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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이 관주 대지를 비추네 (1)

-사부님께서 관주에 오셔서 법을 전한 14주년을 기념-

작가:산동관현 대법제자

머리말
1. 만세의 인연을 대법이 이끌다.
2. 사부님께서 처음 관현에 오시다.
(1)신의 기적(神迹)
(2)공과 법을 전수
(3)사부님께서 제자의 집에 가시다
(4)사부님께서 소성(萧城)에 가시다
(5)사부님께서 대명(大名)에 가시다
(6)영암사(灵岩寺)에서 사부님께서
3. 사부님께서 두 번째 관현에 오시다.
4. 사부님께서 세 번째로 관현에 오실 준비를 하시다.

서두

1992년 11월, 1993년 5월 사부님께서는 두 번이나 관현에 오셔서 우주의 근본대법을 관현대지에 골고루 전하셨다. 대법을 널리 전하던 시기에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여기에 와서 교류하고 토론하였던가? 1999년 7.20이후, 이곳은 사악이 중점적으로 파괴하기도 하였다.

1. 만세의 인연, 대법이 이끌다

관현은 지리적으로 루시평원(鲁西平原) 서쪽과 연기(兖冀)중간의 로위(鲁卫) 접경지대에 있다. 즉, 당우(唐虞)3대의 익주(冀州)지역이다. 주위진관씨(周谓晋冠氏)와 황읍(黄邑)성씨인데, 춘추를 보면 진관(晋冠)씨의 읍이고 한조 때는 청연현(清渊县)이고 당조 때는 고조를 피하여 청천현(清泉县)으로 고치고 송조와 금나라의 대명부(大名府)이고 원나라 때는 동창로(东昌路)에서 원조 6년에 관주로 승급하였다. 명나라, 청조 때는 동창부(东昌府)에 속했으며 지금은 랴오닝시에 속한다. 동쪽 마돈하(马颊河)를 사이에 두고 동창부와 인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위하(卫河) 하북성의 관도(馆陶)와 이웃하고 남으로는 신현(莘县)과 접했으며, 북으로는 린칭(临清)과 접하고 있다. 동서 약40킬로미터이고 남북은 약50킬로미터이다. 면적은 1150평방킬로미터이고 현재 인구는 약 70만이다.

관현경내에 고산준령은 없지만 그러나 고대로부터 하류 고도로 윤택하여[膏润], 전하는데 의하면 홍안강(鸿雁江), 사하(沙河), 황하, 청하(清河), 조왕하(赵王河), 마협하(马颊河)와 고돈하(古屯河)는 경내로 흐르고 더욱이 청연(清渊), 교고(巧姑)[교여천(巧女泉)이라고도 한다]. 앤산[청나라 때《앤(弇)묘링천(庙灵泉)》란 시가 있다. 높은 앤묘에 파란연기가 감돌고 감천은 파도치고 비석에 새겼노라. 삼십육계를 알고 덕정에 감사를 드리니 단비는 촉촉이 산령에 기도드리네. (巍巍弇庙绕烟青,泉有澜兮碑有铭。卅六知时酬德政,甘霖底事祷山灵)] 등 맑은 샘물은 앞 다투어 솟아오르고 한 갈래의 영험하고 수려한 기가 흐르듯 하늘땅이 풍요하고 수림이 우거지고 꽃들이 만발하는 절경이다.

공자[공자는 만선향(万善乡) 완단즈 촌에서 염자(冉子)를 위해 맥을 짚으며 말하기를, 사람이라!질병이 있을 수 있네! 동시에 오늘의 공자촌에서 주숙했다.]와 맹자 [오늘 성(城) 동북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장평촌은 맹자를 기념하는 절과 효춘정(晓春亭)흔적이 있다. 맹자는 여기서 종횡가 경춘 대장부를 만나 마땅히 “부귀하더라도 음탕하지 말아야 하고, 빈천하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위협과 무력 앞에서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었다]두 성인은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가르쳤다. 공자의 학생 염자는 이곳을 사랑하여 죽은 후 이곳에 묻혔다.[오늘날 만선향 왕단촌이고 명나라 때 현령이 자아를 반성한《염자현사》시가 있다. 선현의 뼈는 황대(荒台)에 묻혀 만고에도 남면에서 인제가 여전하네, 옛나무가지에 까마귀 울며 지나가니 천년의 영학은 다시 오리라. 아름다운 명월도 부끄러운 듯 적막한 비석은 무성한 풀들이 가리웠다. 감개무량하다 논하지 말고 존경하는 마음을 심어 놓는다네]

