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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잃은 소년(2)

【명혜망 2005년 8월11일】

◆경찰에게 처음으로 거듭된 속임수와 협박을 당하다

노교소에 있는 2년동안 전혀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심지어 왕훙빈이 병으로 앓아누운 기간에도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병세를 은폐하면서 밖에서 치료하겠다는 요구도 거절했다. 후에 “엄관”은 또 왕훙빈의 옷을 씻지 못하게 하였고, 노교소 교관의 태도 또한 아주 야만적이었으며 또 방문하러 갔던 펑샤오메이도 수감하였다.

이 기간동안 한 마음씨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노교소에서는 사적으로 버루가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동의하였으며, 버루 한 사람만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노교소에서 문을 지키던 경찰은 반복적으로 10살난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다그치면서, 파룬궁을 연마하는지 물었다. 아빠와 단 한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버루는 시종일관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한 마음씨 좋은 사람이 경찰이 아이를 난폭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경찰에게 한바탕 훈계하였다. 버루는 겨우 들어가 아빠를 만났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심리적 압력이 너무나 컸던지 버루는 얼굴색이 창백했으며 길에서 구토를 하였다.

◆아빠는 혹독한 형벌로 자백을 강요 당하다

왕훙빈을 체포한 주요 책임자는 공안국 610의 마원성 한 무리었다. 그들은 장(江)씨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명예상에서 더럽히고 경제상에서 무너뜨리며 육체상에서 소멸’하는 사악한 정책에 따라 이른 바 ‘중점’적인 파룬궁수련생들을 체포하여 중형을 선고하였다. 그들은 창안분국에 지시하여 전화와 핸드폰을 도청하고 한 달이 넘도록 추적하였다.

왕훙빈이 스자쫭시 쐉후안호텔에 보내진 후 스자쫭시 공안국 610의 악도 왕샤오펑은 창안공안분국의 정보대대 부대대장 후광후이를 지시하여 황훙빈이 이미 써놓은 구술서에 서명하게 핍박하였다. 그가 2000년 9월에 타탄학교 교사 뤼신수의 사무실에서 뤼선생한테 파룬궁에 관한 VCD를 주었다고 승인하게 강요했다. 이런 일이 근본 없었기 때문에 왕훙빈은 서명을 거절하고 뤼선생과 직접 만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꼬 도리어 그더러 맨발로 바닥에 서 있게 하고 수갑을 채웠다(한 손은 어깨 위를 지나고 한 손은 직접 등 뒤로 가서 억지로 수갑을 채우는 것임, 이런 형벌은 중범죄자들에게 사용한다고 함). 그리고 또 그에게 끊임없이 주먹질하고 발길질을 하였으며 수시로 그를 비방하며 비웃었다. 밥을 주지 않고 반대로 그가 단식한다는 핑계를 대며 고의적으로 음식물을 주입함으로써 박해하였다. 그 당시 붙잡힌 몇몇 수련생은 모두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뤼신수의 부인은 맞아서 기절하고 청각을 잃었으며 괴롭힘을 당하여 신체가 갈수록 허약해져 온 몸이 덜덜 떨게 되었을 때에야 나중에 집에 돌려보냈다. 왕훙빈은 뤼신수가 옆방에서 비참한 비명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고 같이 잡혀 들어온 양졘메이 역시 얼굴이 시퍼렇게 멍든 것을 보았다.

뤼신수는 불법으로 8년 판결을 받았고 양젠메이는 불법으로 12년 판결을 받고 모두 바오딩감옥에 수감되었다. 왕훙빈은 불법으로 3년 판결을 받고 스자쫭시 노교소2대대에 수감되었다. 공안 내부의 소식에 의하면 왕훙빈이 불법 노동개조 3년 판결을 받으면서 ‘사건이 마무리 되자’ 시국 610의 마원성 한 무리는 보너스로 5만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아빠가 인간세상을 떠나다

