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안후이성 허페이시 수련자 궈징란 억울하게 세상 떠나…생전 장쩌민 고소

[명혜망](안후이성 통신원) 안후이성 허페이시에 거주하던 궈징란(郭景蘭)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박해를 당했다. 그녀는 노동수용소에서 박해당했고, 구금당해 박해받았으며, 11일 연속으로 정신적·육체적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0여 년간 생계수단이었던 급여를 불법적으로 박탈당했고, 퇴직 연령이 됐을 때도 받아야 할 연금을 받지 못했다. 궈징란은 2024년 8월 23일 새벽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고 향년 73세다.

궈징란은 1951년 2월 19일생으로, 허페이시 루양구 환청난루 28호에 거주했다. 그녀는 파룬궁 수련 후 심신이 건강해졌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 우두머리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 박해 운동을 시작했고, 직접 박해 지휘 체계인 ‘파룬궁 문제 처리 지도소조’와 ‘610 사무실’을 설립해 각급 관리들이 파룬궁수련자들을 박해하도록 직접 조종했다.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을 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 공안병원, 비밀 감옥, 노동수용소, 구치소, 구류소, 세뇌반에 감금돼 박해당했고, 수많은 수련자와 그 가족들이 박해로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거나 미쳐버렸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부양받지 못했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됐으며, 얼마나 많은 행복한 가정이 파괴됐는가.

궈징란은 2015년 6월 18일 최고법원에 파룬궁 박해 주범 장쩌민을 고소했다. 다음은 그녀가 고소장에서 진술한 박해 사실이다.

“저는 이 큰 박해 속에서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 했다는 이유로 세 차례나 납치됐습니다. 장쩌민 집단은 제게 불법감금죄, 납치죄, 무고죄, 사리사욕으로 법을 어긴 죄, 노동자 강제노동죄, 불법수색죄, 주거침입죄, 모욕죄, 비방죄, 고문죄, 피구금자 학대죄, 공민 종교신앙 자유 불법박탈죄 등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2004년 8월부터 지금까지 제 연금을 박탈하고 유일한 생활 수단을 불법적으로 차단했습니다.

2001년 3월 2일, 저는 보저우(亳州)에서 610에 납치돼 구치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3년 강제노동 판결을 받아 안후이성 여자노동수용소로 보내질 때는 이미 박해로 인해 혈압이 130/230이었고 심장이 빨리 뛰어 분당 140회였으며, 심각한 심장병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노동수용소는 제 상태를 보고 단호히 수용을 거부했고, 보저우 610은 할 수 없이 저를 보저우 구치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도 사악한 610은 다시 저를 여자 노동수용소로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저는 감방에서 박해로 인해 심장병이 발작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구치소는 책임을 질까 봐 두려워했고 그제야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2002년 6월 28일 오후 3시경, 저는 조카딸와 함께 손자에게 줄 물건을 사러 가려고 막 집을 나섰는데 계단도 내려가기 전에 성 공안청 경찰 몇 명이 우리를 에워쌌습니다. 우리는 강제로 차에 실려 허페이시 후포산장 호텔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도 강제로 위층으로 끌려갔고, 안내데스크를 지나 몇 층인지도 모르는 복도 끝 방으로 끌려갔습니다. 몇 분 후 그들은 제 조카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고, 그때부터 조카와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강제로 자유를 빼앗겼고 외부와 단절됐으며, 가족과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곳에서 성 공안청, 보저우시 공안국, 차오청구 공안국, ‘610’, 보저우시 형사대 경찰 10여 명이 저를 방에 가두고, 주변 방을 모두 잡아 복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봉쇄구역을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했으며, 호텔 청소부조차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10여 명의 경찰이 이런 폐쇄된 환경에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며 중생을 구하지 못하게 하려고 저를 방의 난방관에 수갑으로 채우고 밤낮으로 심문을 멈추지 않았으며,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11일 연속 제 눈을 감지 못하게 했고,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욕설과 모욕, 협박이 이어졌고, 방안은 경찰의 고함소리로 가득했습니다. 험악한 얼굴이 제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위협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말할래? 말 안 하면 죽여버릴 거야.”, “말할래? 말 안 하면 반쯤 죽여서 위에서 던져버릴 거야.”, “어서 말해, 말 안 하면 네 자식들과 가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거야.” 그들은 제 양손이나 한 손을 수갑으로 난방관에 채우고 고문했으며, 눈을 감지 못하게 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탁자를 두드리고 의자를 치며 고함을 질렀고, 수갑을 꽉 조여 살을 파고들게 했습니다. 당시 제 손은 마비돼 감각을 잃었습니다. 6일을 고문한 후에도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사람을 바꿔가며 고문했습니다.