그러므로 관현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고 남자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여자는 부지런히 옷감을 짜면서 사람들은 효도와 의리를 알고 있는 전통적 마을이다. 태종, 연소(延昭)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달리고 목계영(穆桂英)[전하는데 의하면 오늘의 신집향(辛集乡) 동서 낙차산 남쪽의 목장사람이다]이 여기서 크게 적진을 격파하고 군영보루의 자리도 그대로 존재해 관람할 수 있다. 부처님과 신을 공경하는 예절은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선을 향하는 남녀들이 많다. 사원과 도관(寺院道观)이 전현 경내에 널려 있다. 그중에 유명한 곳도 40여 곳 있다. 예를 들면 성동의 자치사(慈济寺), 천불사(千佛寺)[오늘의 칠리불당], 국보사, 집보사(聚宝寺)[오늘 한촌], 태평사[오늘의 개하토(开河头)], 성남의 원조사(圆照寺)[오늘의 마채], 삼청관(三清观)[오늘의 사촌], 백타사(白塔寺)[전설에 의하면 천신이 이정천왕의 백색보탑을 훔쳐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백불사[오늘의 백불토], 원퉁사(圆通寺)[오늘의 염촌], 석불당(오늘의 사촌), 관인당(오늘의 염촌), 성부의 불성사(오늘의 소화촌), 만선사(오늘의 만선), 정혜사(오늘의 류소촌), 만수사(오늘의 한로촌), 금강사(오늘의 장팔채)벽가궁(오늘의 리고)성서에는 82개의 절과 72개의 당조 사원 군체가 있다.(오늘의 당사), 현성내에는 려조당(오늘 성내의 문명가), 자치사(현치동), 자혜암(慈惠庵)(현치동남), 관인당(현치동남), 자미관(현치서), 개리사(화회가 옆에는 지장암(地藏庵), 충명사(崇明寺)[현치서에 있다. 원조때 건립했고 벽돌로 탑을 세우고 명조 현령의 스스로를 반성한 시《고탑고충(古塔高冲)》이란 시가 있다. 어렴풋하게 들떠있는 푸른 하늘지도가 있고 팽허사가 사방을 둘러보는 천지 개벽등이다. 점심이 되면 구름을 뚫고 무지개를 펼친다. 한조의 세력은 천자의 옥처럼 웅대하고 하늘을 찌르는 백령풍 같다. 걸음마다 조용히 다가서니 호흡은 옥제궁을 통하네]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과 부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의와 양보는 습관이 되었고, 불도신을 믿는 사람들이 나날히 많아졌다. 신불께서 이 비옥한 땅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중생들은 일찌기 인걸과 땅이 영험한 여기 관현으로 와서 대법이 홍전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이다!

명(明), 청(清)조 때부터 천재와 인화가 끝없었고 예의와 신불을 공경함이 점차적으로 쇠퇴하고 절과 도관도 파괴 당했다. 집을 지키기 위하여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문맹도 갈수록 많아졌다. 문화가 없으면 법을 얻는데 아주 큰 장애가 아닌가?! 어떤 방법으로 세인을 깨닫게 하는가? 한 사람을 우리는 꼭 말해야한다. 그는 곧 1883년에 관현에 출생한 유림진무장의 천고의 기이한 걸인──무훈(武训)이다.

