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생명의 길(3)

5. 박해를 받다

2001년7월, 내가 졸업한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새벽 2시쯤,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 증명도 보여주지 않고 수색을 진행했다. 그 당시 나는 한 동수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악경들은 내가 가지고 다니는 대법 책과 녹음테이프자료, 그리고 두 묶음의 대법자료를 수색해냈다. 이번의 손실은 매우 컸는데 나의 전부의 대법 서적, 컴퓨터 두 대와 열 몇 개의 디스켓 ,백 장이 되는 CD, 열 몇 개의 테이프를 손실 보았다. 제일 가슴 아픈 것은 내가 꾸리고 있는 자료실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후에야 알았는데 나를 알고 있는 한 수련생이 체포된 후 박해에 못 견뎌서 나를 고발한 것이었다.

경찰은 대량의 “증거”를 수색해 냈기에 나를 파출소로 잡아갔다. 그들은 아주 큰 “자료실”을 수색해 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를 엄격하게 심문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성(省)정부까지 떠들썩했다고 했다. 악경은 누구하고 연락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 그들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옷을 다 벗기고 전기몽둥이로 치고 비닐주머니를 나의 머리에다 씌워서 호흡하지 못하게 했는데 수단이 아주 악렬했다. 나는 그들한테 이것은 억지로 죄를 승인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는 때리고 한 편으로는 흉악하게”누가 너를 때렸나?!누가 억지로 죄를 승인하게 했나?!누가 봤나?!”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날 때려죽인다 해도 말하지 않겠다. 나중에 그들은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는 나갔다.

나는 자료실의 다른 두 동수도 동시에 체포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컴퓨터, 스캐너 등 기계도 손실 보았다. 그들도 역시 그 수련생이 고백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파출소에서 하루 이틀 밤이나 갇혔는데 그 기간에 밥도 못 먹고 물 한 방울 못 마셨다. 이튿날 아침, 악경들은 체포영장을 가지고 와서, 우리한테”너희들은 아직 마지막으로 기회가 한번 있는데 TV프로그램 제작을 도와주거나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법륜공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니, 그들은 우리를 구치소에 보냈다.

구치소에 있는 관리원과 죄인들은 우리가 모모 대학의 학생인데 법륜공을 수련하다가 체포된 것을 알고는 매우 놀라하고 아쉬워했다. 한 관리원이 나를 심문할 때, 나는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는 본래 내향적인 성격이라서 말하기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는 말을 아주 잘 해 보였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얘기했는데 그는 손에 든 기록 책에 한글자도 쓰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는 한숨을 쉬더니 “지금 국가가 이런 거야, 너희들의 일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네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라고 말한 다음에 나를 보냈다.

구치소의 조건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십몇 평(역자주: 한국의 계산방법으로는 몇평)밖에 안 되는 작은 방안에 30여명을 가두고 있었는데 먹고 마시고 대소변 보고 잠자고 하는 것을 모두 한데서했다. 저녁에 잘 때는 반장 등 힘센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몸을 옆으로 누워서 자야 했다. 이전에 나는 인터넷에서만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매일 저녁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고, 더워서 잠을 못 잤다. 이때의 심정은 구치소에 가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먹는 것은 더 형편없었다. 매일 두 번밖에 먹지 못했는데, 한 끼에 굵은 강냉이로 만든 작은 떡 한 개에다, 매 두 사람한테 작은 그릇에다 채소국(소금물이나 다름없는)을 주었다. 배불리 먹기는커녕, 두 번 합쳐도 배를 불리기 힘들었다.

나는 범인들한테도 진상을 알렸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한테 “법륜대법이 좋다”란 것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범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미 법륜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전에 들어왔던 많은 대법제자들이 대법을 실증했던 것이다.

그 기간에 나는 또 두 번이나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직도 나보고 다른 수련생을 대라고 했지만, 나는 한 사람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나를 위협했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의 정념이 강할 때면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전화번호 책과 호출기를 그들이 수색할 때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많은 동수들과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있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날마다 발정념해서 사부님께 도움을 구했다. 후에 내가 발견했는데 악경들은 그것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고, 또 나의 호출기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 알았는데 그들은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체포될 당시에 나는 악경이 제일 먼저 빼앗아 간 것이 나의 호출기였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보호해 준 것이 틀림없다.

