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훙성
[명혜망 2006년 2월25일] 나는 올해 82살이다. 일찌기 항일전쟁, 4년국공내전에 참가하였었는데 그 중 청진전역과 요심전역에는 완전하게 전부 참가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나의 ‘위대한 공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이런 ‘노혁명’이 어떻게 공산악당에게 박해 받았는가를 공소하려는 것이다. 나는 오늘까지 다행히 살아남은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나의 절반 생애의 피눈물나는 역사를 써내어 선량한 중국사람들이 중공의 사악한 본질에 대해 진일보의 똑똑한 인식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직도 미혹속에 있는 세인들이 어서 빨리 깨여나 마피아에 사교(邪敎)까지 겹친 사악한 중공악당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바로 ‘9평’에서 쓴 것처럼 중공이 일어선 발전역사는 본질상 완전히 ‘사악, 기편, 선동, 투쟁, 빼앗기, 망나니, 이간, 공제’의 역사였다. 지금 이런 것을 말하기에는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그러나 나는 도리어 일생을 통해 검증하였다.
1. 나라에 보답하려는 급급한 마음으로 중공에 잘못 가입하다
1920년대에 나는 가난한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땅농사와 잡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내가 출생한 그날부터 슬픔과 고생이 나를 따라 다녔다.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신 후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쳤는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명은 아주 세다. 어머니를 죽일 수 있다. 당신이 있으면 그가 있고 그가 있으면 당신이 없을 것이다” 어머님은 내가 그를 죽일 것 같아 나를 남에게 주려고 했다. 부친은 동의하지 않았고 어머님은 그냥 젖을 먹이지 않았다. 부친은 나를 형수에게 맡겨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안고 사처로 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였다. 어느집 아이가 젖을 먹지 못한다는 말만 들으면 얼른 가서 몇 모금 먹였다. 이렇게 아주머니는 배곯기도 하고 좀 먹기도 하면서 쌀알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지나와서 죽을 쑤어 먹거나 떡 같은 것을 부드럽게 씹어서 먹이면서 나를 키웠다.
내가 막 한 살이 되었을때 과연 점쟁이의 말과 같이 어머님은 사망하셨고 몇해 뒤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려서부터 줄곧 형수에게서 자랐다. 집이 너무도 가난하기에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형수를 도와 애를 보고, 연자를 돌려 가루를 내고,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는 등 나의 동년은 바로 이렇게 간고한 세월 속에서 지내왔다. 초등학교 공부를 마치자 더욱 큰 고난이 잇따라 왔다. ‘7.7 사변’의 포성이 울렸다. 일본 침략국이 도처에서 죽이고 불지르고 빼앗았고 백성들은 사처로 도망갔다. 나는 항일에 참가하였고 항일구국을 위하여 생사를 가리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의 혹형을 받았는데 찬물을 끼얹고 달아매고 때렸으며, 다리가 퉁퉁 부어 걸을 수도 없었으나 그래도 버텨냈다. 후에 나는 일본군 내부에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하였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나의 이 단계에서의 적후사업의 역사가 후에 나를 몇십년 박해하는데 이용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이것은 후에 할 말이다.
