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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잃은 소년(3)

【명혜망 2005년8월12일】(윗문에 이어)

◆이모부가 실종되다

왕버루의 이모부 왕샤오펑(34세)은 충칭대학 공상관리대을 졸업하였고 화북제약재단 화롄유한공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였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렴 자율하여 왕샤오펑은 아주 빨리 영업부 과장으로 승진되었다. 늘 회사 책임자들과 함께 업무를 보러 다녔으며 동료들과도 아주 즐겁게 지냈다. 99년 7.20 이후 공안이 늘 찾아와 괴롭히자, 회사의 책임자는 젊은 나이에 또한 이런 하늘땅을 뒤덮는 진세를 본 적이 없어 아주 긴장해하였다. 회사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왕샤오펑은 사직하고 다른 일을 찾았다. 그들 회사의 책임자는 그가 회사에 대해 공헌한 것을 생각하여 그에게 한달치 월급을 더 주었으며 또한 자신이 돈을 대어 그가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하였지만 그는 사절하였다.

왕샤오펑은 수련하기 전에 성격이 아주 강하여 고향에서도 싸움꾼으로 이름난 사람이었으며 학교에서도 늘 말썽을 일으켰다. 가족, 동창생, 친구들은 모두 그를 멀리 피하였다. 수련은 그로 하여금 마음이 넓어지게 하였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게 하였으며 학업과 사업에 노력하게 하였다. 또한 아주 유능한 좋은 청년으로 변화시켰다. 후에 그는 몇몇 회사에 초빙되었고 책임자와 동사자들이 그에 대해 평가가 모두 높았다. 그러나 장씨집단은 천리와 민의를 거슬러 대법수련생에 대해 탄압을 실시하였다. 사악의 무리들은 가족을 감시 추적하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조사하고(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수련생들은 신분증이 없음)고향에 찾아가 이익으로 유혹하는 방식 등 망나니 수단을 썼는데 왕샤오펑으로 하여금 한번 또 한번 집을 이사하게 하였고 한번 또 한번 회사를 바꾸게 하였다. 갓난 아이를 낳은 아내와 아기도 할 수 없이 곳곳을 떠돌아 다녔다. 생활도 한번 또 한번 곤경에 빠졌다. 아기가 좀 커서 영양이 필요하여 사골을 사서 뼈국물을 만들 때 한번에 겨우 갈비뼈 두대 밖에 사지 못하였으며 되도록 생활비을 줄였다. 아내의 병이 위급하여 입원하여서야 그는 이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병원에 가서 간호하려고 하였을 때 펑샤오민은 이미 혼수상태이었다.

들은 소식에 의하면 왕샤오펑과 펑샤오민 부부는 모두 스자쫭시공안국 610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줄곧 “체포”대상이었다고 한다. 왕샤오펑은 젊은 아내와 영별한 후 또 한번 갓 한살이 넘은 아들과 헤어졌다. 시간은 이미 21세기로 진입하고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의 중국에서 이런 한 막 한 막들이 장(江)씨 정치망나니의 조종하에 중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왕샤오펑이 현재 어디에 있으며 상황이 어떠한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버루집에 남은 가족들은 묵묵히 그를 축원하고 있다. -반드시 견강하게 단호하게 걸어 나오세요. 그것은 수련인의 마음 속에는 대법의 광명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처지

2004년 6월 여동생의 사망이 펑샤오메이한테 준 타격이 아주 컸다. 그것은 그녀가 남편을 잃은 고통에서 겨우 신심을 회복하였는데 또 갑자기 여동생을 잃었기 때문이다. 99년 7.20 이후 두 자매는 줄곧 서로 지지하고 도움을 주면서 몇차례 함께 박해를 제지하였다. 생사 속에서 걸어나오면서 두터운 우정이 쌓였다. 그러나 우리는 펑샤오메이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그녀는 자신의 생명의 뜻을 깊이깊이 알기 때문이다. 그녀도 있는 힘을 다해 아직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교육할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고하다

