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5년 6월 4일】(명혜기자 리밍 종합보도)1999년 7월 20일, 중공과 강택민이 서로 의기 투합하여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오늘날까지 2,447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사망한 사실은 이미 동네 주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명혜망에 공표 되었다. 박해로 사망한 429명의 파룬궁 수련생 중, 88명은 2005년 1월부터 5월까지 사망한 숫자이고, 그 중 22명은 최근 5월에 죽었으며, 사망한 수련생의 성비율은 여성이 251명으로 59%를 차지하고, 55세이상 노년이 286명으로 67%를 차지했다. 박해받은 사람 중 최연소 어린이는 14세로 2명이나 된다. 흑룡강성 쌍청시 제 8중학 1학년 여학생 왕원란은,2003년 9월 12일 박해로 사망했다. 라오닝 단둥스 푸춘 초등학교 남학생 탕스위도,2003년 5월 25일 박해로 인하여 사망했다.
이렇듯 429명이 박해로 사망한 곳은 전국 26개성, 시, 자치구이다. 라오니성 64명, 헤이룽쟝성 62명, 지린성 59명, 허베이성 56명, 산둥성 42명, 후베이성 20명, 허난성 19명, 쓰촨성 17명, 후나성 13명, 쟝시성, 네이멍구, 베이징 각각 10명, 광둥성 9명, 충칭스 8명, 안후이성 7명, 구이저우성 5명, 간수성 4명, 톈진스 3명, 쟝수성, 저쟝성, 산시성, 각 2명, 광서성, 푸잰성, 산시성、윈난성, 신쟝즈즈취에서 각각 1명씩 사망했다.
이렇듯 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수련생이 사망한 사례를 보더라도, 99년 7.20일부터 오늘날까지 중공과 강택민은 좀체로 파룬궁에 대한 멸종성 박해를 정지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파룬궁 수련생들은 지난 6년 동안 줄곧 이에 굴하지 않고 진상을 알리면서 가장 평화롭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박해에 반대해 왔다. 그래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의 박해 진상을 알게 되었다. 해외의 제일 큰 매체 대기원에서는 9평 공산당을 수록하여 중국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유전하고 있다. 구평 공산당은 중국민들에게 중공이 몇 십 년 동안 일관적으로 자국민들을 학살한 진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정의롭게 깨어나 지혜롭게 분분히 이번 박해를 배척하고, 중공이 역사에 남기고 있는 전례없이 음험하고 악독한 박해를 폭로하며 실증하고 있다.
* 따칭스의 여교사 양위화가 경찰들의 야만적인 주입에 두눈을 뜬채로 원한을 품고 주었다
양위화 (여,50세) 헤이룽쟝성따칭스의 제 6중학교 교사였다. 양위화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는 심한 당뇨를 앓아 많은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신체는 너무나 허약했다. 하지만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한 후부터는 아주 건강해 졌다. 그러다 대법이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그녀는 각 종 압력을 이겨내면서 줄곧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파룬궁의 박해 진상을 알려왔다. 2005년 4월 16일 밤 12시, 따칭 철도 분국의 경찰 5,6명이 갑자기 양위화의 집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침대에서 강제로 납치하였으며, 대법책, 컴퓨터 및 물품도 함께 몰수해 갔다. 양위화는 불법으로 따칭스 간수소에 감금된 후 쇠줄로 만든 의자에 7일 동안 묶여 있었다.
