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해외대법제자
[명혜망2004년1월30일] 명혜망에 올라오는 문장의 형성과 유통과정은 전세계 대법제자들, 특히 대륙대법제자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명혜망이 정법수련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대륙의 인터넷 접속지, 자료팀의 형성, 명혜에 보낼 자료수집, 소식 전달, 글 작성, 그 다음 명혜편집부의 작업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각종 명혜망에서 발표된 문장(특히 대법제자들의 법에 대한 인식과, 3가지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한 문장)을 광범위하게 각 지역 대법제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 명혜의 문장 자료를 편집하여 대량 인쇄해서 각 지역 사람들의 손에 전달되기까지의 이 과정에는 알려지지 않은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대륙의 제자들이 그 고난스러운 환경과 어려운 형편에서도 묵묵히 명혜망의 정보 채널을 열어가고, 보호하고, 넓혀가고 있었는가? 우리 해외제자들은 그들의 노력과 감당에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오늘 나는 이 자리를 빌어 3명의 대륙 수련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왕찬(王潺): 원래 직장은 북경에 있었으나 99년 탄압이 시작되자 집을 떠나 산동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주동적으로 명혜의 일을 참여하였고 또 다른 지역의 대법제자들도 이끌어 같이 하고 있었다. 짧은 몇 년 동안 대륙의 수많은 지역에 그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대륙의 명혜에 협조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 협조인의 배역은 자연히 맡게 된 것이고 그가 수련해낸 경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히 그의 주변에 응집하게 되었다. 명혜망을 열어가고 정보 채널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명혜의 문장과 자료를 널리 전하고 또한 사람들을 이끌어 정진하고 제고하는 면에서 왕찬의 작용은 정말 컸다.
위안장(袁江): 칭화(清華)대학 교우(校友), 95년 간수성 보도소 소장이다. 99년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현지 수련자들이 정법에 합류할 수 있도록 주동적으로 이끌어 주면서 또한 명혜에 협조하는 수련자로서 많은 중요한 작업을 하였다. 그는 명혜의 정보관련 일을 맡으면서 명혜의 법인식 교류에 관한 좋은 문장을 이용하여 그 지역 동수들의 수련제고와 기타 면에서 수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중민(李忠民): 수련에 있어서 아주 확고하였으며, 여러 차례 붙잡혀 감금되어 구타를 당했지만 모두 정념으로 악마의 소굴에서 빠져 나왔다. 사악들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후에 유랑생활을 하면서 묵묵히 정법제자로서의 3가지 일을 하고 있었고 명혜의 대륙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리중민은 자료기지의 가동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수련과 진상에 대해서도 아주 정진하는 제자였다. 주변에 있는 동수들은 그의 활동에 감탄하면서 또 그로 인해 정(正)의로운 응집력이 형성되었다.
아래는 현재 공개할 수 있는 이 3명 동수의 부분적 사적(事蹟,자취)들이다. (박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기에 기타 대륙 동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서는 명혜의 구체적 작업을 세세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1. 왕찬(王潺)
왕찬, 남, 39세, 키 178cm. 산동출생, 산동 공과 대학 졸업(산동 대학의 전신). 생전에 북경에서 직장을 다녔고 중국 은행 본점 청산 총센타에서 근무했다. 본점에서는 그를 첨단기술 간부로 발탁하였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그는 업무에 있어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고, 직장에서는 그를 캐나다로 파견한 적도 있었다.
왕찬은 중국 국민들을 향하여 진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대륙 대법제자에 속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고 많은 동수들을 이끌고 진상 작업을 펼쳤다.
1999년 사악의 탄압이 시작되자 왕찬은 바로 법륜대법(法輪大法)의 진상을 우편으로 전국 각 성과, 시 정부에 보내 강렬한 작용을 일으켰다. 그는 또한 당시 국가 주석인 장쩌민(江澤民)에게 범죄행위를 중단 하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진실 앞에서 쟝쩌민(江澤民)은 벼랑 끝에서 빨리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화가 치밀어 친히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왕찬이 3개월의 징역을 받게 하였다.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왕찬은 할 수 없이 직장을 떠나 장기간 유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성실하며, 언변이 좋고 언제나 제일 좋을 것을 다른 이에게 남겨 주곤 하였다. 3년을 유랑 생활하는 동안 왕찬은 많은 곳을 다니면서 많은 자료처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다른 동수들이 법에서 제고하게끔 도와주고 많은 동수들을 이끌고 정법속에 뛰어 들게 하였다.
