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17년 전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명혜망](내몽골 통신원) 내몽골(네이멍구) 후룬베이얼 대초원의 해가 막 지평선 아래로 떨어졌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양위신(楊宇新)과 전하이옌(甄海燕) 부부의 집에 한 무리의 불청객들이 강제로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권총으로 양위신의 머리를 겨누며 “꼼짝 마, 움직이면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했다. 나머지 5~6명은 양위신을 경찰차에 태웠는데 옷조차 입히지 않았다. 아내 전하이옌도 함께 납치됐다.

양위신은 “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왜 나를 잡아가나요!”라고 따졌다.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은 그것이 양위신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장면은 2007년 5월 29일 저녁 ‘610’ 경찰에 의해 파룬궁수련자 부부 양위신과 전하이옌이 납치당하는 장면이었다.

파룬궁수련자 양위신

그가 매우 그리워하던 시절

양위신이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것은 어머니 류옌(劉岩) 덕분이었다.

류옌은 원래 다양수진 공상은행 직원이었다. 세 식구는 다양수진 임업국 가족구역에서 살았다. 양위신은 외아들로 키가 185cm 정도로 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뭐라고 해도 듣지 않았고 다스릴 수도 없었다.

류옌이 1996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양위신은 어머니를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파룬궁 수련서 《전법륜》을 읽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자신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진선인(真·善·忍)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며 그 이후로 나쁜 버릇들을 고쳤다.

파룬궁 수련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5가지 공법 동작도 포함하는데 신속하게 신체를 조절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 류옌 모자는 종종 다양수진 임업국 간부 활동실인 ‘삼용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공을 연마했다. 매번 연공을 다 하고 나면 양위신은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매우 그리워하던 시절이었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라고 명령하고 모든 언론을 조종해 하늘을 덮을 듯이 파룬궁을 비방했다. 베이징의 중앙TV 방송국을 예로 들면, 1999년에 중앙TV는 매일 7시간씩 각종 미리 제작된 프로그램을 틀어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대사의 연설을 크게 왜곡 편집하고, 자살, 타살, 병이 있어도 치료를 거부하다 죽은 ‘1400명’이라는 가짜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파룬궁과 그 창시자를 모함하고 흑색선전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양위신은 마음속으로 파룬궁 수련 이후 몸과 마음이 크게 개선됐음을 알고 있었다. 이번 박해는 불법적인 것으로 마치 중공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나 고대 로마제국이 기독교도를 박해한 것과 같았다. 그는 이 억울한 사건의 진실이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610’ 두목의 고함 “전향하지 않으면 화장해버리겠다”

2007년 5월 29일 저녁 8시경, 모치(莫旗) 공안국 ‘610사무실’ 두목 장스빈(張世斌)이 사람들을 이끌고 파룬궁수련자 양위신, 전하이옌 부부를 납치했다.

‘610’은 1999년 6월 10일 중공 전 당수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고 모든 법률 위에 군림하기 위해 만든 불법기구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날부터 중국 파룬궁수련자들은 자발적으로 박해에 저항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양위신 부부가 납치된 당일 불법적으로 가택수색을 당했는데, 경찰은 컴퓨터, 프린터, 자료, CD 등 파룬궁 진상자료를 인쇄하는데 쓰이는 물품들을 압수해갔다.

양위신이 납치된 지 9일째, 모치 공안국 ‘610’ 두목 장스빈은 그를 니얼지진 남쪽 교외 이층 작은 건물로 끌고 갔다. 장스빈은 자기 집에서 세뇌반을 열었는데 이는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는 파룬궁수련자들에게 폭력으로 ‘전향’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주머니에는 피묻은 돈을 채워 넣었다.

‘전향’은 파룬궁 수련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중공의 파룬궁 박해는 모든 것이 ‘전향’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각급 ‘610사무실’의 최우선 목표였다. ‘전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장쩌민이 내린 “때려 죽여도 상관없다”, “때려 죽여도 자살로 처리한다”, “신원조회 없이 바로 화장한다”는 소멸 명령을 집행했다.

하지만 ‘610’ 두목이 자기 집에서 연 세뇌반은 양위신을 ‘전향’시키지 못했고 양위신은 ‘전향’을 거부했다. 장스빈은 성이 나서 그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전향 안 하면 화장해버리겠어!”

