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사부님께서 제자의 집으로 가시다.
1, 도가공을 연마하는 할머니가 보다 높은 사부를 모셔 장래에 자신도 기공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당시 생각은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층차였다. 그녀는 사부님의 강의를 듣고는 강의가 너무 높으며 사부님께서 겸손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의 대뇌가 감당하지 못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전 도가의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강의를 마치자 그녀는 강단 앞으로 가서 사부님께 “겸손하라구, 당신이 여기서 큰소리를 치는데 옆에는 높은 사람들이 듣고 있네!”사부님께서는 그녀의 말에 웃으시면서 답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작은 도가의 형식으로 사부님을 가늠했다. 대법수련은 사람 마음을 직시한 것이고 집착을 다 버려야 관건인 것이다. 그녀는 사부님을 집에 청하여 또 다시 말했다. 그럼에도 사부님께서는 의연히 웃으시면서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후에 그녀는 천천히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 할머니집에 가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할머니에게 중임을 맡겼으며 또 일부 문제를 보셨기 때문에 관현을 떠날 때 두 제자로 하여금 뒤에서 그녀를 돕도록 하셨다.
2, 로서가 집 앞에 한 그루의 오동 (梧桐)나무가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손으로 살짝 두드리면서 나무가 웃는다고 말씀하셨다. 로서가 밤에 가부좌할 때 이 나무가 빛을 발했다. 일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로서는 이 나무를 뽑아야 했고 저녁에 향불을 피우며 사부님께 이 일을 알렸더니, 그날 밤 꿈에서 백양 한 마리가 동남방향으로 달려갔다.
3, 현 인쇄공장 대문 서쪽에는 작은 문이 있는데 대략 19일 오전에 사부님과 리씨 성을 가진 제자가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 그곳에는 도가의 도술을 가르치는 학원생이 있었다. 학원생이 한 부녀의 사진을 사부님한테 보여드렸다. 미소를 짓고 계시던 사부님께서는 사진을 보시자 마자 얼굴표정이 굳어지면서 그 사람에게 내려 놓아야 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 부녀는 바람을 일구고 비를 내리게 하는 자그마한 도술을 부릴 수 있었는데 동물부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학원생도 깨끗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그 사람을 해치는 사영을 청리하셨다. 그 학원생이 사부님을 바래다 드렸는데, 사부님께서는 대문에서 다시 돌아가셔서 그 학원생에게 알려주기를 “이미 이 울안을 다 청리하였다.” 사부님께서는 그 학원생에게 많은 것을 주셨고, 그의 수련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그 수련생은 잘하지 못하고 심지어 7.20이후에 사부님과 대법에 미안한 일을 했지만 사부님께서는 그 수련생에게 기회를 주셨다!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그 사람이 꼭 대법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사부님의 무한한 자비!제자들은 영원히 사부님을 공경할 것이다.
4, 18일 오전 한 중년 부부는 사부님께서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사부님께 자신들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는 집을 세들어 살았는데 집주인이 검은 큰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사부님 일행이 울안에 들어서자 사부님의 앞뒤 사람들에게는 짖어도 유독 사부님을 보고는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땅에 엎드려 조용히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 일행이 들어서자 집에는 사부님을 뵈러 온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중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근기가 어떤지를 사부님께 여쭈었더니 “근기가 좋아요, 잘 수련하세요.”라고 하셨다. 또 다른 사람도 묻고자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부님께서는 몇 명의 수련생들을 보더니 말씀하시기를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합니다.”고 하셨다.
