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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제 2 부)

글 / 지린市, 수련생 류 준

[명혜망] {(제 1 부)에 이어 계속됩니다}

서문: 길고, 긴 삶이라는 강에서, 사부님은 나를 선택하셨고 사부님은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을 주셨다. 大法과 사부님이 비방당하고, 중상당하고 사악하게 공격을 당했을 때, 나는 大法을 실증했고, 大法을 수호했고 正法에서의 사부님을 도왔다. 그런고로, 나는 이 기사를 “선택”이라고 이름지었다.

지난 4년 동안에,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사악한 고문과 심신의 박해를 경험했다. 어떻게 살인적이고, 잔인하며 경멸할 만한 수단이었는가를 상상할 방법은 없다. 박해는 나에게, 또 수많은 수련생에게, 또한 그들의 가족들에게 굉장한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마주했던 협박과 박해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든지, 그들은 大法과 사부님께 대한 나의 올바른 믿음을 흔들어놓지 못했다. 내가 고험과 고난을 통과하며, 잔인한 박해로 인한 고통을 받거나, 심한 아픔을 참아낼 때마다, 내게는 사부님께서 > 끝에 하신 말씀, “하나의 부동(不動)은 만 가지 움직임 (萬動)을 제어하는 것이다.”가 내 귀를 맴돌았다.

내게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준 것은 大法이다.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주저함이 없이 그런 거대한 고난을 통과해 나올 수 있게 했다. 어떤 개인적인 노력으로 확고부동함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법이다. 나는 다만 大法을 실증하고 大法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정법 입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大法 수련생들로서, 우리가 오직 사부님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를 때에만, 우리는 가장 정의롭게 행동하게 된다.

나는 내가 法輪大法(파룬따파)를 얻는 행운을 가진 후에, 내가 경험했던 거대한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인 변화, 그리고 大法 수련생들의 고귀한 감수, 사심 없는 순수함과 德의 체현에 대해서도 쓰려고 결정했다. 동시에, 나는 또한 장쩌민이 국가공안국, 법조직, 노동교양소, 구치소, 감옥, 세뇌반, 지역정부 및, 사악한 사람들을, 그리고 경찰들을 활용하고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서 眞-善-忍(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틀어쥐고, 맞아도 맞받아치지 않고 비방을 받아도 맞받아 비방하지 않는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양면에서 비인간적인, 극히 사악한 박해를 감행한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나는 단지 수백 만의 희생자 중의 한 명일뿐이다. 나는 거짓에 눈이 어두운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그들이 사실을 안 다음 그들에게 정의를 지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내가 고통받았던 박해사실을 썼다. 나는 또한 동수들을 돕기 위해서 지나간 4년 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을 썼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함께 제고될 수 있다. 나는 내가 불법적으로 감옥에 감금되었을 때 목격한 것만 쓴 것이 아니고, 나는 또한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하고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사악한 거짓을 폭로하던 때의 경험도 썼다. 나는 大法을 실증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이 특수한 역사적 시기 동안에 내가 목격했던 모든 것을 썼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전반 과정 동안에, 자료를 준비하려고 시작하던 때로부터 기사를 완성하기까지 나는 많은 교란을 경험했다. 때로는 펜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어 글자 한자를 쓰는데도 큰 노력을 기우려야 했고, 때로는 몸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고, 때로는 쓰고 있던 펜의 잉크가 너무 많아졌고, 다른 때는 잉크가 전혀 없어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눈이 흐려졌으며, 외부적인 교란 또한 매우 컸다. 나는 내가 끝내지 못한 일들을 항상 내 주위에 쌓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교란도 계속 쓰려고 하는 나의 결심을 막아내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써내려 가는 것을 끝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이것을 보는 수련생들이 이해해주고 부적합한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正法에서 사부님을 도왔던 大法 수련생들의 극히 중대하고 장대한 공훈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2003년 12월 8일

3. 교도소에서 법을 실증하고 전파하다

내가 지린市에 있는 노교소(勞敎所)로 보내졌을 때, 내 아내는 창춘市에 있는 여자 노교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아들은 처음으로 부모 없이 혼자 남겨졌다. 나의 아버지는 집에 계셨지만, 너무 큰 짐을 지신 상태에서 병의 발작으로 고통을 받으시며 말하는 능력을 잃으셨다. 나의 아들은 힘든 농사 일은 물론 편찮으신 할아버지를 돌보아야 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협박과 시달림을 받았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에 대한 걱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으로 내게 왔다.

