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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정법대학(北京政法大学) 학생이 탄허(团河)강제노역소에서 받은 박해 경력을 폭로하다.(1)

글 /대륙대법제자 공 성희 (龚成喜)

【명혜망2004년1월30일】편주:대법제자 공성희 (남),25세 ,베이징시 정법대학 창핑시분원 행정관리 전업4학년 학생이며 원적 (原籍)은 신쟝 우루무치(新疆乌鲁木齐)시에 있다. 교내에서 학생회 주석 , 반장 등 직무를 맡고 있었으며 정직하고 선량하며 품성이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박해를 받고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공성희는 2000년 말에 베이징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잡혔는데 악명이 자자한 북경 탄허강제노역소에 잡혀 들어갔다. 두번이나 집훈대 (“集训队”) 에 끌려가 박해당하고 한번은 비합법적으로 10개월간 기한을 연장하였다. 2년동안의 박해 중에서 악경들은 여러가지 야만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으로, 서있게 벌을 주고 , 쪼그리고 엎드려 있게 하거나 전기충격기로 전기충격을 주고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등등의 갖은 혹형을 가하여 그로 하여금 신앙을 배반하게 하려고 하였다. 아울러 그를 노역소에서 집중적 세뇌 대상으로 정하였다. 2년동안 그는 정신상, 육체상에서 갖은 고통과 시달림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베이징탄허강제노역소에 잡혀간 중에서 제일 견정한 대법제자 중의 하나였다.

2003년 공성희는 정정당당하게 베이징탄허강제노역소에서 나왔다. 그해 8월에 불행하게 사악에게 틈을 타 다시 잡혔으며 현재까지 행방불명이다.

희망하건대 대법제자와 국제사회에서 공성희의 상황을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박해를 폭로하여 구원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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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었다. 청소년시대에 모진 아픔으로 절망 속에서 심신이 타버리는것만 같았다. 동년배에 비하여 더 심각하게 삶의 간고함을 체험하였고 정신상의 압력 또한 컸었다. 우울하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로 생활에 대한 신심을 잃어 버렸다. 98년에 파룬궁(法輪功)을 만나게 되였으며 재 빨리 수련을 하게 되였다.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기묘한 효과를 보았고 병고가 사라졌으며 전신이 영혼의 깊은 곳으로 부터 환골탈태 ( 脱胎换骨) 하여 점차 건강해지고 활기가 있었다. 眞善忍(진선인)의 원칙에 따라 함으로서 학교, 사람과의 관계 , 개인 수양 , 심리소질 등 다방면에서 커다란 개변을 가져왔으며 선생님과 동학들의 절찬을 받았다.

파룬궁은 나에게 참되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친척 , 친우들의 시름을 덜어 주었고 또한 내가 사회를 위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우수한 조건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99년 4.25후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파룬궁을 소개해 주면 안된다는 학교측의 통지를 받았고 학교에서의 일체 직무를 해임당하였다. 학교에 계속 남겠는가 아니면 수련을 선택하겠는가 하는 비합법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나의 정상적인 생활과 공부에 많은 시끄러움을 가져다 주었다.

99년 7.20 이후 우리와 같이 이렇게 진 ,선 ,인(眞善忍) “을 신앙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법을 지키는 많은 국민들이 하루밤 사이에 장쩌민 정치 망나니 집단에 의해 정부의 대립면으로 내세졌다. 국가공포주의 폭력적 수단으로 우리들을 ” 명예상에서 더럽히고 , 경제상에서 무너뜨리고 , 육체상에서 소멸” 하려고 하였다. 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의 생존조건이 극히 막대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많은 무고한 가정이 파산되고 사람이 죽었다.

99년 여름이 지난후 교단위(校团委)에서는 나의 부모님들을 신쟝에서 베이징으로 불러왔고 학업을 중단시키겠다고 하면서 부모님들을 핍박하여 파룬궁 수련을 포기한다는 보증서를 쓰게 하였다. 각종 아무런 도리도 없는 박해와 억울함 하에서, 나는 정부를 향하여 청원하고 호소하기로 선택한 즉 파룬궁에 대한 요언과 진압을 중지하고 또한 우리에게 연공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줄것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1999년 10월 말에 정부에 청원하러 가던 도중에 사복 경찰한테 잡혀서 천안문분국에 가게 되었으며 심문실에서 경찰은 강제로 나의 두팔을 뒤로 하여 수갑을 채웠으며 다리를 굽히고 벌을 서게 하였다. 고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엉덩이를 내리쳤다… …극심한 아픔 속에서, 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손목에 채운 수갑이 살 속으로 패여 들어갔다. 그날 저녁 학교에서 와서 나를 데려간 후 계당위 (系党委)와 교단위 (校团委)에서 나한테 압력을 가하여 내가 계속 국민청원 , 신앙자유 , 언론자유의 합법적인 권익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정부에 알리기 위하여 나는 부득이 떠돌아 다니게 되었으며 한달 후에 학교에 돌아 왔지만 핍박에 의해 1년간 휴학을 하였고 부친이 와서 나를 고향으로 데려갔다.

