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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수련자 쿵샹주가 진상 삽입방송을 한 후 겪은 시달림

[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헤이룽장성 솽야산시 파룬궁수련자 쿵샹주(孔祥柱)는 2002년에 지역 케이블TV에서 파룬궁 진상 영상 삽입방송에 성공한 후, 경찰에 의해 납치 및 고문 학대를 당했고 불법적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무단장 감옥에서 박해를 당해 사경을 헤맸다. 2007년 4월 18일, 가족은 그를 감옥에서 집으로 업어갔는데 두 달 후인 향년 39세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삽입방송 내용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는 국가와 국민에게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이 하나도 없으며, 천안문광장에서의 분신자살 날조극을 폭로했다. 삽입방송 시간은 2002년 4월 말 저녁 황금 시간대 뉴스 시간대로 약 20분간 진행됐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왜 감히 중국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지 않으려 하고 진상을 아는 선량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일까? 소위 ‘1400사례’과 ‘천안문광장 분신 사건’ 등 사기 수단에 여전히 세뇌당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위해, 지난 25년간 목숨의 대가를 치른 사람은 쿵샹주 한 사람뿐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마음을 열고 진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시기 바란다.

쿵샹주(孔祥柱)

쿵샹주의 아버지가 생전에 전한 바에 따르면, 쿵샹주는 진상 영상을 성공적으로 삽입 방송한 후, 방송할 지역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타지로 갔다가 그곳에서 잠복 감시하던 젠산 공안분국 경찰에게 납치돼 솽야산 형사경찰대의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어떤 학대를 받더라도 쿵샹주는 관련 수련자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 경찰은 그의 배에 쇠 도구를 집어넣어 구멍을 냈으며 장이 흘러나오게 했다.

당시 삽입 방송한 지점은 솽야산시 젠산구 둥핑행로와 우마로가 교차하는 곳이었고, 영상은 솽야산 방송국의 케이블TV 서비스 지역 내에서 수신할 수 있었다. 진상 영상이 도시에서 40km 이상 떨어진 광산 지역과 마을에서 수신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선량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중공의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사악한 본성을 잊고 (중공이) 파룬궁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고 생각했다.

酷刑演示:多根电棍电击
고문 재연: 여러 대의 전기봉으로 충격 가하기

2002년 5월 1일 저녁, 쿵샹주는 솽야산시 형사경찰대대에 납치됐다. 다음 날 가족들은 그가 응급처치를 위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술실로 옮겨진 그는 온몸에 멍이 들고, 등 전체가 전기봉에 그을렸으며, 목이 너무 심하게 맞아 살과 뼈가 분리된 상태였다. 흉수는 610을 담당하는 공안국장 링칭판과 링다웨이, 리훙보, 두잔이, 류웨이궈 등 깡패들이었다. 한 경찰은 쿵샹주가 스스로 녹슨 송곳으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고 주장했다.

병원에서 쿵샹주는 한동안 정신이 맑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고, 수술과 간호를 위해 입은 바지 한 벌만 남긴 채 벌거벗은 상태로 있게 했다. 형사경찰팀이 어떤 방법으로 온몸을 구타했는지는 모르지만 등 전체가 전기밥솥 위에 누운 듯 화상을 입었고, 경찰이 또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그의 목 부위를 뼈와 살이 분리되게 만들었는지 더더욱 알 수 없다. 수술 6일 후 실밥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은 그를 족쇄를 채워 침대 끝에 고정시켰고 실밥을 제거한 다음 날 그는 급히 구치소로 보내졌다. 구치소 경찰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금지했다.

酷刑演示:脚镣
고문 재연: 족쇄

2002년 9월 3일 오전, 쿵샹주는 솽야산시 젠산구 법원에서 불법 재판을 받으며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고 외치며 판사석으로 갔다. 판사가 전단지 배포와 케이블 TV 방송 여부를 묻자 그는 혼자 했으며, 진상을 알리고 거짓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대답했다.

이어 판사가 형사경찰대에서의 폭력 여부를 묻자 쿵샹주는 셔츠를 걷어 올려 경찰 폭력으로 중태에 빠졌을 때 생긴 가슴의 흉터를 증거라며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폭력으로 자백을 강요당하고 정신착란 상태에 있을 때 한 진술은 무효라고 성명했다.

쿵샹주는 최소 8년형을 선고받고 2006년 6월 무단장 감옥에서 결핵성 뇌막염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7월 한동안 밖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고 하반신 마비, 대소변 실금, 정신 혼미 등 증세가 있었다. 가족들의 석방 요청에도 감옥 측은 생명을 풀 한 포기 정도로 여기며 무시했고 가석방을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다. 가족의 10개월 노력 끝에 그는 2007년 4월 17일 5천 위안을 갈취당한 후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박해로 뼈만 앙상하고 극도로 쇠약해진 데다 혼수상태에 빠져, 결국 그해 6월 23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원문발표: 2024년 9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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