식사할 때였다. 반찬은 그런대로 풍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반찬 맛이 어떤가고 묻자 사부님께서는 어떤 것을 먹어도 모두 같은 맛이라고 하셨다. 반찬을 집을 때 사부님께서 왼손으로 받치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친히 몸소 법을 전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일례로, 사부님께서는 관현으로 법을 전하려 갈 때 입었던 스웨터(毛衣)는 기운 자리가 있었고, 하루 세끼를 식권을 사서 식당에서 그대로 식사를 하셨다. 식권은 류아주머니가 보관했다. 류아주머니는 처음 사부님을 따라 왔는데 사부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 것을 목격하면서 먹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자 어느 날 아침 스스로 계란후라이을 하나 샀다. 사부님께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 하셨고 또한 류아주머니한테 한 단락의 법을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관현을 떠나실 때 남은 식권은 남겨두었는데 아침과 접심 식권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기셨다. 물론 단체이든, 또 사부님과 같이 단독으로 찍든 지간에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모두 만족시켜 주셨다. 매 번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짜릿해지면서 따뜻한 감을 느낀다. 학습반의 마지막 날 오후, 사부님께서는 류아주머니와 경(耿)아주머니에게 지시하여, 4명의 수련생에게 길림대학 명방궁(鸣放宫)에서 가부좌 연공하시는 법상을 주라고 하셨다. 당시 한 제자가 나는 이미 청했습니다고 하였고 이에 경아주머니는 “사부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개인 명함장까지 남겨 주셨다. 오늘 생각하니 사부님께서 관현 제자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커다란 기대를 걸었던가? (사부님께서는 또 다른 두 집에도 가셨는데 근래 정황을 잘 모르므로 말하지 않겠다)
(4)사부님께서 소성(萧城)에 가시다
금요일 오전(11월 20일) 제자들은 미니버스로 사부님을 모시고 소성으로떠났다. 사부님께서 올 해 역시 이 길로 소성에 가신 적이 있다. 이 길은 관현의 서북쪽으로 만선향을 통하는 향촌 길이다. 차가 길에서 흔들거렸다. 제자들이 사부님께 관현의 풍토인정과 전고(典故)를 말했다. 류아주머니는“길 옆에는 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토지신, 지방신과 다른 공간의 중생들 모두 길 양옆에서 사부님을 환영하네요.”고 말했고, 그 당시 한 제자가 감개무량하여 사부님께 왜 이런 작은 관현으로 오시는지를 여쭈자 류아주머니는“여기에 사부님께서 제도할 사람들이 있습니다”고 했다.
소성은 관현 북토진 동남 5리서의 위하동안에 있고 비교적 보존을 잘해 온 완정한 군마고성(军马古城)이다. 《송사(宋史)>>,《료사(辽史)》에 의하면 성내 흔적에서 발견한 것은 명대릉경(明代隆庆) 년간에 산서 안찰사 양사진의 묘지명 중에서 알았는데, 이 성은 요국태후 소연연(萧燕燕)이 송조와 작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렇게 “소성” (역시 말이 휴식하는 성)이라고 했다.
이 곳은 세인들의 주목은 받지 않지만 “산해(山海)”, “가욕(嘉峪)” 두관과 같이 지형이 험하고 웅위롭고 기교가 정교하지 못하고, 더욱이 고대의 수도 장안 변량(汴梁)같이 명성 높고 역사가 유구하여 무수한 관광객과 문인들을 불러오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그는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저명한 전연지맹(澶渊之盟)이 이곳에서 한 번 싸움에서 달성한 것이다.
기원 1004년 겨울,역사에서 유명한 “전연 전역”(澶渊之役) 중 적의 군정을 잘아는 소태후(萧太后)는 친히 출정하여 3군을 통솔하였다. “(오늘의 소성 서쪽인 량좡에 천년 된 홰나무가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소태후의 말을 메놓던 곳이라고 한다) 원거리 중원을 진공하고, 소성을 이용하면 진공하여 공격할 수 있고 퇴각하면 수비할 수 있는 전선 보루인 것이다.” 범패(犯贝)(청하현), 위(위현), 중외를 진감함을 가리킴 ”송조의 대신 구준력(寇准力)은 조정의 왕흠약(王钦若), 진요수(陈尧叟)의 도망을 주장하는 교란을 물리치고 송전종(宋真宗)황제가 친히 출정하게 하였다. 형세 핍박에 전종은 친히 북경(오늘의 하북성 대명현 성동북)에 왔다.