전투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웠기에 나는 중공당원으로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자호감에 넘쳐 입당 선서한 그날이 도리어 나의 무서운 꿈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중공의 사악한 영체는 나의 몸에 달라붙어 몇십년 동안 흡혈과 박해를 진행하였다. 양심이 있는 기타 중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공산당에 참가한 것은 다만 항일구국과 중화민족의 진흥을 위해서였는데 공산당의 빚좋은 구호에 미혹되어 강도의 배역에 잘못 오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바로 사악한 당의 우두머리 마오쩌뚱이 일본수상을 만나서 공산당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었으니 감사드린다고 말한 것처럼 이 언론은 중공 상층의 가짜항일, 진짜탈권의 추악한 면모를 철두철미하게 폭로하였다. 일체 아름다운 구호와 위선행위는 모두가 탈권이란 이 목표를 감싸고 한 수작이며 승냥이 몸에 양가죽을 씌운데 불과하며 색깔을 올린 그림에 불과한 것으로서 목적은 여전히 더욱 많은 사람을 기편하여 그를 섬기게 하여 그가 더욱 많이 살인하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령이 발작하여 잔혹히 박해하다
공산당은 당신이 수요되면 갖은 방법을 다하여 당신을 이용하지만 수요되지 않을 때면 한발에 차버린다. 심지어 수요에 따라 급급히 죽여 버린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 사령(邪靈)의 본래 모습을 더욱 나타내고 있다. 1955년 나의 일생중 아무런 흠잡을 데도 없는 상황 하에서 나를 박해하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에게 나의 역사 자료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나의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결론을 다시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역대로 치켜 세운, 일관적으로 정확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중공이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믿었기에 허락을 하였다. 나의 단순하고 선량함이 도리어 장장 25년이란 감옥생활의 재난을 가져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4월 4일 점심 식사후, 갑자기 한 갈래의 알 수 없는 한기(寒氣)가 머리로 습격해 오면서 어깨가 죄여들었고 전신이 추워서 마구 떨렸다. 나는 즉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나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모는 반혁명 반역분자이다. 당에서는 당적을 박탈하며, 군적을 박탈한다! 즉시 원적지로 돌려 보낸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에 나는 멍해졌고 천둥이 치고, 높은 집이 무너지는듯 비통하다 못해 요절할 지경이였다. 생사를 무릅쓰고 있는 힘을 다해 일생을 중공에 바쳤는데 결국엔 반역자로 몰리여 기소할 권리마저 없게될 줄 누가 알았으랴! 몇 시간후 나는 억지로 기차에 끌려 올랐다. 나는 고통스럽고 억울하여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 내렸다. 마치 만장 심연 속으로 떨어져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듯이 끝없는 고해속에 빠져 들었다.
고난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였다. 원래 원적지로 돌려 보낸다던 결정이 또 갑자기 ‘현행 반혁명분자’로 변하여 관제를 해야 한다고 하여 나를 감옥에 넣었다. 집에서 기다리던 숙모는 짐만 받아보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관제 당하는 동안 나는 인신자유가 없었고 수입도 없어 친척들의 구제로 살아갔다. 일년 후 더는 이 억울함을 참을길이 없어 방법을 대어 베이징 유관부문에 기소하려 하였지만 후안무치한 중공의 사악한 조직은 나의 억울함을 벗겨준 것이 아니라 조사도 하지 않고 도리어 나에게 무리하게 말썽을 부리고 질서를 문란시켰다는 모자를 씌워 나를 헤이룽장 노교소에 보냈고 후에는 탄허농장에 보냈는데 바로 지금의 파룬따파 제자를 박해하는 탄허노교소의 전신(前身)이다.
수용소에는 많은 사람을 한데 몰아 넣어 잠잘 때면 모로 누워야 했는데 마치도 줄세운 벽돌처럼 돌아 누울수도 없었다. 만일 밤에 화장실에 갔다 오기만 하면 더는 다시 끼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무더운 여름에 바깥에서 일을 하면 피부가 햇볕에 타서 물집이 생겼고, 밤이면 모기가 어찌도 많은지 한번 치면 손바닥에 피가 가득했다. 장기적으로 배불리 먹지 못하고, 또 노동강도가 커서 엄중한 영양실조에 걸렸다. 나는 박해로 온 몸에 부종이 생겼고 또 간염, 풍습성 전풍이란 병을 얻었으며 혈소반 피하출혈에 걸려 늘 고열이 났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손발이 얼었고 나도 엄지발가락 발톱이 얼어서 빠졌다. 한번은 얼음 위에서 일하다가 허약한 나는 얼음구멍에 빠져 하마터면 빠져 죽을뻔 하였다. 너무도 추웠기에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을 하고 문 밖을 나서기도 전에 바지에 소변을 보곤 하였다.