나중에 우리는 불법으로 노동교양 일년을 판결받아, 전문 불법으로 법륜공 제자를 가두는 이른바 센터에 보내졌다. 나는 이번 일이 발생한 원인을 상세하게 찾아보았다. 비록 우리 자료실의 세 사람은 동시에 체포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악경들은 나와 다른 두 동수의 관계를 몰랐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안전하게 연락하는 조치를 실행하는 것과 인터넷 기술방면은 모두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심성상의 원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법공부와 연공 각 방면의 문제를 모두 고려했기에 비록 좀 복잡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빈틈은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원인일까? 나는 오래도록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나의 일사일념을 자세하게 찾아보았다 “설사 내가 체포되고 맞더라도, 나는……….”문제가 바로 이“설사”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확실히 아주 큰 정도로 사악의 박해를 묵인하면서 근본상에서 사악을 제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어떤 행위는 완전히 대법에 있지 않았다. 희망하건대 지금 대법 일을 하는 동수여러분들은 이점을 주의를 하기 바란다.

명혜망에서는 매일마다 노동수용소에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글을 적지 않게 올리고 있는데, 그것은 확실히 진실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우리는 엄밀한 감시를 받았는데, “포협(包夾)”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두 명 혹은 세 명의 죄인이 한 법륜공 제자를 감시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하든 모두 뒤따라 다니며, 밤에 화장실 갈 때에도 자기의 “포협”을 불러서 함께 가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줬다. 대법제자는 누구와도 이야기 못하며, 매일 앉아 있지 않으면 일을 해야 했다. 노동수용소에서 일할 때, 관리원은 우리를 전혀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힘든 중노동이었지만 휴식이 아주 적었으며, 항상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노동수용소에서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고향에서 나를 보러 왔다.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못해본 내가 이렇게 많은 억울함을 당한 후에 친인을 만나게 되니, 진정으로 인생의 다른 일종의 심정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눈물을 삼키고, 아버지한테 웃으며 “나는 괜찮아요, 아버지 어머니는 몸조심하세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때 아버지는 벌써 몇 달째 몸을 앓아서 한 달 동안이나 링거주사를 맞으면서도 주사바늘이 뽑기 바쁘게 열차를 타고 여기에 달려왔던 것이다. 불쌍한 부모님의 마음이여!!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갈 때에 나에게 200원이나 남겨주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른 죄인한테 100원을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불, 옷도 모두다 빼앗아 갔다. 다른 대법제자들이 묵묵히 도와주었기에 나는 많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노동수용소의 생활은 고독하여 참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사악으로 가득했다. 그 고통은 한 두마디로 상세하게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죄인들은 법륜공 제자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많은 죄인들은 대법제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대법제자의 고상한 품성과 사심이 없이 남을 위하는 경지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환경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사악은 여전히 미친듯이 날뛰었다. 특히 2002년 4월, 강씨 집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법을 “반혁명조직“으로 정했다. 상급에서는 전면적으로 “전화율”을 제고하라고 압력을 주었다. 4월 6일, 노동수용소에서는 대법제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씩 끌고나가서 “관을 넘기게”했는데,곡괭이, 넝쿨 밧줄, 전기 방망이, 대나무, 고무 방망이 등등을 전부 사용했다. 대법제자는 하나하나 박해 받아 사람모양을 잃어 갔다. 비명소리가 가슴을 찢고 폐를 갈라터지게 했다. 7일, 하늘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는데, 그렇게 붉을 수 없었다. 연이어 3일이나 그랬다. 모래바람이 대지를 휩쓸었던 것이다. 죄인들도 이것은 진짜로 천상변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당시 온몸에 옴이 가득 났고, 신체도 극도로 허약해졌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일 주요한 것은 장시간동안 법공부와 연공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고, 또 각 방면의 압력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터질 것만 같았고 곧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정황에서 나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집착심은 나로 하여금 한 제자가쓴 “오서(五書)”를 모방해서 역시 그렇게 쓰게 했다. 나는 될수록 관건적인 단어는 피하면서, 사부님의 이름은 전혀 쓰지 않았다. 비록 이렇게 했지만, 압력하에서 교양반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비록 거기에 참가하여 견정한 대법제자들을 만날 생각이었지만, 어찌됐든 자신의 수련의 길에 지극히 큰 치욕을 남겨 놓았고 자비한 사존의 고도(苦度)를 저버렸다.

