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치치하얼시 파룬궁수련자 톈쯔창(田自强)은 여러 차례 납치돼 박해당했다. 세뇌반과 구치소, 노동수용소, 감옥에서 그는 구타와 ‘큰 괘에 올리기(上大掛)’, 코에 겨자유 바르기, 장시간 수면 차단 등 각종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치치하얼시 톄팡구(鐵鋒區)와 거주지인 젠화구(建華區) 공안 경찰의 수차례의 괴롭힘과 협박 속에서 2024년 초 부당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였다.
톈쯔창은 1947년 11월 4일에 태어났고 치치하얼시 국세청 감찰실 부주임이었으며 치치하얼시 젠화구 시훙차오(西虹橋) 위원회에 거주했다. 그는 1994년 11월에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으며 진선인(眞·善·忍) 기준으로 자신의 행위와 사상을 바로잡았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건강한 신체와 도덕의 승화, 명예와 이익 초탈, 타인에 대한 선의를 이루었고 일을 만나면 먼저 남을 생각하며, 진실하고 선량하며 관용하고 양보하는 마음가짐으로 업무와 타인을 대했으며 동료 관계와 이웃 관계가 원만했다. 톈쯔창은 매우 뛰어난 업무 능력을 보여 수년간 직장에서 모범직원으로 평가받았고 동료들은 모두 그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친근해지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며 묵묵히 일하고 부패하지 않은, 진정으로 청렴하고 자율적인 좋은 사람이 됐다고 인정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 우두머리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과 박해를 시작한 후, 톈쯔창은 수련을 견지하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으며 공안에 의해 강제노동을 당했고, 동시에 세무 기관에서 공직도 해임당했다. 톈쯔창은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여러 차례 납치당해 박해를 받았고 1년의 강제노동과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그의 아내도 동시에 납치되어 5년형을 선고받음), 차례로 치치하얼 푸유(富裕) 노동수용소와 타이라이(泰來)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받으며 각종 고문과 구타 및 온갖 학대를 당해 심신이 극도로 망가졌다. 2015년 6월 28일, 그는 최고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고소한 후 또다시 몇 차례 세뇌반으로 납치돼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
2023년 8월 어느 날, 톈쯔창은 집안 개인사를 처리하기 위해 며느리와 톄팡구에서 만났을 때 CCTV에 찍혔고 이것이 진상을 알린 증거로 간주됐다. 이로 인해 톈쯔창은 외출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납치돼 강제로 채혈과 소변검사, 지문날인을 당했으며 혈압이 200까지 치솟았음에도 8일간 불법 구치소 구금을 당했다. 그 후 그는 이른바 ‘처분보류(取保候審, 1년간 보석하되 보증금·보증인을 세워 수사와 재판을 회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와 3,000위안의 벌금을 강탈당했다. 이후에도 톈쯔창은 계속해서 치치하얼 톄팡구와 거주지인 젠화구 공안의 수차례 괴롭힘과 협박을 받았고 혈압이 계속 높은 상태를 유지하다가 2024년 초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톈쯔창이 2015년 6월 우두머리 장쩌민을 고소한 소장에서 진술한 그가 당한 일부 박해 사실이다.
2001년 1월 1일, 나는 천안문에서 대법을 수호하다가 천안문 공안분국 경찰에게 납치됐다. 하이뎬(海淀) 구치소에서 8일간 불법 구금됐고 1월 10일 치치하얼 원화루(文化路) 파출소 부소장 쉬환(徐歡)이 데려갔다. 내가 몸에 지니고 있던 1,000위안과 세이코 시계 한 개, 영생(永生) 금펜 한 자루는 계속 파출소에서 돌려주지 않았다. 원화루 파출소는 나를 하룻밤 불법 구금했고 가오웨이싱(高衛星) 등이 나를 불법 심문했다. 그들은 나에게 내복만 입힌 채 창문을 열어놓고 4시간 동안 얼렸다. 이후에 나를 난방 파이프에 수갑을 채웠는데 야간 근무 중이던 한 젊은 경찰이 수갑을 매우 깊이 눌러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다음날 오전 9시에 제2구치소로 이송할 때가 돼서야 수갑을 조금 풀어줬다. 중지와 약지, 소지가 모두 감각을 잃었고 3개월이 지나서도 손가락이 모아지지 않았다.
