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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시 68세 파룬궁수련자 왕추핑, 4년 옥살이 경험 고발

[명혜망](랴오닝성 통신원) 선양시 톄시구 파룬궁수련자 왕추핑(王秋萍·68)은 2020년 2월 22일 코로나 관련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한 무장경찰의 고발로 마루완 파출소에 납치됐다가 한밤중에 탈출했다. 같은 해 2월 27일 그녀는 다시 납치돼 허핑구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박해를 받았다. 4월 13일 그녀는 허핑구 국보에 의해 선양시 제2구치소에 불법 구금됐고, 12월 28일 4년형을 선고받아 2024년 3월 14일 출소했다.

왕추핑은 1999년 이전에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는 진선인(眞·善·忍)의 법리에 따라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했고 심신이 건강해지고 도덕성이 향상돼 사회에 백 가지 이로움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움도 없었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시작한 후 그녀는 수련을 고수하며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을 계속했다. 2001년 베이징에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 하려다 그녀는 직장에 의해 납치돼 보름 동안 불법 감금됐고, 이후 주민센터에 의해 강제로 장스 세뇌반으로 보내져 보름 동안 불법 감금됐다. 2011년 3월 26일 그녀는 중화문화를 선양하는 션윈 DVD를 배포하다 윈펑 파출소에 납치돼 선양시 구치소로 끌려가 한 달 동안 구금 박해를 당했고 이후 1년 강제노동 처분을 받아 악명 높은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수용소에 감금됐다. 그곳에서 그녀는 강제 ‘전향’, 벌 서기, 노역 등 박해를 당했다.

다음은 왕추핑이 진술한 2020년 2월 재차 납치돼 구금되고 4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힌 경험이다.

2020년 2월 22일은 코로나가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내가 세인들에게 ‘9자 진언'[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으로 전염병을 피하라는 진상 자료를 나눠주다 한 무장경찰에게 발각됐다. 당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여 자전거를 버리고 도망쳤다. 하지만 무장경찰이 날 붙잡고 심지어 내 몸 위에 올라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이때 한 무리 사람들이 와서 이들에게 신고하라고 했고, 그중 한 명이 110에 전화를 걸었다. 마루완 파출소에서 출동해 날 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 도착해 나는 그들에게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면 하늘이 복과 평안을 내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 가방을 뒤져 현금 1700위안과 버스카드, 휴대폰, 어떤 대형마트 충전카드(80여 위안이 남아있었음), 집 열쇠 등을 꺼냈다. 그들은 내 사진을 찍었고 나는 주소와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이 알아냈다. 그들은 내 집을 불법 수색해 파룬궁 서적들과 컴퓨터 본체를 가져갔다. 프린터와 작은 DVD 플레이어, 재단기도 가져갔다. 이 사실은 내가 출소한 후에야 알게 됐다. 지금까지 파출소는 내 주머니에 있던 돈을 돌려주지 않았고, 자전거 한 대도 압수한 채 돌려주지 않고 있다.

날 체포하고 고발한 사람은 리팡하이라고 한다. 그들은 날 불법적으로 파출소로 끌고 가 밤새 감시했다. 밤에는 남자 경찰 두 명이 지키다가 한밤중에 교대하면서 한 명만 남았다. 이 남자는 매트리스를 가져와 바닥에 깔고 문을 막은 채 잠들었다. 그때 나는 수갑에서 손을 빼내 문과 창문을 열고 도망쳤다. 27일 아침 나는 다시 마루완의 사복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내 목을 눌러 숨을 쉬지 못하게 했고, 한 젊은 경찰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나는 “내가 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대하나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날 파출소로 끌고 가 감방에 가뒀고 24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당시 내 양손은 수갑에 묶여 있었고 피곤해서 바닥에 누워 졸았다. 3~5일이 지나자 소장이 다른 곳을 찾아주겠다고 했는데 그곳은 정신병원이었다. 거기서 보름 넘게 갇혀 있으면서 정신을 통제하는 약을 강제로 먹어야 했다. 나는 아무 병이 없는데도 그들은 억지로 약을 먹였다. 처음에는 반 알을 먹다가 나중에는 한 알을 먹게 됐는데, 이상함을 느껴 약 먹기를 중단했다. 그러자 그들은 날 정신병 검사를 받으러 보내겠다고 했다. 가는 길에 파출소에서 보낸 젊은 경찰이 날 감시했는데,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가 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협박했다.