1993년 5월 12일 점심때이다. 관주호텔(당시는 현위초대소)북쪽 식당에서 2,30명이 사부님을 알현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밥 먹기 전에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관현에 온 것은 고향에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묻기를 “사부님의 고향은 장춘이 아닙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생에 내가 관현에 있었다.” 무슨 원인인지 유감스럽게 여러분들이 더 묻지를 않았고 사부님께서도 더 말하지 않았다. 후에 장춘제자들에게 사부님께서 관현의 일생은 속인 속에서 밥을 동냥했다고 한다. 사부님께서 《진수》한편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은 아는가? 부처님은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찍 속인 중에서 동냥하였다” 사부님과 무훈은 어떠한 인연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감수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제도하기 위해 무수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고생을 겪으셨다. 우리는 응당 배로 이 만고의 기연과 사부님의 자비한 제도를 진귀하게 여겨야한다.

2,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관현에 오셨다

(1)신의 흔적(神迹)

1992년 봄여름에 관현의 제1기 친목회가 열려 일부 외처에서 일하는 관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중에는 중국 기공 과학 연구회에서 일하는 한옥안(韓玉安)도 있었다. 당시 한옥안과 만나는 간부들은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는 양생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과 명성있는 기공사 등등이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리훙쯔 선생님과 파룬궁을 소개하고 추천하였다. 관현은 당시 10여 가지 기공이 전해졌지만 몇 년간 연마해도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방면에서 효과가 좋지 않았다. 한옥안의 소개를 듣고 파룬궁이 좋다는 생각에 사부님을 모시기로 준비하였다. 발기인으로는 장회헌(张怀轩) 원현지(县志) 주편집, 안문린(安文彬), 류희기(刘希奇)[현 체육교사],후에 현위부서기 사영조(史永朝), 부현장 치옥분(齐玉芬)도 초청에 찬성했다. 후에 민정국의 장여정(张汝亭), 왕수봉 두 국장과 주옥춘(朱玉春)주임(당시에는 어떤 공파의 보도원이었다), 현 기공협회의 왕회장과 노간부국의 주진달(周振达)국장 등 여러 부문에서 함께 요청했다.

사람이 병이 있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부님께서는 아주 바쁘셔서 한참 동안 관현에 오실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옥안에게 사부님께서 언제쯤 학습반을 여시는지 물었다. 10월 25, 26일 한옥안의 전화를 받았는데 10월 30일 사부님께서 북경에서 학습반을 연다고 했다. 10월 29일 로서(老瑞)[가명]와 미용 두 사람이 바로 북경으로 갔다. 그날 밤 로서(老瑞)는 평생 처음으로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한옥안의 도움으로 로서와 미용 두 사람은 30일 오전 북경 대법제자 류따재(刘大姐)의 집에서 사부님을 뵈었다. 류씨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로서를 보고 아주 기뻐하셨다. 그를 위하여 신체를 조정해주고 친히 파룬배지를 달아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엄지손가락으로 로서의 천목부근을 비틀은 후 “돌지 않는가?”라고 물으시자 로서는 “적화(赤化)”가 엄중하여 “돌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조금 힘을 더 주어 또 한번 비틀었다. 로서는 머리가 멍하여 “돕니다”라고 말하자 사부님께서는 웃으셨다. 그가 꿈에서 부처님을 만났던 일을 사부님께 말하니 사부님께서는 그 이유는 이후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대략 30일 오후 4,5시쯤 파룬궁 전수반이 2포병부대 강당에서 열렸다. 11월 5일 오후 본기의 전수반이 끝날 무렵 로서는 강당 뒷 편에서 하루 빨리 관현에 오셔서 법과 공을 전수해주실 것을 사부님께 간곡히 말씀드렸다. 한옥안도 옆에서 말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바쁘시지만 빠른 기일 내에 관현에 가 보시겠다고 대답하셨다.