대륙 동수의 기억에 의하면 왕찬에게는 6개의 큰 가방이 있었는데 왕찬은 그것들을 둘러메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하면서 중국의 방방곡곡을 돌았다고 한다. 본인이 저축한 20만원(한화 약3200만원 정도)도 모두 진상을 하는데 썼으며, 그는 그 돈으로 5대의 복사기와 5대의 컴퓨터, 프린터기를 사가지고 가는 곳 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의 자취를 깊숙이 남겼다고 한다.
대륙의 불법적인 관리들에게 왕찬은 밉고도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한때는 1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서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사악의 체포를 피해서 다니다 보니 왕찬의 체중은 하루하루 감소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미치듯이 날뛰던 사악의 단속도 그의 대법에 대한 마음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의 진상을 막지 못하였다. 왕찬은 동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악이 어떻게 박해할 지라도 우리는 변함없이 사부님의 요구대로 할 것이다.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8월21일 오후 왕찬은 산동 양산진 터미널에서 제녕(濟寧) 악경 궈훙타오(郭洪濤)가 데리고 온 사람에게 불법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악경들의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왕찬을 때리고 발로 차고, 고무 몽둥이로 폭행하고, 두 손을 뒤로 높이 쳐들어 수갑을 채우는 등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악경들은 왕찬을 불법으로 제녕 교도소에 감금시키고, 왕찬의 진짜 신분을 알아내고는 치욕스럽게도 60여세 되는 어머니까지 납치하였다.
소식에 따르면 왕찬이 불법 체포되기 전에 공안 내부에서는 이미 왕찬을 기한 내 체포하라는 명령이 하달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안에서는 전담요원들을 파견하여 왕찬의 고향인 산동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매복하고 있었다.
왕찬은 불행하게도 체포되었고 악경들은 특진하고 횡재 기회를 잡았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특히 악경 궈훙타오(郭洪濤)는 있는 힘을 다해 날뛰었다. 그는 제녕 교도소에서 길길이 날 뛰면서 며칠째 잠도 못 자게 하는,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술책으로 왕찬을 연속 심문하였다. 왕찬은 대법이 부여한 금강(金剛) 같은 의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악경들은 극악 무도한 형벌로 그를 박해하였다.
2003년 8월28일 왕찬은 제녕 교도소에서 궈훙타오(郭洪濤)등 악경들에게 심문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왕찬의 시신에는 머리의 중상으로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 사망의 집적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왕찬이 사망한 후 공안국과 “610”사무실은 가족들에게 상부에 상고하지 말라고 위협을 주었고 만약 상고할 경우, 두 동생들의 직업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찬이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현지 사악한 것들에 의해 강제로 화장되었다.
2, 위안장(袁江)의 생전의 부분 발자취
교사집안에서 태어난 위안장(袁江)은 아버지가 서북 사범대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모 학교의 책임자급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위안장(袁江) 본인도 1995년7월에 칭화(清華)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에 법을 얻은 위안장(袁江)은 칭화(清華)대에서 가장 일찍이 법을 얻은 수련자에 속했다. 졸업하고는 간수에 돌아가 간쑤성(甘肅省) 보도소 참장이 되었고 란주시(蘭州市) 통신국에 속한 정보 기술 공정(工程)회사의 부사장으로 있었다. 2001년 11월9일 간쑤(甘肃)경찰에게 박해받아 치사당했을 때 위안장(袁江)은 겨우 29세였다.
법을 얻기 전에 위안장(袁江)은 많은 병을 앓았으며 병으로 1년 동안 휴학한 적도 있었다. 93년 그는 모두 4차례에 걸쳐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했고 그때부터 신체는 크게 변하였다. 1994년 8월 위안장(袁江)은 칭화(清華)대학의 초기 몇몇 수련자중의 한 명이었다. 그때 그는 매일 법학습과 법암기를 견지하였고 반복적으로 법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위안장(袁江)과 초기 칭화(清華)대 제자들이 법학습과 연공을 강화했던 시기는, 이후 대법이 칭화(清華)대와 주변지역에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양호한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었다.
지금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칭화(清華)대 동문은 그때를 기억하며 1995년 1월4일 사부님께서 ≪전법륜≫의 출판식에서 설법을 하실 때 북경의 제자들이 너무 많아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칭화(清華)대 연공장은 입장권을 몇 장 밖에 얻지 못했는데 위안장(袁江)도 한 장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을 얻은 지 얼마 안 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사부님을 직접 뵙게 되면 수련함에 있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위안장(袁江)의 생각에, 두 사람은 한 장 밖에 없는 입장권을 가지고 사부님이 설법하는 장소인 공안 대학의 강당에 같이 갔다고 한다. 친구에게 표를 양보하고 나서 들어갈 수 없게 된 위안장(袁江)은 강당 밖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강당에 들어갈 기회가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위안장(袁江)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하나하나 자기의 행동으로 대법의 도덕적 힘을 실증(證實)하고 있었다.