겨울에 발전참(發電站)을 수리하였는데 나는 홑옷을 입고 차를 끌고 한번 또 한번 쉬지 않고 줄곧 뛰었다. 뒤에서 나의 손등을 치면서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파이, 스파이, 아무리 잘해도 스파이야” 나는 이를 악물고 피눈물을 배속으로 삼켰다. 머리는 굳어졌고 소처럼 죽기살기로 차만 끌었다. 내가 그때 죽기살기로 일한 것은 노동개조 모범이 되어 조국 건설에 공헌하고 이로써 자신이 좋은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고, 공산당이 나의 억울함을 벗겨줄 날이 있으리란 순진한 생각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나에 대한 박해는 중공의 미리 짜놓은 조직적인 음모이며 나는 다만 박해받는 군중 속의 일원이란 것을 알지 못했었다.
1966년 8월 베이징은 역대의 운동 중에서 ‘지부 반괘우’로 된 85,196명을 원적지로 압송해 보냈는데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미친 듯한 비판 투쟁대회에서 우리 이른바 5류분자들은 한 줄로 서서 머리를 아래로 떨구고서 군중들에게 보였다. 매번 비판대회에서 돌아오면 생각이 많았고 정신상의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공산당을 위해 생사를 가리지 않았는데 결국엔 투쟁대상이 되어 비판투쟁을 받고 멸시를 받았다. 몇 번이나 자살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으나 그렇게 할수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공산당이 나를 죽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내가 자살을 하면 죄가 두려워 자살했다는 죄명이 들씌워질 것이고 자결은 또 한 가지 죄가 더 첨가될 것인즉 그러면 나의 가족들이 모두 휘말려들 것이고 9족까지 연루될 것이다. 참군, 간부승진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우리집 친속들은 이미 나의 일로 하여 모두 연루되었는데 만일 내가 자살한다면 그들은 더욱 불행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죽은 후의 무서운 후과를 생각하고 최종에는 이 출로마저 단념해 버리고 오직 참고 견디면서 소 말보다 못한 이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연루 박해도 그 무슨 새로운 방법인 것이 아니며 그들 조상이 진작부터 실컷 쓰던 방법이다.
나는 박해받은 많고 많은 밤과 낮을 모두 정신과 육체의 고도로 되는 고통속에서 지내왔다. 중공 사령은 그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는게 죽기만도 못하게 만든다. 죽어도 안되고 그냥 그것들에게 살점을 뜯기울 수밖에 없었다. 시골 마을의 어떤 백성들은 사악의 선전과 부추김, 거기에 공산당의 하늘 땅과 싸운다는 무신론의 주입에 의하여 더욱 악독하게 변하였는데 늘 나를 업신여겼다. 한번은 이웃집 돼지가 병들었는데 며칠 전에 이 집 돼지가 우리집 부엌에서 밤을 지내다가 나에게 무리하게 쫓겨 놀라서 병들었다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는 부자 세 사람이 나를 거리에 끌고 나가서 사람들이 구경하게 하였다. 그 집 며느리는 바늘로 나의 등을 찔렀는데 그 이튿날 그녀는 손이 붓고 참을 수 없이 아팠다고 한다. 참으로 보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돼지, 닭을 독약을 넣어 모두 죽여버렸다.
중공은 나를 긴긴 25년 동안 박해하여 풍채늠름하던 젊은이를 회갑에 이른 늙은이로 변하게 하였고 고독하고 외롭게 옹근 한생을 보내게 하였다. 오랜 세월 가정의 따스함을 느껴보지 못했고 생리상, 심리상, 명예상, 경제상 거대한 상해와 메울수 없는 손실을 받았다.