왕훙빈은 노교소에 있는동안 정신적, 육체적의 각종 박해를 받았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함). 어느 한 번은 그는 잠을 이기지 못하자 관교는 재소자를 시켜 라이터로 손톱을 태우게 하였고, 또 한 번은 관교에 의해 창문의 창틀에 손 하나만 매달아 두 발은 바닥을 닿지 못하게 하였다. 3일 밤낮으로 모두 풀어주지 않았고 옆에는 관교의 지시를 받은 재소자가 몽둥이를 들고 감시하였다. 발이 벽에 닿기만 하면 발을 때렸다. 재소자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혹독하게 굴어야 감형을 받기 때문에 그를 감시하던 재소자는 더욱 온 힘을 다 하여 그를 괴롭혔고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화장실도 따라다녔다. 언제 또 “엄관”에 보낼 지, 언제 또 무슨 일이 발생할 지를 모르기에 왕훙빈의 정신상태는 오랫동안 긴장상태에 처해 있었고 억지로 참는 중에 엄중한 정신적 상처를 조성하였다. 바로 이렇게 왕훙빈의 신체는 점차적으로 허약해졌다.

스자쫭시 노교소는 왕훙빈을 석방한 그 연초에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하였다. 위병이나서 그 시기에 이미 위암이라고 의심할 이유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노교소는 사실을 은폐하며 사람으로서의 양지를 상실한 채 하루 또 하루 ‘밖에서 치료’하지 못하게 하였다. 생명에 위험이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구실을 찾아 사전에 그를 석방하였다.

각종 어려움을 겪고서 어렵게 왕훙빈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날 거울 속에 비친 하얀 머리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왕훙빈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 시기 그는 이 잔혹한 사실에 더는 마주할 수 없었고 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어서 한동안 그는 늘 혼자서 멍하니 있었고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체는 갈수록 허약해져 가고 천식도 심해졌다. 정신 상태 역시 좋지 않아 길 옆의 교통경찰을 보아도 피해갔다.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긴장하고 모든 것에 신심이 없었으며 정신은 거의 붕괴 직전이며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었다. 얼마 안가 왕훙빈은 우울증이 더욱 심해지더니 끝내 가족의 손을 뿌리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펑샤오메이는 전에 자신이 붙잡히고 아들이 납치되는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아주 어렵게 남편을 집에 데려오게 되었지만, 그가 하루하루 초췌해지고 메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타격은 정말로 살인을 하여도 피를 보지 않는 것인 바 한 아내로서 그 고통은 형용할 길이 없었다.

◆작은 이모와 청원하러 갔다고 혼란 중에 서로 흩어지다

왕버루는 작은 이모와 아주 가까웠다. 작은 이모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스자쫭시국면6공장에 배치되었다.


왕버루와 엄마 펑샤오메이, 이모 펑샤오민

펑샤오민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동북에서 이곳으로 왔으며 언니, 형부랑 같이 지냈다.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고 심정이 특별히 우울하여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였다. 언니와 형부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일가족의 신체가 건강하고 마음도 편안해져 일도 순조로운 것을 보고 그녀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에 대략 1996년부터 파룬궁서적을 보기 시작하였다.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연공하여 펑샤오민은 점차적으로 많은 도리를 알았고,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으며 남을 착하게 대하였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다. 하여 정신상태가 좋아지고 신체도 좋아졌으며 심정이 홀가분하여 일도 더 잘하게 되었다. 후에 펑샤오민은 또 대법수련생 왕샤오펑과 만났고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들은 매일 아침 함께 연공장에 가서 연공하고 포만된 정신으로 출근하였다. 저녁에는 함께 법공부하는 것이 분위기가 화해롭고 조용하였다. 그들은 함께 노인을 공경하여 두 집 노인들은 그들에 대해 아주 만족해 하였다. 두 사람은 주말 혹은 집에 돌아오면 노인을 모시거나 아니면 언니 일가족과 여행을 나갔는데 생활이 가볍고 즐거웠으며 걱정이 없었다.

1999년 7.20 새벽의 대수색을 하면서 버루의 아버지 어머니가 체포되어 집에는 방금 10살이 된 버루만 남았다. 이모는 산산조각 난 가정을 보고 할수 없이 사직을 하였다. 조카를 데리고 곳곳을 찾아 정황을 반영하며 언니와 형부를 찾았다. 그들은 시정부 민원처, 성 정부 민원처를 돌고 돌았고 나중에 국무원 민원처만 문제를 해결할 권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여 펑샤오민은 버루를 데리고 또 베이징에 갔다. 길목마다 방폭경찰이 심문하고 가로막아 그들은 감히 큰 길을 가지 못하고 옥수수밭을 지나갔다. 발에는 물집이 생기고 옷도 더러워지고 또 배고프고 지쳤다.