노교소는 나를 3대대, 1중대, 1반에 넣었다. 그 반에는 대략 20 명의 재소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내가 그들처럼 범죄 혐의로 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각종 협박과 모욕적인 책략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갇혀있는 것은 나의 믿음 때문이지 어떤 범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었으며, 내 가족의 투쟁과 “眞-善-忍(진-선-인)”의 법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된 나의 수련 이야기를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어떤 이들은 동정을 표시했고; 어떤 이들은 빈정거렸고; 어떤 이들은 분개했다. 내가 法輪大法의 사실을 설명해준 후에 그곳에서의 내가 사는 상황이 향상되었다. 모든 기회를 이용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大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시에, 마땅히 大法 수련생이 가져야 할 높은 표준에서 행동을 했고, 집없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살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내가 있던 반의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저주하고 도둑질하는 사건들이 차차로 줄어들었고, 이것은 중대의 환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반 지도자들과 훈련 경찰은 그들이 사회의 찌꺼기로 간주하며, 전기 방망이로 때리고 고문한 후에도 변형시킬 수 없던 그러한 재소자들을 내가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행동으로 영감을 넣어줄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것은 法輪大法이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이고 “眞-善-忍(진-선-인)”이 그들의 선량한 본성을 깨어나게 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도 나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출생 후에 가진 관념과 사회야말로 이러한 범죄자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도록 영향을 주었다. 육체적인 힘으로 그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이 善에 있다. 육체적인 힘은 표면적인 것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 본성으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육체적인 힘이 가져오는 효과와 결과는 부정적인 것이며, 얻어맞은 사람들에게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나중에 복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럼, 육체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악 순환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대장과 경찰은 내 생각이 아주 다른 것을 알자 자주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면서 大法이 어떻게 내 가족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오래지 않아서, 노교소 당국은 그들의 몇 가지 고집스런 생각들을 바꾸었고 大法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과 같이 수련생들이 연공하는 것을 중지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밤에는 명상하는 수련생들을 교란하지도 않았다. 또한, 범죄 재소자들을 시켜 法輪大法 수련생들을 못살게 굴게 하지도 하지 않았다.

2000년 9월 27일, 노동캠프에서 수련생들을 세뇌시키는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자, 중대는 노동캠프에 있는 모든 수련생들을 집합시켜서, 그들을 하루 16시간씩 작고 낮은 나무의자 위에 강제로 앉도록 했다. 주는 음식은 끼니때마다 단 두 개의 옥수수 빵과 야채 없는 묽은, 물 같은 국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특별 세뇌 반이 형성되었다. 매일, 일단 당국이 더 이상 뛰지도 못하고, 더 이상 돌도 나를 수 없고, 더 이상 굶주림 때문에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수련생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몇 명의 노동 캠프 직원이 그를 급습하여 세뇌를 시작한다. 그들의 방식은 야비했고 외설된 것이었다. 나무의자에 오랫동안 앉게 하는 것이 많은 수련생들을 불쾌하게 하였고, 대다수가 습한 상태로 인해 옴에 걸리고 작은 돌기들이 생겼으며, 극심한 가려움증을 유발했다.

