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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원덩시 벽걸이 공예품 공장장 톈스훙, 박해로 억울하게 사망

[명혜망](산둥성 통신원) 산둥성 원덩(文登)시 벽걸이 공예품 공장장 톈스훙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감시와 소란, 납치, 불법 구금, 불법 강제노동을 받았다. 톈스훙은 장기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압 박해를 받다가 2019년 11월 말 향년 64세의 나이로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2019년까지도 중국공산당의 톈스훙에 대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2019년 6월 산둥성 칭다오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 기구 정상 회의 기간에는 톈스훙의 집 앞에 감시카메라가 달린 낡은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회의가 끝난 후에야 사라졌다. 현지 공안은 톈스훙의 공장 앞에도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톈스훙은 원덩 벽걸이 공예품 공장의 공장장으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파룬궁 수련 전 그는 경기 침체로 밤낮으로 공장 일에 시달리느라 건강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가 건강 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건강과 정신이 회복되었다. 우아한 외모에 장신인 그를 보고 젊은이들은 그가 50, 60대처럼 보이지 않고 늠름하고 기품이 넘친다고 말했다.

그의 공장은 대부분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으로 자신을 수련하고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그 결과 공장 전체의 분위기가 쇄신됐고, 경제적 이익도 향상되어 제품이 전국에 팔리게 됐다. 톈스훙은 고객에게 정직하고 진실했기에 고객들도 그와 거래하기를 좋아했고 장사는 점점 더 잘 됐다. 흔히들 ‘장사꾼 중에 정직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의 사업 방식은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식사와 숙박 환경도 개선했다. 미혼과 기혼 노동자 모두에게 각자 숙소를 제공하고 편의시설을 완비했다. 노동자들은 안심하고 일했고 공장을 제2의 집으로, 공장장을 가족처럼 여겼다.

​공안의 광란의 체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선량한 사람을 박해하는 경찰의 범죄 행위에 맞서 용감하게 자신들의 공장장을 지켜냈다. 당시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공안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맞섰던 광경은 매우 장엄했다.(아래 사진 참조)

二零一一年五月十二日山东文登国保警察欲劫持厂长田世洪去洗脑班,遭到上百名工人和家属制止
2011년 5월 12일, 산둥시 원덩시 공안국 경찰이 공장장 톈스훙을 끌고 가 세뇌반에 넣으려 했지만 수백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이를 막아섰다.

2015년, 톈스훙은 16년간 자신이 겪은 잔혹한 박해에 대한 내용을 담아 장쩌민을 고소하는 글을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제출했다. 고소장에는 장기간의 박해가 그와 가족, 공장 직원들에게 끼친 심각한 피해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은 톈스훙이 장쩌민 고소장에서 밝힌 자신의 경험이다.

2001년 1월 22일, 파룬궁 수련으로 심신의 이로움을 얻은 나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목소리를 내려 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사복 경찰에 의해 끌려가 베이징 주재 원덩 사무소에 불법 감금됐다. 그곳에서 경찰의 폭행과 모욕, 화장실 감금, 수면 박탈 등 고문을 당했다. 이후 원덩으로 압송돼 구치소에서 7일간 억류되었다. 당시 연말이라 경찰들은 명절을 쇠러 갔고, 나와 구금된 수련자들은 절인 채소와 차가운 찐빵을 먹었다. 석방 후 집에 돌아와서야 한밤중에 지역 파출소장 차이더성(蔡德勝)이 경찰들과 함께 그의 집에 들이닥쳐 7천여 위안을 강탈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 서기는 사람을 시켜 날 매일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시켰다.

2003년 3월, 경찰들이 공장으로 찾아와 파출소장 차이더성이 아프니 가보라고 했다. 나는 함정일 수 있다는 걸 직감했지만 선한 본성으로 파출소에 갔다. 결국 나는 차이더성과 ‘610 사무실'(중공 당국의 파룬궁 박해 기구)의 샹훙핑에게 속아 세뇌반에 끌려갔다. 류위장 등을 위시한 ‘610’ 경찰들은 날 강제로 공장에서 데려가 감금하고 감시하며, 파룬따파를 비방하는 영상을 시청하도록 강요했다. 박해에 가담한 자들로는 류위장, 샹훙핑, 왕샤오보, 상훙보, 비젠웨이 등이 있었다. 얼마 후 나와 다른 파룬궁수련자 3명은 담을 넘어 탈출했다. 세뇌반은 도처에 사람을 풀어 우리를 찾았으나, 한 친구가 류위장과 대화를 나눈 후에야 추적을 멈췄다. 우리는 이후 2개월간 세뇌반에 불법 감금됐다.