겨우 베이징에 도착하자 사복경찰들이 또 곳곳에서 사람을 체포하고 있었으며 버루와 흩어지게 되었다. 펑샤오민은 많은 대법제자들과 함께 톈안먼광장에 갔고 그 곳에서 천명에 달하는 대법제자들이 바닥에 앉아 다 함께 『논어』 『진수』등의 경문을 외웠다. 주위에는 전부 무장한 무장경찰들로 가득하였고 갑자기 무장경찰들이 수련생들을 차에 밀어넣기 시작하였다.

대법제자들은 손과 손을 맞잡고 단호히 제지하였다. 무장경찰은 폭력으로 수련생들을 때리기 시작하였고 모두들 함께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맞받아치지 않는다”를 외웠다. 그 장면은 장관이었고 또한 비장하였다. 일부 무장경찰은 감동되어 손을 멈추었다. 펑샤오민은 한 흉악한 늙은 경찰에게 목을 맞은 후 또 큰 차에 실려 스자쫭에 보내졌다. 사무처에서 하루 수감되고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 펑샤오민은 어찌할바를 몰랐고 멍해졌다. 언니와 형부를 찾기도 전에 남편과 조카 버루마저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먼저 남편 왕샤오펑이 수감된 곳을 찾았고 여러 차례의 구원으로 남편은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또 곳곳을 탐문하여 이웃집에서 눈빛이 뀅해진 작은 버루를 찾은 것을 알아냈다. 그 당시 10살난 아이는 이미 원래의 천진과 활발을 잃고 표정이 없었다.

◆중임이 작은 이모의 어깨에 내려지다

그 후부터 예전의 평온하고 행복했던 나날이 사라졌다. 파출소에서 찾아와 책을 바치라고 윽박지르고 사무처에서 찾아와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핍박하며 거위회에서 찾아서 감시하였다.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두려워 수련하지 못하게 설득했으며, 버루는 어른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이런 각종 압력 하에서도 펑샤오민은 완강한 의지로 이겨냈다. 끝내 언니 형부가 두 달간 수감된 후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매일 여전히 가슴을 조여야 했고 거리에는 늘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누군가 항상 뒤를 밟고 있었다.

2000년 12월 5일, 형부 왕훙빈이 갑자기 집에서 납치되었고 언니도 감히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생활의 중임이 또 다시 펑샤오민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한켠으론 조카를 학교에 보내고 한켠으로는 언니와 형부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또 조급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또 경찰이 와서 집을 뒤지는 것이 겁도났다. 한달 뒤 언니는 목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으로 괴롭힘을 당해 공안에 의해 집으로 보내졌다. 보는 사람마다 모두 죽는다고 하였다. 펑샤오민은 세심하게 보살피고 신념을 단호히 하는 동시에 법률지식을 독학하여 공안 각 기관 부서에 전화를 걸거나 자료를 쓰거나 혹은 직접 찾아가 그 불법의 무리들을 기소하였다. 그들에게 만약 언니가 잘못되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고하며 형부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녀의 각종 노력 하에 언니는 일주일 뒤 건강을 회복하였고 경찰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 기간 버루 어머니는 전신이 붓고 통증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행동이 불편하였다. 소년 버루는 아주 철이 들어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하고 그 다음 어머니를 간호하였다. 물을 마시고, 식사하고, 화장실 가는 것을 도왔다. 저녁에는 또 어머니한테 신체가 불편하기만 하면 반드시 자신을 깨우라고 말했다.