공산당은 그를 위해 희생할 사람이 수요될 때면 이전 일을 따지지 않으며,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단결한다고 한다. 그러나 목적이 이루어지면 수요에 따라 또 다른 아름다운 허울을 쓰고 일체 비루하고 잔인하며 악독한 수단으로 살인하고 생명을 해친다. 나 자신의 비참한 경력이 바로 ‘9평’에서 적발한 것처럼 중공이 정권을 세운 55년의 역사는 선혈과 거짓으로 씌여진 역사이며, 그 피의 대가를 바친 배후의 이야기들은 전대미문의 참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이 처음 아는 일이다.
3. 대법을 얻어 심신이 건강해지다
1997년 기소할 곳도 없고 매년 수천원에 달하는 진료비도 보상받을 곳이 없어 신심이 지쳐서 어쩔 수 없어할 때 기쁘게도 대법을 얻었다. 나는 전쟁터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게다가 중공의 잔혹한 박해 시의 간고한 생활환경은 나에게 치료해도 낫지 않는 여러 가지 질병을 얻게 하였으며 장기적으로 병마의 고통 속에 시달리게 하였다.
예를 들면, 구강염, 인후염, 구창, 비염, 왼다리 정맥곡장, 저혈압, 맹장염, 기관지염 및 변비 등이다. 파룬궁 수련을 한 후 진선인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니 이런 병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 나았고, 그때로 부터 병원에 간 적도 없고, 약을 한 알도 먹을 필요가 없었다. 피부는 부드러워지고 얼굴엔 붉은 빛이 넘치고 정신도 편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좋은 점을 얻으면 좋은 일이고 손해보면 나쁜 일이라고 여겼는데 수련 후에야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면 덕을 잃게 되며 자신에게도 나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공공버스를 탔다가 차표를 사지 않고 내렸다. 집에 돌아와 생각할수록 옳지 않았다. 대법제자가 어찌 표를 사지 않고 차를 탈수 있는가? 이건 틀렸다. 나는 역에 가서 상황을 얘기하고 다시 표를 샀는데 매표원은 괴상하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만일 이전 같으면 나는 언제나 사회가 나에게 빚을 졌다고 여기고 이런 일을 만나면 이익을 봤다고 기뻐하면서 절대로 다시 표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사부님이 >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나는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하는 전반과정 중에서,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짐에 입각하였으므로 얻은 효과는 좋았으며 전반 사회에 대한 영향도 비교적 좋았다.’ ‘나의 소원이라면 대법을 전하여 우리의 더욱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득을 볼 수 있도록 하며 진정으로 수련하려는 사람들더러 법에 따라 위로 수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법을 전하는 과정중에서 우리는 또 사람이 되는 도리를 이야기하였는데 당신들이 학습반에서 돌아간 후 만약 대법에 따라 수련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저한도로 또 하나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유익한 것이다.’ (>)
4. 또 다시 박해받고 사악한 당에서 탈퇴
1992년 사부님께서 정식으로 출산하시어 법을 전하신 후, 나와 같은 많고 많은 대법수련생들은 마음을 닦고, 연공하는 것을 통하여 심신의 건강에 이르렀고, 전반 사회의 도덕승화를 이끌었다. 중공정권은 사부님과 대법이 사회에 가져다준 거대한 물질과 정신적 이익에 감사를 드리지 않았을 뿐더러 사당의 장(江)마두는 도리어 진선인을 신앙하는 좋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고 내가 늘그막에 법을 얻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지 겨우 2년이 되는 해에 중공의 사악한 기운이 또 발작하여 1999년 7월20일에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군체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나는 또다시 장쩌민과 중공이 서로 이용하여 공동으로 실시한 전례없는 잔혹한 박해 속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2000년, 나는 자신이 친히 겪은 수련체험과 수확, 그리고 각종 경로를 통해 수집한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자료들을 함께 종합하고, 내가 사는 가도 당위에 바치면서 그들이 파룬궁 자료를 정확히 인식하게 했다. 동시에 한급 높은 당조직에 더 나아가 중앙에까지 올려 보내 주어 박해가 정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편지가 손에서 나가자마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그들은 비판대회를 열고 사흘동안 나를 비판하였고 나를 핍박하여 이선생님과 파룬궁을 모욕한 문장을 읽게 하고 나에게 이른바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은 파룬궁이 한 일이라고 승인하라고 강박하였으며 파룬궁을 비판하는 문장을 쓰라고 강박하였다. 그리고 파룬궁 수련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식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내고 당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하였다.