늘 웃는 모습이었던 위안장(袁江)은 그를 본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95년 7월 졸업 후 그는 란주에 돌아가 현지와 그 주변지역에서 대법을 전파하고 널리 알렸다. 그때 본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위안장(袁江)은 매일 아침 서북(西北) 사범대학의 넓은 운동장에서 연공을 하였는데 오랫동안 단지 현수막 하나를 내걸고 혼자서 연공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로 계속 견지하였고 1, 2년 사이 란주시는 수련자수가 수만에 달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대법이 간수와 서북지역에서 급속도로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위안장(袁江)이 묵묵히 노력한 결과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위안장(袁江)이 세상을 떠난 후, 대륙제자의 기억(回憶)에 따르면, 위안장(袁江)은 생전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 학습을 잘해야 한다.”에 따라 장기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단체 법학습 모임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그때 연공장에서는 매일 법학습과 연공을 같이 하였다. 위안장(袁江)은 시간만 되면 적극적으로 단체 법 학습과 연공을 같이 했다고 한다. 퇴근이 늦어질 때면 언제나 빵을 사 들고 학습모임으로 달려온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신수련생이 ≪전법륜≫이 없다는 전화나 전달만 받으면 어떤 경우든지 방법을 써서 꼭 대법책을 구해준다고 한다. 그는 법 학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매일 출근하는 그는 업무 시간외에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매일 4,5시간의 법 학습을 견지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 동수들은 그를 따라 시간을 다그쳐 학습을 하게 됨으로써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는 (比學比修)” 환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98년 7월 “≪간보≫사건”이 있었을 때 그는 수련자의 선과 자비로 유관 사람들의 人性과 직업도덕을 깨우쳐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법 수련자에게 사과 편지를 쓰게 한 적도 있었다.
98년과 99년은 서북 지역에서 법을 얻은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대법서적,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위안장(袁江)은 언제나 가기의 월급으로 책을 먼저 구입하여 여기 저기 보내주곤 하였다.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도 마찬가지로 구입하는 데로 공급이 되지 않아 자기의 저축금을 사용하여 수백부의 연공 비디오를 사서 녹화하여 하나하나 보내주었다고 한다. 매번 새로운 연공장이 생길 때면 그는 언제나 자기가 비용을 부담하여 비디오방을 빌려 사부님 설법을 틀어주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기의 식대비 마저도 챙기기가 어려웠다.
95년부터 99년 사이에 위안장(袁江)은 무더운 여름 날씨이든 추운 겨울이든 세찬 바람이 불거나 비가 억수 같이 내려도, 연공장을 한차례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99년 4.25일 후에도 악경이 뒤를 따르고 경찰이 에워싸고 감시해도 위안장(袁江)은 여전히 사람들과 앉아 교류하고 학습했다. 그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도 마음을 내려놓고 안정을 찾았다. 위안장(袁江)은 자주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데 무엇이 무서우랴” 라고 말했다고 한다.
99년 7.20일 전, 좋지 않은 기세가 몰려오고 검은 구름이 뒤 덮일 때 성 안팎은 여러 차례의 매스컴 조작과 대법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시에 많은 연공장들이 충격과 교란을 받고 수련자는 욕을 먹고 현수막과 서적은 몰수당했다. 위안장(袁江) 역시 내부적으로 직장의 압력을 받았고 공안의 위협도 있었지만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와 한번 또 한번 수련자대표로 당정 부문에 청원하러 가고 담화를 요청했다.
위안장(袁江)은 착하고 점잖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간주시 통신국에 속한 정보기술공정 회사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99년 탄압이 시작되고 수련을 포기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직 되어서 기술 총감독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통신국에서 인정받는 직원으로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직장의 주요 기술자였고 중간 간부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그의 나이와 학력, 재능, 인품을 놓고 볼 때 위안장(袁江)은 속인사회에서 금방 승진하여 큰 성공을 거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2001년 1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게 된 위안장(袁江)은 자기의 학식이나 기술로서 돈을 벌지 않고, 끼니를 거르며 방방곡곡과 변강(邊疆) 내륙을 다니면서 대법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소리 없이 묵묵히 일을 하였다. 말이 없는 그는 자주 “할 수 있음이 수련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2001년 9월30일 위안장(袁江)은 간수성 돈황(敦煌) 부근에서 붙잡히게 되었다. 출퇴근 차에서 신분증이 없어서 잡히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내부 소식에 의하면, 당시 북경 공안국에는 밀령이 있었는데, 열 몇 명의 장춘 대법제자가 하서(河西) 통로를 거쳐 신강으로 가니 길마다 엄격히 조사하고 체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위안장(袁江)이 잡히고 나자 간수성 공안청의 사악한 자들과 깡패들은 신속히 집합하여 형벌 도구만 두 차례 싣고 왔다고 한다.