버루의 외할아버지는 퇴직교사이다. 그는 중국의 역대 정치운동을 겪었고 집은 “성분이 높다”는 이유로 늘 투쟁대상이었다. 공산당의 잔폭함과 교활함에 대해 아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작은 딸애의 사망은 부친에게 아주 큰 타격을 주었다. 자매 4명 중 부친은 막내 딸을 가장 사랑하였다. 더욱 잔인한 것은 매일마다 모두 작은 딸애의 아이 왕톈싱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톈싱이 엄마를 잃은 무렵은 겨우 한살이 넘었을 때이다. 우연히 또 엄마를 찾고 엄마의 옷을 보면 남들이 건드리지 못하게 안고 있다. 입으로 아주 똑똑히 “엄마 꺼야, 엄마 꺼야.”라고 한다. 이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막내딸을 잊으려고 하여도 어렵다!

외할아버지는 사위 왕샤오펑이 언제든지 붙잡힐 것이라고 생각하며 큰 딸이 혼자서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생활하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져 늘 혼자서 눈물을 흘리셨다.

바로 이렇게 경찰이 또 여러차례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잠시거주증을 찾고 왕샤오펑을 찾았다. 10월1일 펑샤오메이는 아버지가 식사를 잘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고 병원에 모시고 가서 검사하니 암 말기었다. 펑샤오메이 부친은 99년에 신체 단련을 위해 파룬궁을 연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여 그의 기관지염도 나아졌다. 99년 7.20후 경찰이 소란을 피우자 그는 두려워 감히 연마하지 못하였지만 기공의 건강효과에 대해 확고히 믿고 있었다. 허나 그는 경찰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 두려워 다시 배우지 못하였으며 현대과학은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이렇게 펑샤오메이의 부친은 우울과 분노, 소란과 경황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가족의 생활에 또 한가닥 굵직한 음영이 드리워졌다.

먼저 부모가 체포되고 2년 뒤 아빠가 불법으로 노동 개조되는 동시에 어머니는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달 뒤 어머니는 한가닥 숨이 겨우 붙어 돌아왔으며 나중에 아버지는 하루 하루 초췌해지더니 사망하였다. 거기에 아주 친밀했던 작은 이모가 사망하였고 자신의 학업을 지도해주시던 외할어버지까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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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의 피비린 혈우를 겪고서 버루는 올해 이미 16살 되었고 수 많은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년이 상상할수 없는 고생을 겪었다. 그에게 조성한 정신적 상처는 치유되지 못하였다. 그는 10살에 벌써 각종 생사이별과 유랑, 또 공안의 여러차례의 가택수색을 겪었다. 노교소에서 파출소에서, 아빠, 엄마를 만날 때 경찰은 한번 또 한번 무리하게 심문하고 협박하였고 후에 또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생사이별을 하였다.

중국사회의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버루로 하여금 동창생과 선생님께 아빠의 사망원인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단지 묵묵히 무형의 압력을 감당하게 하였다. 버루는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며 학교에 다니기 싫어한다. 압력이 너무 클 때 그의 눈빛은 초첨을 잃고 표정이 굳어진다. 엄마 혼자서 온 가족을 부양하기에 일이 아주 바빠 늘 출장가시고 그에게 관심을 아주 적게 주게 된다.

어린 사촌동생 톈싱은 이미 3살이다. 그는 엄마의 이름이 무엇이었는가고 묻는데 아마도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가르친 것 같다. 그는 또 왜 아빠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가고 묻는다. 가요 “귀염둥이가 말 잘 들으면 엄마가 데리러 온대”란 가요를 부를 때 그는 “귀염둥이가 말 잘 들으면 외할머니가 데리러 온대”라고 고쳐서 부르고 또 불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괴롭게 만든다. 톈싱은 또 “나에겐 한 쌍의 작은 손이 있어”를 부르며 정말로 혼자서 옷을 입고 스스로 손을 씻고 길을 걸으면서 되도록 외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애를 어떻게 보살펴야 상처를 더 적게 입을지 모르겠다.

(전문 끝)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8/15/63950p.html)
문장완성:2005년 08월 09일

문장발표:2005년 08월 12일
문장갱신:2005년 08월 13일 14:24:52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8/12/1080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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