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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소서 대법 얻은 진저우시 저우위전, 총 14년간 억울하게 박해받아

[명혜망](랴오닝성 보도) 랴오닝성 진저우시에 거주하는 71세의 파룬궁수련자 저우위전(周玉禎)은 ‘진(眞)·선(善)·인(忍)’ 신념을 지킨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아왔다. 지난 20여 년간 여러 차례 납치와 구금을 당했으며, 불법적으로 강제노동형을 선고받고 세 차례나 불법 판결을 받아 총 14년 이상 억울한 감옥 생활을 했다. 2024년 9월, 저우위전은 세 번째로 불법 판결을 받아 4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현재 랴오닝성 여자감옥에 수감되어 박해받고 있다.

저우위전이 고희(70세)를 앞둔 나이에, 진저우시 사회보장국은 그녀의 연금을 불법적으로 중단했다. 그로 인해 홀로 생활하는 저우위전은 생계 수단을 완전히 잃게 됐다.

아래는 그녀가 자신의 정당한 재산인 연금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록한 글로,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며 얻은 소중한 체험과 2003년부터 2023년까지 중공으로부터 당한 박해의 경험을 담고 있다.

구류소에서 맺은 선연(善緣), 대법을 얻다

저는 저우위전이며, 여성이고 1954년생입니다. 랴오닝성 진저우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1년, 주식시장 내에서 좌석 문제로 한 사람과 다툼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상대방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벌금 납부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진저우시 구류소에 수감됐습니다. 이때부터 제 인생의 특별한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제 건강 상태는 매우 나빴습니다. 갱년기를 겪고 있었고, 오십견, 건초염,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몸 곳곳에는 각종 한방 파스를 붙였고, 몇 달 동안 한약과 양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극심한 심리적 압박까지 겹치면서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사회 현실과 가정환경을 마주할 때마다 절망감이 몰려왔고 인생에 대한 깊은 혼란 속에서 헤맸습니다. 저는 종종 하늘을 향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되지 않는 걸까? 살아갈수록 더 엉망이 되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 걸까?”

구류소에서 저는 시립병원에서 온 세 명의 파룬궁 수련생과 시외에서 온 두 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저는 그녀들 내면의 평화롭고 차분한 마음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합리한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할 수 없는 선량함과 자비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며, 제 마음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들이 대법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보여준 선량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제 세계관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저는 눈을 크게 뜨고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사회의 부패와 경찰의 히스테리, 그리고 파룬궁수련자들의 평화롭고 선량한 모습이 뚜렷하게 대비됐습니다. 그 순간, 저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됐습니다.

파룬궁 수련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제 인생관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3일 후, 저는 그들에게 “제가 나가면 첫 번째로 할 일은 《전법륜》을 찾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구류소에서 파룬궁 수련생들과 함께 파룬궁을 배우고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룬궁 수련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저는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진리들을 깨닫게 됐습니다.

13일 후, 저는 여동생과 제부의 도움을 받아 상대방에게 납부할 벌금을 지불했습니다. 구류소에서 돌아온 후, 저는 여동생 집에서 잠깐 식사를 한 뒤, 급히 근처의 파룬궁 수련생을 찾아 《전법륜》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그날, 저는 비를 맞으며 수련생을 찾아가 《전법륜》을 한 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2001년 10월 8일로, 제 평생 잊지 못할 날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법륜》에 나오는 법리에 따라 제 말과 행동을 조금씩 바로잡아 갔습니다. 문제를 처리할 때는 항상 먼저 자신에게 잘못된 점이 없는지 돌아보고, 불편한 일이 생겨도 더 이상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법을 배우고, 대법의 법리를 바탕으로 제 행동을 다스리며,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련을 시작한 후, 제 몸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법륜》을 처음 집어 든 그날 이후, 저는 한 알의 약도 먹지 않았고, 약파스를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수련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을 때, 저는 더 이상 피곤함이나 기운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은 언제나 가볍고 편안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고난 속에서 복을 얻어 파룬따파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인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됐고, 이전에 느꼈던 삶의 고통과 피로에서 완전히 해방됐습니다. 제 인생의 진정한 항로를 찾았고, 내면의 기쁨은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중공은 파룬따파를 박해하는 가장 극단적인 시기에 있었으며, 파룬궁수련자들이 가장 심각한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진과 거짓, 선과 악의 강렬한 대비 속에서,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로 한 제 선택이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저는 중공이 파룬궁을 모함하는 ‘천안문 분신 사건’과 ‘1400건 사례’ 등의 주장에 대해 신중히 분석했고, 이성적으로 분석한 결과, 텔레비전에서의 모함과 비방이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사악하며, 너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당하다