2001년 3월, 나는 치치하얼시 젠화 공안분국에 의해 1년의 강제노동을 선고받았다. 당시 후빈(胡斌) 소장이 치치(遲齊)와 다른 한 명의 경찰과 함께 나를 푸유 노동수용소로 끌고 갔다. 배수로 파기, 건물 기초 파기, 마대 짊어지기 등의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노동수용소는 파룬궁에 대해 법을 운운하지 않았고 장샤오춘(張曉春)과 왕바오셴(王寶憲)이 무고하게 노동수용소에서 푸유현 구치소로 보내져 구금됐으며 이후에 두 사람 모두 박해로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파룬궁수련자들이 성 인민대표대회에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10월 20일, 30여 명의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 파룬궁수련자들을 마구 때렸고 쓰러뜨린 후 수갑을 채워 문밖으로 끌고 갔다. 쉬 씨라는 후근과장은 사람을 때리느라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맞은 파룬궁수련자들은 마당에 누워있었고 손은 모두 뒤로 수갑이 채워졌으며 어떤 이는 눈이 퉁퉁 부었고 어떤 이는 코피를 흘렸는데 목불인견이었다. 그 후 수련자 장자오화(張照華)는 푸유 구치소로 보내져 구금됐고 이후에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4월, 치치하얼시 후빈(湖濱) 파출소 경찰 7~8명이 내 집에 들이닥쳐 수색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했다. 우두머리인 장 부소장과 톈춘리(田春立), 뉴강(牛剛) 등이 대법 자료와 물품들을 몰수해 갔고 나를 불법으로 파출소로 납치해 시멘트 바닥에 앉혀놓고 하룻밤 동안 얼렸다. 그 장 부소장이 나를 주먹과 발로 때렸고 3일간 불법 구금했다. 이후에 나는 또다시 제2구치소로 끌려가 15일간 불법 행정 구류를 당했다. 장 부소장의 말을 들어보니 윗선에서 임무가 내려왔는데 파출소마다 파룬궁수련자 50명씩을 체포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의 관할구역 인원수가 부족하자 다른 곳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붙잡았다.
2006년 4월 3일, 치치하얼시 원화루 파출소 민경 치치가 내 집에 와서 나보고 파출소에 한 번 가자고 했는데, 내가 가지 않자 전화로 경찰을 불러 내 집을 뒤져놓았고 나와 아내를 파출소로 끌고 갔다. 저녁에 아내는 풀어줬지만 나는 시 제1구치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매일 노예노동으로 이쑤시개를 말았다. 낮에 다 하지 못하면 밤에도 계속했고 다 해야만 잠을 재웠다. 나는 40일간 불법 구류를 당한 후 풀려났다.
2006년 8월 25일 저녁, 치치하얼시 정양(正陽) 파출소 경찰들이 내 집에 와서 수도검침을 핑계로 속여 문을 열게 했다. 우두머리인 자오스민(趙世民) 경찰은 들어오자마자 마구 뒤졌고 녹화기도 가져와서 녹화했으며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자 향로까지 가져갔다. 나와 아내를 파출소로 납치했고 그들은 나에게 대법 자료의 출처를 말하라고 강요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나를 룽사(龍沙)구 공안분국 형사대[일명 귀신 건물(鬼子樓)]로 데려갔고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큰 괘에 올리기’로 고문했다. 자오스민은 경찰들에게 지시해 수갑으로 두 손을 뒤로 채우고 다시 밧줄로 묶어 높은 철제 가대에 걸었으며 발이 땅에서 떨어지도록 들어 올렸다. 약 20분간 매달았다가 내렸고 또다시 매달았으며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매달려 있을 때 코에 담배연기를 쐬게 하고 코에 겨자유를 발랐으며 발바닥을 간질이는 등 잔인하게 내 몸을 망가뜨렸다. 나를 오후 내내 매달아놓다가 황혼 무렵이 돼서야 멈췄다. 저녁에도 그들은 계속 고문했는데 이번에는 한 오랜 경찰이 수를 썼다. 내 발과 손을 뒤로 함께 묶어 굵은 나무막대를 꿰어 책상 위에 걸쳐놓고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허리가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니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경찰은 발로 내 허리를 밟았고 허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반복해서 밟다가 한밤중이 돼서야 그만뒀다.