2004년 5월 9일 아침, 파룬궁 진상 전단을 붙이던 중 악인에게 붙잡혀 구치소로 이송됐다. 나는 또다시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고 2개월 가까이 도망 다녔다. 구금 기간, 원덩 경찰은 사사로이 우리집에 들어가 딸의 학습용 컴퓨터를 불법 압수해갔다. 5월 20일경에는 원덩 공안국 610 사무실이 공장에 와서 소란을 피웠다.

어느 날 나는 일 처리를 위해 공장에 왔다가 뜻밖에 진상을 모르는 가족의 밀고로 발각됐다. 7월 6일, 구치소장 왕충룬과 610 사무실의 샹훙핑 등 30~40명이 갑자기 공장에 쳐들어와 날 납치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 공장의 60여 명 노동자들이 정의롭게 저항했다. 그들은 “우리 공장장은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을 잡아가선 안 된다!”고 외쳤다. 하지만 장쩌민 정치 깡패 집단 앞잡이들은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라인더를 동원해 내 수갑을 끊으려 했다. 불꽃이 노동자의 팔에 화상을 입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 구하려 했다. 이성을 잃은 경찰은 정세가 불리해지자 한편으론 폭력을 행사하고 한편으론 휴대폰으로 지원 경찰을 불렀다. 이내 경찰차 몇 대가 도착해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일부 노동자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한 명은 너무 맞아 기절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불법적으로 납치됐다.

내가 끌려간 후 노동자들은 정의를 위해 헌법이 보장한 청원권을 행사하고자 시 신방판공실(민원사무실)에 가서 날 위해 호소했다. 그들은 인내심을 갖고 2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뜻밖에도 시 정법위 부서기 류위장, 공안국장, 환산루 파출소장 차이더성, 구치소장 왕충룬 등이 60여 명의 공안을 이끌고 와 50~60명의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는 현장에서 공장 간부 10명을 불법 체포하고 구금했다. 80세 노인 한 분과 아이를 동반한 여성에게는 200위안의 벌금을 물린 뒤 풀어주었다.

2004년 7월 8일, 나는 3년 강제노동을 처분받고 산둥성 쯔보시 왕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나는 고혈압 증상이 있었고 수용소 규정상 50세 이상은 수감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샹훙핑이 조작해 억지로 수감시켰다. 나는 수용소에서 비인간적 학대를 받았다. 벌을 서고, 수용소 규칙을 암기하며, 번갈아 세뇌당하고, 파룬궁을 모욕하는 글을 쓰도록 끊임없이 강요받았다. 불법 구금 3개월 만에 혈압이 220까지 치솟자 수용소 측은 책임을 두려워해 날 석방했다.

2005년 3월 5일, 나는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려다가 기차역에서 왕샤오보 등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들에게 이유를 묻자 명확한 답변 없이 날 미산 파출소로, 이어 환산 파출소로 끌고 가 약 3시간 동안 억류했다. 가족들의 교섭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2006년, 원덩시 ‘610 사무실’ 책임자 류위장이 물러나고 새 책임자 류모 씨가 샹훙핑 등 5~6명과 함께 집으로 찾아와 날 괴롭혔다.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자 610 사무실 일행은 슬그머니 돌아갔다.

2011년 5월 12일 아침 8시, 환산 파출소의 왕융, 장이, 비씨 부소장 등 10여 명의 경찰이 갑자기 내 사무실로 들이닥쳐 따라오라고 요구했다. 나는 “왜 당신들과 가야 하나요?”라고 따졌다. 경찰들에게 이름을 물었지만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감히 대답하지 못했고 일부는 경찰 번호마저 감췄다. 왕융 파출소장은 경찰들이 제 역할을 못한다며 “다들 죽었나? 어서 해!”라고 고 호통을 치며 직접 나에게 수갑을 채웠다. 계단 중간쯤 노동자들이 날 에워싸자 몇몇은 경찰과 육박전을 벌일 뻔했다. 이때 아내도 달려와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무슨 죄가 있나요?”라며 경찰들을 꾸짖었다. 한 여성 간부는 “잠깐 교육받고 돌아올 거예요”라고 했다. 톈스훙의 아내는 “장쩌민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고 당신들은 모두 속고 있어요. 우린 이미 경찰을 믿지 않아요!”라고 항의했다. 한동안 대치가 이어지다 가족과 노동자들의 완강한 반대로 경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의로운 기세에 눌려 경찰의 납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톈스훙 고소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었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수호하는 건 진실을 말할 권리, 질병을 제거하고 건강해질 권리, 도덕을 향상할 권리, 신앙 자유에 대한 권리다. 이는 또한 모든 중국인의 천부인권이다. 16년간 반복된 납치와 감금, 강제노동을 받는 동안 공장은 여러 번 폐업 직전의 위기에 내몰렸고 경제적 손실도 막심했다. 가족들과 노동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특히 아내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너질 뻔했다. 이는 모두 장쩌민 일당이 저지른 것이다. 나는 장쩌민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을 강력히 요구한다!”

 

원문발표: 2019년 12월 2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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