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허베이성 첸시현 파룬궁수련자 장루이잉, 원한 품고 세상 떠나

[명혜망](허베이성 통신원) 허베이성 탕산시 첸시현 파룬궁수련자 장루이잉(張瑞英)은 중공 악당의 파룬궁 박해 이후, 진선인(真·善·忍) 신념을 고수하고 양심을 지키며 민중에게 진상을 알리는 일을 견지해 왔다. 이로 인해 중공의 잔인한 박해를 받았고, 2023년 1월 6일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여 세였다.

장루이잉은 첸시현 상업국 퇴직 직원이었다. 1996년 7월 파룬궁 수련의 인연을 얻은 그녀는 수련서 《전법륜》을 읽기 시작했고, 20여 년간 앓아온 각종 질병이 사라졌다. 그녀는 파룬따파의 진선인 표준에 엄격히 따라 자신을 수련했고, 일을 처리할 때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신기한 신체적 변화와 고상한 언행을 보고 수련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장루이잉이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겪은 아름다운 체험과 중공의 잔인한 박해 사실이다.

1. 장루이잉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기적

《전법륜》 읽고 20여 년 된 질병 모두 사라져

장루이잉은 19살 여름날, 생리 기간 중 상점에 위생용품을 사러 갔다가 큰비에 갇히게 됐다. 비는 계속 내렸고 점심때가 되자 모든 사람이 식사하러 갔으며, 작은 상점 밖에는 장루이잉과 10대 청년 한 명만 남아있었다. 그때 큰비로 인해 하천이 범람했고 물이 ‘쏴’ 소리를 내며 하천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강가에는 10여 개의 돼지우리가 있었고 생산대에서 키우는 수십 마리 돼지들이 있었는데 이 돼지들이 큰물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장루이잉과 그 청년은 함께 허리까지 오는 깊은 물을 헤치며 돼지우리 문을 하나하나 열어 모든 돼지를 구출했다.

장루이잉은 생리 기간 중 너무 오랜 시간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생리 때마다 허리와 배가 너무 아팠고, 아랫배가 딱딱했으며 눌러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생리 때마다 출혈이 심해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때로는 조금만 움직여도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매번 생리 기간이 매우 길어서 한 달에 깨끗한 날이 며칠 되지 않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장루이잉은 은침, 부항, 민간요법 등 각종 치료법을 동원했다. 송곳보다 굵은 은침이 단단한 복부에 찔러 들어갈 때 ‘쓱쓱’ 소리가 들렸다. 장루이잉은 좋은 의사가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현지 병원과 의사는 물론이고 시내와 이웃 현의 여러 곳까지 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고 나중에는 어머니의 귀걸이와 은전까지 팔아야 했다. 한동안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직장 맞은편에 있는 공사 의원에 가서 주사를 맞은 후 출근했다. 장루이잉은 나중에 또 몇 가지 난잡한 기공을 연마하면서 적잖은 돈을 썼지만 효과는커녕 몸이 점점 더 나빠졌다.

장루이잉이 40대였을 때, 병을 고치기 위해 유명한 중의사에게 중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1년 남짓 후 그 의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신뢰하고 의지하던 사람이 떠나자 장루이잉은 절망에 빠졌다. 당시 장루이잉이 앓고 있던 질병으로는 빈혈, 간경화 말기, 부인과 질환, 류머티즘, 요통, 견관절염, 메니에르 증후군 등이 있었고,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으며 약을 먹다 보니 이가 다 시려졌다. 혈소판 수치가 최저치에 이르러 잇몸 출혈이 잦았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입안에 핏덩이가 가득했다. 온몸에 작은 붉은 점(출혈점)이 있어서 실수로 어딘가를 살짝 긁어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빨래와 채소 씻기는 남편이 모두 도맡아 했고 두 사람의 월급으로는 약값이 모자랐다. 그녀는 그때 정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느꼈고 온종일 근심에 가득 차 있었다.

1996년 7월 말 어느 날, 장루이잉의 옛 동창 아버지가 그녀에게 말했다. “방금 좋은 책 《전법륜》이 나왔어. 한번 봐.” 장루이잉은 마음속으로 뭔가 깨달음이 와서 말했다. “저도 보게 해주세요.” 그가 말했다. “나도 못 가겠어. 네가 우체국 서점에 가서 한 권 사와.” 그날은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루이잉은 추위를 타는 것도 잊은 채 우산을 쓰고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물을 헤치며 갔다. 나중에야 그녀는 놀라움을 느꼈다. 당시 종아리까지 오는 물인데도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다리가 뜨끈뜨끈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오후 장루이잉은 《전법륜》을 읽기 시작했고 한시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다음 날 오전까지 책을 다 읽었다. 장루이잉은 책 속의 법리에 감탄했고 무척 격동됐다. 그녀는 깨달았다. 파룬따파야말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었다.