나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은 교육부에서 나온 왕이었다. 그는 가슴과, 기관지 이외에도, 다른 병들이 있었다. 그는 매일 나와 이야기하려고 왔다. 나는 그의 병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에게 大法을 수련함으로써 내 가족이 받았던 혜택을 말해주었다. 왕은 절망적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당국이 그에게 大法을 수련하도록 허락하지도 않거니와 그의 고용인도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가 수련한다면, 그의 가족은 수입의 문이 닫히게 될 것이고 그의 아이는 학교에 갈 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수년간 이 병들로 해서 고통을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좋은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희생자들은 단지 파룬궁 수련생들만이 아니고 그를 포함한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다. 나는 그에게 박해받지 않고 大法을 수련하며 건강하게 일하며 살라고 말해주었다. 병이 없는 느낌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그가 나에게 말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사악을 폭로하고 法輪大法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았다. 한 번은 그가 그의 일은 나의 믿음을 강제로 포기하도록 하는 것인데, 대신에, 내가 자기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와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계속 이렇게 간다면, 그는 나처럼 강제 노동에 집어넣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이후로,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겪는 내면의 모순은 바로 이 사악한 박해가 가져온 결과라는 것을 이해했다.

당국이 거의 두 달에 걸쳐 法輪大法 수련생들의 의지를 꺾으려고 강행했던 강제 세뇌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반대로, 수련생들은 사악의 박해를 돌파하고 전체적으로 제고했다. 뒤에 쳐졌던 여러 수련생들은 동수들의 도움으로 法輪大法 수련을 새롭게 했다. 단체로 우리를 세뇌시키려던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우리는 다시 본래의 대대로 돌려보내졌다. 나는 총결산 종합보고서에 法輪大法은 좋으며 끝까지 수련을 견지할 것이라고 썼기 때문에 나의 강제-노동 형기가 세 달 더 연장되었다. 열 명 이상의 수련생들의 형기가 연장되었으며, 가장 긴 것은 6개월이나 되었다.