‘전향’이 실패로 돌아가자 양위신은 다시 구치소로 잡혀갔다.

감옥경찰은 감방 죄수들을 시켜 양위신을 마구 때리고 여러 가지 고문을 가했다. 그 중 한 가지는 ‘물다리 건너기’ 고문으로 차가운 물 바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계속 끼얹어 지각이 없어질 때까지 하는 것이었다.

‘610’ 두목 장스빈은 또 죄수들을 시켜 이쑤시개를 양위신의 발가락 사이에 찔러 넣게 했다.

양위신의 팔은 멍 자국으로 시퍼렇고 보라색이 되었다. 양위신은 처음에 반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장스빈은 박해 흔적을 가리기 위해 양위신에게 긴팔 옷을 입게 했다.

양위신은 모치 구치소에서 무죄석방을 계속 요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다.

신혼인 아내가 비보 접해

당시 양위신의 아내 전하이옌도 모치 구치소에 불법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 역시 파룬궁수련자였다.

전하이옌은 어릴 때부터 체질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결핵, 경련, 관절염, 장염 등을 앓았고 하루도 약을 떼지 못해 고통스러웠다. 전하이옌은 파룬궁을 수련한 지 몇 달 만에 모든 병이 신기하게 나았고, 그 이후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전하이옌은 2007년 5월 1일에 양위신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신혼 한 달도 되지 않아 부부가 함께 납치된 것이었다.

불법 감금된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전하이옌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610’ 두목 장스빈이 전하이옌 가족에게 전화해 사람을 데려가라고 통보하면서 1만 위안을 요구했지만, 전하이옌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은 숨겼다. 전하이옌 집에는 그 정도 돈이 없어 데려가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장스빈은 전하이옌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염치없이 5천 위안이면 된다고 했다.

전하이옌이 집에 돌아온 지 보름 후, 모치 공안국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양위신이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전하이옌은 병원에 도착해서야 양위신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찰은 전하이옌에게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전하이옌은 극도로 비통해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그녀는 슬픔의 극에 달해 정신이 아득해져서 그 비보를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이후에 모치 공안국 사람이 다시 와서 전하이옌에게 사망 확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자 다른 가족들이 비로소 양위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들은 이 잔혹한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큰 키에 건강한 양위신이 결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죽었단 말인가? 어떻게 죽은 거지? 시신도 보여주지 않나? 무슨 서명을 하란 거야?’ 온 가족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비통해했다. 경찰은 그 모습을 보더니 사망 확인서를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양씨 일가 세 명 잇따라 사망, 며느리 거의 식물인간 상태로 남겨져

양위신의 어머니 류옌은 1999년 11월 초 집에서 경찰에게 납치돼 3개월간 불법 감금됐다. 그 이후 경찰의 괴롭힘을 자주 당했다.

2004년 4월 25일 밤, 류옌이 파룬궁 진상 자료를 붙이다 임업 파출소 소장 뤼민쥔(呂敏軍) 등에게 납치돼 임업 구치소에서 36일간 불법 감금됐고, 심신이 심각하게 학대받고 박해당해 중병에 걸렸다.

아들 양위신이 5천 위안의 벌금을 내고서야 경찰이 류옌을 풀어주었다. 이때 류옌은 이미 박해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걸을 수조차 없었고 가족들이 차로 집에 모셔왔다.

류옌이 집에 돌아온 후에도 국보(國保, 국내안전보위대) 경찰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자주 집으로 찾아와 괴롭혔다. 이는 류옌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2004년 10월 25일, 류옌은 억울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5세였다.

류옌의 죽음은 남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반년도 안 되어 류옌의 남편도 울적함 속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던 양위신은 모치 구치소에서 한 달가량 단식을 하다가 2007년 8월 27일 오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폭력적인 강제 영양주사로 사망에 이르렀는데 겨우 31세였다.

양씨 집안에 홀로 남은 며느리 전하이옌은 믿음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다. 2년간 불법 강제노동, 6년간 불법 징역을 당했고, 한때는 말을 할 수 없고 다리 근육이 위축되어 걸을 수 없으며 숨만 겨우 쉬는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그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6/4/478344.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6/4/478344.html