《전법륜》을 며칠 읽은 것만으로도 장루이잉의 몸에 있던 각종 불편한 느낌이 사라졌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들은 기쁨과 체험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 허리, 어깨 등 도처에서 무언가 돌고 있는 느낌이 들어 매우 편안했다. 그녀는 심지어 아랫배가 특히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자신이 다시 임신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병원에 가서 검사까지 받았다.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야 사부님께서 자신의 몸을 조정해주고 계신 것임을 확신했다. 그녀는 사부님께서 자신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다.

사부님의 전지전능함을 직접 체험하다

장루이잉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했고 일을 처리할 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장루이잉은 퇴직 후 사진 촬영으로 얻는 적은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가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날 한 트레일러 운전사가 와서 트레일러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을 찍은 후 운전사는 구도를 보려고 했는데 실수로 카메라 렌즈 걸쇠를 건드려 값비싼 고배율 줌렌즈가 바닥에 ‘딱’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당시 고배율 줌렌즈의 도매가는 2천 위안이 넘었는데 사진 한 장에 불과 몇 마오씩 받고, 하루 종일 사진을 찍어도 겨우 몇십 위안밖에 벌지 못했다. 만약 렌즈가 망가지면 장루이잉의 당시 경제 상황으로는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운전사도 무척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루이잉은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겁내지 마세요. 저는 당신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파룬궁수련자거든요. 우리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제가 파룬궁수련자가 아니었다면 오늘 당신에게 당장 2천 위안을 준비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녀는 운전사에게 “이제 가세요”라고 말했다. 운전사는 감사해하며 자리를 떴다.

장루이잉은 방으로 돌아와 탁자 모서리를 배경으로 사진 두 장을 찍었다. 현상한 후 필름이 흐릿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렌즈는 쓸 수 없게 됐다. 장루이잉은 침대에 누워 걱정에 빠졌다. ‘어쩌지?’ 그녀가 잠든 듯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렌즈를 고치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사부님께서 “고쳤으니 쓸 수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장루이잉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다시 원래의 탁자 모서리를 배경으로 두 장을 찍었다. 즉시 현상했더니 필름의 효과가 매우 좋았다!

장루이잉은 직접 체험했다. 제자가 법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고 어떤 층차의 심성 표준에 도달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장루이잉의 몸에 일어난 큰 변화와 그녀가 보여준 정신적, 도덕적 면모는 많은 사람에게 파룬따파의 신기함을 목도하게 했고, 그녀의 가족과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도 파룬궁 수련을 시작해 모두 대법 중에서 이롭게 됐다.

2. 진실을 알리러 나섰다가 장루이잉이 당한 납치, 모욕, 고문, 강제노동

여러 차례 납치를 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장루이잉은 이렇게 훌륭한 사부님과 대법을,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심 없이 병을 제거하고 건강해지게 하는 좋은 공법을 억지로 단속하고 탄압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1999년 7월 22일, 장루이잉은 탕산시 정부에 가서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시 정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경찰에게 억지로 끌려 경찰차에 실렸다. 경찰차에는 청원하러 간 파룬궁수련자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탕산시 공안국으로 끌려갔고 그들은 각자 다른 방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후 장루이잉은 시 공안국에 의해 첸시현 상업국에 통보됐다. 첸시현 상업국은 차를 타고 시 공안국에 가서 그녀를 직장으로 끌고 가 며칠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고, 가족들에게 2천 위안의 보증금을 요구한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1999년 12월, 첸시현 악당 인원들은 파룬궁수련자들이 청원하러 갈까 봐 걱정된다는 구실로 대규모 파룬궁수련자들을 무단으로 납치했는데 장루이잉도 납치됐다.

2000년 7월, 장루이잉은 대법의 명예를 위해 호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경찰의 겹겹의 방해를 뚫고 베이징 톈안먼광장에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파룬따파는 바른 것이고 사부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결백하신 분이십니다. CCTV에서 보도한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거짓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막 광장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어디 가려고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이 차에 타요.” 차에 탄 후에야 그 사람이 변장한 스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곧장 차오먼 파출소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파룬궁수련자들이 와 있었다. 번호를 매기고는 계속 잡아오고 계속 보내는데, 하루에도 5~6천, 6~7천 명의 수련자들이 와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장루이잉은 이후에 현지 경찰에 의해 인수되어 한 달 넘게 불법 구금됐다. 구치소에서는 곰팡이 핀 옥수수 떡을 줬는데, 제대로 쪄지지도 않아 들면 금방 가루가 떨어졌고, 옥수수죽은 쓴맛이 났으며, 만두는 새까맣고 역겨웠고, 마시는 물은 찜통 밑에서 나오는 물이었다. 구금 기간이 만료되자 또 3천 위안을 강탈당했다.