장(江)씨 정권이 전국적인 범위내에서 파룬궁을 소멸하는 공포적인 운동을 하였기에 고향에서도 파룬궁 수련자들이 판결을 받고, 강제노동 교양소에 보내지고, 전화를 도청당하고, 사람마다 태도를 표시해야만이 관을 넘으며 가족까지 연좌 (株连亲 属)되었다. 집 식구들은 공포 속에서 할수 없이 매우 편벽한 농촌에 있는 친척집으로 나를 보냈다. 그러나 거기의 환경도 매우 긴장하여 도처에서 사람을 붙잡아 친척들도 매일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2000년 7월 22일 나는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인 청원을 하여 경찰들에게 맞으면서 끌려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경찰들은 나의 머리를 잡고 폭행을 가하였다. 후에 나와 백여명의 수련자들은 다른 한 공안국으로 끌려갔다. 흉악한 악경들은 우리들을 핍박하여 사진을 찍고 손바닥 지문도 찍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 파룬궁 수련자들을 자료에 기록하여,` 믿음(信仰)을 견결히 신앙하는 수련자들을 전반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각종 방법을 취하여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일하지 못하게 하여 정상적인 사회왕래와 가정생활을 못하게 하려 하였다. 불법적으로 불법으로 구류소에, 정신병원, 노역소, 감옥에 가두어 고문형벌을 받게 하고 강도높은 육체노동과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게 하는 생존조건을 잃게 함으로서 그들더러 파룬궁수련을 포기 하도록 핍박하는 것이다. 그번에 나는 공안국에서 불법으로 48시간이나 갇혀 있었으나 아무런 법률적 절차나 수속이 없었다. 아울러 몇시간동안 벌을 서게 하였는데 거의 쓰러질 때까지 서있게 하였다. 저녁에는 침대도 없는 작은 감방에 가두고 잠을 자지도 못하게 하였다. 연공은 더구나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며 혹독한 매질을 당하게 된다.

2000년 9월 휴학기한이 다가오자 부모님들은 나를 학교에 보냈다. 학교측에서는 내가 “복학신청서”에 “평화적인 청원은 죄가 없다”라고 썼기에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질질 끌면서 복학시켜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부모님으로 부터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한 화목한 가정이 정의와 양지에 대한 무법천지의 박해로 평온함을 잃어버렸다. 부모님은 장쩌민에게 시비를 가릴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자기 집안의 순간의 안일을 찾고자 모든 원한을 나한테 분풀이 하였다. 나를 핍박하여 양심을 팔아먹게 하였다. 이러한 비극이 그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도처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일이었다. 잔혹하고 계통적인 국가공포주의의 탄압 하에 무수한 가정이 파괴되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집을 떠나 떠돌아 다녔다.

2000년 10월, 나는 부모님과 함께 천안문에 놀러 갔는데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기 전에 경찰은 부모님을 핍박하여 파룬궁을 욕하게 하고서야 올라 가게 하였다.

2000년 12월20일, 본인은 베이징대학 분교에서 평화적으로 파룬궁 진상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학교 내의 7,8명 보위일군에게 발각되어 사람들 앞에서 한바탕 구타당하고 베이징 창핑공안국 구치소에 끌려갔다. 가서 이틀만에 그곳에 있는 범죄자로 부터 맞아서 다리가 부었는데 한달동안이나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하였다. 같은 감방에 있던 다른 수련자는 늘 그들한테 옷을 벗기었으며 변태적인 몇몇 범인들은 치솔을 그의 항문에다 밀어넣으며 즐거워하였다. 늘 여러가지 변태적인 수단으로 그를 모욕하고 있었다.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있는 기간, 낮에는 오래동안 쪽걸상에 앉아 있게 하고 저녁에는 추워서 잠잘 수가 없었다. 한달 동안이나 씻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불공정한 대우 하에 나는 단식으로 항의하였다. 3일후 경찰은 강제로 나한테 음식물을 투입하였다. 그들은 범죄자를 시켜 나를 땅에서 몇십미터를 끌어갔는데 두팔이 몽땅 빠지는것 같았다. 신도 벗겨져 버렸다. 찬 바람이 들어오는 문 입구까지 가서야 나를 바닥에 넘어뜨려 눌렀고 다른 경찰이 와서 “꽂아넣어 죽여버리겠다”고 욕설을 퍼부며 코안에다 고무호스를 꽂아넣었다. 강제로 우유에다 물을 타거나 죽 한사발을 투입하고는 재빨리 고무호스를 빼내어 코막이 아주 큰 자극을 받는다. 어떠한 소독 시설이나 필요한 간호가 없었고 심지어는 범죄자들도 도와서 음식을 투입할 수 있었다. 한번은 같은 방에 있는 수련생이 단식을 하게 되었다. 그를 땅에 눕혀놓고 고무호스를 코구멍에 꽂으려고 하자 그가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된다”고 하였고 ” 경찰은 구두발로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걷어차서 눈섭뼈 근처가 오래동안 멍이 들었다.……

거기에서 우리들은 평화적 항의방식인 단식을 야만스럽게 박탈당하였다. 또한 더욱 심한 음식물주입의 괴롭힘을 당하였다. 십여일이 지난 후 나를 본 사람들은 내가 엄중하게 탈상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때 나는 숨을 쉬고 있는것 외에 거의 아무런 힘도 없었으며 신체가 극도록 허약해졌다. 이 모든것을 경찰들은 감시기를 통하여 똑똑히 보았을 것이지만 나를 계속 매일 장시간 동안 쪽걸상에 앉아있게 하였다. 저녁에는 찬바람이 불어치는 문입구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게 하였으며 다리를 펼 수도 없었고 뒤돌아 누울 수도 없었다.

(계속)

문장완성:2004-1-29 투고:2004-1-30 수개:2004-1-30 12:39:06 PM

문장분류:[박해진상]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30/66121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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