양연소(杨延昭)는 이런 글을 올렸다.“치단(契丹)이 전연을 격파하고 북쪽 경내의 천리길에서 강탈한 물건을 말 위에 싣고 다니므로 사람과 말이 다 피로하여 무리가 많아도 가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정예 군대를 이끌고 위호군은 성에서 쇠뇌로 소태후의 동생 타란(挞览)을 사격하여 죽였다. 이렇게 요나라의 사기를 꺽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관현에서 요병을 크게 격파하고 소성을 점령했다. 결국 소태후를 핍박하여 사절을 보내 전연(澶渊)(오늘 하남성 푸 양 (濮杨)현서남)정전맹약을 맺었다. 역사적으로 이를 “전연 지맹”이라 부른다.
오늘 소성에 올라 13미터 가량의 높은 성각 위에 올라서니 소성 안팎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전마는 표효하고 금패는 울리고”,“차거운 빛이 철갑 옷을 비춘다”는 감각이 들었다.
사부님께서는 서문에서 내려 소성 비석 앞에서 기념 사진을 남기시고 성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성곽의 제일 높은 곳에서 사방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공능으로 시간의 대문을 열어 요군의 장막을 보시고 전쟁포로를 매장한 만인 구덩이를 보셨다. 중간 거리에서 하차 하시자 현지 사람들은 사부님께 지난 5,60년대에는 대낮에도 마을 밖에서 선녀들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마을 서북쪽의 지면에서 여섯자 높은 장수를 점검하는 무대에서 공능을 이용하여 당년의 여 통수 소태후를 보았다. 가죽신을 신고 몸에는 전포를 두르고 머리에는 꿩깃털을 꼽고 위무당당하게 장군대에서 요군을 검열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류아주머니와 무언가를 자꾸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류아주머니는 천목으로 일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사부님께서는 천천히 송목으로 둘러싸인 장수대에 올라 거기서 제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셨다.
장군대를 내려 북쪽으로 북쪽 성곽에서 돌다가 시간이 남게 되어 제자들이 사부님께 대명(大名)에 가서 점심을 드시자고 말씀드려서 사부님께서는 응답하시였다.
(5)사부님께서 대명에 가시다
차는 동고성진 동쪽의 106국도 앞으로 달려 다리를 넘어서면 금탄진(송조때는 금사탄이라고 불렀고 전하는데 의하면 당년 쌍룡회때 양대랑, 양이랑 양삼랑(杨大郎、杨二郎、杨三郎)이 여기서 전사하고, 역시 목계영(穆桂英)이 일백령 팔괴전을 크게 돌파한 최후의 일진[鎭]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가로를 보았다. 량량(娘娘)묘와 순도점(顺道店)도 있고 길옆 집의 대문안 담벽 중앙에는 대부분 신상(神龛)이 있고 그 안에는 대부분 관공(关公)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처음 사부님으로 부터 남방 사람들이 관공을 재부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대명의 역사는 유구하고 익남(冀南)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이다. 위하, 장하(漳河), 마돈하(马颊河)는 경내에서 통과한다. 성급문물보호단위로는 당대의 적인걸(狄仁杰)사당비석,뤄랑무덤비석(墓碑), 후진(后晋)마문조의 신도 (神道)비석, 송대 오례기(五礼记)비석과 송대 주희(朱熹)경을 쓴 비석 등이다.
대명은 또 대명부라 부르기도 한다. 서주 때는 위에 속하고 (西周属卫). 춘추 때는 진에 속하고 전국 때는 위에 속했다. 진나라 때는 감단군과 동군으로, 한조 때는 원성현이다. 당나라가 원성을 버리고 귀향으로 들어가고 건중 3년에 대명부라 개명했다. 북송 칭력 2년에 대명을 북경(하북대명현 동북)으로. 북송희녕(熙宁)6년에(공원1073년)에 폐지했다. 소성(绍圣)2년(1095년)에 다시 복명하고, 정하 6년(1116년)에 치남아진(오늘의 하북 대명현남) 금나라때 원래대로 회복하였다. 청건륭( 清乾隆)22년(175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관현의 5대가 송, 금나라 때 대명에 속했다.
