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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룽장 파룬궁수련자 한수쥐안과 가족이 중공에게 받은 박해 실상

[명혜망](헤이룽장 통신원) 한수쥐안(韓淑娟·여, 1963년생)은 1996년 5월 대법(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진선인(眞·善·忍)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중공)에 의해 여러 차례 불법 구금을 당했으며, 오랜 기간 감시와 괴롭힘 속에 심신에 큰 상처를 입었다. 결국 2023년 7월 30일, 60세 나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일가족이 기쁘게 대법을 얻다

한수쥐안은 원래 젠싼장 관리국 치싱 농장의 벽돌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1996년 5월 남편 스멍창(石孟昌)과 함께 대법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예전에 성격이 급하고 여러 질병을 앓아 남편과 자주 싸웠으며, 삶이 너무 힘들어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야 비로소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알게 됐어요.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며,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부터 남편과 싸우지 않게 됐고, 시어머니와 친척들과도 화목하게 지내게 됐어요. 또한 건강하고 낙관적이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됐지요. 파룬궁은 백성에게도, 나라에도 이로울 뿐 해가 될 것이 없기에 저는 수련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한전쿠이(韓振奎), 시아버지 스뎬리(石殿立), 시어머니 왕칭룽(王慶榮), 큰시누이 스슈잉(石秀英), 시동생 스멍원(石孟文) 등 30여 명의 가족은 한수쥐안을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후, 차례로 대법 수련에 동참했다.

주민들을 위해 길을 정비하다

한수쥐안은 벽돌공장 가족구역 남쪽 도로가 울퉁불퉁하고 바퀴 자국이 깊어 비가 오면 통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보고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2~3년이 지나도록 당국에서 도로를 수리해주지 않자 ‘우리 파룬궁수련자들이 직접 길을 닦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녀는 저녁 연공장에서 이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전했고, 다음 날 수십 명의 수련자와 네 대의 작은 사륜차가 모였다. 많은 주민들도 이를 보고 자발적으로 합류했으며, 모두가 힘을 합쳐 사흘 동안 벽돌과 석탄재를 백여 차례 실어 날라 길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정비한 길은 3년간 유지됐으며, 주민들은 기뻐하며 말했다. “저 사람들 좀 봐! 원래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파룬궁수련자들이 대신 해주고 있잖아!”

한수쥐안이 중공으로부터 받은 박해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한 이후, 한수쥐안과 남편 스멍창은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납치·구금됐으며, 가택수색과 재산 압수를 당했다. 한수쥐안은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3년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한 번은 세뇌반에 납치되어 183일 동안 박해를 받았다. 또한 여러 차례 불법 구류됐으며, 총 구금 기간은 6년 3개월 이상에 달했다.

스멍창 또한 불법 강제노동 2회(총 5년), 불법 판결에 따른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불법 구류 48일과 세뇌반 감금 6개월(2회), 2개월(2회)을 포함해 총 8년 4개월 이상 감금됐다. 당시 그들의 아이는 13세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부모가 모두 감옥에 수감되면서 결국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그는 할머니의 돈을 계속 쓸 수 없다며 16세부터 일을 하며 스스로를 부양해야 했다.

베이징 상경과 연이은 탄압

1999년 12월 26일, 한수쥐안은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가 치싱 구치소에 납치됐으며, 70여 일간 불법 감금됐다. 또한 1만 위안(약 200만 원)을 강제로 갈취당했다.

2001년 1월, 한수쥐안과 수련자 차오슈팡(曹秀芳) 등은 두 번째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 후 며칠 동안, 현지에서 30여 명의 사람들이 잇따라 베이징으로 향하면서 젠싼장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에 당국은 이들을 대형 트럭에 태워 강제 연행한 후, 세뇌반에 감금하여 한 달 가까이 박해했다.

2001년 1월 23일, 설날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도 당국은 이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에 한수쥐안, 장구이칭(張貴淸), 차오슈팡 등은 집단 단식을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닷새 후 농장 측에서 가족들에게 “사람을 데려가시오”라고 통지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자유는 없었다. 각 가정마다 직장에서 파견된 감시 요원이 24시간 집 안에 상주하며 감시했다. 이들은 “당신들의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니, 이틀 후 별일 없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 경찰은 12명을 전원 다시 납치해 자무쓰 시거무 감옥으로 이송했다.

한수쥐안에 대한 불법 재판과 반복된 탄압

2010년 1월 10일 저녁 5시경, 중공 당국은 파룬궁수련자들을 불법적으로 재판하기 위한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한수쥐안을 납치했다. 경찰 10여 명이 갑자기 그녀의 집에 들이닥쳤을 당시, 집에는 한수쥐안과 반신불수를 앓고 있는 70대 아버지만이 있었다.