위안장(袁江)은 간수성의 책임자와 그 지역의 명혜를 협조해 주는 사람으로서 많을 일을 알고 있었다. 잡히고 나서 그가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그 잔혹한 과정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위안장(袁江)은 그 마굴에서 고문으로 근 2개월이나 생사의 변두리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사악한 무리들은 모든 형구(刑具)를 다 사용하였다. 그들은 위안장(袁江)을 “大”자 모양으로 매달아놓고 거리낌 없이 가혹한 폭행을 가하였고 마지막에 위독하게 되자, 그를 내려놓고도 여전히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게 하였다.
위안장(袁江)은 이미 사악을 구도 해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강한 정념으로 스스로 수갑과 족쇄를 풀어헤치고 그 마굴을 뛰쳐나갔다. 그때가 약 10월26일쯤 이었다.
장기간 사악에게 잔혹한 박해를 받은 그는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고 오래 동안 또 단식을 했기에 몸이 극도로 허약해 졌다. 위안장(袁江)은 어렵게 마굴에서 빠져 나와 얼마 걷지 못하고 체력을 지탱하지 못해 산굴에 들어갔다. 10월말 서북 날씨에 위안장(袁江)은 이 산굴에서 나흘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산 밖에는 사악이 2,3천의 군대 경찰을 동원하여 란주시의 각 교통 요지와 버스역에서 검문을 실시하였고 거의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 집을 불법적으로 수색하였으며 이는 기타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어떤 수련자의 집은 문이 부셔졌고 심지어 60여세 되는 한 수련자는 어쩔 수 없이 4층에서 뛰어 내려 허리와 다리가 다쳤다고 한다.
후에 위안장(袁江)은 강인하게 산굴에서 기어 나와 어떤 수련자 집에 찾아갔다. 그는 거기에서 11월9일 까지 버텼지만 끝내 여러 군데의 내상(內傷)이 도져 치료를 받지 못하여 생명을 잃었다.
후에 그 지역의 수련자가 마굴에서 나온 위안장(袁江)의 상태를 본 것을 기억하며 쓰기를, “당신은 이미 너무 말라 뼈밖에 남지 않아 거의 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다른 수련생이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나는 여기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이다.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때 나의 머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눈물은 쏟아지고 마음은 조각조각 찢어지듯 했고 겨우 비통을 참으며 당신의 이마를 만져보았지만 이미 이마는 차가워 졌고 조금 굳어있는 손도 흔들어 보고 또 당신의 다리를 보았는데 나는 거의 쓰러질 뻔 했다. 당신의 왼쪽 무릎 이하는 거의 검은 색에 가까웠고 장단지에 손 하나 크기, 왼 발에도 손가락 하나 크기의 면적에 모두 살가죽이 없었다. 그의 한쪽 다리 전체는 말라 오그라든 나뭇가지 같았다…”
위안장(袁江)이 목숨을 잃고 나서 공안은 바로 대대적으로 수색을 개시하여 위안장(袁江)을 보호해 주고 도움을 준 많은 동수들을 연이어 붙잡았다. 그의 부모도 엄밀한 감시를 받았다.
위안장(袁江)이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난 후, 사악한 무리들은 죄상을 덮기 위하여 박해를 가해온 깡패들을 원래 있던 곳에서 옮기고 또 전문 사람을 파견하여 위안장(袁江)이 있던 쓰얼거우(寺兒溝) 교도소에 가서 거기의 범인들을 위협하며: “위안장(袁江)은 여기에 수감된 적이 없다. 누가 말만 꺼내면…” 정말 “눈감고 아웅하기” 이다.
위안장(袁江)의 더욱 많은 박해 사실은 법정인간 시기 흉수들이 심판받기 전에 반드시 그 만행에 대해 밝혀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명확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좋은 동수 위안장(袁江)은 금강부동(金剛不動)하게 잘 견뎌냈다. 그는 수련생을 배신하지 않고 사부님과 맺은 서약도 어기지 않았다.
2001년 9월30일 간수성 돈황(敦煌) 부근에서 체포되면서부터 2001년 11월9일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겪은 위안장(袁江)의 그 고난(苦難)과 고초는 어느 날인가는 꼭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위안장(袁江)을 박해한 흉수(兇手)들은 어서 빨리 공(功)으로 죄를 씻지 않는다면 필연코 법률과 하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다음에 연속)
(2004년 1월19일 법회 발언고)
문장완성: 2004년 1월 18일
문장발표: 2004년 1월 30일
문장갱신: 2004년 1월 30일
문장분류: [호법역정]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1/30/6572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