당승상(唐宰相) 위정, (《신당서》기록에 의하면 위정은 위주 취성사람이다. 오늘 말하는 관도현 사람이다)이 일대에서 도사로 있었다. 한나라를 찬탈한 왕망의 조상은 원성이다. 오늘의 황금제향(黄金堤乡)5촌포두다. 양가장(杨家将)도 여기서 주둔하였다. 북경으로 승급한 후 대명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올랐고 군사상에서는 치단(契丹) 침략을 방어하는 북방중심진이라 재상구준찬(寇准撰)은 말하기를 “동군의 팔다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북문의 요새 하늘을 잠구네”
차가 대명현성까지 도착하기에는 아직 한참 남아 있을 때 길남쪽의 사람들이 폭죽을 터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터지는 같은 느낌에 차까지 흔들렸다. 류아주머니가 이것은 “사부님께서 오신 것을 환영하는 것이다”고 알려주었다. 차가 작은 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갔다. 대략 1시에서 2시 사이에 차는 길 북쪽에 있는 갓 개업한 식당문 앞에 섰다.(그 당시의 식당은 지금은 없다)
제자들이 곧장 2층에 자리를 잡자 안내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하여 제자들이 사부님께서 첫 반찬을 주문하시도록 요청하려고 하니 사부님께서는 그때까지 오시지 않았다. 1층에 내려가도 사부님께서 보이시지 않는 것이었다. 좀 지나니 사부님께서는 구운 닭 한 마리를 들고 오셨다. 제자들이 서로 어떻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사 오시도록 하였는지 서로 원망하자 사부님께서는 “기사에게 사드리는 것입니다.”고 하셨다.왜냐하면 차를 이용할 때 소성에는 간다고 하였지 대명에는 간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기사가 힘들어 한다고 사부님께서 친히(류아주머니가 가지 못하게 했다)가셔서 구운 닭을 사오셔서 기사를 위로한 것이다.(또 기사에게 파룬 뺏지도 드렸다)또 일부 예의적인 말씀을 하셔는데, 이 일은 제자의 마음에 새겨져 잊지 못하고 있다.
밥을 먹은 뒤 차는 도로 대명성 밖 거리에 서게 되었는데, 사부님께서 이곳에 한참 서 계시면서 거리를 보고 성문도 보셨다. 사부님과 류아주머니는 천군만마가 성문에서 쏟아져 나와 사부님 뒤를 돌아 이 문으로 대명고성의 거리로 향한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여기서 기념 사진을 남기셨다. 왜냐하면 성곽에 오르는 문이 잠겨져 있었고, 직원이 없어 사부님께서는 성곽에 오르지 못하시고 남쪽을 향해 한 단락 가신 다음 되돌아와 대문 북쪽에서 한참 서 계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문은 명,청시기에 있었고 송조의 성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송대의 대명이 위치했던 자리를 찾아 보라고 하셨다.(오늘 제자가 일부 역사 자료를 봤는데 《중국고대 성시 자전》에 대명고성은 청건륭 22년에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역사자료와 완전히 맞는 것이었다. 당시 제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차가 소인하 다리에서 서자 사부님께서는 제자의 사진기에 사부님의 필름을 넣으셨다. 소인하는 장(漳),위하의 지류이고 대명성동교에서 남에서 북으로 흘렀다. 장하는 림장에서 경예를 거쳐 대명에 흐르고 당년의 서문표(西门豹)는 치예에서 (오늘의 안양북)이다. 중학교 국어과에서 한편의 《하아저씨가 장가가네》란 글이 있다. 서문표가 위나라 수도를 다스린 이야기이다. 사부님께서는 이 모습을 사진기로 배경을 찍어 돌아가면서 제자들에게 당년의 그 극을 보게 하셨다. 그것은 다리 남쪽 강변에 붉은 기 휘날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북소리 하늘에 울려 퍼졌다……
