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산동대법제자
[명혜망]우리 시집의 온 가족은 1996년 하반기에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해 여러 가지로 이득을 참 많이 보았다.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이런 정신과 신체의 변화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좋은 공법이 1999년 4월부터 교란과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직 연공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진(鎭)(향鄕과 함께 현 아래의 행정단위)소속의 정부 관리들이 줄줄이 우리집에 드나들면서 법륜공 수련을 못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수련해서는 안 된다는 그 어떤 이유도 대지 못하고 오직“정부가 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진(鎭)위원회에 속해 있는 3명과 파출소의 경찰 3명이 우리집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아 온 종일 들랑날랑하여 조용할 새가 없었다.
아침에 연공하러 사람들이 우리집에 오기만 하면그들은 안팎으로 감시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7월 19일까지 지속되었다. 어느날 친정집에서 막 잠자리에 누웠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직장에서 찾는다며 나를 부르러 온 것이다. 대충 옷을 입고 직장으로 달려가 보니(그때 나는 이미 임신 6개월이었다.) 진(鎭)위원회 소속의 두 사람은 나에게 빨리 시집에 한번 가보라고 하였다. 시집에 도착하여 보니 대문은 땅바닥에 넘어뜨려져 있고 시어머니는 집안에서 두려워 울고만 있었다. 시아버지, 시숙, 형님 3명은 모두 진(鎭)에 붙잡혀 가고 집에는 시어머니, 아가씨, 그리고 시숙의 두 아이만 남아 있었다. 시숙의 집과 우리집은 전부 진(鎭)정부의 관리와 파출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담을 넘어서 들어왔거나 아니면 대문을 넘어뜨리고 그 위로 짓밟고 들어온 것이다.
시어머니는 겁에 질려 도난 방지문을 잠가 놓고 집안에서 놀라 벌벌 떨고 있었다. 금방 시어머니를 좀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그때 계획생육 사무실 주임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짓밟고 들어왔다. 그들은 손을 높게 들고는 우리에게 법륜공을 비판하라고 외쳐댔다. 내가 보니 그 모양은 마치 영화나 TV에서 나온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행동 같았다.
이런 처지를 지켜보던 직장 상사는 나를 데리고 직장에 가서 좀 피해 있어야겠다고 하였다. 후에 진위원회는 나의 상사와 몇 명의 동료들에게 자기들과 같이우리집 문 앞에서 시어머니를 감시하라고 강압적으로 시켰다. 그리고 7월 25일이 되어서야 친정 오빠의 요구로 나를 친정집에 데리고 갔다. 직장에서는 매일 두명의 동료들을 파견하여 나와 같이 있게 하였다(사실은 감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7월 26일 남편은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해서 (문앞에는 항상 차가 지키고 있었다) 나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친정집에 찾아왔다. 조금 지나 교육 위원회 소속 위원 3명이 쳐들어와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동안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1500원을 강탈해 갔다. 학교에 돌아와서도 교육위원회는 우리 가족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생활비라며 나한테 영수증도 주지 않고 300원을 받아갔다. 그리고 시숙, 형님, 시아버지도 모두 “벌금”을 받아 내고서야 집으로 보냈다. 시숙 5000원, 형님 60원, 시아버지 60원씩 벌금을 물렸다. 이번에 진정부와 파출소의 사람들이 우리집에 대한 박해 과정은 다음과 같다.:낮에는 포카놀음을 하고, 잠자고, 밤에는 차문을 두드리고 경적을 누르며 사람을 아주 놀라게 만든다. 7.20이후 나는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잃게 되었다.
1999년12월27일 우리 가족 6명은 법륜공을 수련하고 나서 여러 가지 혜택을 본 사실을 설명하려고 헌법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인 청원권을 행사하러 북경에 갔다. 목적은 그곳에 있는 정부 관리들에게 사실 정황을 밝히러 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인가?
1, 우리 남편이 박해받은 과정
북경 천안문 악경들은 우리남편을 (그림모양)그런 모양으로 된 기구로 뺨을 때려 얼굴이 온통 퍼렇게 멍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커멓게 멍든 두 눈도 부어 올라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고 입도 벌리지 못했다. 후에 북경주재 사무실에 송치되어 불법 감금돼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그들에게 똘똘 말은 종이로 얼굴을 맞았고 여자 동수와 같이 수갑 하나를 채우는 바람에 앉지도 못하고 절반은 구부린 상태로 계속 서있기도 하였다. 물도 밥도 주지 않는데다가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 거기서 그는 나이 든 수련생이 악경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교도소에서 한달 동안 불법 감금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게 하고 죄수들의 속옷과 양말까지도 빨아 줘야 했으며 얻어맞기까지 하였다. 그는 또 방자(坊子)교도소에서는 수련자에게 대소변을 먹으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겨우 양력 22일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또 직장에 불법으로 연말까지 갇혀 있어야 했다. 직장 주임은 문 앞에 지키는 사람에게 하루에 찐빵 하나만 주고 대소변은 방안에서 보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하루에 찐빵 하나 가지고 어떻게 해요. 3개는 줘야 해요.”하고 문을 지키는 사람이 말했다. 그후 남편은 집에서 설만 쇠고 정월 초사흗날에 또 직장에 갇혀 들어갔다.
