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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산둥 여 파룬궁 수련자의 몇 년 동안 받은 가혹한 형벌(사진)

[ 명혜망 2004면10월 5일] 쑤칭(素晴 가명, 여) 산둥(山東)성 둥잉(東營)시 성리(勝利)유전 파룬궁 수련자이다. 1999년 7월 20일부터 같지 않은 지역의 구류소, 구치소, 배정부(調遣 處), 노동교양소에서 여러 가지 박해를 받았다. 아래는 본인이 직접 이 몇 년 동안 받은 가혹한 형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조건이 제한되어 있어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만 여러분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999년 9월, 산둥성 둥잉시 성리유전 회사에서 불법으로 감금당해 있는 동안에, 파룬궁을 견지하여 수련한다는 이유로 보안 경찰(保衛)의 체벌을 받았다. 체벌의 동작은 — 두 손은 수평으로 들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야 하며, 엉덩이 부위는 발목에 대지 못하게 하였고, 반쯤 들어야만 했다. 많은 모기들이 물어도, 정말로 괴로워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몸이 떨려서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손전등으로 나의 얼굴을 비추고 눈을 감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전기봉을 바닥에 눌러서 불꽃이 튀게 했는데, 동작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전기봉의 충격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웅크리고 앉기만 하면 2시간을 보내야 했다.

2000년 2월, 산둥성 둥잉시 성리유전 구치소에서는 죄수들이 지켜야 할 감옥의 규칙을 외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 교도관(구치소에는 여자 교도관 한 명만 있었다)은 나의 손을 높이 머리 위로 들어올리게 하고 감금실 안의 폐기한 철 난간에다 묶어놓았다. 그때는 바로 엄동설한이었다. 창문에는 유리가 없었으며 차가운 바람이 파고 들어서 덜덜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은 수갑을 채워서 못 쓰게 될까봐 4일 후에 수갑을 풀어주었다. 이때 손, 어깨, 몸 전체는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손은 이미 검은 자주빛깔이 되었고, 장기간 마비상태에 있었다. 한 참 후에야 정상적인 색깔로 돌아왔다. (사진은 그 당시의 상황에 미치지 못하며, 진정한 고통은 실제로 보여줄 방법이 없다.)

2000년 11월, 베이징(北京) 둥청(東城) 구치소에서(포국[炮局]이라고도 부른다)는 연공한다는 이유로 일종 쓰촤이(死揣)라고 부르는 형구를 달아놓았다. 형구는 폐기된 수갑으로 만들었는데 천을 감싸서 신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옛날에 쓰던 녹이 슨 열쇠(橫插 鎖-헝차쒀,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아 요즘의 자물쇠로 대체하여 재현했다)로 나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 매일 정말 고통스러웠고, 눕지도 못하고, 편안하게 앉을 수도 없었다. 화장실을 갈 땐 마음씨 좋은 형사범이 도와 주어야만 했다. 단식으로 제지했기 때문에 6일 후에야 수갑을 풀어주었다. 이때 손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누구의 손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2001년 4월, 베이징 초양(朝陽) 구치소에서 불법 감금에 항의하기 위하여, 전후로 단식하고, 유리에 부딪치기도 했다. 두꺼운 유리는 부숴져 온 바닥에 깔렸고, 나의 머리 부위는 20바늘이나 꿰맸다. 붉은 피는 온 머리, 그리고 상의와 지혈을 하던 수건을 듬뿍 물들였다. 화장실도 못가게 했기에 생리혈(經血)은 침대 위에 온통 흘러내렸다. 때문에 체내의 출혈이 과다했다. 게다가 이름도 모르는 링겔 주사를 강제로 놓았으며, 코에 끼운 호스는 뽑아내지 않았다. (다음에 음식물을 주입하는데 편리를 위해서이다) 자신은 혀 끝으로 목에 끼운 호스를 감각할 수 있었다. 매번 침을 넘길 때마다 목은 아파서 정말 매우 고통스러웠다.

나의 두 발은 끈으로 판자 침대 밑에 있는 가로 나무 막대에다 묶어놓고, 두 팔도 투명 테이프( 테이프는 약 네 손가락의 넓이가 된다)로 침대 밑에 있는 가로 나무 막대에다 묶어놓았다. (좁은 판자가 없어서 넓은 판자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여준 가로 막대기는 완전히 분명하게 나타내지 못하였다) 두 팔은 매우 팽팽하게 묶었기 때문에 두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손가락은 자주색 무같이 부어올랐다. 투명 테이프는 공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두 팔은 매우 괴로웠으나 상처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테이프와 테이프 사이에 드러난 피부는 기포가 생겼으며, 안에는 노란 물이 잔뜩 차 있었다. 지금까지 3년이 지난 오늘에도 묶어서 생겼던 상처는 여전히 어렴풋하게 보인다. 그러나 다른 젊은 여자 수련자는 투명테이프로 묶을 때 매번 감은 테이프 사이에 잘 이어지지 않은 자리에 모두 틈이 있어서, 두 팔엔 모두 한 줄 한 줄의 노란 기포가 생겼다. 구치소 의사는 한편으로는 남의 험담을 섞어가며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 “이후는 잘 묶어 주어라. 상처가 나지 않도록 중간에 틈을 내지 말아라.( 박해 받은 증거를 남길까 봐 두려워서이다)” 한 편으로는 죄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

이상은 단지 여러 가지 가혹한 형벌을 극히 간단히 진술한 것이다. 그 때의 고통은 말로 묘사할 방법이 없으며 또한 종류 역시 많고도 많다. 단지 이 몇 가지 경력으로 장쩌민 집단이 저지르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폭로하려고 한다.

문장완성: 2004년 10월 2일

문장발표: 2004년 10월 5일
문장갱신: 2004년 10월 5일 01:18:51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http://minghui.ca/mh/articles/2004/10/5/856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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