2001년 중국 신년 동안에, 강제 노교소는 갑자기 아주 긴장되었다. 당직을 서는 경찰의 숫자가 배로 늘어났고, 화장실에서조차도 더욱 강력하게 수련생들을 감시했다. 나는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했는데, 중국 신년이 지나자, 노교소 관리자들은 수련생들을 모이게 하고 천안문에서의 조작된 “자살” 사건의 허위선전 비디오를 보도록 했다. 당시, 나는 이미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았고 증거는 거기에 있던 누락투성이의 조작이었으며, 이것은 大法을 비방하고 法輪大法을 반대하는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동수들과 교류했으며 우리는 이 모든 것이 大法을 날조하고 세상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다음날 토론 시간에서 논평하는 기회가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건과 관련된 나의 의문점을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전에 베이징에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광장 주위의 어느 건물에서 소화기와 불을 진압하기 위한 담요를 가져오려면 적어도 약 10분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시간은 한 사람이 불에 타서 죽을 수 있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누가 등뒤에 소화기를 가지고 다니는 경찰을 본 적이 있는가? 누가 이 전체 사건을 촬영했는가? 비디오에서는 천안문 광장이 엄중한 통행금지였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어떻게 허난省에서 온 7명의 사람들이 신분증도 없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고 자신들을 광장 주위로 흩어지게 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왕진둥이 6년을 수련했다면서 가부좌도 할 수가 없었는가?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왕진둥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은 베이징에서 다른 수련생들이 청원할 때 전형적으로 하는 말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 어떻게 류쓰잉 [자살을 기도했다고 말해지는 어린 소녀] 그녀가 화상을 당한 결과로 기관 절개 수술을 받은 후에 노래를 하고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는가? 法輪大法은 부처수련이다. 수련을 창시하신 이 홍지 선생님은, 大法 책에서 살인과 자살을 허용하지 않으며, 자살은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수련생들은 절대로 그들의 생명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처럼 많은 수련생이 베이징으로 갔었지만,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또한 그들에게 法輪大法 수련생들은 그들의 삶을 眞-善-忍(진-선-인)에 기초하여 살고 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람들과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비디오는 大法을 날조하고 경찰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大法을 증오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찰들은 그 사건에 대한 나의 분석을 들은 후 충격을 받고 토론 회의를 즉시 중단했다. 아무도 자살 사건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노교소에 있던 누구도 이것을 大法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거짓이 폭로된 후, 많은 경찰들은 수련생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를 바꾸었고 그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2001년 3월 7일, 고위층 권력자들은 노동 캠프로 하여금 다시 파룬궁을 박해하도록 특별 대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그들은 다른 대대로부터 가장 사악한 경찰과 반 지도자들을 모집해 왔고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밤과 낮으로 수련생들을 포악하게 때렸다. 당시 이것은 정말로 끔찍스러웠다. 경찰 손에 있는 전기 방망이는 끝없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고; 박해받고 있는 수련생들로부터의 공포에 찬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왔으며; 전기 방망이에 의해 살이 타는 냄새가 공기를 진동했다. 경찰들은 완전히 그들의 이성과 인간의 본성을 잃었으며, 대체로 여러 명이 함께 미친 듯이 감방 안으로 뛰어들어가서는, 닥치는 대로 수련생을 잡고서 폭력적으로 때리거나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3일 동안에, 한 12명의 수련생이 심각하게 상처를 입었고 몇 명은 병원 응급실로 급히 들려갔다. 지린省 지린市에서 온 45세 된 수련생, 허우 잔하이는 갈비뼈와 폐에 받은 손상으로 몇 달 후 그녀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여러 날 후에, “악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중대장 한 명이 나와 함께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가족과 나 자신에 대해서, 또 法輪大法을 수련하고 나서부터 우리가 경험했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큰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나는 또한 며칠 전 우리를 때렸던 일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이야기했고 미래에는 대법제자들을 잘 대우하라고 충고했다. 그에게 우리는 불법으로 갇혀있는 것이며, 우리는 어떤 법을 어긴 일도 없으며, 다만 “眞-善-忍(진-선-인)”의 법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할 뿐인데, 우리를 노교소로 보낸 것은 잘못이고, 부당한 평결은 조만간 반대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의 가족 중에 누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시오, 당신은 슬프지 않겠소?” 라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절대로 맞받아치지 않는 그런 좋은 사람들을 때린 것을 미안하다고 느끼지 않겠소? 문화대혁명 이후 단지 몇십 년이 지나갔고 그 시기 동안에 정치적인 무기를 갖고 다른 사람들을 때렸던 사람들이 모두 나쁜 응보를 받았소.” 그런 다음 나는 그에게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몇 개의 진짜 인과응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침 한나절을 끌었고, 나는 양심이 재발견된 그의 눈에서 가책의 눈물을 보았다. 그는 나에게 나의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제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일생에서 다른 사람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향한 과거의 그의 태도는 그가 먼저 다른 사람을 치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를 못살게 굴 것이기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을 먼저 쳤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 어떻게 그가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2001년 3월 27일에, 구류소에서는 45명의 수련생을 퉁화, 랴오위안과 주타이 노교소로 이송시켰다. 나는 랴오위안市 구류소로 보내졌다. 처음에, 우리 15명은 집중 재교육반으로 보내졌다. 그곳의 경찰은 이미 그들이 지린市 노교소에서 이송된 견정한 대법 수련생들은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준비된 고문 기구들로 우리를 협박했고 하루종일 우리를 “크게 매다는” [두 손을 뒤로 수갑을 채우고 단지 발가락만이 땅을 닿게 한 상태에서, 쇠 창문의 창틀에 로프로 매다는 고문 형식] 형벌을 받게 하고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포기한다고 동의할 때까지 우리에 대한 고문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엄숙하게 경고했다. 한 수련생의 굳은 믿음은 어떤 폭력적인 수단으로도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정념이 랴위안 노교소에 있는 경찰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지역 수련생들은 물론 크게 고무 받았으며,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것을 다른 수련생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우리는 두려움에 대해 남아 있는 집착이나 또는 어떤 것 때문으로라도 절대로 우리의 믿음과 양심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무슨 분열 성명서를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그들 중 몇 명은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만 다른 사람들을 따랐다. 그들은 아주 슬프게 느꼈고 그들이 더 이상 계속해서 大法을 수련할 자격이 없으며 사부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고 그렇다고 그들의 양심의 가책과 후회를 옆으로 치워놓지도 못했다. 우리와 교류를 한 후, 그들은 그들이 뒤쳐져 있었다는 것을 보고 즉시 따라잡았다.