수련을 통해 저는 파룬따파의 광대하고 깊은 진리와 신비로움을 직접 체험했고, 대법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에 더욱 감사하게 됐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거짓말과 날조된 프로그램이 많을수록, 저는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속고, 미혹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상 전단지를 배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매번 진상 자료를 배포하기 전에, 저는 그 전단지의 내용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전단지를 한 사람에게 전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 제 마음 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느꼈고, 제가 한 모든 일에 대해 깊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2003년 6월 7일, 저는 길거리에서 한 젊은 사람에게 진상 전단지를 전달한 후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사람이 신고한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 후, 저는 진압 경찰에 의해 납치돼 시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경찰에게 하루 종일 불법적으로 심문을 당했고, 밤까지 계속해서 진상 자료의 출처에 대해 강제로 심문 받았습니다. 경찰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다음 날 저는 시 제2 구류소로 보내졌습니다.

19일간의 불법 감금과 강제 급식

제2 구류소에 수감된 19일 동안 저는 불법적인 구금에 항의하며 계속해서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경찰은 저를 여러 차례 시립 병원으로 보내 강제로 급식하고 링거를 투여했습니다. 나중에는 더 이상 강제로 음식을 넣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저를 마싼자 노교소로 보내 강제노동 시키려했습니다. 마싼자에 도착한 후, 노동수용소에서는 저를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신체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제 몸 상태는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저는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 말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의사가 온 것을 느끼고 가까스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습니다. “저는 거의 20일 동안 단식을 했고, 밥 한알 먹지 않았고, 강제로 음식을 넣어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후 의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결국 마싼자 노동수용소에서는 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6월 25일, 저는 약 20일간의 고난을 겪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무고하게 납치돼 불법적으로 20개월간 강제노동 처분을 받다

2004년 5월 31일 아침 7시 30분경, 저는 집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던 중, 집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세 명에게 곧바로 납치당해 징예(敬業) 거리 사무소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지질탐사대 구내에 설치된 세뇌반(강제 전향 시설)으로 이송됐습니다. 세뇌반에 도착하자마자 경찰들은 불법적으로 신체 수색을 했고, 제 옷주머니와 손가방 속의 모든 물건을 강탈했습니다. 심지어 집 열쇠마저 빼앗겼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경찰은 이 열쇠를 이용해 가족도 없는 빈집에 침입하여 가택수색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집에 있던 DVD 플레이어, 녹음기, 대법 관련 CD와 서적, 사부님의 사진, 그리고 여러 진상 자료를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세뇌반에 갇힌 동안 저는 꾸준히 연공을 했고, 납치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다음 날, 경찰은 저를 다시 제2구치소로 이송했습니다.

6월 3일, 경찰은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법원의 판결조차 없이 저를 직접 마싼자 노동수용소로 보내 더욱 극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마싼자(馬三家) 노동수용소의 제2여자소(외부에는 ‘사상교육학교’라고 허위로 선전)는, 랴오닝성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체포된 파룬궁수련자들이 감금된 곳입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강제로 옷을 모두 벗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목욕’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신체 수색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창문도 없는, 비좁고 어두운 삼각형 모양의 짐 창고에 감금됐습니다. 그 방에는 침구도 없었고, 낡은 짚자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 후, 매일같이 두 명씩 짝을 이루거나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저를 둘러싸고 ‘전향’하도록 강요하며 끊임없이 왜곡된 사상과 거짓 논리를 주입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정상적인 사고를 흐트러뜨리려 했으며, 동시에 저를 작은 나무 의자에 앉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이 비인도적인 박해를 거부했고, 단 한 번도 그 의자에 앉지 않았습니다.

5개월 반 동안의 단식 기간 동안, 저는 보통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극심한 고통과 체력 소모를 겪었습니다. 처음 강제로 삽입된 튜브로 인해 위, 식도, 비강, 목이 심각하게 손상됐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음식을 먹지 않자, 경찰은 저를 아래층의 은폐된 장소로 끌고 가 더욱 악랄하게 박해를 가했습니다. 사지를 강제로 ‘십자가’ 형태로 벌려 침대에 수갑을 채운 뒤, 바지를 벗기고 바로 도뇨관(소변줄)을 삽입했습니다.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채, 코에 삽입한 관을 밤낮으로 빼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세 차례 강제적으로 음식을 주입당했습니다. 한 번의 주입량은 약 1kg 정도였고, 이로 인해 하루 종일 구토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토사물 속에 음식물이 있었지만, 밤이 되면 위에 음식이 없고, 위에 꽂힌 튜브는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특히 밤이 되면 고통이 극심해져 더욱 심한 구토를 하게 됐고, 그때부터는 검은색, 녹색의 액체와 함께 피가 섞인 구토를 쏟아냈습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고문은 일주일 동안 지속됐습니다.