당시 죄인들 중에 한 힘센 죄인은 나하고 사이가 특별히 좋았다. 마침 악경은 그 죄인한테 견정한 대법제자를 책임지게 했다. 나는 그 죄인에게 꼭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죄인한테 많은 대법 진상과 나의 체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꼭 할 테니까, 넌 시름 놓아라, 내가 그들을 때릴 때에 정도를 파악해서, 될수록 관리원이 때리지 않도록 할 거다. 그들이 사람을 지독하게 때리니 말이다.”고 말했다.

나는“문화대혁명”을 겪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노 수련생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 당시의 정황은 당년의 “문화대혁명”과 같다고 한다. 매일 비판대회를 열고, 동수의 목에 간판을 걸고 무대에 떠밀어 올려서 비판하고, 죄인들은 밑에서 구호를 부르고 혁명가요를 불렸다. 나의 신체는 이미 매우 허약해 져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먹기만 하면 토했고, 온몸의 근육은 위축되어 바싹 말랐다. 얼굴을 알아보기마저 힘들게 되었는데, 계단을 올라갈 때에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한 달 사이에 원래의 65키로 체중이 40키로밖에 남지 않았다. 사지는 말랐는데 배만 불룩하게 나왔으며 마치 돌처럼 딱딱했다. 늘 배가 부풀어나서 땅에서 뒹굴었다. 동수들이 나를 석방할 것을 제기했지만, 악경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된 그 날, 나는 이를 악물고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 나갔다. 아버지가 나를 마중하러 나왔는데 자기 자식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아버지는 내가 속상해 할까봐, 몰래 눈물을 닦았다. 나는 얼굴이 초췌하고 백발이 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이 모든 것은 강택민의 사악한 박해가 조성한 것이다! 내가 불법으로 노동수용소에 있는 동안에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보냈기에 바싹 여위였다.

그 날 오후 아버지는 바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의사들은 나를 보더니 깜작 놀라면서, 지금 당장 입원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아버지께 알렸다. 하지만 며칠 동안이나 입원해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병인(病因)을 찾지 못하고, 매일 나한테 영양제 링거주사만 놓았다. 의사가 나의 큰 배를 반복적으로 투시해 보고 초음파 검사도하고 또 레이저 검사도 했지만 계속 정상으로 나타났다. 입원비용이 너무 비싸서 나는 아버지에게 퇴원하자고 말했다. 할 수없이 친척집에서 20일 동안 있었는데 나의 신체가 일정하게 회복된 다음에야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처음에는 나의 신체가 허약해서 열차도 탈 수없었다). 집에 와서 많은 의사를 보였지만 여전히 낫지 않았다. 나는 점점 여위여가고 이미 걸음조차 뗄 수 없었으며 정신 상태는 극도로 나빠졌다. 나는 이것을 보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부님과 대법에 미안한 일을 했기에, 사부님께서 나를 책임지지 않아 업력이 모두 되돌아 온 것이라 생각했다.