그 이후로, 이전의 분리 약속을 무효화하는 엄중 성명서가 하나 씩 하나 씩 제출되었다. 이것은 전체 노교소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고 모든 경찰들이 그처럼 겁을 먹었기 때문에 그들은 폭력적으로 때리고 엄중 성명서를 쓴 수련생들의 형기를 늘렸고 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작은 감방에 넣어버렸다. [재소자는 각각 아주 작은 독방에 가두어졌다. 감시원들은 수련생들을 고정된 자세에서 뒤로 수갑을 채웠고, 그 상태에서 수련생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다. 작은 감방은 아주 습기가 찼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재소자들은 그곳에서 대소변을 보며, 낮 동안 정규 식사량의 절반만을 재소자들이 갇혀 있는 작은 방으로 공급한다. 작은 방에서 나는 악취는 너무 고약해서 숨을 쉬기도 어렵다.] 어떤 수련생들의 등은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이 맞아서 멍으로 뒤덮여 버렸다; 어떤 수련생의 얼굴은 전기 충격 고문으로 온통 물집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아주 견정했고 아주 잘 해냈다. 지린市에서 온 우리 15명은 때린 것과 작은 감방에서의 박해 사건들을 밝히고, 경찰에 의해 우리에게 범해지는 폭력적인 범죄와 인권 위반을 폭로하는 보고서를 썼다. 결과적으로, 노교소는 수련생들을 일단 작은 감방에서 나오게 할 것을 결정하고 수련생들을 때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번 수련생들의 정념정행은 사악과 그들의 통제 밑에 있는 경찰들을 크게 놀라게 했고, 전에 잘못을 저질렀던 그런 수련생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大法을 향해 더욱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2001년 4월 말, 지린 수련생들 중 우리 6명을 랴오닝省, 창투市로 강제로 끌고 갔으며, 지하 케이블을 설치하는 땅을 파게 했다. 나는 1 대대 1반으로 보내졌고 이층으로 된 임시로 세를 낸 곳에 머물렀는데, 방은 아주 작고, 어둡고 습했으며, 고약한 냄새는 토할 것 같았다. 또 아주 비좁고 침대도 없어서, 시멘트 바닥에서 자야했다. 우리는 아침 네 시 삼십 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고, 다섯 시에는 일하러 갔으며 밤 여덟 시에야 끝났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70cm의 너비에 1.3m 깊이 되는 도랑을 수십 미터씩 파도록 할당받았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는데, 누구라도 끝내지 못하면 벌을 받았다. 우리는 또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 랴오닝省 서쪽의 이른봄에는 자주 모래 폭풍이 왔는데, 일단 식사가 밖에 놓이면, 단번에 한 층의 노란 먼지로 덮여서, 씹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시는 것이었다. 작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 단지 10kg의 물이 공급되었고, 그처럼 힘든 육체적인 노동에 있어서, 이것은 겨우 반나절 분량이었다. 때로는 우리 중 한 명이 갈증으로 쓰러졌다.