단식 기간 내내 참기 힘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도 고통받았습니다. 당시 날씨는 한여름이라 매우 더웠고, 계속해서 구토했지만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토사물이 사방으로 퍼져 온몸이 더러워졌습니다. 장기간, 고용량, 고밀도로 무분별하게 음식이 주입되면서(나중에는 하루 4회까지 증가), 끊임없이 메스꺼움과 구토를 겪었으며, 자주 피를 토했습니다.

약 5개월 반 동안 지속된 강제 급식 과정에서, 경찰들은 저의 생사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강제 주입되는 음식의 양이 점점 증가했고, 결국 제 머리와 얼굴이 심하게 부어올라 변형됐으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앉아 있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심지어 사고 능력조차 마비된 듯했습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저를 석방할 의사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가면 체면이 안 서잖아.”

이후 저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박해를 중단하라! 불법 구금을 끝내라!” 경찰들은 나의 외침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두려워했고, 결국 나를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수련을 다시 시작했고, 이 기간 동안, 경찰들은 나를 ‘전향’시키기 위해 바오자(감시 담당 죄수)를 계속 교체했지만, 매번 전향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2005년 2월, 나는 다시 마싼자 노동수용소 내의 일반 범죄자 수용구역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는 마약 중독자, 성매매 종사자, 절도범 등 온갖 범죄자들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죄수든 경찰이든 모두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죄수들끼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경찰들끼리도 서로 속고 속이며 권력을 다투었습니다. 경찰들은 죄수들에게 가혹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고, 매일같이 고함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좌반원’(坐班員)과 ‘사방원’(四防員)[감기 담당 죄수]은 집안에 돈이 있어야만 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경찰들은 누구의 계좌에 돈이 많고 소비가 많은지 보고 강제로 시켰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좌반원’과 ‘사방원’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됐고, 하루 12시간 근무하고 12시간 쉬며,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을 받을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매일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6시 30분에 작업장으로 나갔습니다. 오전 11시경 작업을 마치고, 12시 30분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오후 4시경 한 차례 작업을 마치고, 5시 30분에 또다시 작업에 투입됐고, 밤에는 빨라도 9시 이후에야 작업이 끝났으며, 일반적으로 10시~11시에 종료됐습니다. 심지어 늦을 때는 자정까지 작업해야 했는데 즉, 매일 최소 14시간에서 많게는 17시간씩 중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하루 작업량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완료하지 못하면 밤을 새워야 했으며, 일부는 형량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저는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 외칠 때마다 ‘좌반원’, ‘사방원’ 그리고 주변의 감시자들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한 번은 “파룬따파하오!”라고 외친 직후, 과거 다롄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을 잔혹하게 폭행했던 감시 죄수가 저를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머리가 바닥에 먼저 부딪히는 순간, 저는 모든 감각을 잃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또 한 번은 “파룬따파하오!”라고 두 번 외치자 마약 중독자인 한 ‘사방원’이 저의 머리를 가격하고 방 안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가 다시 외칠 거냐고 물었을 때 제가 다시 외치자 그 ‘사방원’은 저를 침대에 눕히고 주먹으로 머리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가 지치자 또 다른 마약 중독자인 ‘사방원’이 이어서 저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했고, 침대가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굴복하지 않자, 그들은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복부를 발로 짓밟았고 이어 일으켜 세운 후, 화장실로 끌고 가서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파룬따파 좋다!’라고 외치는 것은 당신들에게 폭행당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폭행을 멈췄습니다.

저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은 두 명의 감시자를 배치하여 밤낮으로 저를 지켜보게 했습니다. 그들은 가부좌 자세를 허락하지 않았고, 땅에 서서 연공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찰이 저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려고 했지만, 제가 거부하자 그들은 저를 난방관에 수갑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서 있는 상태에서 수갑을 채우려고 했으나, 저는 바닥에 앉아 연공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에 대대장 왕옌핑(王豔平)은 저를 발로 차고 걷어찼으며, 감시자들과 작업장 죄수 우두머리들에게 제가 다리를 꼬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 그렇게 수갑에 묶여 있었습니다.