성 공안청 경찰은 그곳에서 밤낮으로 지키며 제 자료를 그들의 사악한 우두머리에게 바쳐 공을 세우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저우시 공안국 경찰은 공을 세우려고 세 차례나 인원을 교체했고, 매번 박해 수위가 높아졌습니다. 그들은 더욱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구타 소리와 욕설이 뒤엉켜 방 안에 가득했고, 도처에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계속해서 제 머리와 얼굴, 어깨, 가슴, 등을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손으로 때리다 지치면 책이나 자료 같은 것을 말아서 때렸습니다. 한번은 보저우시의 스(石) 씨 성을 가진 경찰이 저를 때린 후 며칠 동안 제 팔과 손을 들 수 없었고, 며칠 연속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들은 또 제 양손을 수갑으로 채워 창문에 매달아놓고 때렸습니다. 이렇게 또 5일을 고문당했습니다.

11일의 정신적·육체적 고문을 당한 후에도 경찰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히스테리적으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자료들을 가져와 계속해서 제 앞에 들이밀며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협박했지만, 저는 단호히 서명도 지장도 찍지 않았습니다. 계속 거부하자 그들은 더욱 미쳐 날뛰었고, 경찰 몇 명이 미친 듯이 달려들어 저를 제압했습니다. 제 오른손은 계속 난방관에 채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강제로 제 오른손으로 지장을 찍게 했습니다. 이렇게 비열하게 조작한 후 그들의 악행이 드러날까 봐 2002년 7월 9일 오후 6시경, 그들은 저를 비밀리에 허페이에서 250km나 떨어진 외진 현 소재지인 타이허로 끌고 가 그곳 구치소에 감금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소식을 차단하며 외부와 격리하는 강제 수단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경찰들은 선량한 대법제자인 저, 이 맨손의 50대가 넘은 좋은 사람에게 이토록 잔인했습니다! 저는 그토록 외진 곳에 격리돼 생활용품도 하나 없었습니다. 구치소 관리자에게 집에 전화해서 갈아입을 옷과 생필품을 가져오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도 감히 전화를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구금자라서 상부의 지시 없이는 감히 그럴 수도 없고 방법도 없다고 했습니다. 비인간적인 생활고에 시달린 몇 달 만에 제 체중은 70kg이 넘었는데 50kg대로 줄었고, 입고 있던 옷은 4분의 1이나 커졌으며, 머리가 백발이 되고 많이 빠졌습니다.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몇 달을 살다가 또다시 사악한 자들에 의해 보저우 구치소로 이송돼 외부와 단절됐고, 가족의 소식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이렇게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제 가족도 박해했습니다. 조카딸 훙샤(紅俠)는 당시 저와 함께 있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28일 동안 불법 구금됐습니다.

단지 제가 대법제자(파룬궁수련자)이고 진선인의 기준에 따라 일하고 처신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999년 ‘4·25′(파룬궁수련자 1만 명이 베이징에서 평화롭게 청원한 날) 이후 불법 행위자들이 여러 차례 저와 제 가족을 박해했습니다. 국가 법률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파룬궁과 수련자들이 20년 가까이 당한 누명을 씻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법원에 파룬궁 박해 주범 장쩌민의 죄행을 고소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11/48599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12/11/485997.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