2000년 12월, 장루이잉은 또다시 베이징에 가서 대법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광장에서 경찰에게 납치된 지 사흘 만에 챠오먼 파출소에서 두 손이 땅바닥의 난방 파이프에 수갑으로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그냥 땅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다. 이후에 현지 경찰에 의해 인수되어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가족들에게 또 현금 3천 위안을 갈취당했지만 그 어떤 영수증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단식으로 항의했고 야만적인 강제 식사와 전기봉 고문을 당했다.

구치소에서 매달리기 고문을 당하다

장루이잉은 현지로 끌려간 후 첸시현 구치소에 감금됐다. 구치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장루이잉과 여섯 명이 6평방미터도 안 되는 흙 온돌방에서 지냈는데, 공간이 너무 좁아 한 사람은 머리를 남쪽으로, 한 사람은 머리를 북쪽으로 해 서로 밀착해야만 간신히 누울 수 있었다. 밤사이 큰 눈이 내려 다음 날 날이 개면 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져 이불이 축축해졌다. 오랫동안 습기가 찬 탓에 천장에서 먼지가 자주 떨어졌고, 먼지를 제때 치우지 않으면 이불 위에 금세 한 층이 깔렸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할 때도 모두 찬물을 사용했다.

酷刑演示:吊铐
고문 재연: 매달리기 고문

한번은 감방 안 수련자들이 함께 연공을 하다가 장루이잉, 천훙리 등 몇몇 수련자들이 쇠창살에 매달려 있는 채로 수갑이 채워졌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대여섯 명이 창에 밀착된 채 매달려 있었다. 천훙리는 기절할 때까지 있다가 겨우 내려올 수 있었는데 손은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장루이잉과 천훙리 등에게 계속 수갑을 채웠는데 한 번 채우면 72시간 동안 풀어주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화장실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그들은 끼니마다 아주 조금씩만 먹었다. 화장실도 모두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밤에 잘 때였는데 양손이 뒤로 묶여 있어 눕지를 못하고 벽에 기대어 쉴 수밖에 없었다. 몸과 손이 눌려 저리고 아팠으며 손등은 만두처럼 부어올랐고, 양팔은 부어서 살짝 스쳐도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군중 재판대회’에서 밧줄로 입을 묶이고 모욕당하다

2001년 1월 20일은 섣달 스물여섯이었다. 중공 악당은 이른바 ‘군중 재판대회’를 열었는데, 그날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악당 인원들은 구치소, 수용소, 세뇌반에 불법 감금된 모든 파룬궁수련자들과 기타 형사범들을 차에 실어 거리 행진으로 모욕했다.

당시 구치소와 수용소에 감금된 수련자들은 모두 꽁꽁 묶인 채였고, 세뇌반에 감금된 수련자들은 모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다. 매 수련자 뒤에는 경찰 두 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밧줄을 들고 있었다. 파룬궁수련자들이 구호를 외칠까 봐서였다. 차가 구치소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갔을 때 장루이잉이 구경하는 군중들을 향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한 마디 외쳤다. 그녀 뒤에 서 있던 경찰이 즉시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앞으로 힘껏 누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밧줄로 그녀의 입을 힘껏 뒤로 묶어 입가에서 피가 났다.

장루이잉의 아들은 길가에서 엄마가 대형 버스 안에서 꽁꽁 묶인 채 입에 밧줄까지 물린 모습을 보았다. 마치 짐승을 묶어두듯 그녀를 묶어 두었다. 아이는 차를 쫓아가며 “우리 엄마 풀어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엄마, 누구예요? 누가 엄마한테 이런 짓을 해요?” 아이는 울면서 소리치며 버스를 따라 뛰었지만 점점 차는 멀어져 갔으며, 아이의 작은 모습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파룬궁수련자들은 첸시현 도심에 위치한 광장, 이른바 ‘공개 재판대회’ 현장으로 끌려갔다. 각자에게 강제로 죄명을 선고한 후 파룬궁수련자 뒤에 서 있던 경찰이 수련자를 땅에 꿇어앉히고 꽁꽁 묶인 채로 차에 실려 구치소로 끌려갔다.

노동수용소에서 잔혹한 박해를 받다

공개 재판대회가 끝난 후 장루이잉은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 밤, 그녀는 탕산 카이핑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남자 제8반에 수감됐다. 당시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된 파룬궁수련자는 1천여 명이 넘었다. 사무실과 회의실 바닥에도 빽빽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설 첫날, 노동수용소는 모든 여성 수련자들을 노동수용소 회의실 대강당에 가두고, 문 앞에는 사악한 경찰들이 지켰으며 그들에게 겉옷을 모두 벗고 속옷 차림으로 대강당에 들어가도록 강요했다. 대강당에는 난방이 없었고 파룬궁수련자들은 어떤 이는 수갑에 묶여 있고, 어떤 이는 끈으로 묶여 있었으며, 어떤 이는 입이 테이프로 봉인되어 있었다. 모두가 이를 덜덜 떨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밤에 노동수용소는 그들을 다시 운동장 주변 감나무에 묶어 두었다.

