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헤이룽장(黑龍江)성 짼싼장(建三江)대법 수련생
[명혜망 2004년 3월 20일] 짼싼장이라는 곳은 중국지도에서 확대경으로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사악한 장씨 정치건달 집단이 발동한 이번 法轮大法(파룬따파)를 박해하는 중에서, 이 손바닥만한 곳은 잊혀진 곳으로 될 수 없었다.
4년 동안의 시련을 돌이켜보면, 상상도 못할 일들을 많이 겪었고, 사존님의 자비로우신 보호가 있었기에 오늘까지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흑룡강성 짼싼장 농장에 있는 대법제자이다.
2000년 설 전, 나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는 대법의 결백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온 후 사악한 자들에 의해 불법감금을 당했다. 대략 5평 남짓한 작은 방의 1.7미터쯤 되는 마루바닥 위에 총 아홉 명의 대법제자가 감금되었다. 그믐날 저녁에, 나는 그 지역의 대법 보도소 소장과 같이 불려 나갔는데, 사악한 자들은 우리의 두 손을 묶고, 눈은 수건으로 가렸으며, 머리는 옷을 덮어 씌우고는 차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우리를 백 리 밖에 있는 암흑의 구치소에 3개월 간 감금했다가, 후에는 또 짼싼장 구치소로 보내어 계속 감금하였다.
2001년 1월 15일에, 나는 쟈무스(佳木斯) 노동 교양소에서 2년의 노동교양을 받았다. 노동 교양소에 도착한 이후, 장기간 대법을 접촉하지 못함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박해와 감금을 당하였고, 집착심이 일어나 인간쓰레기의 거짓과 기만을 믿게 되었고, 또 자신의 주의식이 강하지 못한 탓으로 대법제자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는 바로 성명을 써서 올렸다.
한 악경은 흉악하게 나를 보고 “당신은 고발장을 다시 써야 한다.”라고 말하자, 나는 이미 전환(转化)한 것은 무효라고 성명서를 썼으니, 다시 고발장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녀가 “당신은 나가고 싶지 않나요?”라고 말하자, 나는 “나가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5월 5일 단옷날에, 집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공안국과 직장 사람들은 계속 사람을 파견하여 나를 감시하였다. 6월 20일, 그들은 또 나를 보고 고발장과 결별서(决裂書)를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쓰지 않으면 사람을 잡아간다고 하였다. 나는, 허구한날 사람을 잡는 것으로 나를 겁주는데, 이것은 분명 사부님께서 나에게 법을 실증하라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법공부 전후의 심신체험’ 한 부를 써서 보냈다.
7월, 나의 산동(山东)에 사는 아들이 손자를 봐달라는 편지를 보내 왔기에, 나는 남편과 같이 산동으로 갔다. 도착한 그 주에, 직장의 부서기와 농장 검찰실의 주임은 비행기를 타고 산동으로 쫓아와서, 나보고 보증서를 쓰라고 하였다. 나는, 노동 교양소에서 나왔고, 또 나보고 보증서를 쓰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법이 좋다는 몇 마디만 쓰고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2002년 3월 아들은 짼싼장으로 한 살 반 쯤 되는 손자를 돌봐 달라고 데려왔다.
4월 14일 아침 5시경, 사악한 자들은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총 삼십 여명의 대법제자들을 붙잡았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잡혔고, 어떤 사람은 길에서 경찰 차에 떠밀려 올라갔다. 악인은 내가 제일 완고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리 집 아래층에서 지키고 있다가, 내가 나오면 바로 손을 쓰려고 했다. 당시 나는 곧 발정념을 시작했는데, 나는 사부님의 진수제자이며,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만약 누가 나를 건드릴 수 있다면, 사부님을 건드린 것이며, 그는 곧 이 우주를 건드릴 수 있다. 이렇게 줄곧 저녁 5시까지 하였을 때, 경찰들은 기다리다 못해, 큰 사다리를 얻어와서, 창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문을 따기 시작하자, 나는 문을 열어 그들을 들어오게 하고는 “당신들의 지금 이 모습을 보세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저는 당신들 대신 부끄럽네요. 오늘 당신들은 누구도 나를 건드릴 생각을 말아요, 나를 죽이지 않고는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들고 나갔다면, 어떻게든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중얼중얼거리면서 당신의 손자가 어린것을 봐서, 우리들이 돌아가서 상의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니 가버렸다.
사악은 또 돈으로 사람을 써서 나를 감시하게 했는데, 내가 문만 나서면 그들은 미행했다. 한번은 백화점에서, 미행하던 사람은 나에게 호되게 훈계를 받았다. 그리고는 무서워서 다시는 나를 감히 따라오지 못했다. 그들은 줄곧 전화로 도청하고, 나를 교란했으며, 나중에 나는 이 기회를 빌어 전화로 진상을 했다. 어떤 때에는 사악한 자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올해 신정 때, 경찰은 나의 집에 와서 교란하기에, 나는 “法轮功(파룬궁)을 꼭 수련할 것이고, 또 당신들이 대법제자들을 박해한 악행을 모두 공표할 것이니, 당신은 며칠 뒤에 와서 데려가시오!”라고 말하자, 돌아간 이후로 그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2001년 4월 짼쌍장에 “전화기지”(转化基地)를 건립했고, 또 가을에는 긴 집 한 채를 지어, 전문적으로 대법제자들을 세뇌하고 박해하는 곳으로 썼으며, 농업 계통의 사람은 모두 이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하얼빈, 허우씽러웅(红兴隆), 보치왠링(宝泉岭), 솽야산(双鸭山), 베이안(北安) 각 농장의 많은 대법제자들도 모두 이 곳에 감금되었다. 어떤 사람은 네 다섯 번 불법감금 당했고, 지금까지도 놓아 주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2년 동안이나 감금되었다. 대법제자들은 단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번 박해를 배척했다.
대법제자 짱서우펀(张守芬)은 2000년 9월에 베이징에 가서 정법을 했다는 이유로, 2년 판결을 받았고, 감금기간이 지났음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동수들과 함께 세뇌반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일년이 넘어서야 그를 놔주었다.
턘보위(田宝玉)와 쓰멍잉(石孟英)은 99년 10월에 베이징으로 정법하러 갔다가 돌아온 후 2년 판결을 받아 쟈므스 노동 교양소에 보내졌고, 기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 감금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또 3년 판결을 내려 쒜이화(绥化) 노동교양소에 보냈고,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화이쩌웅(余怀忠)은 치씽(七星)농장 무장부(武装部) 대법제자이며, 또한 지역의 무장부 부장이고, 마을 사람들이 공인하는 좋은 사람이지만, 8개월 동안 감금을 당한 후 일년 판결을 받아 쒜이화(绥化) 노동교양소에서 기간을 마친 후에 또 3년 판결을 받아, 지금까지 쒜이화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깊이 체험했다. 오직 정념정행한다면, 꼭 사악을 제거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부님이 우리들의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꼭 반석과 같이 견고하고 금강부동(金钢不动)한 대법제자가 되어야만이 사부님의 정법과 구도에 미안하지 않다.
문장완성: 2004년 3월 18일
문장발표: 2004년 3월 20일
문장갱신: 2004년 3월 20일 9:32:24 AM
문장분류: [정념정행]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3/20/7033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