한번은 류푸산(劉福山)이라는 경찰이 물었는데 내가 그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지 않자 그는 구두로 내 머리를 걷어찼다. 당시 나는 수갑에 채워진 채 바닥 가까이 있는 파이프에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다리를 높이 들어 구두 뒷굽으로 내 정수리를 내리찍었고 한 발 한 발 연이어 차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오랫동안 차다가 멈췄다. 내 정수리에서 많은 피가 났고 머리카락이 모두 엉겨 붙었으며 입에서도 피가 났고 귀에서도 피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볼까 봐 나더러 피를 씻으라고 했다. 내가 일어났을 때 이미 서 있기도 힘들었고 앞으로 가려고 하면 뒤로 넘어지거나 왼쪽으로 넘어졌다. 부소장 톈춘리(田春立)가 들어와서 보고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는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를 찬 그 경찰이 재빨리 말하길 “그가 스스로 벽에 부딪혔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정양 파출소에서 5일 동안 불법 구금됐고 물도 주지 않았으며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했다. 매일 밤 수갑을 하나는 앞으로 하나는 뒤로 채워서 전혀 잘 수 없었다. 내 양손은 만두처럼 부어올랐고 팔도 부었으며 ‘큰 괘에 올리기’로 인해 왼쪽 손목의 피부가 크게 벗겨져서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매우 큰 흉터가 남았다. 정양 파출소가 나에게 가한 고문과 박해, 당사자들의 법집행 위반은 모두 유죄이지만 나는 잠시 그들을 고소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장쩌민의 박해 정책의 희생양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장쩌민의 고문죄와 형신(刑訊, 고문 취조) 강요죄만을 고소한다.
2006년 8월 31일, 나는 정양 파출소에 의해 치치하얼시 제1구치소로 보내져 불법 형사 구류를 당했다. 구치소에서 한번은 내가 행동이 조금 느렸다는 이유로 한 형사범이 발로 내 상처가 나고 피가 부어오른 팔을 걷어찼고, 상처가 터져서 피가 침상에 튀었다.
2007년 7월, 나와 아내는 룽사구 법원에서 각각 3년과 5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내가 사진 찍기와 채혈을 거부하자 경찰 팡 씨가 형사범을 시켜 날 붙잡고 사진을 찍었으며 내 뺨을 때렸다. 감방 관리 경찰 왕수리(王樹立)는 형사범을 시켜 강제로 내 손을 잡고 채혈했다. 그런 다음 또 구치소에서 가장 무서운 고문도구인 ‘방쯔(棒子)'(자체 제작한 고문도구로 매우 얇고 좁아서 손목에 채우면 틈이 없고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드러나게 할 수 있음)를 가져와서 나에게 채우고 또 발찌를 채웠으며 ‘방쯔’와 발찌를 연결했는데 거리가 매우 짧아서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나를 3일간 채워놓아 밥 먹기와 대소변을 모두 스스로 할 수 없었으며 감옥으로 보낼 때가 돼서야 풀어줬다.