그때, 나는 내 몸 전체에 많은 물집이 생겼고, 어떤 것은 주먹만했으며, 대부분이 몸 아래 부위에 있었다. 내가 땅을 파는 낮 동안에는, 양쪽의 둑에서 날아오는 모래 돌이 내 다리와 엉덩이의 살을 쓸어댔다; 고름, 피와 땀은 껍질이 벗겨진 살 위에 뒤범벅이 되었고, 살을 파고드는 통증을 만들어냈다; 저녁때, 옷을 벗으려고 하면, 진물이 나는 부분에 옷이 들러붙었고 얼마 동안 안에 말라버렸기 때문에, 상처 난 곳의 딱지가 옷을 벗느라고 떨어질 때는 내 몸 전체에서 나는 찬 땀과 함께 통증으로 덜덜 떨었다. 통증이 그처럼 강했기 때문에 내가 이 기억을 쓰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매우 편치 않은 느낌을 만들어 준다. 나의 내의는 땀에 늘 흠뻑 젖어 딱딱해져 버렸고, 빨래할 물이 없었기 때문에 달리 방법도 없어 다만 손으로 비벼 약간 부드럽게 한 다음에야 다시 입었다.

심한 노동을 한지 사흘 째 되는 날, 몹시 통증을 주는 물집에 더해서, 나의 왼 손이 아주 심하게 부어 올라 삽을 쥘 수가 없었다. 노동을 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루 빠질 수 없는가 하고 반장에게 물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있다. 하나는 “분리 성명서” [나의 믿음을 포기한다는]를 쓰는 것인데 그 후에야 나는 다시 노교소로 돌려 보내지거나 아니면 내 병으로 인한 보석으로 풀려나서 집으로 돌려보내질 수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죽는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내가 단지 사고로 죽었다고 주장하면 된다. 노교소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보통이어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곳은 감옥이지 요양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공평치 않다. 이것은 인권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는 냉소하면서 대답했다, “이곳에서 나에게 인권을 말하지 말라.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작용하지 않는다. 가서 우리를 고소하라. 지린에서 온 당신들은 쓰기를 아주 잘하는데, 어서 가서 우리를 고소하라, 누가 끝에 이기는가 보자.” 그리고는 내가 계속해서 굴을 팔 것을 강요했다. 그 날, 나의 삽이 부러졌고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국은 재소자 감시원으로 하여금 나를 때리도록 명령했다. 그의 성은 장이었는데, 아주 사악했다. 그는 대나무 딱따기와 삽으로 나를 때렸고, 내 얼굴, 머리, 몸 전체에 상처와 멍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눈이 충혈 되었고, 각막에 입힌 부상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한 쪽 눈의 시력이 약하다. 상처와 아픔, 거기에 더해서 몸 전체에 퍼져있는 물집은 나에게 밤에 고열이 나게 만들었으며, 나의 몸 전체가 망가져 버렸다. 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감옥의 감시원은 내가 “분리 성명서”를 쓸 것인지 아닌지를 체크하러 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眞-善-忍(진-선-인)은 내 몸 각각의 세포 속에 있다; 내가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런 성명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반장은 분노로 으르렁거렸고, 이제부터 매일 내가 성명서를 쓰든지 아니면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때리겠다고 맹세했다. 신카이 강을 지나가는 날, 반장은 내가 일한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트집을 잡으며 나를 때렸다. 그는 삽을 휘둘러서 내 다리, 허리와 어깨를 찍었다. 나의 바지는 물집이 있는 살 속으로 패여들어갔다. 나는 통증으로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 나의 동수들은 흐느꼈고 그가 계속한다면 나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막았다. 내가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나의 왼쪽 다리는 무감각한 상태로 되었고, 심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피는 두 겹으로 된 바지를 적셨다. 크게 갈라진 어깨에서도 역시 아주 심하게 피를 흘렸으며, 머리에도 여러 개의 달걀 크기의 피 물집이 생겼다. 나는 메스꺼웠으며 때때로 의식을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것을 느꼈고 죽어가고 있었다. 내게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생각만이 마음속에 있었다: 大法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갑자기, 나는 아랫배 부위에서 파룬(法輪)이 도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 수 년 전이었다. 이것은 그렇게 내 가슴을 아주 따뜻하게 해주었다. 동시에, 내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까지 따뜻한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극히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누워 있지 않았고, 대신에 삽에 몸을 의지하며 일어섰다. 같은 날 오후, 반장에게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몸 전체가 몹시 아파서 그는 통증을 줄이느라고 데굴데굴 계속 굴러야 했다.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그에게 여러 병의 점적 정맥 주사 놓았는데도 통증은 그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그가 지은 업에 대한 인과응보가 아니란 말인가? 나는 그에게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좋은 일에는 좋은 보답이 있고 나쁜 일에는 나쁜 응보를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는 나를 그렇게 때린 것을 후회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나를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의 보호였다는 것을,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바로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몇 번이나 죽을 위험 속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가슴속에서 “사부님, 감사합니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6월 3일에 나는 다시 노교소로 보내졌다. 체중이 많이 줄었고, 뼈만 남았으며, 얼굴은 까맣게 여위었다. 노동을 하러 나가지 않았던 나의 동수들은 나를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나의 왼쪽 다리에 있는 통증이 내 몸의 반쪽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나가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때가 되서야 나는 내가 그들과 협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 노동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노동하는 동안에 혹사 받은 나의 경험을 회고하고, 그것들을 정리해서, 노교소의 책임자에게 보고했다. 노교소의 책임자가 이에 관해 나와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그에게 내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간 것은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를 2년간 강제 노동으로 형을 내린 것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며, 나는 잘못 취급을 받고 있다. 노동 캠프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세뇌 수단들은 한 편으로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법을 위반하고 있다, 더구나, 그들은 인권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그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나서 내 가족에게 육체와 정신 양쪽에서 받은 혜택에 대해서, 그리고 내게 일어났던 박해에서의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말했다. 그는 내게, “우리는 지금 수속을 시작해서 며칠 내로 당신을 석방시키겠소.”라고 말했다.