11월 12일 새벽 1시 로서와 로대[戴](가명) 두 사람은 로서의 전용차를 타고 감단(邯郸)기차역으로 향했다. 새벽 5시쯤 사부님과 일행 4명은 감단기차역에 내려 로서의 차를 타고 기남과 감단길에서 후당구북의 길을 거쳐 관현으로 들어섰다. 약 7시가 넘어서 사부님일행은 붉은기 길 중간쯤 다리북쪽에서 하차하신 뒤 굽은 돌이길 남쪽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관현에 도착한 첫 아침식사로 튀김과 콩물을 드셨다. 식사 중에 로서는 사부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려고 하자 사부님께서는 동의하셨다. 식사 후 사부님 일행은 노간부 활동센터에 가서 유관부문의 영도를 만나 학습반을 꾸리는 일에 대해 상의했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공안국, 민정국, 노간부국, 체육위, 기공협회와 모모공의 보도소 등 방면의 유관인원들이었다. 회의 도중에 사부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조정(调理)해 주셨다. 11시 반이 넘자 로서는 사부님 일행을 점심식사에 초대했고, 노간부국 주진달국장과 노대가 와서 알현했다. 점심식사 때 사부님께서는 병을 보러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번거로움을 끼칠 수 있으시다면서 로서 집에는 가지 않기로 하셨다. 어떤 사람이 사부님을 현위의 초대소 귀빈실에 모시자 사부님께서는 비싸다며 하루 저녁만 묵으신 다음 서쪽 2층에 있는 보통실로 옮겨 23일 아침 관현을 떠날 때까지 묵으셨다.

12일 오후 현위 부서기 사영조, 부현장 치옥분이 합동으로 현직 각국 급부문의 영도 몇 십 명에게 알려서 노간부 센터에서 함께 회의를 했고, 사부님께 관현에 오셔서 경을 전하고 보배를 가져다 주심에 열렬히 환영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파룬궁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13일 오전 관현 영화관에서 한차례 공을 가진 보고회를 열기로 결정하시고는 노간부센터에서 병 치료를 3일간 해주셨다. 사부님께서 관주 영빈관 서남 작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셨는바, 민정국에서 사부님을 청하신 것으로, 이때 사부님을 모신 사람들은 국장 장여정, 부국장 왕수봉, 사무실주임 주옥춘과 공안국 두 명의 경찰이었다.

11월 13일 오전8시가 지나자 사부님께서는 영화관에서 공을 가진 보고회를 진행하셨다. (한옥안도 참가)오후는 노간부 활동 센터에서 병치료를 해주셨다. 16일까지 바삐 보내시고 오후는 저녁 강의를 위해 노간부 센터에 가시지 않으셨다.

사부님께 병치료를 하실 때 기이한 일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 이런 형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대법에 대해 초보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다. 당시 병치료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병이 나으면 10원을 받고 당시 효과가 명확하지 않으면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일반 노간부 활동센터에 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중의나 서의가 치료하지 못하는 난치병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와서 운이나 만나 보려고 한 것인데 반신불구 환자들도 적지 않게 왔다. 예를 들면 현병원의 직원인 조옥현은 밤중에 귀가하다가 성서문 밖에 있는 리민 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는데, 강물이 말라있는 상태였기에 머리가 땅에 부딪혀 윗부분이 마비되어 목부위 밑으로는 감각이 없었다. 손발도 움직이지 못해 밥도 집사람이 먹여 주었는데, 몇 년 동안 가족들은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던 그가 사부님의 치료를 받은 자기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런 효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4일 오전 추운 날씨에 미미한 북풍이 불었다. 8시 전후로 노간부 활동센터에는 병치료를 하러 오는 사람들로 끝이 없었다. 그 중 한 중년부인은 몇 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4년째 탈항으로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여 스스로 생활하지 못했고 앉거나 설 때 너무나 어려워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녀의 남편이 여러 번 휴가를 내어 병원에 갔다(제일 긴 휴가는 약 일년)랴오닝성 전문병원, 성립일원, 성립2원, 성중의병원, 성노개병원, 088병원, 90병원, 베이징협하병원 등 내노라하는 병원 모두 치료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병세는 갈수록 중해져 종종 쇼크로 인해 몸은 말라 나뭇가지와 같았다. 약 160센티미터의 키에 55킬로그램이던 체중이 32킬로그램으로 빠졌고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발버둥 쳤다.