차는 계속하여 동으로 향하다가 북으로 접어들었다. 대략 3키로미터 가량 갔을 때 대로변의 향교선촌에 들어섰는데 이 부락은 사람들에게 원시적인 역사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 촌의 위치는 고대명 서성벽 밖에 있었다. 차가 시골 길을 따라 북으로 조금 향하다가 촌북교로 가다가 동쪽으로 약 1키로 미터가량 간다음 더 가지 못하여 밀밭중간에서 섰다. 사부님께서 차에서 내리셨다. 작은 북풍은 미미하게 사부님의 머리카락을 나부꼈는데, 사부님께서는 사방을 바라보시고 구름과 안개가 마치 과거의 일체를 힙싼 것 같았다. 푸른 나무 몇 그루가 마치 과거의 일부 소식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북쪽강을 사이두고 의연히 어린수목이 자란 높은 언덕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북경의 송대 명성 로성의 서북쪽의 무너진 한조각 담벽이다. 사부님께서는 밀밭에 서서 류아주머니와 무엇인가를 말씀을 나누었는데──사부님께서 송대명성과 그 번영한 거리, 우뚝 솟은 성루와 성위의 위풍당당한 양가병(杨家兵)을 보신 것이었다. 우리가 떠날 무렵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만약 고고학자들이 모두 공능이 있다면 ……”
차에 탄 한 수련생은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우는 악습이 있었는데 커서는 사람들의 작은 병을 볼 수 있었고 또 술독에 빠져 매일 알콜에 잠겨서야 편안함을 느꼈다. 이 사람의 실제 행위는 사람이하로서 사람(人)인 자에도 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무량한 자비로 강대한 공을 내보내 이 사람을 청리해 주셨다. 이 사람은 평소 하루에 한보 넘는 담배를 피웠는데 그 날은 담배피우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사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서 이 사람은 담배술을 끊어버렸다. 지금 이 수련생은 매번 사부님을 회억할 때 특히 《사부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란 남성 독창을 들을 때 그의 눈물은 선이 끊어진 염주마냥 아래로 떨어진다.
차는 밀밭의 작은 길에서 되돌아왔다. 남쪽을 향해 3리길을 가자 아스팔트에 올랐다. 이 동서길은 당송대명 로성의 중간 거리였다. 현제는 큰 거리로 변했다. 동쪽에서 위하서안의 노동문 동서길이가 약 10여리길이다. 차가 동쪽을 향하다가 얼마 안 가서 길 남쪽에 “적(狄)공의 술집”이 있고 서쪽 대재향 파출소 맞은 편에 “적인걸(狄仁杰)사당비석”이 있다.(당년에는 비석만 있었는데 정자(亭)는 96년에 세웠다.)사부님께서는 차에서 내려 밀밭에 싸여있는 비석앞으로 가셨다.
적인걸(수 607─당 700), 자는 회영이고 당대 병주 태원사람이다. 무측천(武则天)이 즉위한 초년에 그는 지궁시랑(地官侍郎)과 풍각란대평장(凤阁鸾台平章)일을 하고 후에 래준신(来俊臣)에게 모함당해 옥에 갇히게 되어 풍택령(彭泽令)으로 떨어졌다. 만세통년간(공원696년)치단(契丹)이 익주를 함락하여 하북이 진동하자 조정에서는 적인걸을 위주장관으로 임명했다. 치단은 소문을 듣고 물러가 버렸다. 그는 일을 할 때 올바르며 백성을 사랑했기에 백성들의 깊은 존경을 받아왔고 그를 위해 비석과 사당을 세웠다. 적(狄)사당이 전란과 수리를 하지 않아 특히 문화대혁명 때 이 하나의 비석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여기에 오래동안 서 계셨던 것이다.
이때 나이가 든 한 남자가 사부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대명현은 ‘적인걸사당비석'(狄仁杰祠堂碑)을 동쪽으로 약 100메터북쪽에다’대명각인박물관’ 세우려고 한동안 이 비석을 파내여 거기로 옮겨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깊게 파지도 않았는데 비석 좌우밖으로 황색의 흙탕물이 나오고 팔수록 흙탕물이 많아져 비석을 파는 사람들이 조를 나누어 윤번으로 깊은 밤까지 팠으나 그래도 파내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비석 네 주변에는 흙탕물이 다 차있어서 할수 없이 포기하고 이 비석은 이대로 원래자리에 있게 했다” 라고 하면서 이 일은 지금까지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했다.