5월 7일, 저는 적게 먹거나 아예 먹지 않으며,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불법 감금에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들은 제가 점점 야위어 가는 것을 보고, 강제로 링거를 맞히며 감금을 연장하려 했습니다. 약 4개월이 지나자, 저는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었고, 혈압을 잴 때마다 맥압 차이는 극히 적었으며(10 또는 5), 심박수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심한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연공을 하려 했으나, 죄수들이 이를 방해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뿐이며,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방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손과 발을 어떻게 움직일지는 제 자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제 연공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이며, 범죄입니다. 경찰이 강제로 막거나, 여러분을 시켜 연공을 금지하는 것 또한 사악한 행위입니다.”

그 당시, 저와 함께 2층에 불법적으로 감금된 파룬궁수련자는 일곱 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제 노동을 거부했고, 경찰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의 태도를 밝혔습니다. 이에 경찰들은 ‘사방원’, ‘좌반원’, 그리고 감시자로 지정된 죄수들에게 우리가 서로 접촉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수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진실함과 선량함, 인내심을 보여주자, 그들은 점점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제가 연공을 할 때 매우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일부 죄수들은 오히려 경찰이 들키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만약 경찰에게 들키면 그들 역시 욕을 먹거나 형기가 늘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공을 한 후 다시 정상적으로 식사를 시작했고, 몸도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2005년 11월 20일경, 저는 다시 한 번 소식(少食) 또는 단식을 하며, 물도 거의 마시지 않는 방식으로 불법 감금에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월 24일까지 단식을 이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말라서 피부만 남은 상태가 됐고, 왼쪽 목에 혹이 자라났습니다. 왼쪽 얼굴 전체가 심하게 부어올랐으며, 왼쪽 눈도 뜰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귀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1월 26일, 노동수용소는 제가 볼거리(유행성 이하선염)에 감염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가족에게 연락하여 저를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1월 27일, 제 남동생이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20개월간의 박해를 겪은 끝에, 저는 마침내 그 사악한 감옥을 떠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박해를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겪은 이 모든 잔혹한 박해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진선인(眞·善·忍)’의 신념을 지키고, 그것을 기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13년 7월 23일 저녁, 저는 파룬궁수련자 왕옌추(王彦秋) 씨, 취웨이(曲偉) 씨와 함께 사람들에게 중국 전통문화를 선양하는 ‘션윈(神韻) 공연’ DVD를 배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市) 사교(邪教) 전담반 경찰에게 무고를 당해 납치됐습니다.

취웨이는 진저우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됐을 때, 사흘 동안 팔이 허공에 묶이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 후 당뇨병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15일 후에 풀려났을 때, 그녀의 발은 이미 괴사 상태였으며, 혈당 수치는 18.7까지 상승했습니다. 2014년 8월 21일, 그녀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진저우시 중앙병원에 입원했으나, 5일 후에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7세였습니다.

구치소에서 저는 진저우시 사교 전담반 경찰에게 두 차례 뺨을 맞았으며, 왕옌추 씨와 저는 ‘대(大)자형 매달기’ 등의 가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왕옌추 씨는 심각한 빈혈로 혈색소 수치가 5g 미만으로 떨어졌고, 고혈압, 자궁근종, 경추 수액저류 증상 등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고혈압과 혈액 수치 이상 증세에 시달렸으며, 나중에는 혈변 증상까지 나타났습니다.

2014년 12월 1일, 구타(古塔)구 법원은 저와 왕옌추에 대한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으며, 우리는 모두 불법적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저는 건강상의 이유로 네 차례나 감옥 입소를 거부당했으나, 다섯 번째 시도에서 결국 왕 씨와 함께 강제로 랴오닝성 여자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왕 씨는 감옥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감된 지 1년이 지나면서 고혈압과 뇌졸중을 포함한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싼자 감옥에서는 강제 전향을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감옥경찰 대장 자오징화(趙敬華), 부대장 다이쉐메이(戴雪梅) 등은 감형을 미끼로 수감자들에게 왕옌추를 감시하고 고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수감자 쥐화(菊華), 왕샤오훙(王曉紅) 등이 그녀를 감시하며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왕 씨는 파룬궁 박해를 총괄하는 부대장 유옌(尤岩)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후 독방에 감금됐습니다. 평소에도 강제 노역을 강요받았습니다. 출소를 한 달 앞두고, 극심한 박해로 인해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져 결국 식물인간이 됐습니다. 2017년 7월, 왕옌추는 출소했지만 이미 몸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졌고, 같은 해 12월 29일, 그녀는 결국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6세였습니다.