10시쯤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서쪽 방문 앞에서 부녀를 보면서 무슨 병이 있는지 물으시면서, 눈을 감고 윗몸을 약간 구부리라고 하시고는 오른손으로 머리에서 발까지 한 번 두드리셨다. 그 소리는 매우 컸는데 약 20분경 지나자 이 부인의 불그스름한 얼굴에는 땀방울이 많이 맺히면서 각종 병이 다 없어졌다!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눈을 뜨고 무엇을 보았지 묻자 그녀는 눈앞이 깜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그녀에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라고 했는데, 그녀는 많고 많은 다른 공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 그녀는 사부님의 불체를 보면서 즉각 사부님께서 사람을 제도하려 오신 것임을 알았고 부처님이 세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그녀에게 자전거를 타라고 하여(그녀는 4년이나 자전거를 타보지 못했다)그녀는 바로 자전거를 탔다(오성이 좋아 사부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사부님께서 빨리 타보라고 하시자, 류아주머니도 빨리 탈수록 좋다고 하여 그녀는 울안 중앙의 큰(연)못을 돌면서 자전거를 탔는데 마치 어린이 같았다. 울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박수를 쳐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는데 모두들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기쁨에 들떤 그녀를 보고 무엇이라 말했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고는 후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춤을 쳐봤다. 그녀는 춤을 추며 사부님께서 나의 병을 치료해 주셨는데 나는 사부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했다. 15일 아침 일찍 그녀는 4년 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찾아 사부님 곁에서 한 명의 봉사요원으로 일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바퀴 바람이 빠져있어서 남편이 공기를 넣어 자전거를 타고 사부님을 뵈러 갔다.

15일 하루는 자전거가 좋았는지 두 번이나 오가면서 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6일 오후에 보니 앞바퀴에 바람이 없어서 남편이 반나절이나 바람을 넣어도 들어가지 않아 살펴보니 안의 고무바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뒷바퀴를 보니 역시 안에는 고무바퀴가 없었다. 부부는 신기한 것을 체험했다면서 놀랐다.

3일 동안의 자문(咨询)치료 중 신기한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 엄중한 심장병, 암증, 뇌혈관, 고혈압 등도 치료된 예는 아주 많은데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2)법과 공을 전수

11월 16일 저녁 7시, 파룬따파 관현 제1기 학습반이 관현진 회의실에서(지금은 존재하지 않음) 진행됐다. 사람들이 많아 두 번째 강의[課]는 관현 술창 회의실에서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음)열렸다. 17일 저녁무렵 제자들은 차로 사부님을 술창 회의실에 모셨고, 사부님은 강의가 끝난 후에는 걸어서 관주 여관으로 가셨다. 마지막 날까지 사부님께서는 모두 걸어 다니셨으며 완고하게 제자들이 차로 모시지 못하게 하셨다.

매일 사부님께서는 일찍 문을 나셔셨는데 홍기 거리를 따라 십자길에서 동쪽으로 돌아 관현술창으로는 약 400미터 거리다. 굽인돌이에 인민 이발소가 있었고 현재의 “좋고 아름답다”는 복장점이 있다. 당년 사부님께서는 이곳에서 이발을 하셨던 것이다.

매일 제자들 모두 빨리 술창에서 사부님을 기다렸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을 잡아주어 많은 사람들은 끝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공개적으로 법을 전한 시간이 얼마되지 않아서 제자들은 아직도 무엇이 수련인 줄 잘 몰랐고 허스(合十)하는 예절도 몰랐다. 그저 사부님을 높은 공이 있는 기공사인줄 알고 마음속으로 아주 친근함을 느꼈다. 어떤 제자들은 사부님과 악수하면 공이 빨리 자란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생각은 아주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매 번 마다 일찍 문 앞에서 기다리는 제자들과 악수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얼굴에는 자비한 미소로 여러 사람들을 보았고 어떤 때는 제자들과 몇 마디 말을 한 다음 강의실로 향하셨다.