차가 동쪽으로 약 100미터가량 가자 길북쪽에 소택지 중간의 높은 곳에 몇 장이나 되는 큰 비석이 있다. 예전에 “왕강비석”설이 있는데 “위박 (魏博)절도사 하진도(何進滔)덕정비석”, “송대오례기록비석”(宋代五礼记碑)”등이 있다. 비석글을 보면(비석머리의 8개의 글자)마지막 설이 믿을 만하다.
사부님께서는 자세히 일부 비석에 새겨긴 글과 큰 비석 아래에 누워있는 큰 자라를 보았다. 그때 류아주머니는“이 큰 비석안에는 또 작은 비석이 있다. 어느 날인가 큰 비석이 풍화하면 작은 비석은 세상에 나타날 것인데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마지막에 사부님과 제자들이 “오례기록 비석”(五礼记碑)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제자는 비석앞 구덩 위에 누워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차가 돌아오면서 금탄진(金滩镇)을 건너 비스듬한 상점과 남판(당년 소태후의 군영)을 지나,신윤장(申尹庄)북에서 동쪽 남관 북으로 돈지 얼마 안 되어 제자가 사부님께, 성동남에 맑은 샘천(清泉)이 있는데 강남사람들이 압수하였고, 이 샘천을 찾기 위하여 성남에 벽돌공장을 세웠다고 알려드렸다. 사부님께서 “보았습니다. 지금 사용 못하게 하지만 이후에는 사용하게 할 것입니다”고 하셨다. 기억에 사부님께서 관현사람들의 많은 병들은 이 한갈래의 검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원인이며, 다른 공간의 좋지 못한 물건을 사부님께서 청리하셨기에 이 갈래 강은 새로 강길을 바꾸면 곧 좋아질 것이다. 그때는 청량한 샘물이 또 관주 대지를 적실 것이다. 저녁에 강의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대명에 간 일을 말씀하셨다.
(6)사부님께서 령암사(灵岩寺)에 가시다
23일 일찌기 사부님께서 곧 관현을 떠나시게 되었다. 일부 수련생들은 사부님과 작별인사를 드리고 일부분 수련생들은 사부님을 바래다 드렸다. 로서가 그의 전용차를 타고 왔고 사부님께서는 차에 오르셨다. 로서가 령암사에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고 묻자 사부님께서는 “오늘은 당신이 안배하시오 ”라고 하셨다.
차가 마협하(马颊河)를 건너 로성(聊城) 옛성에 도착했다. 고대 건축물 광장의 확장공사를 10월에 준공하여 가능하게 개방하지 않았기에 사부님께서는 건축물에 올라가지 않으셨다. 사부님은 밑에서 광악루(光岳楼)를 한바뀌 돌면서 말씀하시기를 건축물에는 한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셨다.
차가 료성을 떠나 계속 달리던 중 사부님께서 동작을 하자 곧 한 도사가 나타났다. 몸에는 자색도포를 입고 백발의 긴머리는 가슴 앞에 흩어져 있었고 손에는 먼지떨이를 쥐고 길옆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어떤 수련생이 영접하려 나온 줄로 생각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영접하려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소뢰(小蕾)(당시 차 위에 있었다)의 사부를 구한 것입니다. 그의 사부는 빙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소뢰가 빙하에 있다고 말함)냉궁(冷宫)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제도하기란 얼마나 힘든가!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졌을 뿐만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마음 고생을 하시며 우리의 생생세세 은혜와 원한을 선해하셨을까? 부처님 은혜 그지없어 제자들은 무엇으로 보답할 것이 없다. 오직 엄격히 법을 선생으로하고 사부님께서 가르켜주신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령암사는 태산 북 기슭(北麓) 장청현 만덕 경내의 방산지양에 위치한다. 방산은 또 옥부산이라 하는데 동진(東晋)의 고승인 랑공(郎公)이 여기에 왔다는 말이 있다. “맹수는 굴복하고 돌들은 머리를 끄덕인다”란연고로 령암(灵岩)이라고 한다. 시는 북위 때 흥하고 당송 때는 성대하고 제일 왕성할 때는 궁전과 누각이 40여군데 있었다. 사원(禅房)이 5백칸이 있었고 승려들도 500여 명 있었다. 천태국(天台国)의 청사(清寺), 강릉(江陵)의 옥천사(玉泉寺), 남경의 치샤(栖霞)사와 동시에 4원의 “4절”(四绝)이라고 했는데 령암사는 4절의 첫번째이다.