2007년 10월, 나는 시 제1구치소에서 불법으로 타이라이 감옥으로 압송됐다. 떠나기 전날 나는 아내를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구치소 부소장 궈전촨(郭振川)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파룬궁은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타이라이 감옥에 도착했을 때 감옥은 막 파룬궁수련자들을 강제로 전향시키고 있었다. 내가 가기 전에 류징밍(劉晶明)이라는 수련자가 이미 박해로 사망했다. 후근감구 1분감구의 감구장 리잉(李瀛)은 내가 ‘전향’하지 않자 벌로 서있게 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서있었고 나중에는 저녁 10시까지 연장됐으며, 그다음에는 저녁 12시까지 연장됐다. 나는 2개월 동안 벌서기를 당했고 다리가 모두 부어올랐다. 분감구는 또 음식으로 날 학대했으며 나에게 반찬을 먹지 못하게 했다. 2008년에는 8개월 동안이나 반찬을 주지 않았다. 나는 만두에 찬물만 마실 수 있었고 채소밭에 물을 많이 대면 작업장에는 물이 없어서 만두를 물도 없이 그냥 씹어 먹어야만 했다. 2009년 봄, 분감구는 또 나를 자지 못하게 했다. 밤에 야간 근무하는 두 사람을 시켜 날 감시하며 눈을 감지 못하게 했고 눈을 감으면 베개를 잡아당겼다. 가장 심했던 것은 감방을 관리하는 형사범 쑹창춘(宋長春)이었는데 매일 밤 내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았다. 내가 눈을 감으면 그는 주먹으로 내 머리를 때렸고 새벽 2시가 되기 전에는 떠나지 않았다. 나는 20여 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낮에도 여전히 정상적으로 일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서 있다가 그냥 쓰러지기도 했다.
겨울에는 땅굴에서 저장 채소를 정리했다. 채소 저장고는 음침하고 습기가 많았고 지급된 솜옷도 얇았으며 매일 장시간 서 있어서 무릎 관절이 다쳐서 아팠다. 힘을 버티지 못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오른쪽 무릎 관절이 갑자기 움직이지 못하고 마치 걸린 것처럼 됐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걸을 수 없어서 한 발로만 뛰어다녔고 저녁이 돼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이는 감옥의 박해로 인한 것이다. 분감구장 리잉도 감옥의 압력 하에서 피동적으로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일을 했다.
2009년 11월, 나는 집에서 원화루 파출소 경찰 3명에게 납치돼 시 안전국 초대소(국영 여관)로 끌려갔다. 젠화구 ‘610사무실'(장쩌민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주임 자오핑(趙平)이 이미 그곳에 있었고 날 납치한 경찰이 그녀에게 “네가 원하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말했다. 세뇌반은 시 ‘610’이 책임졌고 ‘610’ 주임 리자밍(李家明)도 거기에 있었다. 온 사람들은 모두 젠화구와 이안(依安)현의 사람들이었다. 세뇌반은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했고 조작된 ‘톈안먼 분신’ 영상을 틀었으며 변절자들이 많이 참여했고, 또 무슨 선생을 불러와 태극권을 가르쳤다. 이안현의 농촌 파룬궁수련자 3명이 ‘전향’됐는데 그들 말로는 전향하지 않으면 강제노동을 보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각각 2,000위안의 ‘수업료’도 강탈당했다.
나와 아내가 불법 구류되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집에는 아이만 혼자 남았다. 그는 고1이었는데 밥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동네에서 빌어먹으며 연명했다. 저녁 9시에 하교해서 집에 와도 먹을 밥이 없어서 배를 곯은 채로 잠들어야만 했다. 아이는 부모가 보고 싶어서 타이라이 감옥에 와서 나를 만나려고 했지만 감옥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찰은 자주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괴롭혔고 아이는 심신이 매우 큰 상처를 입었다. 장인어른은 그해 88세셨는데 우리 부부가 납치된 후 큰 충격을 받으셨다. 한번은 계단에서 넘어져서 다리뼈가 골절되셨다. 4년 후 장인어른의 딸이 막 돌아왔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 이 모든 것은 장쩌민이 파룬궁 선량한 단체를 박해해 내 아름다운 가정에 가져온 재난이다.
장쩌민은 파룬궁을 이렇게 오랫동안 박해하면서 나의 정신과 육체에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 가정의 경제와 생활에도 엄청난 어려움을 초래했다. 2001년 내가 1년의 불법 강제노동을 당할 때 치치하얼시 국세청[당시 청장은 싱빙화(邢秉華)]은 내 1년치 월급을 압류했다. 2007년 내가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치치하얼시 국세청[당시 청장은 장다웨이(張大偉)]은 불법으로 내 공직을 해임하고 월급 지급을 중단했다. 나는 약 10년간 월급 수입이 없었는데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이는 장쩌민의 ‘경제적으로 끊어버리는’ 정책의 악행이며 장쩌민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중국 형법에 따르면 장쩌민은 공민 재산 불법 박탈죄를 범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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