했다. 그들의 눈물을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흐느낌 소리를 당신은 들어 보았는가? 1999년 7월부터 2008년 7월 사이,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민감 도경을 통해 능히 자세하게 확인한 바 이미 3,163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박해로 치사하였다.

중국 대륙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사업도 집도 버리고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가면서 평화적인 청원을 하였으며, 아껴쓴 돈으로 전단지를 찍었으며,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진상을 삽입하여 집집으로 보내주었다…… 해외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피곤도 모르고 국내 동포들에게 전화를 하고, 우편으로 진상을 밝혀 주며. 세계를 돌아다니며 박해에 관심을 가지고 제지할 것을 호소하였고, 법률적 수단을 통해 박해 원흉들을 기소함으로써 정의를 부추켜 주었으며, 각종 곤란을 극복하면서 참된 말을 하는 자유 매체를 꾸려, 중공의 정보 봉쇄를 돌파하고 진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 줌으로써 세인들의 정의와 양지를 불러 일으켰다……

파룬궁 수련생, 이는 얼마나 특수한 군체인가! “쩐(眞), 싼(善), 런(忍)”의 진리가 비방당하고 짓밟힐 때, 세인이 거짓말에 독해당해 대난에 직면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중공 사당의 장장 9년에 달하는 멸절성적인 박해에 직면했을 때, 날조, 폭력, 혹형과 학살에 직면했을 때, 파룬궁 수련생들은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또한 증오를 품고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용감히 나서서 이성적이고 장기적으로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하였다. 그들은 “쩐(眞), 싼(善), 런(忍)”의 숭고한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진(眞)으로 가짜를 폭로하고, (善)으로 악을 막고 인(忍)으로 폭력을 막는 한 갈래의 반박해의 길을 견정하게 걸어왔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무사무아(無私無我)로 “쩐(眞), 싼(善), 런(忍)” 진리의 빛발을 보위함으로 하여 점점 더 많은 심령들이 각오와 회귀의 여정에 오른 것이다.

2008년 7월 20일, 파룬궁 박해 9주년 기념일에 나는 촛불을 켜고 “촉광”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불법(佛法)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세상을 뜬 파룬따파 제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점점의 촉광, 곡마다 비장하고 슬픈 노래, 수련자의 영웅적인 비장함을 이야기하네
점점의 촉광, 한 수 한 수의 서사시 마다, 수련자의 자비와 견강함을 이야기하네
점점의 촉광, 하나하나의 교량마다 세간의 정의와 선량을 이어주네
점점의 촉광, 하나하나의 희망마다 쩐(眞), 싼(善), 런(忍)의 아름다움을 사방에 뿌려주네

문장발표 : 2008년 7월 2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7/23/1826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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