경찰의 불법적인 요구에 한수쥐안이 따르지 않자, 형사 자이창쿤(翟長坤)이 앞장서 그녀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한수쥐안은 “경찰이 사람을 때린다!”라고 외쳤지만, 자이창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타를 이어가며 음담패설까지 퍼부었다. 결국 경찰은 그녀를 강제로 차에 태웠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침대에 홀로 남겨졌다. 한수쥐안은 40여 일간 감금된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10년 4월 19일 오전 7시경, 경찰은 다시 한수쥐안과 남편 스멍창을 납치했다. 스멍창은 우창시 세뇌반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고, 한수쥐안은 친척들의 강력한 항의 덕분에 그날 밤 10시가 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2013년 9월 하순, 부부는 또다시 악명 높은 칭룽산(靑龍山) 세뇌반에 납치되어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 그곳에서 받은 정신적 피해는 극심했으며, 스멍창은 186일 동안의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한수쥐안 역시 칭룽산 세뇌반에서 공갈과 협박을 당하며 사악한 세력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됐다.

스멍창이 중공의 박해를 받은 사실

1999년 11월, 스멍창은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납치되어 치싱 구치소로 압송됐다. 구금 기간 동안, 경찰 자오위쥔(趙雨軍)은 스멍창을 폭행하고 모욕했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하고 팔과 손을 등 뒤로 강제로 들어 올린 후, 머리를 아래로 강하게 눌렀고, 그 아래에 성냥개비를 놓고 놓지 않으면 더욱 강하게 눌렀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넘어지면 발로 차고 짓밟았다. 또한, 옆에 있던 변기통에 머리를 넣고 짓밟는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그 후, 농장에서 공판 대회가 열렸고, 스멍창은 수갑을 채운 채로 목에 끈을 조여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끈을 더욱 꽉 조였으며, 이후 그는 자무쓰 시거무 감옥로 이송되어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또한, 한수쥐안에게 400위안을 내라고 강요받았는데, 이는 감옥으로 가는 차비라고 했지만, 사실 경찰의 출장비가 포함된 금액이었다. 치싱 구치소에 있는 동안에는 급식비 900위안(약 20만 원)을 강제로 갈취했으며, 식사는 만두 네 개와 물때가 낀 생수뿐이었다.

자무쓰 감옥에서의 학대

자무쓰 감옥에서 스멍창과 우춘룽(吳春龍)은 연공을 한다는 이유로 경찰 신옌(申岩)에게 구타를 당했다. 철제 옷걸이로 맞고, 널빤지로 허리를 때렸으며, 영하 20도 밖에서 옷을 벗긴 채 냉동시키고, 팔을 등에서 위로 들고 다리를 벌리는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들을 바람이 잘 통하는 곳으로 끌고 가 찬물을 끼얹었고, 많은 형사범들이 이를 보고 “이 경찰은 정말 인간성이 없다”고 비난했다. 사부님의 법신의 보호가 없었다면, 이들은 얼어 죽었거나 맞아 죽었을 것이었다.

자무쓰에서 노동 교육을 받는 동안, 스멍창은 여러 차례 난방 파이프와 침대에 수갑으로 묶인 채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검은 찐빵을 먹었으며, 기름 한 방울도 없는 음식과 진흙과 파리 등이 떠 있는 야채 수프를 먹어야 했다. 석 달 동안 기름 한 방울도 보지 못한 끔찍한 식사를 했다. 스멍창은 젠싼장 경찰 저우지(周記)에 의해 집으로 송환됐고, 다시 치싱 구치소에 40여 일 동안 불법 감금됐다. 그 후, 아내 한수쥐안과 노모가 여러 차례 석방을 요구하자,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다시 납치돼

스멍창은 집에 돌아온 지 21일 후, 톈바오위(田寶玉)의 집에 놀러 갔다가 또 납치됐다. 경찰은 그가 셋이서 모임을 가졌다고 하며 불법 집회라고 주장하고, 그를 불법적으로 체포했다. 당시 함께 납치된 사람 중에는 서화이중(佘懷忠)도 있었다.