양위화는 늘 강제로 가는 철관을 용접하여 만든 철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철의자에 손과 발이 몽땅 묶여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간수소에서는 수감 중인 범인을 시켜 수련생들을 구타했다. 이에 양위화는 금식으로 항의하여 금식 6일 째 되는 날 경찰들은 그녀에게 야만적으로 음식주입을 하였다. 양위화의 몸은 처참하게 되었고, 그녀가 외치는 “경찰이 사람을 때린다.”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처참한 소리를 감옥에서 늘 들었다. 5월 1일,양위화가 406실로 옮겨졌을 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며 소변에는 피가 섞여 나왔다. 5월 2일,경찰들은 양위화를 또 강제로 끌고 가서 음식을 주입 시켰다. 그녀가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소장이 와서“숨을 쉬고 있는가? 아직 살았는가?”고 물었을 때 감옥안의 사람들이 소장에게 “소변에 피가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소장은 “소변에 피가 나온다고? 소변에 심장이 나온다 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5월 3일부터 8일까지,양위화는 계속 음식 주입을 당했는데 그녀는 입으로 주입관을 물어서 끊어 버렸다. 그러자 음식을 주입하던 경찰이 철관으로 주입하려고 하였다. 5월 9일 오전 10시, 양위화는 숨이 곧장 끊어질 듯 하였다. 경찰들은 그녀에게 주사를 놓기 시작했는데 약물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주사 약물은 그녀의 피하로 들어가 팔은 약물로 인하여 부풀어 올랐다. 9일 정오 양위화는 고통스런 신음을 짧게 내다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벌린채 영원히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보도에 의하면 “간수소에서 진상을 덮어 감추기 위해 그녀를 병원에 보내 ‘구급’하였다고 했으며, 그날 전 따칭스 공안과 검찰관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어떠한 사람도 양위화에게 변호해 주면 안 된다는 특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인을 모두 조작한 후 10일에야 그녀의 가족에 죽음을 알렸다.”고 되어있다. 당시 양위화의 시신은 피골이 상접하였다. 사체는 퍼렇고 거먼 멍이 많았으며 두피에도 상처 투성이 였고, 두 눈은 크게 떠진채 동공은 꺼져 있었으며 입은 벌려진 상태였는데 큰 소리로 외친 모양이었다. 표정은 분노로 인해 고통에 찬 모습이었으며 친지들은 이를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녀의 동생이 손으로 눈을 감기려 해도 잘 감기지 않아서 슬픈 마음으로 “언니 나 언니가 억울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 내가 가산을 탕진 하더라도 언니의 억울함을 씻어 주겠어!”라고 하자 그때서야 그녀의 두 눈은 천천히 감겨졌다. 그녀의 사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분노로 들끓었다.
양위화의 가족들이 사체 부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친지들은 그녀를 위해서 억울한 누명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시신을 가족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하였다. 친한 친구가 그녀의 집을 조문할 때는 변복한 경찰이 앞을 가로막고는 조사를 하였으며, 그녀의 가족들 또한 전화 도청을 당하였다. 이에 대해 그녀의 가족은 전화로 친구에게 슬픔을 나누었더니, 뒤이어 그 친구는 상급 기관의 협박 전화를 받았는데 “파룬궁의 일에 당신은 참여하지 말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1999년 7월 20일 이후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통계에 의하면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 2,447명 중, 헤이룽쟝이 305명으로 전국에서 제 2위이며, 따칭은 50명으로 헤이룽쟝 성에서 제 2위를 차지한다.
* 쓰촨성의 여자 수련생 리후이, 학살된 뒤 박해 흔적을 없애 버리려 한 경찰의 사례
리후이 (여, 42세) 쓰촨성 네쟝스 위왠쌘 룬후이전 양류런. 가정 생활이 어려워 리후이는 일년 내내 다른 성에서 일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2005년 4월 29일 리후이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중 CD 하나를 얻었다. 그 길로 병환 중인 어머니를 먼저 방문하였는데 그녀는 CD를 부모에게 보여주면서 함께 보았다. 보고 나서야 CD가 파룬궁의 연공 동작인 것을 알았다. 리후이는 자신도 모르게 5가지 공법을 따라 배우게 되었는데 연공하고 난 후 온 몸이 가볍고 가뿐한 감을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 공법을 나는 배우겠다. 그리고 대법책도 보고 사부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또 먼 곳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주려고 전법륜 책 한 권도 준비하였다. 5월 4일 리후이는 자신의 일터로 가던 중 청두(成都) 역에서 경찰들에게 전법륜과 사부님의 작은 사진 하나, 두 개의 연공음악 테이프를 몰수 당하고 그날로 경찰에 납치되어 위왠쌘 룽후이전 파출소로 압송되어 처참하게 혹형을 당했다. 그 후 리후이의 부모님 집에 갑자기 고스진 파출소의 악경들이 불법으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면서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부친 이영모도 고스진으로 붙잡혀 갔다. 이영무(李映茂)는 심문을 당하면서 자기 딸이 이미 박해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식에 의하면 룽후이전파출소 악경들은 5월 5일 리후이를 학살한 후, 2명의 흉악한 경찰은 곧장 간단한 복장으로 분장하고는 화물차에 리후이의 시신을 싣고 그녀의 아버지 이영무가 살고있는 집과 20리 되는 황산교 길옆으로 갔다. 그 곳에서 철관에 물이 새어 생기게 된 5치 깊이의 웅덩이에 잡초로 뒤덮인 도랑을 선택하며, 사체 머리를 누런 작은 도랑안에 넣고는 리후이가 입은 옷을 끌어 당겨 머리를 덮었다. 그리고는 철관에서 새어나오는 물이 그녀의 알몸 등짝을 적시도록 하였다. 이렇게 자살한 것처럼 현장을 위조하였다.