2000년 양회(兩會)기간에는 그를 직장내의 단칸방에 가두어 놓고 돌아가면서 감시하게 하였다.
2000년 양력 2월 저의 남편, 시어머니, 시숙, 형님은 모두 鎭사법소에 붙잡혀 가 거기에서 많은 구타를 당하였다. 형님은 한 달이 지나서도 회복이 되지 않아 화장실도 부축하여 가야할 형편이었고, 시숙은 적어도 작은 다리에 여러군데 딴딴한 응어리가 생겼다. 우리 남편도 손에 상처를 입어 몇 개월만에 회복되었다.
그때 내 아이는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3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한 내가 젖이 없어 아기는 울기만 했다. 사흘째 되던 날 진 위원회는 우리 아기가 얼굴이 퍼렇게 변색하고 머리가 힘이 없이 처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이 애기 큰일 나게 생겼어. 어서 빨리”하면서 나를 친정집에 데려다 주었다.
2000년 3월 남편과 형님은 또 불법으로 구류 15일에 처해졌고 그들에게 중노동을 강요당했다(짐지기,쌀뒤집기,밀 갈기). 4 월초에 그들은 교도소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그런데 사법소와 직장에서는 또 그들을 여러 차례 불법으로 감금해 놓았다.
출근한 후에는 남편에게 화초에 물주기나, 집수리, 길닦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만 시키면서 월급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2)나는 진정하게 수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부님의 책 ≪전법륜≫은 읽어 봤다. 우리 가족의 화목과 신체건강의 회복을 통하여 나는 대법이 모함과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1999년 12월 27일 태어난 지 30일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기어코 북경 신방(信訪)국에 청원하러 떠났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연공을 배우지 않았지만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신방국은 내가 상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신방국 밖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꽉 차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들이 청원하러 온 사람들인 것으로 착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고 그 흉악하게 생긴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파견되어 나온, 대법제자를 잡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뜨문뜨문 한쪽에서 맞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나를 끌고 차가 있는 쪽으로 갔다. 차에 오르자 어떤 젊은이 두 명이 가까이 오더니 나의 주머니를 뒤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의 바깥 주머니에 있는 돈 200원을 털어 갔다. 그중 한 명은 나의 얼굴에 손까지 댔다. 그리고 나를 신방국 옆의 여관에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시(市) 신방국 사람들이 있었! ! 다. 그들은 겉으로 아주 잘 대하는 척하면서 연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지금 또 대법책을 보고 있다면서 “비싼 물건이 있으면 감춰 놓아요, 그들은 너무 못돼서 옷을 벗겨놓고 뒤져요.”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 감출 데가 없는 것 같아서 그에게 1990원과 ≪전법륜≫ 그리고 연공 음악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며 주소를 남겨놓고, 집에 돌아가서 보내 주겠다는 응답까지 받았다. 결국 집에 돌아온 뒤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알고 보니 이런 수단으로 돈을 사기치는 사람이었다. 밤에 파출소 부소장과 진의 부서기가 여관에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나와 애기를 북경 주재 사무실에 있는 나의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당시 남편은 진(鎭)에 있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얻어맞아 얼굴이 변형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본래의 지역에 데리고 와서 남편은 교도소에 가두어 놓고 나는 진(鎭)파출소에 보내졌다. 시어머니는 이미 거기에서 이틀동안 구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어머니와 남편은 같이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에 어떤 지역에서 붙잡혀 남편 혼자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어머니를! ? 컬茱?부근의 길 옆 난간에 수갑을 채워 놓고는 오고가는 행인들에게 치욕을 당하게 하였다.
후에 시집은 파출소의 강요하에 2000원의 벌금을 물게 되었고 “담보서”를 쓰고 나서야 나를 친정집에 데리고 가게 하였다. 그들은 또 시숙과 시어머니를 가두어 놓고 돈까지 강탈하려고 했는데 시숙은 설이 곧 돌아오는데 양식을 팔 돈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악경은 염치없게도 200원만 내놓으라고 하였다. 시숙은 결코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 둘은 석방되었다.
1999년 4월부터 우리집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남편은 이틀이 멀다 하고 붙잡혀 들어가고 나 혼자서 애를 보아야 했으며 생활비도 단절되어 시어머니와 형님은 채소시장에 나가 사람들이 버린 야채 잎파리를 주워 먹거나 산나물을 캐먹어야 했다.
후에 악인들의 끊임없는 교란과 체포 때문에 우리 부부는 한 살 갓 넘은 애를 내버려두고 할 수 없이 밖에서 떠돌아 다녀야 했다.
나는 전세계 정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이 잔혹한 망나니 집단을 제지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모두 마땅히 행복하고 화목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발표시간 : 3월22일
문장부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3/3/22/469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