스멍창은 단식 농성을 계속하던 중 경찰 저우지의 지시로 여러 명의 경찰과 의사(바오허핑, 包和平)가 강제로 음식을 주입했다. 그는 구토와 피를 토하게 됐으며, 심신에 큰 손상을 입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8일 후, 농장 측은 그의 노모를 속여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했고, “당신 아들은 무죄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를 집으로 보냈다. 다음 날 저녁, 경찰들이 스멍창의 집에 찾아와 그의 노모를 속였고, 노모는 경찰을 믿고 문을 열었다. 그 후 경찰은 강제로 스멍창을 납치해 치싱 세뇌반에 가두었다.

​스멍창의 박해 과정

세 시간여 후인 새벽 1시쯤, 스멍창은 수갑을 차고 경찰 저우지 등에게 의해 쑤이화(綏化) 노동수용소로 납치됐다. 수용소 훈련대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명의 죄수들이 몰려들어 미리 준비한 찬물을 대야와 호스로 스멍창에게 뿌렸다. 그들은 이것이 경찰의 지시대로 한 일이라고 말했다. 수용소에서는 흑면(黑捂面)을 먹었으며, 쪄낸 찐빵은 보라색이었다. 장기간의 영양실조와 여러 차례의 강제 음식 주입으로 인해 스멍창의 위와 십이지장에 상처가 생겼고, 십이지장 궤양과 말초신경염이 발생했다. 어느 날 밤, 그는 피를 크게 토하고 몸이 급격히 수척해졌으며, 걷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어디를 가든지 업혀야 했다. 이 상태는 4~5개월 동안 계속됐다.

석방을 위한 노력

스멍창의 노모와 아내 한수쥐안은 여러 차례 석방을 요구했으나, 산장과 노동수용소는 “전향하지 않으면 석방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수이화 감옥의 경찰들은 매우 폭력적이었으며, 온갖 고문을 통해 파룬궁수련자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스멍창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전히 허약한 몸으로도 류(劉) 씨 경찰에게 뺨을 세게 맞았고, 자주 경찰과 범인으로부터 욕설과 협박을 받았다.

불법 강제노동 종료 후의 박해

3년간의 불법 강제노동이 만료되자, 젠싼장 경찰 위안신야오(袁新堯) 등은 스멍창과 서화이중(佘懷忠)을 다시 산장으로 데려가 치싱 구치소에 수감했다. 스멍창은 다시 단식 농성을 벌이며 즉시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5일 후에야 석방됐으나, 그 후에도 주민위원회, 파출소, ‘610’ 요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괴롭혔다.

2005년 9월 하순, 위안신야오 등 경찰은 10.1(국경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스멍창의 집에 침입하여 한수쥐안 혼자 있는 집을 수색하고 재산을 압수했다. 경찰은 한수쥐안에게 스멍창의 행방을 캐묻고, 그가 돌아오면 공안국에 출두하라고 지시했다.

2008년 7월 21일 저녁 8시경, 치싱 분국 경찰 리수차이(李樹才), 리젠(李建) 등 8~9명은 올림픽 대회 안전 보장을 명목으로 다시 스멍창의 집에 침입해 불법으로 가택수색하고 스멍창과 한수쥐안을 납치해 치싱 구치소에 수감했다. 당시 한수쥐안의 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반신불수 환자로 홀로 집에 누워있었지만, 경찰은 그런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스멍창은 단식으로 박해에 맞서며 즉시 석방을 요구했다. 감옥경찰 황신리(黃新利)와 10여 명의 경찰은 스멍창을 땅에 눌러 제압하고 강제로 음식을 주입했다. 스멍창이 의식을 잃자, 황신리는 여러 차례 그의 인중을 눌러 깨어나게 했고, 형사 구류 중인 한 사람에게 스멍창을 업고 경찰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게 했다. 그 후 4명의 경찰이 그를 병원으로 옮겨 검사와 투시를 받게 했으며, 다시 구치소로 데려가 링거를 맞혔다. 이렇게 39일 동안 구금된 후, 스멍창은 다시 단식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10년 4월 19일 저녁 7시경, 젠싼장 치싱 공안분국의 위안신야오, 멍판화(孟繁華) 등 10여 명의 경찰이 스멍창의 집에 침입해 그와 그의 아내 한수쥐안을 납치했다. 그날 밤, 스멍창은 치싱 구치소로 납치됐고, 다음 날 오후 4시경, 젠싼장 경찰 쑨전쥔(孫振軍) 등은 강제로 수갑과 족쇄를 채운 뒤, 10여 시간 동안 천 리가 넘는 길을 고생 끝에, 21일 새벽 4시경 헤이룽장성 우창시 세뇌반으로 이송했다.