절 주위는 군산(群山)에 둘러싸여 심오하고 고요하다. 절 내외에는 측백나무, 마정송(摩顶松), 랑공석(郎公石), 가공상(可公床) , 피지탑(辟支塔), 일선천(一线天), 송교(松桥) 그리고 “오보삼천”(五步三泉)이“경치춘효(镜池春晓)”, “방산적취”( 方山积翠)、”명공청설”(明孔晴雪)등 경치는 모두 독특한 정경이 있었다. 대문호 소동파(苏东坡)도 여기서 시를 남겼다. 《술취 해 황모강(黄茅岗)에 가다》.
차가 령암사 문밖에 이르자 대략 정오가 되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산을 올랐다. 로서가 표를 사고 사부님과 앞에서 걸었다. 사부님께서 로서에게 말씀하시기를 “뒤에 4,5백명이 따르고 있어요.” 로서가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안 보입니다”사부님께서 웃으시면서 답하지 않으셨다. 후에야 그것은 다른 공간의 5백 호법신인 것을 알았다.
로서가 사부님을 배동하여 계속 위로 오르고 로대, 로류는 뒤를 따랐다. 언제부터 로서는 15,6세되는 어린 소녀가 따라오는 것을 봤는데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안에는 광천수를 담고 있었다.(로대가 본 것은 40여 세 되는 중년부녀였다), 로서가 그녀가 뒤따르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자 사부님께서 “따라오도록 하세요”라고 하셨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 “물을 파는가?”고 물으니 그녀는 “아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녀를 도와 바구니를 들겠다고 하니 그녀는 도움이 필요없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산에서 그녀의 두 병의 물을 마셨다. 로서가 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온 뒤 그렇게 따르던 그녀가 누구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그녀는 본지의 토지선이다”고 알려주셨다.
산 위의 감동(龛洞)중에 네모난 큰 돌이 있다.(가능하게 랑공석(郞公石) 또는 가공침대(可公床)이고 동굴에는 불상이 없다)사부님께서 위에 앉아 대수인(打大手印)을 하고 로서가 동쪽에, 소리가 서쪽에, 로대와 류아주머니는 아래에서 꿇어 앉았다.