2016년 11월, 진저우시 사회보험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제 연금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는 제 정신과 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게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파룬궁을 박해한 장쩌민(江澤民)의 정책인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적으로 차단하며, 육체적으로 말살한다’라는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저와 주변의 파룬궁수련자들이 겪은 끔찍한 박해를 되돌아보면, 이 정책이 얼마나 잔혹하고 참혹한 현실을 낳았는지 더욱 뚜렷하게 보입니다.

연금 중단과 생계 위협

저는 부당한 판결로 인해 퇴직 연금이 강제로 중단됐습니다. 이로 인해 노년의 유일한 경제적 생계를 잃었고,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나 혼자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보험국은 연금을 끊어버렸고, 생활비조차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간신히 살아가야 했습니다.

결장암 진단 후 강제 수감

저는 구치소에서 결장암 진단을 받았으나, 경찰은 저에게 검사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강제 ‘전향’ 교육과 신앙 포기 강요

감옥에서 저는 매일 강제 ‘전향’ 교육을 받으며, ‘보증서’를 작성하고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수없이 모욕을 당하고, 폭언과 폭행을 받으며, 혹독한 고문까지 겪었습니다. 감옥은 죄수들을 선동하여 저를 차별하고 고립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 정신적 피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불법적인 징역 4년 선고

2019년 4월 중순, 저는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납치됐고, 이후 진저우시 구타 공안분국 국보대대에서 불법적으로 납치됐습니다. 4월 30일, 진저우시 구타구 검찰원에서 불법적으로 체포 영장이 발부됐습니다. 7월 말, 저는 비밀리에 진행된 불법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가족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었고, 감옥으로 이송될 때도 저의 행방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불법적인 감옥 이송과 봉쇄

2020년 이후, 코로나의 확산을 구실로 랴오닝성 내 모든 감옥이 전면 봉쇄됐고, 대부분의 파룬궁수련자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됐습니다. 면회나 전화 통화조차 금지됐으며, 이 봉쇄는 1년 이상 지속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감옥 내에서의 탄압은 더욱 악랄해졌고, 강제 ‘전향’을 거부한 수련자들은 강도 높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독방 감금, 전기봉 고문, 집단 구타, 장시간 손을 묶고 매달기, 기아형(굶기기), 추위 속 방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었습니다.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박해

2020년, 저는 여러 차례 집단 구타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제 몸은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수척해졌고, 체중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감옥에서는 저를 강제로 ‘전향’시키려 했습니다. 죄수들은 화장지를 주지 않고, 화장실 사용도 금지하며, 잠을 못 자게 하고, 몇 날 며칠 서 있기와 같은 벌을 강요했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면 폭행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그 ‘윗선’이 대체 누구냐?” 그러나 그들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전향서 작성 강요

또한, 감옥에서는 ‘전향’의 내용으로 저에게 파룬궁의 창시자에 대해 모욕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었고 도덕적 가치를 높여주었습니다. 저는 강요된 것도 없었고,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원하지 않으면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제가 대법을 모욕해야 합니까?”

비인도적인 대우

감옥에서는 제게 화장지를 제공하지 않았고, 밤에는 이불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전향’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11월 어느 날 밤, 감옥 측은 창문을 열어 저를 얼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 후, 다른 수감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항의하자, 그제야 창문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가장 더럽고 저속한 말로 모욕을 가하고, 끝없는 폭행과 학대를 이어갔습니다. 이와 같은 폭력적인 대우 속에서 저는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2023년 4월, 저는 마침내 이 악몽 같은 랴오닝 여자감옥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4월 30일 오전, 저우위전은 길거리에서 진실을 알리는 자료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진저우시 공안국 구타 지국(古塔分局) 바오안 파출소 경찰에 의해 납치됐으며, 진저우시 여자구치소에서 불법적으로 행정구류 15일을 선고받았다. 2024년 9월 중순, 저우위전이 링하이시 법원에서 불법적으로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그녀가 세 번째로 불법적인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현재 71세이신 저우위전은 다시 랴오닝 여자감옥에 불법 감금되어 있으며,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가 겪고 있는 박해에 대해 묻지 못하고 있어, 그녀의 상황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1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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