◆작은 이모가 사망하다

2001년 5월 1일,펑샤오민은 한 수련생과 함께 “파룬따파는 좋다”란 스티커를 몸에 지니고 등산하기로 약속하고는 등산을 하다가 스자쫭시 동화루파출소의 순경한테 체포되었으며 그 후로 40일간 실종되었다. 이 기간 그녀는 경찰들로부터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하고 경찰의 사주를 받은 재소자들로부터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 제1구치소에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펑샤오민은 단호하게 박해를 제지하고 20여일간 단식단수하여 신체는 극도로 허약하여 거의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였다. 구치소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는 감히 받지 못하였고 노교소도 받지 않았지만 동화루파출소는 여전히 사람을 풀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5000위안의 돈을 갈취하려 하였다. 펑샤오메이, 펑샤오민 자매의 단호한 제지 하에 파출소가 돈을 갈취하려던 의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펑샤오민은 결국 언니 집에 돌아갔지만 늘 고열에 시달리고 신체가 허약하였다. 그 당시 사악이 아주 창궐하여 단식단수로 뛰쳐나온 수련생들을 또 세뇌반에 납치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노교소에 보내 계속 박해하였다. 그 당시 정황에 따라 펑샤오민은 신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언니와 작별하고 남편과 함께 떠돌아다니는 간고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가족이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가족과 아주 적게 연락하였다. 이 기간 그녀는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여 신체가 아주 빨리 회복되었다.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고, 연공, 진상알림, 사악을 폭로하는 것 역시 아주 잘하였다.

대략 2002년 9월 펑샤오민은 아기 샤오톈싱을 낳았고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고해졌다. 그 당시 환경이 아주 혹독하여 경찰은 호구 조사란 이름으로 마을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수련생들을 곳곳에서 납치하고 있었다. 펑샤오민은 분국의 주관국장이 늘 언니를 괴롭히며 언니를 통해 자기네 부부를 찾고 있다고 소식을 듣고 감히 가족에게 아기를 돌봐달라고 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그들 부부는 갓난 아이가 있어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매일 아주 간고하게 아기를 돌보고 또 늘 집을 이사하며 경찰의 “호구조사”를 피하였지만 정신은 지속적으로 고도의 긴장상태에 처해 있었다.


사랑스러운 샤오톈싱


버루의 작은 이모 펑샤오민(이미 사망)

더욱이 이른 바”사스”가 폭발한 기간에는 곳곳에서 출입증을 만들고 곳곳마다 신분증 조사가 이루어졌다. 떠돌아다니는 파룬궁수련생들은 모두 신분증이 없었고 펑샤오민 부부는 몇 개월 밖에 안된 아기를 데리고 곳곳을 유랑하느라 아주 간고하였다. 후에 이들 부부는 할수없이 헤어져 지내게 되었고 펑샤오민 혼자서 아이를 맡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어 생활의 간고함은 더욱 상상을 뛰어넘을 지경으로 힘들었다. 이런 각종 핍박 하에 펑샤오민은 심신이 아주 큰 상처를 입었고 더는 아이를 키울 힘이 없었다. 끝내 한 살이 좀 넘은 아이를 언니 집에 맡겼고 자신은 조용히 수련하면서 몸을 회복하였다.

어린 아기를 보낸 후 공안은 더욱더 펑샤오메이를 핍박하여 샤오민을 찾아내려고 하였고 샤오민은 아이를 보러 감히 집에 오지 못하였다. 정신적, 신체적 손상이 과도하여 또 거기에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어느날 펑샤오민은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병원에서 5일간 응급 치료를 받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화농성 뇌염이란 진단이 내려졌고 뇌에서 뽑아낸 액체는 모두 옅은 노란색의 농이었다. 의사는 펑샤오민의 머리부분이 충격을 받았다고 의심하였고 가족도 펑샤오민이 경찰의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병원에서 가족이 펑샹민을 만났을 때 샤오민은 이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간혹 어쩌다 정신이 똑똑해지면 모든 사람을 경찰로 보았다. 샤오민의 언니 펑샤오메이와 남편 왕샤오펑은 모두 아주 비통하였다.

겨우 34살난 생명은 한차례 또 한차례 그녀의 감당능력을 초월한 피비린내나는 혈우를 겪었고 여명전에 떠났다. 그녀는 아쉬움과 어린 아들 톈싱에 대한 그리움을 두고.(계속)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8/14/63919p.html)
문장완성:2005년 08월 09일

문장발표:2005년 08월 11일
문장갱신:2005년 08월 13일 14:23:25

문장분류 : 【대륙소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8/11/10809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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