그러고 난 뒤 경찰에 연락하여 화장터로 싣고 가서 시신을 촬영했다. 경찰은 그녀의 가족들이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법의들에게 사체를 부검하게 하고는 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자살로 위증하게 하였다.
5월 8일 리후이가 죽은지 3일 후에야 고스전파출소에서는 가족에 알려 화장터로 가게 되었다. 파출소 악경 류런핀은 리후이의 사진을 보이면서 “딸이 맞는지 확인”하라고 하였다. 부친은 나의 딸이 맞다고 하였다. 법의는 “당신의 딸은 경찰이 죽인 것이 아니라 의외의 사고로 죽었다. 우리가 이미 부검해 보았는데 사망 사인이 없다면서 혹시 그녀의 머리를 부검해야 비로소 사망 원인을 알 것 같다고 하였다.” 리후이의 부친은 “당신들이 나의 딸의 배를 가르고, 왜 우리가 현장에 오게끔 통지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또 무슨 머리를 부검할 것 있는가?”고 말하였다. 리후이의 친척들은 모두 법의로 하여금 리후이 시신을 또 다시 부검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악경은 강박으로 가족에게 부검한 요금을 요구하였다. 거기에다 또 장례비 모두 1,730원도 전가시키면서 가족들이 이 돈을 치른 후에야 시신의 유골을 가져가게 하였다.
* 한 생명의 진상, 라오닝중학교 교원 왕원쥐 박해로 사망하다
왕원쥐는(남,38세) 라오닝성 슈옌센탕거우 중학교 영어 교사 이다. 2003년,왕원쥐의 아내는 당뇨병으로 인해 곳곳에 있는 의사를 찾아 다니면서 많은 돈을 썼다. 한 중의가 이 병은 오직 파룬궁을 수련하여야만 나을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2004년 그들 부부는 함께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수련 후 환골탈퇴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2004년 10월 중순의 어느 날, 왕원쥐는 학생들에게 자습 시간을 이용하여 아내의 병과 대법의 신기함에 대하여 진상을 알렸다. 그는 진상을 알리면서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격동되어 눈물을 흘리면서 “파룬따파는 좋다!( 法轮大法好!)”라고 외쳤는데, 결국 학생의 자모에게 신고를 당했다.