가족들은 모두 매우 조급해 했다. 친척과 친구들도 나를 보러 왔는데 어머니는 매일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어 나는 더욱 괴로웠다. 저녁에 어떤 때는 애써 일어나 앉아서 가부좌를 했는데, 그러면 배가 덜 아팠다. 그러나 얼마 견지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 속인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의사를 하고 있는 친척이 나를 보러 왔는데, 나에게 내가 걸린 병은 XX병일 수 있는데 이런 병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 못하며 즉시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속으로 역시 그 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념 때문에 나는 2개월 동안이나 입원하고 있었다. 이전에 여러 의사들이 검사를 했지만 아무 병도 찾지 못했던 것인데 이번에 병원에 가서 투시한 뒤에는, 나의 배가 여러 곳이 막혔다고 했다. 의사의 말로 한다면“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사는 바로 집에 병이 위급하다는 통지를 보냈다. 나는 의사한테 나의 병은 치료할 수 있냐고 물었다. 몇 명의 의사는 모두 나에게 이런 “병”은 매우 위험한 만성병이라서 많은 주의점이 있는데 예를 들면, 채소만 먹을 수 있고 또 영양이 따라 가야하며 활동을 해야 하지만 너무 힘들어도 안 된다고 했고 만약 어느 하나라도 잘못하면 수시로 생명 위험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낫게 된 후에도 몇 년 동안은 조심해야한다고 했다. 또 나에게 많은 예를 들면서 병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말을 많이 했지만 결국은 한마디였다. “당신이 운명에 달렸다!”경험이 아주 많은 한 한의사가 나에게 이런 병은 사실 회복되었다 해도 정상인처럼 회복되려면 적어서 2년이나 3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적어도 반년동안 입원을 해서 치료받아야한다고 말했다

6. 다시 정신을 차리다

내가 2개월 동안 입원했는데 부모님도 2개월 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동반했다. 의료비도 아마 몇만 원은 썼을 것인데 우리 집 형편에서 놓고 말한다면 아주 무거운 부담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고, 수련의 기점에서 다시 이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한 후, 나는 퇴원을 고집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 왔는데 신체는 입원할 때보다 더 회복이 빨랐다. 체중도 신속히 증가 되었는데 한달이 지나 나의 체중은 이미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았는데, 의사는 이번에 찍은 사진과 예전의 것을 대조했는데, 원래 사진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악성 종양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들 불가사의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의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또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한 것이다. 우리가 대법을 향하는 그 마음만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매 제자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다시 법공부 하려고 마음먹었다. 나의 대법 책은 모두 손실 보았다. 다행히 집에는 한부의 대법 책이 궤짝 안에 잠겨져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대법 책을 찾아 들려고 하니, 일종의 마난이 계속 나를 가로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하루, 나는 궤짝의 열쇠를 찾아냈는데, 아무리 궤짝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서 열어봤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혹시 열쇠를 잘못 찾아 온 것일까? 하지만 이런 모양의 열쇠는 오직 이 열쇠 하나뿐이었다. 또 이틀이 지나가 버렸는데 나는 한 수련생을 만났다. 그는 나한테 현재 대법제자가 마땅히 법공부, 진상 알리는 일, 발정념 이 세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발정념!”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발정념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사악에게 붙잡혔던 것이 생각났다. 맞다, 발정념을 해 보자, 집에 돌아와서 나는 그 열쇠를 들고, 마음속으로 “내가 법 공부하는 것을 교란하는 일체 사악을 제거한다.”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열쇠를 다시 열었더니 “팍!”하는 소리와 동시에 아주 쉽게 궤짝 문이 열렸다. 나는 오래 만에 다시 보게 된 대법 책을 어루만지면서 가슴이 설렜다, 또한 자비로운 사존의 구도에 감격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동수들은 체포 되었다가 풀려나면, 많든 적든 모두 이상하게도 “게으름”이 생기며 연공하나 법공부하나 모두 힘들어한다. 강대한 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하지 않으며 이런 교란은 아주 컸다. 나 역시 이런 “게으름” 때문에 오래도록 힘들어했다.

나는 매일 열심히 법공부하고 ,연공 했으며, 또 발정념도 하면서 정법의 거센 흐름 속에 들어갔다.

최후의 이 되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꼭 사존의 가르침대로,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3가지 일을 잘하며, 대법에 가져다 준 손실을 배로 보충하여,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영광스러운 역사 사명을 원만하게 완성하겠다!!

발고: 2003-5-22 갱신: 2003-6-19
분류:호법여정

원문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3/5/22/50834.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