며칠 후 그들은 날 선양 제1구치소로 보냈다.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 결국 선양 제2구치소로 보내졌고, 이렇게 해서 그들의 임무가 완료됐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 집에 전화해서 내 옷을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보내지 않았다. 나는 선양 제2구치소에서 한 달 넘게 있다가 다시 선양 제1구치소로 옮겨졌고, 거기서 1년 8개월을 더 있다가 선양 제2여자감옥으로 보내져 박해받았다.

그들은 나를 3감구(監區) 5소대로 배정했다. 먼저 ‘전향(수련 포기)’을 강요했는데, 대장은 위루였고 생산조장은 왕옌이었다. 왕옌은 날 비웃었다. 작업장에서 그들은 날 감시 카메라가 없는 사각지대로 데려가 열린 창문 쪽을 향해 서 있게 했다. 솜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가장 추운 1월이었다. 신발도 신지 못하게 하고 시멘트 바닥에 서 있게 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움직이면 욕을 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 35분에 작업장으로 나가 노동교대 작업장에 서 있다가 저녁 6시 35분에 작업을 마쳤다. 하루 10시간 넘게 서 있어야 했고 추워서 떨었다. 이틀 동안 그렇게 얼렸더니 나는 정말 견디기 힘들어져서 마음에도 없는 이른바 ‘5서(수련 포기 각서)’를 썼다. 그들은 또 녹화를 하라고 했고 녹화하지 않으면 계속 박해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법을 배반했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왕옌은 날 박해한 일로 인해 보응을 받아 생산조장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감구로 옮겨갔다. 소대에는 가오옌이라는 새 생산조장이 왔다.

示意图:中共监狱中的奴工迫害
중공 감옥의 노역 박해 (예시도)

곧이어 그들은 생산 노동 방면에서 날 박해했다. 옷을 만들었는데 매일 10시간 넘게 일했다. 나에게 안감을 대는 일을 시켰고 혼자서 5~6가지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이 일하는 양까지 채워야 했다. 그때 나는 66세였지만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일을 다 해내지 못하면 생산조장에게 욕을 먹고 비웃음을 당했다. 그래서 일이 많아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욕먹는 게 두려워 그저 견디며 일했다.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일했다.