10월 26일 오후 탕구파출소와 현 공안국에서 그를 납치하여 슈옌(岫岩) 간수소에 압송되었다. 왕원쥐와 한 감실에 있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왕원쥐는 가는 곳마다 남을 생각했으며 대법에 대해 매우 견정하였고, 만나는 사람에겐 대법의 진상을 알렸다”. 같은 호실에 있던 범인들도 모두 그를 대신해서 불공평을 토로하였으며 두 명의 범인이 진상을 안 후 왕원쥐와 함께 연공을 하기 시작하였다. 왕원쥐는 늘 “파룬따파 하오”를 외쳤다. 경찰들은 천으로 그의 입을 막아 놓고 그의 손발에 수쇄, 족쇄를 채워서 그가 “파룬따파 하오”를 못하도록 제지시키려 하였다. 왕원쥐는 불법으로 감금된 데 대해 금식으로 항의를 하였다. 악경들의 백방으로 되는 박해는 여러 번 그에게 야만적인 음식 주입을 하였으며 높은 곳에다 매달아 놓았다. (수갑을 착용하여 높은 곳에 거는 것,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설 수 없다. )
왕원쥐는 슈옌 간수에 4개월이 넘도록 있는 동안 박해로 인해 신체는 매우 허약해 졌다. 경찰들은 그를 풀어줄 것이라는 조건으로 왕원쥐의 가족에게 여러 번 돈을 갈취했고, 실제로 법원에서는 비밀리에 불법으로 3년 판결을 하였다. 2005년 3월 말 왕원쥐는 심양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후에 또 푸순스 난화왠의 감옥에서 박해를 계속 당했는데, 경찰들에게 참혹하게 맞아 2005년 4월 25일 생명이 위험하여 푸순병원으로 호송되었다. 그곳에서 27일 원한을 품은채 돌아갔다.
* 14세 어린이 두 명이 박해 중 비참하게 사망
왕원란 (여,14세) 헤이룽쟝청스 제 8중학 1학년 학생. 2000년 7월 19일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를 따라 북경에 청원을 갔다가 악경에게 체포되었다. 북경주재 판사처에 7일 불법으로 감금된 후 본 지방으로 압송되었다. 610인원의 불법적이 심문과 위공 협박에 700원의 돈을 길취 당했다. 어느날 왕원란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청스 뚱펑 파출소의 악경들이 10살 된 그녀에게 소란을 피워 심신에 극도의 상처를 입혔다. 이에 2003년 9월 12일 원한을 품고 돌아갔다.
* 타스위 (남,14세) 라오닝단둥스푸춘 초등학생. 탕스위는 어려서부터 심장병을 앓았는데, 1995년 병원의 진단결과 “앞으로 반 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하였다.
1996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연공을 통하여 그의 병은 차츰 나아지기 시작하였으며 능히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따라서 학업 성적도 아주 뛰어났다. 99년 7월 파룬궁이 박해를 받은 후 탕스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대련에 청원을 갔다가 불법으로 하루밤 감금되었다. 탕스위의 어머니가 학교에 출근하였을 때 단둥 공안에게 납치당하였다. 며칠 지난 후 마샨쟈 노교소에 압송되어 2년동안 박해를 받았다. 탕스위의 아버지 탕이칭은 단둥스 전싱취 푸춘 초등학교에서 꾸리고 있는 공장의 직원이다. 1999년 7월 22일 북경에 청원하러 갔다가 푸춘 파출소에 납치되어 박해를 받았는데 여러 번 불법으로 감금되었다. 2003년 7월 13일, 단둥 공안처에서 탕이칭에게 전화로 텔레비를 수리하겠다고 거짓말 전화를 하여 집에서 나오게 한 후 지금까지 행방불명된 상태다. 후에 가족들이 곳곳에 알아본 결과 그날 경찰에게 납치당한 후 어떠한 법률 절차도 없이 불법으로 4년 판결을 받았으며 선양 둥룬감옥에 감금되어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러 번 납치되어 불법 판결을 받고, 여러 번 경찰들이 집을 소란하게 하며 물건을 몰수하는 가운데 탕스위는 정신상 거대한 타격과 고통으로 심장병이 재발하여 2003년 5월 25일 원한을 품은채 사망했다.
이렇듯 매 한 가지 사례들은 모두 하나의 피값이다. 선악에는 보응이 있듯이 피값에 대한 보응도 있을 것이다. 즉 그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바, 밝은 천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할 것이다. 중공 장시 집단이 파룬궁에 대한 멸종적인 박해 중 수련자가 흘린 피값은 모두 갚아야 하는데 그 날이 가까와 지고 있다..
문장 완성: 2005년 6월 3일
문장 발표: 2005년 6월 4일
문장 갱신: 2005년 6월 3일
문장 분류:【박해진상】
문장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6/4/1033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