몇십년 전의 무서운 노교생활, 비판투쟁 대회에서의 인성을 잃은 그 미치광이들의 형상이 나의 머릿 속에서 되살아났다. 중공악당의 사악한 정도가 이정도에까지 닿았다.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참말을 하는 권리마저 없게 만든다. 박해에 직면하여 나는 마음 속으로 시비를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공산당에 몇십년 동안 박해받은 나로서는 그가 어떠한 나쁜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박해에 겁을 먹었고 정념이 부족하였으며 법에서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강렬한 두려운 마음으로 인해 마음을 어기고 대법제자가 하지 말아야 할 일부 일들을 하였다. 악당 인원들은 이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나는 610사무실의 장기 감시대상이 되어 경찰, 보안들이 수시로 이른바 담화를 하였는데 기실은 감시하고 소란을 피워대는 것이었다.
법공부와 교류를 통하여 나는 사람의 마음이 자신을 장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에 발정념을 하고 사부님의 가지 하에 끝내 사악의 감시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오래오래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관을 넘는데 매우 오랜 시간을 끌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일찌기 공산당에 대하여 착오적인 인식이 있었다. 내가 비록 공산당에 한평생의 박해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의 과거는 좋았는데 후에 비로소 나쁘게 변했다고 여겼다. 또 그가 세 개의 큰 산을 뒤엎었고 대중을 해방하였으며, 인민의 생활표준을 올려 놓았다고 잘못 인식했다. 기실 속인의 각도에서 전면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보아도 공산당은 너무나도 나쁜 것이다. 그는 오로지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하여 여러가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얻었고 유지하고 있으며 8천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나의 피눈물의 역사가 이미 그에게 환상을 품은 어떠한 사람이든지 결국에는 비참한 끝장을 보게된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9평’의 사악한 중공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고도 긍정적인 것으로서 정의감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응당 모두가 일체역량을 다하여 ‘9평’을 널리 전하여 중공악당을 하루 빨리 해체시켜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전의 가난하던 나날에 비하여 물질이 풍부해 진 것 같다. 그러나 도리어 전 민족의 도덕체계를 희생하고 회멸시켰으며 자연계의 생태 체계의 파괴를 댓가로 한 것이다. 사람의 심신이 건강하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사이가 화목하지 못하며, 사람과 자연이 화목하지 못하다. 도처에 ‘가(假),악(惡),투(鬪)’가 넘치고 자기의 명리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 우주특성 진선인의 표준을 완전히 위배한 것이다.
지금 중공은 마지막 길을 걷고 있으며, 악습이 차고 넘친다. 하늘은 곧 이 반우주, 반문명적인 사악세력을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다. 양지가 있고 평안을 바라는 모든 중국인들은 모두 마땅히 주동적으로 이 사악한 조직에서 탈퇴해야 하며 다시는 그것의 일원이 되지 말아야 한다. 깨어나라, 선량한 사람들, 일시적인 안일과 요행을 바라면서 이 역사적인 기회를 놓치지 말며, 중공의 멸망을 따라 불행한 암흑에로 가서 사악의 순장품이 되지 말라!
마지막으로 시 한수로 나의 마음을 표달하려 한다.
당당한 천문 만고에 열리니, 조대마다 힘차게 걸어 나오네.
적룡이 오늘 춤춘다고만 보지 마라, 잔바람에 이미 두꺼비 되어 울고 있네.
하늘서 9평 내려 용 무찌르니, 탈당 어서 하여 평안을 지키세.
만 중생 진선인 부르거니, 파룬따파 당신 위해 왔다네.
문장완성 : 2006년 2월2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2/25/12150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