카이핑 노동수용소에서는 쌀과 밀가루가 모두 곰팡이 냄새가 나서 냄새가 매우 지독했고, 점심에 먹는 채소는 감자였는데, 큰 것은 반으로 자르고 작은 것은 통째로 삶아서 먹고 나면 그릇 바닥에 모래가 한 층 깔려 있었는데 푸른 채소 잎 하나 볼 수 없었다.

5월 어느 날, 노동수용소 여성 수련자들이 모두 운동장 햇볕 아래 놓여 있었다. 주위의 풀들도 다 말라 버렸다. 모든 사람이 강제로 서 있어야 했고, 쪼그려 앉기라도 하면 때리고 발로 찼다. 기절한 사람도 있었는데 물도 주지 않았다.

酷刑演示:野蛮灌食
고문 재연: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

노동수용소는 수련자들을 ‘전향(수련 포기)’시키기 위해 그들을 못 자게 했고, 많은 수련자들이 이에 항의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노동수용소는 죄수들을 이용해 포위하고는 야만적으로 음식물 강제 주입을 시켰는데, 억지로 먹인 옥수수죽은 설익은 데다 소금을 많이 넣어 한 번에 네 대접씩 먹였다. 수련자들은 먹은 것을 다시 토해냈고 배가 부풀어 허리를 구부릴 수 없었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토했다. 수련자들이 이런 박해에 항의하며 모두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치자 노동수용소 남자 경찰들이 총동원되어 여성 수련자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마구 발길질을 해대니 쓰러지고 기절한 사람들이 한 바닥이었고, 복도에는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장루이잉은 한 수련자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 사악한 경찰은 여전히 구둣발로 그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장루이잉이 “그만 때리세요!”라고 한마디 하자 그 사악한 경찰이 곧장 달려와 주먹으로 장루이잉의 얼굴을 때렸다. 코피가 쏟아져 땅에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 후 그녀를 끌고 가서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게 농구대에 매달아 놓았다. 수갑은 가시가 있는 것이라 잠시 후 살 속으로 파고들어 움직일수록 조여들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잠시 후 한 죄수가 대야에 물을 떠 와 “좀 식혀 줄게”라며 대야의 물을 그녀 얼굴에 끼얹어 숨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있었고 풀려났을 때 손목은 피가 낭자하고 손은 이미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강제 ‘전향’이 한창일 때 어느 날 아침, 파룬궁수련자들은 운동장에 나가 대형 훈련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확고한 파룬궁수련자들은 간수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간수들이 수련자들에게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급박한 순간, 장루이잉은 머리로 큰 벽을 들이받았다. 다음날 장루이잉은 운동장 농구대에 묶였는데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고 굴욕을 당하며 뜨거운 햇볕 아래 방치됐다. 그 후 그녀는 또 소회의실 탁자에 대자로 묶인 채 손발이 모두 고정되어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머리에 감은 붕대는 그대로였다. 당시 기온은 섭씨 36~7도였다.

3. 불법 판결부터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2012년 11월 3일 오전, 장루이잉은 파룬궁수련자 두쉐쥔과 함께 첸시현 바이먀오쯔향 궈좡쯔촌에서 주민들에게 진상을 알리다 촌 서기의 모함을 받아 두 사람 모두 바이먀오쯔향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고, 이틀 후 탕산시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2013년 3월 27일 오전 10시, 첸시현 법원은 두 수련자에 대한 불법 재판을 열었고, 재판 과정에서 증인이 출정해 증언하지 않았으며, 최후에 재판장 자오성민은 그들에게 각각 3년 형을 선고했다.

장루이잉은 탕산시 제1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었고, 걸을 때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했으며, 2013년 7월 중순 병보석됐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장루이잉은 중공의 각 기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과 납치를 당했고, 그녀 가족들도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녀의 남편은 누군가 그녀를 찾는다는 소리만 들어도 즉시 두통과 구토 증세가 나타났고, 아이들은 경찰차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다. 그래서 장루이잉이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공포에 떨며 그녀가 다시 끌려갈까 봐 걱정되어 그녀가 외출하거나 다른 수련자들과 만나는 것을 막았다. 그녀의 눈도 계속 회복되지 않았다. 2023년 1월 6일, 장루이잉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6/4/47839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6/4/4783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