그때 나는 106호실에 살았는데, 방장 톈펑이 날 매우 괴롭혔다. 나는 그녀와 같은 행동조였는데 그녀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만 갈 수 있었다. 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그녀가 함께 가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몰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갔고 나는 가지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가지 못하게 했고 누군가 나와 함께 가면 그 사람도 욕을 먹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감옥에서 1년, 구치소에서 2년, 총 3년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장자난 대장에게 면회 신청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다른 대장에게 말하라고 했다. 당시 자오 대장이 당직이어서 그녀에게 말했더니 평소대로 신청하라고 했다. 나는 돌아가서 방장 톈펑에게 면회 신청을 한 번 해달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해주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화장실 다녀올 때 혼자 걸어가다 생산조장에게 발각돼 한바탕 말을 들었고 면회 자격을 박탈당했다. 당시 나는 3년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어느 날 가오 대장이 집에 전화를 하게 해줬다. 전화를 끝내고 보니 집에서 변호사를 불러 다음 날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산조장 가오옌은 나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은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면회 자격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변호사가 왔고 진위 대장과 판 대장이 나를 데리고 면회했다. 진위 대장은 앞으로 마음대로 변호사나 가족을 부르지 말라며 그녀에게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말라고 위협했다. 변호사가 날 만나러 와서 편지를 한 통 가져왔는데 막 읽어주려고 하자 판 대장이 가로막으며 읽지 못하게 했다. 결국 변호사는 읽지 못했다. 변호사가 다른 일들에 대해 물었고 생산 상황과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노동 생산을 한다고만 말했고 어떤 일을 하는지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사상 보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한번은 내가 쓰고 싶지 않아 하자 칸카이 대장이 종이 몇 장을 가져와 쓰라고 했다. 나는 쓰지 않았다. 다음날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날 공안 사무실로 불렀다. 들어가자마자 서 있으라고 했고 또 쪼그려 앉으라고 했다. 나는 따르지 않았다. 하루 종일 10시간 넘게 일하고 밤에 또 벌로 서 있게 해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또 한번은 우리 소대와 다른 소대가 나란히 일하고 있을 때 수련생을 만나 말을 몇 마디 나눴는데 다른 수감자가 보고 칸카이 대장에게 알렸다. 칸 대장은 나를 작업장에서 2시간 넘게 서 있게 했다. 한번은 내가 사상 보고서를 쓰지 않자 대장이 날 사무실에 서 있게 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때로는 그보다 더 늦게까지 10시간 넘게 일했다. 감방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벌로 서 있어야 했고 완전히 지쳐 거의 기절할 뻔했다. 반성문을 쓸 때 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장자난 대장이 악랄하게 방장(대원이라는 이름)에게 말했다. 쓰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며 세면도 못하게 하고, 물건도 못 사게 하고, 밥과 뜨거운 물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짐도 모두 가져가고 작은 밥 한 술만 주며, 아무도 날 상대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감옥은 대법제자들에게 매우 가혹했다. 노동 보수로 매달 5위안(약 1천 원)이나 10위안만 줬는데 이는 생활용품을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반면 일반 수감자들은 100위안, 70~80위안을 받았다. 과일을 줄 때도 항상 다른 사람들이 고르고 남은 것 중 가장 작은 것을 줬다. 때로 의류 공장 관계자들이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햄버거를 사주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2~3개씩 받았지만 우리에게는 1개만 줬다. 비록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우리 수련인은 이런 것들을 개의치 않았다. 때로는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 잘못이 됐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일을 잘 하지 못해도 욕을 먹고, 이불을 잘 개지 못해도 욕을 먹고, 생활을 잘 하지 못해도 욕을 먹었다. 요컨대 날 괴롭히려고만 했다.

출소 한 달 전, 아침 작업 시간에 이곳의 생산조장들은 아침을 먹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일 욕심 때문이었다. 누군가 밥을 먹으러 가면 모두가 가야 했고 한 명도 빠질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아침을 먹으러 가면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돼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아침을 먹으러 가지 못했다. 모두가 평소에 사 둔 ‘배급품’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배급품 구매를 중단시켰다. 방의 물건들을 그들이 정한 수량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점수를 깎고 배급품 구매를 중단시켰다. 이런 사람들은 생산 노동 중에 굶어야 했다. 어떤 이들은 각종 압박 속에서 갑자기 쓰러져 동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 처치를 받았다. 별 문제 없다고 생각되면 돌아와 계속 일했다. 나는 감옥에 들어와서 10개월 동안 배급품을 사지 못했다. 때로는 식사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아 반드시 배급품으로 보충해야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배고파서 어지러워하고 현기증이 났는데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대장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그들을 위해 일해서 이익을 창출하기만 하면 됐다.

작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고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한 사람이 방을 나가려면 방 전체 사람들이 다 나가야 했다. 한 사람이 화장실에 가려면 방 전체 사람들이 다 가야 했다. 사람들은 이를 견디기 힘들어했고 서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갈등이 특히 격화돼 화장실 가는 것조차 매우 어려웠다. 그들은 모든 것을 통제했고 일부러 문제를 만들었는데 정말 사악했다. 그곳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고 하루하루가 1년 같았다.

대법제자들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3감구 1소대에서 1소대장은 계속해서 대법제자 장샤오나가 세면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출소하기 전 3개월 넘게 그녀는 세면을 하지 못했다. 2소대에도 한 명의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악인들이 계속 그녀를 세면하지 못하게 해서 몸에서 냄새가 났다. 나중에 정말 안 되겠다 싶어서야 그들은 그녀를 세면하게 했다. 나중에 연말이 되자 그녀의 소대는 그녀에게 세뇌반을 열었다. 매일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벌로 서 있게 했고,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 서 있게 했다. 이는 새로 승진한 천 과장이 수감자들을 조종해 이렇게 하도록 한 것이었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1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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