그 때, 省 사법청 청장 류(Liu)씨가 조사하러 노교소로 왔다. 장갑 공장에서,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게 물었다, “당신 파룬궁을 수련하나?”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석방된 후에도 계속해서 수련할 것인가?” 나는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나는 수련할 것입니다. 大法은 그처럼 훌륭합니다. 대법은 사람들에게 “眞-善-忍(진-선-인)”을 가르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대법을 수련하기를 그치겠습니까? 이것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좋은 것인데, 왜 금지합니까? 法輪大法 수련생들을 감금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헌법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2001년 11월 9일, 대대장은 나를 석방하라는 편지가 발행되었고, 이것이 나를 집으로 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전화를 해서 그 도시의 “610 사무실”로부터 소개장을 가지고 와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집에 전화를 했고, 사흘 동안 내 아들은 소개장을 받아내려고 애썼지만 얻어낼 수가 없었다. 시에서는 현으로, 현에서는 읍으로, 그리고 읍에서는 다시 뒤로 밀었다. 어찌되었든지 아무도 소개장을 발행하지 않았다. 내 아들은 너무 걱정을 해서 입에 큰 물집이 생겨 고생을 했고 먹지도 못했다. 2001년 11월 12일, 나는 대대장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그에게 그들이 아직도 나를 석방시키지 않는다면, 단식을 단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단식항의 하는 것이 두려워 당장에 “610 사무실”로부터 소개장을 발행하게 했다. 2001년 11월 13일 아침 10시에, 670 일 낮과 밤을 지옥과 같은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았고,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박해를 받는 동안 몇 번을 거의 죽을 번 한 후에, 大法과 사부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나는 노교소의 문을 정정당당하게 걸어나왔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을 만났고, 노교소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으며,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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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는 3월 18일자 명혜망을 보십시오

문장발표: 2004년 3월 9일

문장완성: 2004년 3월 8일

문장분류: [진상알림]

중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2/9/66934.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4/3/9/458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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