​젠싼장 경찰 쑨전쥔은 3만 위안의 현금을 꺼내 세뇌반에서 스멍창에게 ‘전향’시키는 비용을 지불했다. 산장 경찰이 떠난 후, 우창시 세뇌반 주임 푸옌춘(付彦春)과 부주임 모전산(莫振山)은 스멍창을 불법 심문했다. 푸옌춘은 스멍창을 위협하며 “여기는 ‘전향’ 기지로, ‘전향’하지 않아도 ‘전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멍창은 그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라고 알려주었지만, 악당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부하들에게 전기 충격봉을 가져오게 하여 ‘팍팍’ 푸른빛을 번쩍이며 큰 소리로 협박하고 위협했다. 그는 스멍창에게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따과(大褂, 고문 방식)를 할 거야. 40분이면 너는 땀을 흠뻑 흘리고, 전기 충격봉 자국이 온몸에 가득할 거야. 이때 너는 말을 하고 쓰라고 하면 쓸 거고, 욕하라고 하면 욕할 거야”라고 위협했다. “콘돔을 네 머리에 씌우면 1분도 못 견딜 거야. 그리고 이쑤시개도 박겠다. ‘전향’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 화장하고, 병사 진단서를 하나 작성하면 끝이야. 중국 10억 명이 넘는 사람 중에 너 한 명이 없어도 티가 나지 않아”라고 말했다.

스멍창이 여전히 ‘전향서’를 쓰지 않자, 네 명이 몰려들어 전기봉을 푸른 빛을 번쩍이며, 뺨을 때리고 팔을 잡아당기며 머리를 책상에 눌러 강제로 ‘전향서’를 쓰게 했다. 쓰고 나서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으며, 그들은 흉악하게 웃으며 “이번에 네가 떨어졌으니, 우리는 그것을 명혜망에 올려서 너의 사부님에게 당신의 제자를 버리라고 할 거야” 등의 조롱, 모욕, 비방을 퍼부었다. 몇 분 후, 몇 명이 다시 우르르 몰려와 강제로 반성문을 쓰게 하고 지장을 찍게 했다. 몇 분 뒤, 같은 방법으로 결별서를 강제로 작성하게 했다.

​이러한 고압, 협박, 위협, 공포 속에서 스멍창의 몸과 마음은 큰 상처를 입었고,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관상동맥질환, 고혈압, 십이지장 궤양 등 다양한 질병이 발생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는 먹는 즉시 토했고 피골이 상접해 170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는 40여 킬로그램 남짓에 불과했다. 걸을 때는 벽을 짚고 걸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푸옌춘은 “여기는 병을 치료하는 곳도, 아버지를 모시는 곳도 아니야”라고 말했다. 28일 밤, 모전산은 다시 스멍창에게 ‘삼서’(3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가 쓰지 않자, 네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머리, 어깨, 팔, 손을 눌러 강제로 ‘삼서’를 쓰게 하고 폭력적으로 지장을 찍게 했다. 이때 푸옌춘이 들어와 큰 소리로 위협했다. “그의 사부님 사진을 가져와 직접 찔러라.” 그들은 스멍창에게 못을 쥐어주었고, 사진을 들고 힘껏 못에 대고 눌렀다. 푸옌춘도 옆에서 뺨을 때렸다.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었다! 스멍창은 고통에 시달려 침대에 쓰러졌고, 부주임 모전산은 스멍창의 인중을 못으로 찌른 후 구심환을 먹였다. 다음 날, 스멍창은 이미 걸을 수 없게 됐고, 푸옌춘은 그가 세뇌반에서 죽을까 봐 걱정되어 빨리 젠싼장에 사람을 데리러 오라고 했다.

4월 30일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스멍창의 팔순에 가까운 노모와 아내 한수쥐안은 마침내 자신의 아들과 남편을 만났다. 스멍창이 젠싼장 경찰에 끌려 마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집에 있을 때는 멀쩡했는데 열흘 만에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 당신들은 어떻게 박해한 거야?” 경찰은 그들이 박해한 것이 아니라고 서둘러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들은 단지 사람을 데려오는 일만 했을 뿐, 나머지 일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20여 분간 대치한 후, 경찰은 손을 뿌리치고 떠났다. 어쩔 수 없이 노모는 큰 소리로 슬피 부르짖었다. “누가 내 아들을 이런 꼴로 만들었어?” 한수쥐안도 40kg밖에 남지 않은 남편을 안아 올리며 한탄했다.

가족이 박해받은 사실

한수쥐안의 아들 스치레이(石奇磊)는 1999년 12월 26일, 어머니 한수쥐안과 함께 베이징에 상경하여 세뇌반에 5일 동안 수감됐으며, 당시 겨우 13세였다.