사부님께선 1992년 5월 장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전수하셨다. 2기의 학습반을 꾸리고 후에 북경에서 1기를 꾸리고 그 다음 4번째 강의는 10월 14일 태원광기(矿机)공장초대소에서 진행했다. 로서가 참가한 것은 북경의 2기 학습반이다. 그후에 사부님께서 관현으로 가셨던 것이다. 관현은 사부님께서 공개적으로 법을 전한 4번째 지역으로 전국적으로 제6기 학습반이 열린 곳이다. 이것은 관현 최대의 영광인 것을 당시의 관현 제자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학습반에서 강대한 공을 내보내 많은 사람들이 덥고 피곤해 했고 19일 저녁에는 사부님께서 회의실의 벽조차 빛을 방사한다고 하셨다. 공을 가르치실 때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이 몸에서 20센티를 초과하지 말고 그 안에서 기지를 찾으라고 하셨다. 후에 제자들이 이런 것들을 말할 때면 모두 감개무량해하며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의 자비한 제도에 무엇으로 보답할지? 오직 견정하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가고 사부님께서 가르쳐 준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한 번은 사부님께서 강의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데 어떤 부체는 사람들에게 깊이 숨어 같이 들어왔다. 당신은 빨리 나가 사람 몸으로 전생하여 이 법을 얻으라. 조금 있다가 가지 않으면 제거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말씀을 마치자 5,6명의 수련생들이 토하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서자 부체들은 가버렸다. 그 몇 사람들은 돌아온 후 아주 정상적이었고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당시 모든 기공사들은 모두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을 말했지만, 사부님께서는 고층차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다. 어떤 제자들은 고층차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사부님께 노자나 혜능(慧能) 그런 층차인가고 물었다. 어떤 제자가 기억한데 의하면 사부님께서 천정을 가르치면서 노자와 혜능도 모두 법을 듣고 있다고 하셨다. 어떤 제자들이 이 공은 얼마나 높이 수련할 수 있는가 묻자 사부님께서는 “만약 여래 이 층차가 있다고 한다면 그가 막지 못한다.”

매 개인의 근기가 같지 않고 학습반의 반응도 같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은 4번째 시간에 왔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결인하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했는데 재빨리 그의 천목이 열렸다. 사부님이 계신 강연대에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정자와 누각이 있고 마지막에 보니 사부님께서는 큰 부처님이셨다.(이 수련생은 후에 개봉에서 교류회에 참가할 때 실내에서는 크고 작은 파룬이 꽉차있는 것을 보았다.)

관현의 본기 학습반을 원래는 열흘 잡았는데 주최측이 시간이 길다고하여 후에 7일로 줄였다.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신체를 조절할 때의 내보낸 공은 에너지가 크고 맹렬하여 어떤 제자들은 강의를 들을 때 혼미하여 잠자는 상태라 사부님께서 강의하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이후의 법공부에서 차쯤 사부님의 위대함과 자비를 인식한 것이다.

학습반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부님을 뵙고는 아주 익숙하고 전혀 낯설지 않다고 했다. 어떤 수련생은 수강 후 사부님을 배동하여 초대소로 가는 도중에 자신이 며칠 전에 꿈에서 어떤 사람이 도와준다고 했다는 말에 사부님께서 당시에 해답해주셨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에서 말씀하시기를 “3년 전부터 당신들을 관계하였다. 당신이 이 학습반에 참가한 것은 3생의 행운이고 조상에서 덕을 쌓아 세상을 떠난 당신의 친지들도 같이 덕을 본다”

22일 오후 사부님께서 강의를 끝내시자 식사시간이 되었다. 저녁 7시면 또 강의를 하셔야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일부 수련생들과 사진을 찍으셨다.

이번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제자들은 매 사람마다 40원의 학비만 내고 중도에서 들어온 사람은 20원만 냈다. 또 일부분 입장표와 학원증을 수여했다. 마지막 날(22일)저녁, 사부님께서는 친히 매 제자들에게 수료증[结业证书]을 발급하셨는데 증서의 글은 모두 사부님께서 친히 쓰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의 문답에서 제자들이 사부님께 다시 한 번 학습반을 꾸릴 것을 간절히 요청하여 사부님께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강의를 마치는 날, 사부님께서는 친히 관현 보도소에 기를 증정해 주셨다.

(계속)

발표시간 : 2007년02월23일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2/22/1490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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