천불궁(千佛殿) 서쪽에 당천보(唐天宝)12년(기원 753년)에 건설한 피지탑(辟支塔)이 있었다. 이 탑은 령암사의 표지성(标志性)건축이다. 로서의 요구에 사부님께서는 이 곳에서 제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로서와도 한 장 찍으셨다. 이때 날이 저물어 저녁 식사 때가 되어 산밑의 한 식당으로 갔는데 반찬을 주문할 때 누군가 “부처의 손 볶음)(炒佛手)을 청하자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은 식사하시오, 나는 안 먹겠소”라고 하셨다. 사부님의 얼굴색은 좋지 않으셨다. 이 채는 더 요구하지 않았는데, 사부님께서는 그 사람이 부처님께 불경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후에 사부님께서《북경국제교류회의에서의 설법》(1996.11)말씀하시기를 “과거의 사람들은 부처를 이야기할라치면 무한히 경앙(敬仰)하는 마음이 생겨 매우 수승(殊勝)한 상태 중에서 부처, 보살, 나한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이 부처를 이야기할라치면 아무렇게나 뱉어내며 아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마치 매우 일반적인 것 같이 여긴다. 이는 인류가 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 이 일보까지 발전하여 조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에 대하여 공경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대사(大事)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함부로 부처에 대해 농담을 하며 심지어 식사함에도 부처를 비방하고 있는데 많은 요리의 이름마저도 부처를 비방하고 있다. 무슨 “나한재(羅漢齋)”요, “불도장(佛跳墻)”이요, 이러한 이름이 모두 올랐으며, 모두 부처를 욕하고 부처를 비방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음식점 중 어떤 것들은 거사나 스님이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이미 부처를 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령암사 서쪽 당조에서 청조까지 역대 령암사 주지사의 무덤탑이 167개 있다. 23일은 날이 어두워 미처 볼 수 없었다. 24일 아침 일찍 로서가 사부님께 탑인데 가보지 않으시겠는가 묻자 사부님께서 대답하셨다. 로서가 23일의 문표를 가지고 공작인원과 말하니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새로 문표를 사라고 했다. 사부님께서 “내가 가서 말하겠다”. 사부님께서 공작인원과 몇 마디 하시니 직원은 아주 기쁘게 여러분들을 보고 들어가게 했다!로서가 사부님께 “제가 공안 제복을 입었어도 사부님보다 못합니다”고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답하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 직원들과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
탑림 속에 들어가자 사부님께서는 차례로 무덤탑 앞을 지나가면서 어떤 탑 앞에서 사부님께서는 단수입장하고 어떤 탑 앞에서는 좀 서 계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매개의 무덤탑에는 원래 그 사람의 형상인데 그들은 모두 나와 말하고 알은 체를 한다”
령암사를 고별하고 로서가 사부님께 기남의 천불사(千佛山)에 가시지 않으시겠는지 여쭈었더니 사부님께서 허락하셨다. 천불산의 산중턱에 한 커다란 불상이 있고 유람객들이 많았다. 그들 몇 명은 향불을 피우고 절하려 갔는데, 로서는 공안제복을 입고 향 피우는 것을 창피스러워하자 사부님께서 “당신이 향에 불을 피우면 내가 꽂아 주겠다”. 로서가 고분히 말을 듣고 향에 불을 달아 사부님께 드리자 사부님께서 친히 이 향을 큰불상 앞의 향로에 꽂으셨다.
위로 흥국선사(兴国禅寺)에 도착하자 한 60여 세의 도인이 사부님을 한 객방에 청하여 사부님을 위해 차를 한 주전자 끓였는데 사부님께서는 마시지 않고 몇 마디 말씀만 나누시고 작별하셨다.
천불산에서 내려와 순정가(舜井街)에서 로서가 사부님을 청하여 몇 권의 기공책을 사달라고 하자 사부님께서는 못사게 하셨다. 후에 로서는 자신이 료성에서 한 권의 가짜 기공책을 샀는데, 버스에서 한 수련생을 만났을 때 그 수련생이 그것을 보자 머리가 곧 아파났다. 여기서 가짜 기공이 모질게 사람을 독해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점심 식사 후 사부님께서는 북경으로 떠나셔야 했다. 기남서역에 가니 오후에 북경으로 가는 모든 차표는 이미 다 팔리고 없어서 로서가 높은 가격으로 표를 사려고 해도 사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음이 급해 온 머리에 땀이 났으나 방법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매 사람에게 한장의 입장권만 사주면 된다”고 하셨다.
사부님과 작별한 후 로서는 좌석표를 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녁에 류아주머니가 전화로 “사부님께서 탄 이 칸에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없고 다른 칸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습니다. 하여 차 안에서 잠을 잘 잤다고 합니다” 로서가 이 말을 듣고 안심이 되고 또 신기하게 여겨졌다.
북경에 돌아간 후 사부님께서는 항상 관현의 제자들을 마음에 두셨으며, 93년 원단에는 친히 관현의 제자들에게 축하편지를 보내 주셨다. 편지의 머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