2015년 5월, 서경구 경장 자이창쿤(翟長坤)은 10여 명의 경찰을 이끌고 스치레이가 운영하는 컴퓨터 가게에 침입해 스치레이를 납치하고, 노트북 몇 대를 빼앗았다. 그는 공안국에 반나절 감금됐다. 2016년 10월 24일, 스치레이는 경찰에게 납치되어 두 달 넘게 구치소에 수감됐다. 같은 시간에 납치된 이들 중에는 스멍창과 한수쥐안도 있었으며, 스멍창은 칭룽산 세뇌반을 기소했다가 불법으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한수쥐안은 불법으로 2년 형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2000년 11월, 시동생 스멍원(石孟文)은 파룬궁 수련을 계속한 혐의로 2년간 불법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2008년 3월 21일 저녁, 스멍원 등 다섯 명의 파룬궁수련자들이 칭룽산 농장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의해 현지 파출소로 납치되어 일곱, 여덟 명의 경찰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다. 스멍원은 이후 불법으로 5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자무쓰 감옥으로 납치돼 박해를 받았다.

2014년 3월 21일 아침, 약 20명의 제복 차림 경찰이 변호사가 머물고 있는 그린하오타이 호텔의 방에 강제로 침입해 11명을 납치했다. 이 중에는 스멍원 등 파룬궁수련자 및 가족 7명과 4명의 변호사 장톈융(江天勇), 탕지톈(唐吉田), 왕청(王成), 장쥔제(張俊杰)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경찰은 그들에게 큰 폭력을 행사했다. 파룬궁수련자 우둥성(吳東升), 딩후이쥔(丁惠君), 멍판리(孟繁荔)는 생명에 지장이 생겨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았다. 네 명의 변호사는 경찰에게 맞아 갈비뼈 24개가 부러졌고, 스멍원은 전신에 부상을 입었다. 스멍원은 이후 젠싼장 법원에서 불법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큰시누이 스슈잉(石秀英)은 파룬궁 수련으로 여러 차례 불법적으로 가택수색과 재산 압수를 당했다. 2010년 10월, 스슈잉은 칭룽산 세뇌반으로 납치되어 박해받아 위암에 걸렸으며, 생명이 위독해진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위장의 4분의 3을 절제했다.

스멍창은 총 5년의 강제노동을 했고, 한수쥐안도 불법 강제노동과 여러 차례 불법 감금을 당했다. 집에 있는 13세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가족들은 큰 압박을 받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시 70대인 스멍창의 노모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내어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둘째 아들 스멍원도 강제노동 박해를 받았고, 둘째 며느리는 외지에서 일하느라 집에 없었다. 열 살 된 손녀도 노인이 돌봐야 했다. 아이는 스스로 요리를 할 줄 몰라 매일 라면만 먹었다. 아이의 할머니는 보다 못해 세 곳을 왔다 갔다 하며 돌봤다. 스멍창의 아이는 매우 철이 들어 열여섯 살 때부터 할머니가 주는 돈을 사양하고,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80세인 아버지와 거의 80이 된 노모는 이 모든 고통을 감당했으며, 두 아들과 딸 하나도 모두 박해를 받았다. 명절이 되면 보통 가족들이 모두 모이지만 어르신들은 눈물로 지냈다. 이 몇 년 동안 흘린 눈물은 대야로도 담을 수 없었다. 지난 10여 년간 겪은 고난, 오늘은 노동수용소에 가고 내일은 감옥에 가며, 위아래층으로 각 부서의 지도자들을 찾아다니고, 버스와 열차를 타고 비바람 속에서 매번의 타격을 감당했다. 이 모든 것은 가정과 노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2012년 1월, 한수쥐안의 원래 반신불수였던 아버지 한전쿠이(韓振奎)가 연이은 괴롭힘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015년, 시아버지 스뎬리(石殿立)가 괴롭힘과 박해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023년 1월, 시어머니 왕칭룽(王慶榮)이 중공의 괴롭힘과 박해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023년 7월 30일, 한수쥐안은 장기간의 감시와 괴롭힘 속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60세였다.

중공 악당에 충성을 다한 젠싼장 공안, 검찰, 법원 악당들은 스 씨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고통을 안겼으며, 그에 대한 응보는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선량한 스 씨네 수련자들은 이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도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싶어 한다. 빨리 악행을 멈추고 중공을 탈퇴하며,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로로서 자신들의 미래를 되찾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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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2/22/4909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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